2011년 1월 23일 일요일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하지 않았다면

진실위원회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건 중의 하나가 조봉암 사건이다.
조봉암이 간첩이 어니라는 것을 입증할 증인인 양명산 밖에 없으나 그도 사형을 당했고, 당시 재판부에 있었던 판사들 이들을 불법적으로 조사한 CIC 대원들 모두가 사망했으니 새로운 증거는 나올 것이 더 이상 없었다.
법원도 진실위의 보고서 이상으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판결은 사실 진실위의 조사결과를 추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봉암을 죽인 사람은 이승만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고정훈이지만, 그도 오래 전에 사망했다. 사법살인이라는 것까지는 법원이 인정을 했으나 법원이 누구의 명을 받아 조봉암을 대신 살해했는지까지는 밝히지 못했다.
1956년 선거에서 혼줄이 나고, 다음 선거에서 조봉암을 살려둔다면 자신이 정권을 잃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승만 말고 누가 그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조봉암이 살아있었더라도 4.19 혁명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조봉암은 혁신계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조봉암이 4.19 이후 정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더라도 5.16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이 때 살았더라도 그는 박정희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전향한 인사라고 하나, 독립운동과 좌익의 경력을 가진 조봉암을 살려둔 상태에서 친일경력을 가진 한국의 군부 보수세력이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었다면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1987년 이후에도 그 여파는 남아 새 세대의 진보정치운동이 더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법살인, 그로 인해 한국정치의 발걸음은 훨씬 뒤쳐졌다. 보수세력은 엄청난 정치적 과실을 거두었다.

정권의 하수인이 된 한국의 법원은 이렇게 한 사람의 걸출한 정치가를 없애버렸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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