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6일 월요일

[세상 읽기] 세습의 문화 / 김동춘


2011년 12월 26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19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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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북을 가장 강경하게
비판하는 쪽이 사실상 북과 가장
닮은 집단들이라는 건 역설적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그의 아들 김정은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급부상하였다. 북은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하기 위해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물론 북의 3대 세습을 비판하던 미국도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위기수습과 체제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은 북으로서는 합리적 선택인 것 같다. 정권교체가 어려운 북 체제의 성격상 핵문제 해결과 개혁·개방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남한의 보수집단은 북을 현대판 왕조체제라 비판한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남한에서 북을 가장 강경하게 비판하는 쪽이 사실상 북과 가장 닮은 집단들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재벌, 보수언론, 사학재단에서 이런 2대, 3대 세습은 일반적이며, 세습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유사하다. 수년 전 담임목사직 세습으로 비판을 받던 광림교회는 김선도 목사의 아들을 후임자로 선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광림교회의 전통과 목회 방침을 잘 알지 못하는 목회자가 후임자로 부임하면 성장에 지장을 주고 분열과 분파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삼성은 에버랜드 사건 무죄 선고로 이재용 편법 상속을 위한 법률적 장벽이 없어지자, ‘오너경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사장단의 입을 빌려 “삼성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전임 회장의 경험과 지혜를 활용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명분을 들이대며 그를 삼성의 후계자로 등극시켰다. 국가와 기업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지만 공적 조직을 가족이 사유화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혁명위업 완성’을 위해서건 ‘전통 유지’, ‘성장과 발전’, ‘경험과 지혜 활용’을 위해서건, 오늘 남북한의 세습의 실제 동기는 앞선 창업자의 직계 남성만이 해당 조직을 책임질 수 있는 적임자라 보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실 내부의 관점에서 보면 앞선 지도자의 방침과 철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안전하고, 내부 약점이나 불법사실도 덮을 수 있을뿐더러, 위기상황에서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해주고, 일사불란한 지휘를 가능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2대는 동업자이지만, 3대는 황태자”라는 말도 있듯이, 세습은 권력을 절대화하여 조직이 큰 실패를 해도 그에 대해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고, 심각한 부패를 낳을뿐더러, 구성원을 노예화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극심한 식량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북 주민의 처지는 ‘노조가 없어서’ 백혈병 발병 사망에 대해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죽어간 삼성전자 여직원들의 처지와 얼마나 다를까? 온갖 반사회적 불법을 저지른 담임목사가 구속되어도 “목사님, 우리 목사님” 외치는 세습 대형교회 신도들이나, 오너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족벌 사학과 언론사 직원은 과연 전적으로 다른 처지에 있을까?

오늘 북의 김정은 체제가 단기적으로는 안정을 보장해주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남북한의 새 왕조체제가 그것이 표방하는 진보·보수의 이념과 전혀 무관하게 수구 퇴행적 행태라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것이며 21세기 가치와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 모든 세습은 전쟁, 분단, 조직위기, 성장지상주의를 빌미로 등장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세습을 정당화했던 국내외 환경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조직을 연착륙시키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2011년 12월 26일, <한겨레21> 제891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0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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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도전자 잡아베던 독재시대 국가원수모독죄
비판·풍자 용납 않는 엠비시대 다시 살아나



지난 10월13일 서울 롯데백화점 주변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연행된 대학강사 박정수씨에게 대법원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공용물건 손상죄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원은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형법상 금지하는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애초 구속영장을 신청한 남대문서 형사과장은 “중요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국격을 높이는 국가 홍보물을 더럽히는 것이 (시민의) 정상적 사고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씨는 애초 경찰이 단순 재물손괴 혐의로 조사를 했다가 ‘윗선’의 지시로 ‘공안 사건’으로 키웠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경찰에게 물었더니, 경찰청장에게 보고되고 청와대에도 보고됐기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MB 비판하면 ‘불경죄’로 다스려

총리실 불법사찰 건의 최대 피해자인 (주)KB한마음 사장 김종익씨는 애초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을 빌미로 유죄가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에서 쫓겨났고 소유 주식을 포기했으며, 경찰과 검찰은 공금횡령과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등을 들어 그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의 공식 죄목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 결정서에서 피해자는 자연인 이명박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적시돼 있다. 검찰은 수개월을 끌다 대통령 명예훼손을 인정하는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결국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고, 사기업의 회장직과 개인 소유의 주식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의 범죄가 된 것이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하라”고 고함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을 장례식 방해 혐의를 적용해 벌금 3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일반인들은 그런 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생소한 법조항을 끄집어내 그를 형사처벌했다.

지난 3월 문화방송 경영진은 ‘검찰과 스폰서’ ‘4대강의 비밀’ 등 사회적 큰 반향을 일으킨 의 간판급 연출자인 최승호 PD를 비롯해 핵심 인력 교체를 강행했다. 최승호 PD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노조는 성명에서 “MB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불경죄’를 범하기라도 하는 듯, 최승호 PD가 MB 정권의 뿌리인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다루려 하자 을 거칠게 흔들어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사교양국장은 1년 이상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사람은 예외 없이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경찰, 검찰, 법원, 문화방송 경영진 등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람을 처벌한 명분과 법조항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하나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김종익씨에게 적용한 죄목인 ‘대통령 명예훼손죄’는 최고권력자가 명예훼손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독재 시절 여러 민주인사를 옥죄다가 노태우 정권하에서 폐지된 형법상 ‘국가원수모독죄’의 정신이 깔려 있는 셈이다. 제작자들에 대한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훼손죄 기소,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국가정보원 명예훼손 기소 등 같은 범주에 속하는 정부 쪽 기소 사건 역시 법이 국민의 보호막이 되기는커녕,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의 칼이 되어 정부 정책과 최고권력자에 대해 작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마구 휘둘러대는 것과 같다.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거나 대통령을 사실상 국가와 동일시한 상태에서 권력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언론은 무조건 앵무새처럼 대통령을 찬양해야 하고, 국민은 ‘입을 닥쳐야 하는’ 독재체제하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발상이 이명박 정부에서 살아났다.


최능진


이승만에게 도전해 살해당한 최능진

군사독재 시절 국가원수모독죄의 원형은 전근대 시절과 일제 식민지 시절의 불경죄였다. 1948년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최능진은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이승만의 당선을 저지하려고 같은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그해 10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돼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즉각 정전, 평화 호소 대회’를 추진했지만, 수복 뒤 군법회의는 인민군 치하에서 그의 활동이 국방경비법 32조(이적죄) 위반에 해당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그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총살형을 당했다. 원래 그는 일제하에서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일하다가 공산당과 마찰을 빚어 월남한 인물이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며 친일 경찰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1946년 경무부장에 의해 파면되기도 했다.


장준하

선거 당시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은 집요하게 최능진의 등록을 방해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는 극적으로 후보등록을 했다. 기호 1번이 된 그는 독립운동 경력을 부각시키고 이승만의 친일 경찰 기용을 비판해 인기가 높았으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대문 경찰서장은 본인이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당선 무효를 주장했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이틀 전인 5월8일,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의 날인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의 등록을 무효화했다. ‘혁명의용군 사건’ 역시 조작 의혹이 짙고, 전쟁 중 군법회의의 사형 판결도 평화적으로 전쟁을 종식하려 했던 행위에 정치보복으로 응답했다는 비판이 많다(2009년 8월1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헌법상 근거가 없는 군법회의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 판결을 확정판결로 볼 수 없다고 결정했다).

최능진의 비극적 최후는 실정법과 재판의 형식을 거쳤다고는 하나, 당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앙되던 이승만에게 감히 도전하면 어떤 정치보복을 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후 국가원수모독죄가 적용된 1988년까지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대통령을 비꼬거나 정치적으로 도전한 인물들에게는 긴급조치 위반 등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무서운 보복과 처벌을 가했다.


일본에선 없어진 ‘국가원수모독죄’

최능진과 마찬가지로 장준하도 일제 말 일본군 학도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편입돼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인 박정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경력 때문에 5·16 쿠데타 이후부터 그는 박정희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는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규탄했고, “일본 패망이 없었으면 박정희는 여전히 독립투사를 학살하는 일본군 장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박정희는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공격했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돼 3개월간 투옥됐고, 그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등산에 나섰던 그는 한 벼랑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과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히려 했으나, 죽은 지 24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다. 사고사라고 보기 어려운 정황이 너무나 많은데도 아직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최능진과 장준하는 국가 지도자에게 감히 도전했다가 온갖 수난을 당한 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공통된 점은 이들이 모두 국가 지도자로서 국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두 인물을 공격했다가 보복의 칼을 맞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약점이 있거나 위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농담에도 성난 얼굴을 하는 법이다.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중국의 법은 어떤 자라도 황제에게 경의를 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그 법은 이 경의를 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구실로 그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죽이고 그가 죽이고 싶은 가족은 모두 죽일 수 있다”라고 불경죄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즉 법이 합리성과 공정성의 원칙이 아니라 인격의 원리에 입각해 있고,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해 그에게 어떤 도전도 금하는 전통시대 중국의 법문화를 비판했다.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한 법의 정신은 군국주의 일본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메이지 헌법 3조에는 ‘천황의 신성불가침’ 조항이 있고, 형법에서는 ‘황실에 대한 죄’ 조항이 있었다. 천황제를 비판한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는 이 불경죄 조항으로 처벌을 받았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박열도 대역죄인이 되어 해방 때까지 무려 21년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의 우익 지도자들은 이 대역죄·불경죄의 조항을 살리려 했다.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자유당의 기타우라 게이타로는 “도대체 26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불경죄를 미국식으로 삭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널리 국민 일반의 지식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를 위해 그 찬부를 묻고 싶다”고 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도 두 법을 존치시켜달라고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헌법이 법 아래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천황이나 황족만이 형법상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에서는 없어진 이 법이 한국에서 1988년까지 ‘국가원수모독죄’로 살아숨쉬었다.


MB 나온 웹자보 삭제 요구 받아

지난해 서울 청량리에서 탈성매매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는 단체 ‘성매매 없는 세상, 이룸’에서 웹자보(인터넷판 대자보)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유한 건물인 서울 양재동의 영일빌딩에서 성매매업소가 영업 중임을 풍자하려고 빌딩의 업소 사진과 함께 합성사진을 실은 것이다. 그러자 담당공무원들은 웹자보 삭제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사무실과 상담소 대표의 개인 휴대전화에까지 수시로 전화를 해댔으며, 이런 식이면 앞으로 상황이 어려울 것이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불경죄는 사라졌으나 불경죄의 정신은 권력자나 관료들에게 아직까지 살아 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싫어하거나 저잣거리 광대들의 농담조차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딱딱한 머리의 권력자, 국가나 국가원수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 아래 국민은 국가 혹은 국가원수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시대나 군국주의 시대의 사고를 가진 관료가 바로 그들이다. 이 칼은 과거에는 최능진·장준하 같은 도전자를 잡아서 베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예술가나 소시민의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로 살아났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세상 읽기] 대학에는 ‘대학’(大學)이 없다 / 김동춘


2011년 12월 5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86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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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역사 60년이 지났는데
아직 박사 따려면 ‘미국’ 가야 하고
학부는 오직 ‘간판’ 취득 기관이다


지난 며칠 동안 학술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에 다녀왔다. 느낀 것이 많지만 대학을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이 눈에 가장 많이 들어왔다. 지하철이나 학교 카페에서 스마트폰 갖고 노는 학생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베를린대학으로 가는 전철간에는 책이나 수업교재를 줄 치며 읽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며칠 동안의 인상이지만 프랜차이즈 업체가 어지럽게 들어와 있는 캠퍼스나, 도서관에서 토익·토플·편입 공부 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젊은이들 탓하자는 것 아니다. 대학에서 밥 먹고 있는 한 사람이자 학부모인 나도 책임의 일부를 지고 있다. 한국의 학부는 취업과 출세를 위한 ‘간판’ 따는 곳이다. 그러니 입학이 중요하지,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입학만으로 이후 취업과 출세가 거의 80%는 정해져버리니, 교수와 학생이 학문을 매개로 만날 일이 없다. ‘서열’이 낮은 대학의 교수나 학생은 이런 조건에서 취업률 압박과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정년 보장을 받은 상위권 대학의 교수는 교육에 매진할 동기가 거의 없다. 게다가 대학 강의의 반은 학술 연구는커녕 하루하루의 생계 걱정을 하는 시간강사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대학의 실제 수준은 사실상 대학원을 보면 안다. 그런데 국내 대학원은 텅 비어 있다. 국내 학위로는 행세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학을 제외하면 외국 학생들이 한국의 특정 교수 밑에서 공부하러 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사실상 국민교육기관인 학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 학부모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하고 심지어는 수많은 전사자(?)가 나오는 비극이 계속되지만, 정작 학문과 학자를 생산하는 대학원은 학부의 부속기관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 대학에는 한국 유학생 7만여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학생 수로는 중국·인도에 이어 3위이지만 인구비례로 보면 압도적 1위다. 한국 학생들이 1년 지출하는 돈은 평균 잡아도 대략 2조원이 훨씬 넘을 것이다. 이 돈이면 서울의 큰 대학 5개 이상을 운영하고도 남는다. 그 돈을 10년 정도 국내 대학(원)에 집중 지원하면 일본처럼 구태여 미국 유학 가지 않고서도 자기 땅이나 세계에서 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또 할 의지도 없다. 대학 역사 60년이 지났는데, 아직 박사를 따려면 ‘미국’ 가야 하고, 학부는 오직 ‘간판’, 특정 학벌집단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증 취득 기관으로만 남아 있다. 경쟁해서는 안 될 곳에 과도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국가의 지원과 경쟁이 필요한 곳은 그냥 버려져 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한국에 대학이 없고 학문이 없는데, 실제로 대학은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다.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학부모 부담률은 전체의 90% 정도로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식 학벌사회 편입시키기 위한 투자비용이다. 독일의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고, 등록금이 거의 없다. 요즘 독일 대학도 미국 따라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 때문에 기존의 국가 지원과 평준화 제도를 철회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서열대로 모여 있는 한국 학생들이 평준화된 대학에 다니는 독일 학생들보다 우수하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학부를 평준화하고, 기업이나 사회에 채용 정보를 주기 위해 졸업정원제 등 대학 평가 체계를 엄격히 하되, 오히려 대학원에 집중 지원하고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여 대학(원)을 진정으로 학문하는 곳, 국제적인 수준을 갖춘 곳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2011년 12월 5일, <한겨레21> 제888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9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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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공인의 실종 ②-지역명망가 학살하고 연 거짓 우파만의 세상
한국사회는 공적인 인간이 절멸된 뒤 친일파가 만든 결과일 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인사 청문 대상자는 총 89명으로 이 중 82.0%에 달하는 73명이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등 이른바 ‘4+1 필수(?) 불법 과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탈세 또는 탈루, 체납 등 세금 관련 의혹이 57명(64.0%)으로 가장 많았고, 부동산 투기 의혹 44명(49.4%), 위장 전입 의혹 29명(32.6%), 병역 기피 의혹 16명(18.0%), 표절 등 논문 관련 의혹 13명(14.6%) 순이었다.
지역도 다르지 않다. 민선 지자체장 3명을 배출한 경기도 성남시와 전북 임실의 경우, 역대 지자체장 전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거의가 뇌물수수 등의 죄목이었다. 경북의 영천시와 소싸움으로 유명한 청도군은 2005년 이후 시장과 군수가 선거법 위반 등 죄목으로 물러나 매년 선거를 치러 왔다. 충청북도는 민선 4기 동안 도내 지자체장 중 4명이 중도에 낙마했고, 민선 5기 들어서도 지자체장 3명이 기소되었다. 강원도·전라남도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단체장의 비리는 거의 전국적 현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4·3 전후로 지역인물 극명하게 갈린 제주

1953년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고 집권당이나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했고, 수많은 장관과 고위 관료가 왔다 갔지만, 민주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는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말을 들은 지도 참 오래되었다. 가장 힘있던 사람들이 재임 기간 중이나 그 이후 각종 부패 스캔들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고,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잊혀졌다.

나는 이것을 중앙이나 지역사회에서 ‘공인의 실종’, 즉 오직 개인적 권력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들만이 주로 힘있는 자리에 올라할 수 있도록 판이 짜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임명직이나 선출직이나 별로 큰 차이는 없다. 민주화 이후 선거라는 절차를 거치고 있지만, 진정 국민과 주민의 편에 서서 일할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은 현재도 거의 없다. 한국전쟁은 좌익은 물론 중도 혹은 우익 인사 중에서도 공적 대의에 헌신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후부터는 그런 사람이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지역사회의 1차 판갈이는 1945년 8·15 해방 직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통해서였다. 공식 역사는 좌익이 이들 조직을 주도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지역사회에 들어가보면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실제로 해방 직후 지역에서 신망받는 상당수 사람들이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이런 조직에서 활동했다. 2차 판갈이는 정부 수립 전후 이들이 탄압을 받아 제거되고, 곧이어 학살된 사건이다.

제주도에서처럼 4·3 사건 이전과 이후 지역사회의 지도자들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등 지역 자치기구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70% 정도가 일제하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지역의 부호나 극우 인사를 도지사로 앉혔고, 4·3 사건을 겪으며 초기 주민의 신망을 받은 거의 모든 인물들이 타살·학살·실종되었다. 1987년 이후 제주 4·3 사건 재조명 분위기가 활발해지자 지역의 노인들은 “요망한(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고, 물경한(시원찮은) 우리만 살아남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즉 민주화 이후 난폭한 폭도로 몰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리더십이 있는 똑똑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이끌고 가르쳐줄 진정한 선배가 없어 마을의 정기와 맥이 끊겼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4·3 이전의 지도자들과 친일파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다시 판이 짜인 이후의 제주 지역 지배자들을 비교해 “똑똑한 사람 다 죽고 나서 아무개가 도지사가 되니 도민들 모두가 비웃었다”고 말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원로가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친일파들에게 죽임 당한 지역인물들

‘원로 실종’, 즉 존경할 만한 지도자 부재는 제주도만이 현상이 아니라 사실 1950년대 이후 한국 전체의 특징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군 단위에서 주민의 요구는 주로 지역사회의 지주 부호층, 친일 식자층으로 구성된 ‘유지’ 집단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총독부 관리들과의 뒷거래와 진정을 통해 민원을 해결하며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왔다. 총독부 관리나 경찰들이 이들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독점적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이들은 쫓겨났고, 주민의 신망을 받던 항일 인사나 지식층, 양심세력이 주민의 참여를 통해 짧은 기간 지역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역사회는 또다시 식민지 말단 관료 출신, 우익청년단 출신, 중앙에서 유명해져서 고향으로 낙하산 타고 내려온 인사로 채워졌고, 일제 시기와 같은 로비와 진정으로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한국전쟁 기간에 이승만 정부의 군경·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해방 직후 지역사회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이들 대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을 죽인 사람은 일본 경찰 출신과 옛 친일 경력자들이었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반이승만 노선이 죽을죄였다.

전남의 완도·해남 등 지역에서는 일제하에서 청년운동·소작쟁의 등에 참가했던 지역의 활동가,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와 같은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상당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자연스럽게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당, 청년단체 등 지역 정치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의 공출에 반대하거나 이승만 편을 들지 않거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부 수립 전후 수없이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다 전쟁 이전에 경찰에 사살되기도 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보도연맹원 혹은 부역자로 지목돼 대부분 학살되었다. 최평산(1903년생)은 일제 시기 완도군 소안면에 본부를 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 구성원이었고,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대표적 항일 인사였다. 그는 해방 뒤 과거 항일운동 동료들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8년 11월5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소안면의 김장균(1923년생)은 광복군 출신이다. 해방 뒤 귀국해 완도군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책임자가 된 뒤 수배와 구금이 반복되었다. 김장균은 완도읍 죽청리 뒷산에 은거하던 중 1949년 4월13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김남곤(1899년생), 김장안(1905년생), 김유곤(1908년생), 최홍길(1899년생)은 소안사립학교 동문으로 일제강점기 소안면 독립운동 2세대다. 이들은 해방 뒤 소안면 사회운동을 주도해 수시로 경찰에 구금됐다. 1949년 8월 소안면에서 좌익 혐의로 각각 체포된 이들은 완도군 신지면 현재의 명사십리 해안가에서 경찰에 모두 사살되었다.



공인 제거 뒤 만든 지금의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완도군 소안면은 해방 뒤 ‘좌익의 근거지’로 지목돼 초토화됐고, 이렇게 전도된 기억은 지금까지 섬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할아버지·아버지가 모두 좌익계열 운동가였던 완도의 정종래씨는 “세상은 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닌 빨갱이의 후손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는데(<주간경향>, 2007년 8월14일), 독립운동의 공적, 해방 직후 지역사회 운동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빨갱이의 멍에만 짊어진 가족들의 이야기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항일운동가 출신이나 좌익계열 사람들이 사라지자 중도층이나 우익 성향 인사들, 식자층이 지역사회에 등장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 전후 동네에서 구장이나 반장 역할을 했던 사람 중 일부가 전쟁 발발 뒤 인민군이 점령한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는데 인민군은 동네 사정을 잘 알고 글을 할 줄 아는 이들에게 지역 행정을 맡겼고, 수복 뒤 경찰이나 우익 치안대는 이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주민의 모함으로 살해된 경우가 있다.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에는 임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 신자였다. 해방 뒤 타 지방 사람 송해봉이 들어와 천주교를 전파하며 지역의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해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이 천주교에 나가면 결혼도 하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그는 글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복 뒤 임씨들은 자치대를 조직해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결국 눈엣가시 같던 외지인 가톨릭 신자를 없앨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었다. 지역에서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송해봉은 그렇게 이웃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한국의 어느 지방, 지역사회에 내려가도 이런 사례를 만날 수 있다. 결국 한국전쟁 전후 지역사회에서 살해·실종·학살된 사람들이 좌익 인사라고 보는 것은 냉전시대의 시각이다.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벗어던져야 한국 지역정치의 실상이 보인다. 공적 마인드를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이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들이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의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의 소멸사라 해야 맞다. 흔히 사람들은 친일파가 득세해 오늘의 한국 정치와 사회가 이렇게 비뚤어졌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친일파와 경찰이 해방 뒤 지역정치를 주도한 항일운동가, 지역 지도자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학살한 결과라고 말해야 한다.


휴전 뒤 7년 만에 나타난 공적 인간

그래서 전쟁 뒤 한국은 사적 이해,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이 되었다. 식민지 말단 하수인 ‘유지집단’은 또다시 지역사회의 유지, 반공국가의 첨병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공적 인간의 소멸사는 동시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짜 우익’의 탄생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적 도덕으로 무장한 새 인간은 휴전 뒤 정확히 7년 만에 나왔다. 4·19 혁명이 그것이다. “기성세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는 “오직 개인과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인간들은 물러가라”는 이야기였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독일 튀빙겐 대학




독일 마지막 일정으로 튀빙겐에 가서 한국학과에서 강의를 했다.
6년만이다. 내 책 전쟁과 사회 독일어판 번역자가 이곳의 송문의교수님이어서 그곳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송교수님이 그 때의 팜플렛을 그대로 갖고 계셨다.

튀빙겐은 중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대학도시다. 네카강을 끼고 있는 그림같은 곳이다. 헤겔, 셀링, 휠더르린 등이 이곳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캐플러가 공부한 곳이기도 하고, 헤세가 젊은시절 서점에서 점원노릇도 한 곳이다. 신학과 철학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뇌과학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대학이라고 한다.사회학자인 다렌도르프가 이곳 사회학과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대학도시인 것 같았다.

목요일 저녁 강연장에는 머리 허연 신사가 나타났다. 헨리 폰 보세 목사님이시다. ( 중간명을 보아 귀족 출신인듯? ) 감리교 목사님으로 한국의 한일장신대에서도 강의하신적이 있다고 한다. 놀라는 것은 그가 내 책 독일어판을 매우 꼼꼼하게 읽으신 독자이며,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려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한국에서 왔는데 청중이 너무 적다고 주최측에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독일 반전세대의 한 분이시다. 말미에 질문도 많이 해 주셔서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매우 놀라운 어른으로 비춰진 것 같다.

금요일 아침, 약간 시간이 나서 튀빙겐 시내, 강가에서 산책하고 도서관도 들러보았다.
초콜렛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500년 전 대학 본부나 기숙사 건물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참 좋은 곳이다. 한국의 중소도시에도 흔한 대형수퍼(SSM)도 볼 수 없었다.
프렌차이즈 업체가 무질서하게 들어와 있는 우리나라 큰 대학의 캠퍼스 풍경과 겹쳐졌다.

2011년 12월 1일 목요일

독일자유대학 3




사람들은 미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데 ( 나도 내 책 전쟁과 사회에서 그렇게 적었다)실제 미국은 대학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미국의 세계지배의 힘이 대학에 잇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들 별로 못 만나봤다. 정치가들 중 그런 식견을 가진 사람 더욱 못봤다. 아마 내년 정권 교체가 되어도 지경부, 외교부의 미국 유학파 관료들이 모든 것을 사사건건 발목잡을 것이다.(오해 없기를 내가 모든 미국 유학파를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님) 시장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그들을 무슨 수로 설득할 것인가? 그들은 한국 속의 미국이다. 미국이 대학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사례중 한국 보다 더 좋은 경우는 없다.
론스타의 먹튀도 사실 그들의 공모에 의해서 가능했다.

어제 자유대학 한국학과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모두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아마도 케이 팝, 한류 열풍으로 한국에 관심을 가졌을 청년들인 것 같다. 인종적으로도 다양해보였다. 참석한 어떤 사람의 전언에 의하면 그 동안의 어떤 초청강의보다도 열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 회사에 취직할 목적으로 입학해도 좋다. 한국학의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국학과 건물도 이채로웠다. 단독주택인데 입구에는 장승이 서 있었다.

낮에 베를린 시내 배회를 했다. 구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도 돌아봤다. 지하철에서 놀란 것은 스파트 폰 보면서 노는 사람을 거의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신문과 책을 들고 있엇고 그 중 일부는 글씨가 매우 빽빽한 두꺼운 책도 들고 있었다. 대학으로 오는 마지막 노선에는 대학생들이 복사물이나 책 보면서 공부하는 모습들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지하철, 대학근처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독일의 힘과 수준을 보는 것 같앗다.

간판따기 위해 학교에 와서 수업시간에는 폰 들고 문자질 하는 한국 학생들. 수업시간 늦에 나타거나 쉬는 시간 출석을 불렀다면 사라지는 학생들. 음식 갖고와서 먹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학생들.

대학은 그 나라의 수준이다. 어디 이 사진의 자유대학 한국학과 처럼 저런 주택에서 교수 학생 모여 밤늦도록 토론하는 그런 대학없을까?

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독일자유대학 2


어제 memory and history 행사 무사히 마쳤다.
나는 한국 대표로 초청받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시아 전체 대표( ?? ) 였다.
라틴아메리카 대표 1명, 그리고 아시아 대표인 나, 나머지는 독일과 미국에서 왔다.
사실 대표라는 말은 농담이다. 무슨 운동 경기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최 측에서 학술횅사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시아 쪽을 배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국인가? 어제 주최측인 다램 인문학 연구소 소장인 쿠퍼교수에 물어보았다.
그는 중국인들은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 말 조심을 하고, 일본인들은 자기 문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을 선택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학자들이 생각해볼 중요한 이야기였다. 한국학자들의 역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사람 중에 왜 나를 선택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마 독일어로 번역된 저서도 있고, 한국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만 하고 있다. 아마 자유대학에서 한국교수 누가 추천했을 것이다. 소장은 어제 마지막 회식을 하면서 그는 이번 행사에 내가 많이 기여했다고 인사를 했다. 의례적인 인사인지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 사람들 모르는 것 이야기 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 사례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통해 기억을 어떻게 신빙성 있는 진실로 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의견을 표명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여성학자 Elizabeth Jelin은 정치학자(? ) 이고 나머지는 모두 역사학자, 문학 전공자들이었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는 좀 따분했다. 최근 20년간 역사학계에서의 기억연구 붐에 대한 논란, 기억이 어떻게 역사학 연구의 풍부화에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 기억연구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 역사기술에서 기억이 갖는 중요성 등이 주요 주제였다.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했다는 Gabrielle Spiegel 이 좌장 역할을 했고, 나머지 발표자들도 이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는 학자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특별히 흥미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이미 내가 다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실천적 영역이나 문제의식의 차원에서는 우리는 그들의 선생이 될 자격이 있다. 단 책상에 앉아 각국의 유사 사례를 정리하거나 이론화할 여유가 없을 따름이다.

인문학자들이라 그런지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현실정치 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내 발표에 대해서도 약간 겉도는 질문만 제기되었고, 독일의 집합적 기억에 대해서도 미국의 전후 점령 등을 언급하지 않아서 좀 답답했다. 학살연구와 마찬가지로 기억연구도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인상이었는데 이 행사에서 중요인물 2 사람이 유대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억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약간의 긴장도 있었다. 이스라엘 출신이자 미국에서 활동하는 발표자는 자신은 팔레스타인의 강제이주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고 오직 두 집단의 상이한 기억만 다루겠다고 말했는데, 과연 오늘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괄호에 넣고 기억을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기억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관적인 현상인데 여기서 어떤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개별발표보다 훨씬 긴장된 것은 마지막의 대중토론 시간이었다. 통상 독일에서 학술행사는 이렇게 진행되는 모양인데 이번 행사도 독일 교육부 지원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언론홍보, 그리고 시민 교육 차원에서 반드시 마지막에는 공개행사를 갖는 것 같았다. 대학의 사회서비스, 공공지식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은 학생들인 것 같았지만 그대로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도 여러 명 참석했다. 개별 발표는 그냥 발표하고 질문에 답하면 되었지만 이런 행사는 청중질문에 대해 즉답을 하기도 해야하고, 또 발표자들끼리 토론도 해야하므로 영어 듣기와 표현에 능하지 않는 나로서는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대로 나에 대한 질문은 없었지만, 어떤 할아버지가 당신들 역사학자들이 나치 학살에 대해 수백권의 책을 썼는데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당신들이 할 수 있는일이 무엇인가라고 아주 심각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도대체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해명을 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에 대한 질책인 것도 같아서 따끔했다. 그런데 내가 들어도 동료 참석자들의 답변은 좀 시원치 않았다. 내가 그 할아버지라면 학살이나 큰 역사적 사건 울궈먹으면서 먹고사는 인간들 아닌가라는 질문을 거꾸로 던지고 싶었다. 학자들끼리의 토론 말미에 대중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은 좋았다. 우리도 대학의 학술행사가 이렇게 운명되면 좋을 것 같다. 하여튼 아시아대표로 고군분투했다. 영어가 서툴로 하고싶은 말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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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독일 자유대학



독일 베를린에 왔습니다.
오늘부터 이틀간 열리는 '기억 그리고 역사' 학술행사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학기가 진행중이라 출장이 좀 부담스럽습니다만, 중요한 행사인것 같아 초청에 응했습니다.
(프로그램은 내 홈피에 있습니다.
http://dckim.skhu.ac.kr/bbs/zboard.php?id=blog)
9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 이른 아침같습니다.
호텔 근처 자유대학 풍경입니다.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세대인가 계급인가, 아니면 세대가 계급인가


http://weekly.changbi.com/581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109135215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주소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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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2011년 11월 9일


김동춘 / 성공회대 교수



세대인가 계급인가, 아니면 세대가 계급인가
[창비주간논평] 서울시장 선거의 민심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 세대투표의 특징이 두드러졌다고들 말한다. 출구조사에 의하면 20~40대의 압도적 다수가 박원순을 지지하고, 특히 30대의 경우 박원순 지지자가 나경원 지지자의 3배나 된다는 사실이 그 중요한 근거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계급투표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는 지적이 있다. 소득이 높은 강남 3구의 투표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고, 그중에서도 압구정동에서는 나후보가 79%를 얻는 등 나후보 지지율 상위 10개동은 대부분은 강남구였으며, 박후보는 대학생 밀집 거주지역을 비롯해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구로동, 창신동 등에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이 출구조사가 엄밀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이 조사만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강남구의 경우 인구구성을 확인하여 실제 강남구의 30,40대도 거의가 나후보를 지지했는지 검증해보아야 하고, 거꾸로 30,40대 대부분이 소득이나 재산 여부를 불문하고 박후보를 지지했는지 여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50대 이상과 40대 이하의 투표행태가 현격하게 갈린다는 것, 저소득층이 밀집 거주하는 지역의 투표율이 낮다는 것, 아파트가격이 높은 지역의 투표율이 높고 나후보 지지율이 높다는 것을 종합해보면, 이번 선거는 세대투표 경향이 두드러진 가운데 빈곤층과 부유층의 차별적인 투표행태가 그 밑에 깔려 있다는 점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하층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두드러지고, 상대적으로 부르주아가 자기 집단이익에 더욱 민감하다는 기존의 이론도 이번 선거에서 또 한번 확인되었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세대의식'이 반영된 것인가

그런데 과연 언론이나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세대, 계급의 개념이 과연 지금 한국인의 투표성향, 더 나아가 정치의식, 사회의식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계급이나 세대는 사회적 응집체 중의 하나다. 그런데 '계급'이 주로 경제질서에서 같은 위치, 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을 말한다면 세대는 생물학적·사회역사적 시간대에서 특정한 위치를 공유하는 집단, 즉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특정한 정치경제적 사건을 비슷한 나이에 겪은 사람들을 말한다. 만하임(K. Mannheim)은 신선한 접촉의 경험, 즉 젊은 나이에 특정 공간에서 어떤 큰 사건을 같이 겪음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기억'으로 각인될 때 이들은 세대의식을 공유하고 그것은 이후 지속적으로 이들의 의식과 정치행동을 좌우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를 두고 젊은 '세대'가 박후보를 지지했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도 좋을까?

앞의 정의에 따르면 486세대, 4․19세대 등 정치적 경험과 뚜렷한 가치지향을 공유한 사람들은 분명히 세대라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의 30대, 40대가 각각 별도의 세대가 되거나, 20대까지 묶어 40대 이하를 하나의 세대로 부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물론 30대 이상의 경우 청년시절에 IMF 경제위기를 겪었다는 점, IT기술과 인터넷 문화에 어릴 때부터 노출되었다는 점, 월드컵 경험 등의 공통점을 들 수는 있다. 그리고 40대 이하가 모두 SNS에 익숙하다는 점을 들 수도 있지만, 이들이 이번 선거 이전에 하나의 공유된 사회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사한 가치와 행동을 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이번 박후보에게 거의 몰표를 안겨준 30대의 경우 2007년 대선 때는 그 반대의 투표행태를 보였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세대현상은 오히려 노년에 더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50대 이상, 특히 60대 이상이 압도적으로 나후보를 지지했는데, 한국전쟁과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겪은 60대 이상은 과거에는 물론 10여년간 거의 모든 투표에서 매우 일관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0대 이하를 묶어주는 고리는 세대의식이 아니라 이들이 온몸으로 겪고 있는 현재의 비정규직화, 실업, 주거 등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대'라는 외피로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롬니((M. Romney)는 "이것은 계급전쟁이다"라고 공격했다. 월가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이 금융자본주의의 탐욕과 CEO들의 부도덕한 돈잔치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2010년 우익의 티파티(Tea Party)운동이 뜰 때와 유사하게 무정형적이고 계급의식도 약하며 정치엘리뜨 일반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에서 스페인, 그리스에 이르는 유럽·북아프리카 전지역 청년들의 저항운동도 사실상은 심각한 청년실업과 빈곤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크다. 즉 청년들의 좌절은 전세계적 현상이고, 그것은 미국 주도의 시장자본주의, 1%가 99%를 가져가는 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60년대 반전세대의 문화적 저항과는 달리 '세대'라는 외피를 통해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비정치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 최근 칼럼은 지금까지 미국은 후세대가 항상 이전 세대보다 좋았고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것이 어려워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미국에나 한국에서 정규직 아버지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아들을 걱정하고, 비정규직 아버지는 아들을 정규직으로 만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가 자녀의 정규직 채용시 가산점을 요구하는 것처럼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계급상황을 개인적으로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가짜 해결사'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의 청년들처럼 한국의 20~40세대도 이 고실업과 비정규직화, 사회적 양극화, 대자본의 거침없는 탐욕,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하는 기성 정치권과 언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순을 온몸에 안고 있는 존재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역시 이들이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므로, 결국 '세대'로 지칭되는 현실의 밑에는 전통적 세대현상이 아닌 잠재적인 계급현상, 더 나아가 경제양극화에 응답하지 못하는 현재의 정치적 대표체제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관된 의식이 없고 무정형의 집단이므로 2007년 '이명박 밀어주기' 때처럼 앞으로 대자본의 편을 들면서 실업, 복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선전하는 가짜 해결사, 즉 우익세력에 또다시 기웃거릴 수도 있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세대라는 형식으로 잠재화된 계급집단의 불만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결과는 내년의 정권교체에 청신호를 주고는 있지만, 이 불만은 정권심판의 구호만으로 결집될 수 없으며, 설사 현재의 야당 중심으로 정권교체를 하더라도, 이들에게 또다시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 이들을 일관된 의식을 갖는 사회세력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지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청된다.

2011.11.9 ⓒ 창비주간논평

[세상 읽기] 크레인과 굴뚝 / 김동춘


2011년 11월 14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53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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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적 안 잡으면 백성이 죽는다”
큰 도적 잡아, 일하는 사람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정치세력 어디 없나?

309일 동안 고공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 내려온 김진숙씨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고 한다. 노사 합의에 따라 농성을 풀고 내려온 사람을 ‘업무방해’죄로 구속을 했다면 더 큰 갈등이 발생했을 것이다. 혹시 큰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던 국민들도 크게 안심을 했고, 그간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섰던 희망버스 기획자들이나 참가자들 모두 크게 안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진중공업 사태로 숨을 돌리는 순간 쌍용자동차에서는 열아홉번째 희생자가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퇴직 노동자가 돈 벌러 나간 사이 그의 부인이 집에서 숨을 거두었고, 두 아이는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의 주검 옆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다.
크레인에 올라갔던 노동자는 무려 300일 이상의 농성 끝에 살아서 내려오기는 했으나 공장 굴뚝과 지붕에 올라갔다가 개처럼 끌려 내려왔던 노동자들은 곧바로 회사 정상화 이후 복직 약속 종이 한 장 달랑 든 채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한 사람씩 죽어가고 있다. 그들이 올라갔던 크레인과 굴뚝은 보통사람들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인간 존재의 막장이나 극한지대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 길이 없었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저 높은 곳으로 살기 위해 올라갔다. 곤봉과 최루탄을 쏘아대는 경찰, 무기를 든 용역직원, 업무방해로 구속영장 들고 서 있는 검찰, 경찰과 용역의 폭력에는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언론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땅에는 그들이 서 있을 공간은 없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이들을 ‘떼잡이’라고 부르고, 검찰은 ‘업무방해’, ‘공무집행방해’ 등의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라 부른다. 이명박 정권 집권 2년도 안 된 2009년 11월에 이미 구속노동자는 334명을 넘었고, 쌍용자동차 한 회사에서만 구속노동자가 무려 86명에 달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노동자들도 해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용자나 언론이 강조하지 않아도 노동자들 자신이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 수십년간 열심히 일했는데, 경영 위기에 처하면 오직 노동자들만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고, 해고자 선별 과정이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사쪽의 온갖 협박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파업하다 해고되면 빨간 딱지를 붙여 다른 곳에 재취업도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를 그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고, 정당과 정치권, 노동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노조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목숨을 각오한 결사항전에 나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감사론(監司論)에 빗대어 보면, 굶주린 나머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작은 도적은 사실 도적이 아닌데도 무조건 구속되고, 남의 돈을 개인 돈처럼 빼돌리거나 투자를 잘못해서 충직한 머슴을 거리로 내몬 사람들,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로비 자금을 챙긴 ‘큰 도적’들은 언제나 위세 당당하여 야경꾼이나 포도청, 사헌부는 물론 나라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처벌하지 못한다. 도저히 이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인들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크레인이나 굴뚝에 올라가 소리치고,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백성들은 소리 없이 죽어간다.

나라와 사회의 진짜 주인인, 땀을 흘려 생산을 하는 자들이 궁지에 몰려 크레인으로 올라가거나 생계형 범죄를 저질렀다고 감옥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우리는 원한다. 다산 선생 말대로 “큰 도적을 잡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죽는다”. 큰 도적 잡아서 일하는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정치세력 어디 없나?

피 묻은 총검을 든 한국 ‘자유민주주의’ [2011.11.14 제885호]

2011년 11월 14일, <한겨레21> 제885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7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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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총검을 든 한국 ‘자유민주주의’ [2011.11.14 제88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독재와 쿠데타로 자유주의의 원리를 배반한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우리 한인은 자유민으로 죽을지언정 남의 노예 백성으로 살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우리가 혈전 마당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표명한 것입니다. 우리 평민과 군인들이 각각 가진 것을 다 사용해서 세계 모든 자유민의 원수를 일심으로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이승만)
“우리는 침략자를 물리치고 국토를 통일하여 자유대한을 건설할 권리가 있음을 전세계에 엄숙히 선언한다.”(‘38선 정전안을 결사반대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인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의 꿈은 분쇄하고 세계의 자유 인류의 평화를 이룩해야 할 우리의 앞날에는 아직도 허다한 난관과 시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박정희)


유신헌법이 강조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2009년 8월 교과서 검정 신청을 3개월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뉴라이트 쪽의 주장을 받아들여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을 새롭게 발표했고, 2010년에는 이미 검정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사’로 고쳐 쓰도록 했다. 2011년 교육과정에서는 지난 8월9일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 고시했다. 그리고 이번에 고시된 개정 교육과정에는 위원회에서 논의된 적도 없는 내용을 추가했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도록 고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때아닌 자유민주주의냐 민주주의냐 논란이 일었다. ‘역사교육과정 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이 교육과정에 일일이 개입하고 국가기구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교육과정 개발, 집필 기준 작성, 검정까지 주도하도록 하여 사실상 정권의 입김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기존 교과서 내용 수정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거의 쿠데타적인 방식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고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는가?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떠나서는 서술될 수 없다. …하나였던 한반도의 북부에 불법적으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고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침략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권희영)라고 그 이유를 주장한다. 즉 대한민국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칙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독재를 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단지 권력구조의 측면에서만 일시적으로 자유의 원칙을 제한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결국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이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의 전문에는 우리 헌법 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런데 유신체제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표현과 결사의 자유, 법치, 삼권분립을 가장 심각하게 제한하고 조작간첩 사건 등 국가가 사실상 범죄를 자행한 시기였다. 그런데 유신헌법이 이렇듯 국가를 신성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가장 무시하고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실이 바로 오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즉 유신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유’(민주)다. 이 ‘자유’(민주)는 공산독재는 배격하나 반공독재와 자본독재,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용인할 여지를 남긴다.


이승만과 자유당, 천황제의 적자들

물론 이 사상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에 속하는 우드로 윌슨과 해리 트루먼은 민주정부와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내세우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들, 특히 윌슨 시대의 독일, 트루먼 시대의 소련 공산주의 독재의 사슬에서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을 도덕 혹은 정의의 담론으로까지 승격시켰다. 이들에게 자유와 시장경제는 도덕적, 더 나아가 종교적 함의까지 갖는다. 그런데 윌슨의 ‘자유’는 사실상 제국주의 국가의 자유임이 이미 판명 났다. 그의 민족자결은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될 수 없는 강자의 논리였다. 트루먼의 ‘자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전쟁에 이런 관점에서 접근했다. 트루먼에게 한국전쟁은 자유세계와 공산노예의 투쟁이었다. 즉 트루먼과 미국에 자유세계는 선의 세계, 문명세계이고 공산주의는 악의 세계, 야만의 세계였다. 그에게는 한국과 같이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시장경제만 유지한다면 ‘자유’의 이름하에 진행된 옛 제국주의 파시즘 세력(친일파)의 부활, 반인권적인 식민지적 경찰통치의 부활, 군과 경찰의 노골적 폭력과 학살이 일어나도 알 바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 윌슨의 제자이며 트루먼의 후원하에 한국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윌슨과 트루먼의 보편주의는 바로 이승만의 ‘자유세계’ 관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승만에게 ‘자유’와 ‘독립’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구 집권과 정적 탄압을 위한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비상계엄 선포, 전시라는 이름하에 의심되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 거의 재판도 없이 죽일 수 있었던 특별조치령, 민간인을 군인으로 취급해 구속할 수 있었던 국방경비법, 인민군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을 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체포해 처형한 수복 뒤의 지옥과 같던 서울이, 피난민의 생명과 재산이 외국군인 미군의 무차별적 폭력과 자의적 작전 결정에 의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할 수 있었던 이 땅이 이들에게는 ‘자유세계’였다.

“자유대한의 푸른 하늘엔/ 학두루미가/ 펄펄 나르네/ 춤을 추네/ 얼마나 그리던 자유였더냐/ 우리는 지금 자유 찾았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갖었네.”( 박종화, ‘구름 위에 넌짓 실어’)

제1공화국의 자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기초로 하나 경찰의 전제정치, 우익 청년단의 고문과 테러를 수반했다. 그래서 가공할만한 선거조작과 부패를 저지르고, 어린 학생들에게 총칼을 겨눈 집단이 바로 이승만의 수족 ‘자유당’이었다. 일본의 ‘자유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유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희생하고라도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우위를 내세운 천황제의 적자였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 역사학자들이 천황제의 전쟁범죄를 감추고 이웃 국가 침략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자민당과 자유주의 사관은 사실상 미국이 만들어준 자유세계의 일원이자 사유재산 비판을 대역죄인 취급한 천황제의 적자들인 셈이다.


유신 쿠데타 북에 먼저 알린 박정희

그러니 박정희가 국회의원 3분의 2 선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절차적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그것도 통일을 위한다는 거짓 명분을 들이대고 국민을 거의 겁박해 90% 이상의 지지로 통과시키고, 긴급조치라는 초유의 대통령 명령을 법으로 대신하던 시절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강변한 것은 이승만이 말한 ‘자유’의 후렴에 해당하고 멀리는 그가 일본의 명치유신과 조선총독부 통치하의 전시동원 체제와 억압을 남한에 다시 실천한 장본인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었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채 온 국민에게 사상적 순결성을 강요하고, 국가에 대한 일방적 충성을 강조한 천황제 파시즘의 후계자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민주적 질서’의 수호자가 된 셈이다. 이승만의 계엄령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국가의 긴급권 행사, 즉 개인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통제했는데, 이 자유의 제한이 바로 ‘자유’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역설이 발생한 셈이었다. 그렇게 되니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던 어린 학생들이 자유당과 반공연맹을 불태우는 일이 발생했고, 박정희의 긴급조치를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 “자유민주주의 유린”이라고 공격한 종교인들이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다.

만약 백번 양보해 이승만이 말한 자유와 박정희가 말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반공 혹은 국가 억압 정당화의 논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파시즘을 명백하게 반대한다는 점을 법과 절차, 행정집행에서 명시해야 하고 국민, 국가 그리고 민족의 입장에서 그것을 배반한 사람을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이후 현재까지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발언을 하거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에 테러를 행사하는 극우세력에 대해 ‘자유민주적’ 헌법정신과 각종 형법을 적용해 처벌한 예가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민에 대한 테러를 자유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 국가인 미국의 한국 국민에 대한 범죄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했으며, 박정희의 경우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북한 당국과 비밀히 협상을 했고, 국가의 기밀 사항까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인 북한에 먼저 통고해주었다. 유신 쿠데타를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알려주는 반국가적 조처까지 취한 것이다(박명림, ‘박정희 시기의 헌법정신과 내용의 재해석’, <역사비평>, 2011년 가을).

여기서 과거의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오늘날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싣자는 뉴라이트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냉전 시절 자유주의에 대해 앤서니 아블라스터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가이거나 혹은 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반혁명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가까워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러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한국의 앞날을 예견하듯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범위라는 공화국도 원한다. 그들의 온건한 범위를 넘어서면 그들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들은 행복하게 혁명이라는 관념을 즐긴다. 그러나 그들은 1848년 인민폭동의 광풍 앞에서 공포에 질려 후퇴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문명과 질서를 구하기 위해 계엄령의 총검 뒤에 숨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

사실 공산주의에 두려움을 가졌던 1945~60년의 기간처럼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원리를 그렇게도 비열하게 배반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87년까지, 아니 2011년 오늘 이 시점까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원리를 비열하게 배반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오직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를 내세우는 파시스트거나 천황제 파시즘의 후예라고 공격하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외친 사람들에게 총검을 들이댄 자유(민주)주의였다. 오늘도 그들은 절차와 법을 지키자는 사람들 앞에 주먹을 과시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너희들 인민민주주의자 아니냐고.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0월 25일 화요일

“MB 정부의 지배방식은 전쟁정치”

2011년 10월 25일, <한겨레>에 올라온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024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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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사회학대회’ 김동춘 교수 발표
반대세력을 ‘적’으로 간주
검찰·일부 언론 동원 진압해
“개발독재 방식 신자유주의”



이명박 정부는 처음엔 주로 경제 자유화에 충실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독단적인 국정운영과 민간인 사찰, 과도한 개입주의적 경제정책 등으로 그 성격에 대해 갖가지 논란이 일었다. 곧 민주주의 절차로 집권했지만 사실상 30년 전 권위주의 정권과 다름없는 독재 정권이라거나 파시즘 정권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런 진단에 더해 김동춘(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21일 열린 제14회 비판사회학대회에서 엠비 정부의 성격을 ‘전쟁정치’란 개념으로 설명해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지배 방식’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의 근저엔 “지배 집단의 위기의식과 기득권 상실의 불안감 속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쟁정치’, 곧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제도적 쿠데타’”가 자리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전쟁정치란 국가가 전쟁상황에 있다는 전제 아래 국가의 유지, 곧 안팎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을 가장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국내 정치를 전쟁 수행하듯이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곧 반대세력을 ‘좌파’나 ‘적’으로 간주한 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압하는 방식의 국정운영을 일관되게 계속해왔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그동안의 민주화 성과를 인정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일부 억제해왔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민주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봤지만 이후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건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정권 존립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지배 세력의 이해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전쟁정치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 국군 기무사령부, 검찰·경찰 공안부서 등 ‘그림자 정부’의 위상이 다시 강화되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청산하려는 시도는 이런 전쟁정치의 지배 방식이 표면화된 단적인 사례라고 본다.

사실상 전쟁정치는 민주정부 10년을 제외하고 한국의 역대 정부들이 예외 없이 수행해왔던 지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뒤에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검찰과 언론의 구실이다. ‘자기편’에는 봐주기 수사를 하지만 반대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리한 기소도 서슴지 않는 검찰, 정부 사업에 대해 홍보성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을 “억압과 정당화의 두 기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거나 권위주의 정권 등으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이 정부는 아무런 가치나 방향, 이념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경제 제일주의, 시장주의의 허구성, 그리고 한국 보수주의의 퇴행적 성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이런 전쟁정치가 일관된 계획이나 지휘 아래 진행됐다고도 보기 어려우며, 차라리 지배 세력이 지난 10년 동안 약간 상실했던 이익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 체면과 염치를 가리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설명했다.

이런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한국 사회의 전체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면? 김 교수는 기본적으로 한국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으며, 1987년 민주화에도 그 지배 세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뒤로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했고, 지배 세력과 집권 세력(민주정부) 사이의 갈등이 노골화됐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공주의·개발독재 세력의 재집권’이라는 성격을 띤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이전처럼 지배 세력과 집권 세력을 다시 일치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경제적 신자유주의 추진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역진이라는 흐름을 결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해, “개발독재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성격을 갖는다는 풀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세상 읽기] 사장님들의 분노 / 김동춘


2011년 10월 24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21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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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 정치가들이 말하는 ‘경제’와
자신들의 ‘경제’는 전혀 다르단 것을
자영업자들은 진작 알아차렸어야…

지난 18일 요식업을 하는 자영업자 7만여명이 서울 잠실경기장에 모였다. 그들은 카드수수료율을 대형마트 수준인 1.5% 정도로 내려 달라고 요구했다. 신용카드 회사는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지만 중소상인들은 대형마트의 거의 갑절인 2.7% 이상의 카드수수료를 내고서는 도저히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자영업자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전체 취업자의 28%를 차지하는 자영업자 중 연매출 4800만원 이하의 간이과세자가 전체의 80%에 달한다고 하고, 자영업자의 4분의 1은 월 120만원의 소득도 올리지 못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사실 대부분의 자영업자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지 못해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노무현 정부와 비교해서 자영업자에 대한 정부의 배려는 어떤가’라는 설문에 자영업자의 46.7%가 ‘더 힘들다’고 답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서울이나 지방에서 택시를 탔을 때 기사들에게 “요즘 살기 어떠냐”고 물어보면 육두문자부터 먼저 내뱉었던 기억이 있다. 그 개인택시 기사님들 모두 2007년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을 것이다. 서강대의 조사 결과 2007년 선거에서 자영업자의 60%가 지지했다고 하는데, 비공식적인 조사로는 자영업자들의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80%를 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하니 이들은 거의 ‘묻지 마’ 투표를 한 셈이다. 이들 호프집, 치킨집, 미장원, 식당, 카센터 사장님들과 재래시장 아주머니들은 이명박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 했을 때, 자신들도 이 비즈니스 세계의 일원인 줄 알았을 것이다.

2009년 6월 이명박 대통령이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했을 때 상인들이 대형마트 때문에 장사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가 법을 만들어도, (대기업이) 헌소를 내면 정부가 패소를 합니다. … 요즘은 농촌에도 인터넷이 들어와서 직거래를 하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즉 망해가는 소상인들을 보호할 방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기업들이 헌법재판소에 제소할 것까지 미리 알려주면서 상인들이 몰락해도 그것은 시장의 법칙이니 어쩔 수 없고 알아서 자구책을 구하라고 했다.

대형마트의 뒷골목 상권 장악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국회는 뒷북치듯이 유통산업발전법을 통과시키고 자영업자를 보호하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미리 겁을 준 것처럼 대형마트들이 아직 헌법재판소에 제소를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고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이 본격 작동되면 이들 자영업자들은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동네 가게는 모조리 사라질 수도 있다.

자영업자들의 91%는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임금노동자보다 더 낮은 소득수준에 있는 자영업자들은 이 사회에서 완전히 버려진 존재다. 그래서 이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카드수수료율은 마땅히 대형슈퍼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대형슈퍼의 동네시장 약탈 역시 중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고통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선거 때 정치가들이 말하는 ‘경제’와 자신들의 ‘경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경제활동인구의 28%를 차지하는 자영업자들의 처지는 오늘 한국 서민의 실상이고 선거 때 나타나는 이들의 착오는 바로 우리 서민들의 판단착오이기도 하다.

“유신헌법은 무효…독재 부역자 처벌해야”

2011년 10월 19일, <한겨레>에 올라온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13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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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화복지포럼 학술대회
“나치 전력자는 엄정한 죗값 치렀는데…”
‘반민주행위자 인명사전’ 펴낼 계획도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파시즘 체제였던 유신체제를 두고, “유신헌법을 법적으로 무효화하고, ‘유신부역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자”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반민주행위자·유신부역자 인명사전’을 만들려는 계획도 나왔다.
민주·평화·복지포럼(상임대표 이부영)과 민주정책연구원(원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은 19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유신체제,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었다. 5·16쿠데타 50년을 맞아 마련한 학술대회 시리즈 가운데 세번째 행사였다. 이날 대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신체제의 악영향에 대한 진단에 이어, “특별법 입법 등 실질적인 조처를 통해 유신체제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터져나왔다. 지난해부터 대법원에서 재심을 통해 긴급조치 무효 판결을 내고 있긴 하나, 전후 독일의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처럼 유신헌법을 무효화하는 확실한 조처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다.

발표를 맡은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는 “유신헌법은 법적으로 무효”라고 못박았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단체가 국민의 주권을 대신 행사하게 하고,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시켜 권력분립을 포기하는 등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이념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게다가 1972년 국회를 해산했던 10·17 비상조치가 유신헌법 탄생의 배경이 됐는데, 임 교수는 “당시 대통령에겐 국회 해산권도 없었고 헌법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킬 어떤 권한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유신헌법은 내용과 절차 모든 측면에서 무효라는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조작 간첩사건 등 유신체제를 지탱했던 공작정치의 내용을 분석해, “유신체제는 명백히 일제말 식민지 파시즘과 동시대 유럽 파시즘의 적자”라고 밝혔다. 그는 “나치 전력자들이 엄정하게 죗값을 치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긴급조치에 근거해 무고한 시민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판사가 대법원장이 된다”며 우리에겐 유신체제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지적했다. 또 나치 청산법으로 10여만명을 처벌했던 독일의 사례를 들어 “간첩조작, 학원탄압, 노동탄압 등을 기획하거나 집행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책임자급은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국회의 특별법 입법 등 유신헌법을 무효화하는 실질적인 조처가 있어야 또다른 민주주의 역행을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정치학)는 국회가 주관하고 학계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헌정사 평가위원회’를 발족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편 이부영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처럼, 유신체제에 부역했던 인사들의 명단을 사전처럼 담은 <반민주행위자·유신부역자 인명사전>(가제)을 내년께 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공익 추구세력에 대한 사익 추구세력의 학살 [2011.10.17 제881호]

2011년 10월 17일, <한겨레21> 제881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5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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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 추구세력에 대한 사익 추구세력의 학살 [2011.10.17 제881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공인의 실종 ① 해방된 나라에서 ‘빨갱이’로 몰려 죽은 공인들-공적 활동했던 모든 정치적 반대자 절멸 시도한 이승만·친일세력

동학농민항쟁을 이끈 전봉준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본공사가 배후에서 조종한 형식상의 재판에서 재판관이 “너는 피해가 없었다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난을 일으켰느냐?”라고 묻자, 전봉준은 “한 몸의 피해가 있다고 들고일어나는 것이 어찌 남자의 일이라 하겠느냐? 여러 사람이 원망과 한탄을 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해악을 없애고자 일어섰다”고 대답했다. 썩은 조선왕조와 일본의 침략에 맞섰던 전봉준은 바로 백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공익 추구세력이 불순분자인 시대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할 무렵에 고관대작이 아닌 몰락한 양반, 유생이나 중인 하층 출신 지식인 중 일부는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공인(公人)의 덕목을 실천했는데, 의병운동에 투신한 사람이나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매천 황현, 가산을 정리해 만주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회영, 이동영 가문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전봉준과 이후의 독립운동가들은 유교적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논리가 아닌 만민평등의 새로운 사상에 입각해 민족과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근대적 공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선량한 국민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천황에게 충성하고 오직 가족만 돌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일부 조선인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를 배불리 먹이기 위해 일제의 밀정이나 경찰, 군인이 되었다. 그런데 근대적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 항일운동가들의 다수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며, 살아남은 사람도 구타, 고문, 정신적 고통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살아난 항일 인사들 상당수가 해방 뒤 국가나 민족의 지도자로 대접받기는커녕, 일제가 남기고 간 그들의 대리자들, 즉 일제하에서 처자식 배불리 먹이려고 일제의 끄나풀 노릇을 서슴지 않던 사람들의 손에 ‘해방된 나라’에서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는 점이다. 사익을 추구한 사람은 지역사회의 ‘유지’, 즉 ‘우익’이 되었고, 공공의 대의에 몸을 던진 사람은 빨갱이 혹은 또다시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익추구자들은 일본 경찰이 항일 인사들을 감시·색출하려고 만든 명단을 활용했으며, 이후 이들을 주로 전향한 좌익으로 구성된 국민보도연맹으로 묶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살했다.

경남 김해는 일제 시기부터 농민조합운동과 야학운동이 활발한 곳으로 유명했다. 김해의 김정태·강성갑 등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에 진력해온 인물이었는데 지역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강성갑은 진영 한얼학교 설립자로 사재를 털어 교육운동에 헌신했으며, 김정태는 1919년 3·1운동 당시 진영만세의거를 주도해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군에게 자금도 제공했다. 그런데 해방 뒤 지역의 일제 끄나풀들은 이들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특히 강성갑에 대해서는 “진영이 고향도 아니면서 진영에 머물러 교육사업입네 하는 것이 아니꼽다”고 말들을 했다고 한다. 김정태를 향해서도 해방 뒤 그가 3·1절 행사 때 이승만 정부의 행사에 참가하지 않고 김구의 행사에 참가하자 일제 시기 교사를 하다 여학생 추행사건으로 면직된 경력이 있는 강백수는 그를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했고, 결국 그는 전쟁 발발 직후 학살되고 말았다. 전쟁 발발 직후 진영읍의 우익계 비상시국대책위원회 구성원인 이석흠·이병희·김윤석·강백수 등이 ‘사설군법회의’라는 사설단체까지 조직해 학살을 기획·집행했다고 한다. 이석흠·김윤석·강백수 3명은 1950년 7월27일 지서 주임 김병희, 청방단장 하계백과 밀회해 강성갑을 살해할 것을 모의했으며 곧바로 낙동강변에서 카빈으로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미국 선교단체와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최초로 문제제기해 미국 언론에까지 보도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사건이 시끄러워지니 김병희 등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후 김병희는 사형을, 나머지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형이 집행된 사람은 김병희뿐이고 나머지는 한 달도 못 돼 석방되었다. 당시 계엄민사부장이던 김종원이 3천만환을 받고 이들을 석방시켜주었다는 소문이 있다. 한편 진영여자중학교 교사였던 김영명은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신혼이었고 미모나 인간성으로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으나 지서 주임 김병희가 오빠 김영봉의 은신처를 캐묻다가 그녀를 성폭행하고 고문치사 뒤 암매장했다. 김영봉, 김영명의 부친 김성윤이 일제 때부터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지역 내 후진을 해외유학까지 보낸 인물이었으나 진영읍내의 각 기관의 ‘유지’들은 이를 시기해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이들을 몰살시키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좌익계열의 추대를 빌미삼아

그 뒤 학살당한 김정태의 아들 김영욱은 4·19 직후 부친의 억울함을 풀고자 유족회 활동을 했다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생존시 부친의 죽음은 “아무 이유도 없는 죽음”이라고 말했고, 도대체 진영의 학살사건은 ‘엉망진창 사건’이라고 술회했다. 일제 때부터 친일했던 사람들이 무고해서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았다는 것이다.

한편 경기 남양주에서도 반이승만 노선을 걷는 우익계 독립운동가들을 군경이 살해했다. 남양주 진건·진접 <독립운동사8>에는 1919년 3월31일 진접면 부평리 광릉천 일대에서 3·1운동 시위가 벌어졌는데, 당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김성숙·강완수·이순재·김석로·현일성(현상규) 등 봉선사 승려들이었으며 그들은 문건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감옥살이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봉선사 운허 스님(이학수)이 광동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학교에서 김구 선생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전쟁 직전 이 지역은 봉선사를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며 진보적으로 사회참여를 하려는 분위기가 높았으며, 봉선사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현상규와 그의 처 백추파는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1950년 10월15일께 진접지서에 끌려가게 되었다. 서울 전매소에서 일하던 그들의 아들 현인섭도 이 소식을 듣고 남양주로 들어오다가 잡혀 진접지서에 갇혔다. 이들은 국군이 수복한 뒤 1950년 10월21일(음력 9월11일)께 인민군 치하에 살아남아서 그들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진접면사무소 뒷산에서 살해되었다.

해방 뒤 스스로 대중 앞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중립적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은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었기에 좌익 계열 사람들이 이들을 지역의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학살당한 사례도 있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여수여중 교장이던 송욱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제 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적도 있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직후 여수시에 남아 있다가 좌익계 교사들이 지지 연설을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물러간 직후 진입한 토벌군은 그를 반란군의 수괴로 몰아 학살했다. 반란군 치하에서 살아남았고 그들에게 추대되었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그것은 이승만 쪽이나 현지 토벌군의 실수로 보기 어려웠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당시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던 김구의 배후 음모설을 계속 퍼트렸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이승만 세력에게 남북협상을 추구한 김구는 사실상 빨갱이와 같은 존재였다.


‘친일 콤플렉스’가 낳은 잔인한 보복

해방 뒤 반이승만 노선을 걸었던 항일 경력자들이 빨갱이로 몰린 것은 마산시에서 공식적으로는 전향한 좌익을 감시·통제하려 만든 국민보도연맹 가입 범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경남 마산시 지부는 1949년 12월7일 지부 결성 이후 1950년 1월5~20일을 ‘가맹주간’으로 설정해 가맹 대상자를 지정했는데 그중에는 △ 미소공위 마산시민축하대회에 시민으로서 대열에 참가한 자 △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지지한 자 △ 10월 폭동에 의식·무의식으로 가담한 자 △ 민전 산하 사회단체에 물자 및 금품 제공 조달 협력자 등이 포함돼 있다. 이는 사실상 1946년 이후 이승만 한민당 계열 극우단체의 활동을 제외한 미군정의 보리공출 반대 등 공공집회 및 민족주의·좌익·중도좌익 주도의 집회에 참가했거나 단체에 가입했거나 그러한 활동을 사적으로 지원한 사람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사인(私人)으로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활동, 특히 공적인 사회활동을 한 거의 모든 사람을 포괄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 미소공위나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지지한 사람의 대다수는 좌익 계열이었지만, 통일정부 수립을 원한 다수의 우익계 항일운동가들도 이승만식 단독정부 수립은 전혀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이 범위에 속해 보도연맹에 가입당한 사람들은 이후 대부분 피살당했는데, 이렇게 보면 보도연맹 피학살자 중에는 미군정에 반대하고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광범위한 지역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는 말이 된다.

진영이나 남양주 지역처럼 좌익과 전혀 무관한 우익계 독립운동가들이 이들을 시기하던 지역 내의 ‘유지’, 주로 친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함에 의해 전쟁 통에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한 사례는 전국 방방곡곡에 무수히 많다. 이 우익계 항일운동가들은 해방 뒤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재기용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하자 그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바로 그러한 입장 때문에 그들은 좌익으로 몰렸다. 미군정에 의해 재기용된 친일 경찰이나 관리들은 과거 그들의 행적을 알고 있을뿐더러 그들에게 고통받았던 이들이 자기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었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모두가 “똑똑해서 주위 사람들이 시기를 했다”라고 말한다. 똑똑했다는 말은 일제 때나 해방 뒤 지역사회의 지도자급이었다는 말과 같다. ‘시기’는 사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유지들의 친일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이고, 그 콤플렉스 때문에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잔인하게 보복을 가한 것이다. 수년 전 작고한 노촌 이구영 선생처럼 해방 뒤 경찰에 구속된 옛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말에 자신을 고문했던 경찰들에게 또다시 고문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많이 겪었다.


제거됐어야 할 ‘위험인물’

결국 한국전쟁 전후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람들 중에는 다수의 항일운동가가 포함돼 있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친일 경찰이나 친일 인사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친일 경력자로 채워진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에게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제거됐어야 할 ‘위험인물’이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0월 20일 목요일

박원순 변호사

나는 서울시민이 아니므로 내가 뭐 이렇게 선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좀 우습기도하다.
나는 박변호사가 서울시장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잘 할 수 있을지는 좀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나경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서 몇 자만 적는다. 특히 언론에서 네거티브 보도 하다보니 옛일을 잘 모르는 40대 이하 사람들은 그저 두 사람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 같다.
그거 절대아니다.
사람 제대로 못 보면 평생고생한다. 젊은이들이여 정신차려라, 인생 공부좀 해라

욕지미래 어든 선찰기연이라 欲知未來 先察己然
미래를 알고 싶으면 지나온 것을 봐라. 사람의 입을 보지 말고 그가 무엇을 했는지 봐라.
과거는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미래는 암흑이다. 무엇을 보고 판단할 것인가?

박원순 변호사와 나는 88년 역사문제연구소시절부터 참여연대 창립, 활동기까지 14.5년 가까이 있었으니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장단점 많이 보았다. 단점도 상당히 많다.
좋은 일화 한가지 소개한다.
나는 그가 동교동 집을 팔고 집에 소장된 수만원의 책을 역사문제연구소에 거저 넘기고 그 집을 판 돈을 역사문제연구소 건물 구입에 조건없이 희사할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동교집 팔고 이사한 날 나는 그 집에 있었다. 그 때 웃으면서 한 말이 있다.
"좀 살살 가져가라" "몇 권이라고 좀 남겨두고 가라"
그런데도 우리는 그의 집에 있는 책 깡그리 다 들고 갔다.
그는 그 당시 운전사 데리고 있던 잘나가던 변호사였다. 소장하는 책 싯가로 따지면 지금 10억대 이상이다. 그 책들은 그의 손 때가 묻은 귀중한 현대사 자료들이다.
동교집 집 필아서 그 돈으로 필동 실천문학사 건물 구입했다. 그 건물에 대해 자신의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남 전세로 갔다.
내가 그런 집이 있었다면 그거 팔아서 단체에 넘겼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더구나 수만원의 책을 조건없이 넘긴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이었다.

그는 한 때 자신의 것 모두 던진 적이 있는 사람이다.
변호사 업무도 그만두고 참여연대 상근자로 들어간 사람이다.

아름다운 재단을 만든 이후 나는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다.

13억의 시세차익을 얻은 부자 변호사와 그 이상의 돈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
어찌 이들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고. 이 젊은이들이여

유신체제 논문( 홈피 접속 불량으로 이곳에 올립니다)

유신체제의 공안 통치와 병영적 사회질서
- ‘전쟁정치’로서 10월 유신

민주주의 먹고는 못 삽니다. 배가 불러야 민주주의가 잘되는 것입니다.
(박정희, 1967.4.29)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기를 그쳤다. 물질과 허세만이 왔다갔다 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의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그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 말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에 발을 들이밀자 말자 발을 썩어 버린다. 그 문드러진 팔다리로 나는 힘차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과의 타협을 우리는 오늘의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더 지독한 마약이 필요하다.

정현종, “노우트 1975“

1. 머리말

지난 8월 2일 대법원은 “긴급조치는 법률이란 명칭을 갖고 있지 않고, 국회 국회 입법과정도 거치지 않았다”고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법률보다 하위의 명령, 규칙 등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대법원에 부여한 헌법에 따라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에 대한 심사권은 최종적으로 대법원에 속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불복하였다. 검찰은 “긴급조치는 당시 유신헌법에 따른 절차를 거쳐 형식적 의미의 법률과 동일한 효력이 있었다”며 “긴급조치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도 국민적 동의를 받았으므로, 긴급조치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긴급조치권 발령의 상황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권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고,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긴급조치 발령상황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혀 긴급조치의 존재 이유를 두둔하는 의견도 밝혔다. 검찰은 이 문제를 대법원과 헌재 간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법학자들은 이미 긴급조치는 법의 자격을 갖추지 않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즉 법의 이름을 빈 사실상의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검찰의 이의제기는 단순히 검찰의 입장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주류 보수세력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것은 1) 유신헌법은 국민적 동의를 받았다, 2)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긴급조치 발령의 정당성이 있다. 3) 당시 판사들은 어쩔 수 없이 실정법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4) 지금 와서 이를 긴급조치를 무효화하거나 당시 판사들의 비판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국론을 분열시킨다. 여기다 더 추가를 하면 “유신통치가 인권침해를 가져온 것은 맞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인권과 민주주의만을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대략 이런 주장들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한국의 보수 세력, 보수 언론들만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국민들도 그것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유신시절을 겪었던 50대 이상 사람들도 사실상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고 있다. 거의 완전한 보도통제, 곧 이은 전두환 정권의 등장, 87년 이후 5.18 광주 문제 중심의 과거청산 작업 등의 이유로 10월 유신 시절 실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단지 외형적 경제성장의 성과만이 일방적으로 전달되어 왔다. 그래서 우선 유신체제에 역사적 사실에 다한 충분한 공개와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유신체제에 대한 평가는 현재 진행형일뿐더러 미래의 한국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만들것인가의 문제와도 여전히 맞닿아 있다.
만약 히틀러 치하의 독일 파시즘에 대해 오늘 검찰과 같은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독일의 정치권에 잇거나 그러한 주장을 유포하는 언론과 지식인이 있다면, 그들은 처벌을 면치 못하거나 파시즘의 망령을 부활시킨 자로 지목되어 사회적 지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히틀러의 파시즘 수족 역할을 했던 니치당원, 나치 친위대, 비밀경찰(게쉬타포) SS, 판사나 검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치에 부역한 학자들까지도 전후에 엄한 처벌을 받아 공적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정 반대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은 그의 딸 박근혜를 내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올려놓았으며, 유신체제 하에서 중앙정보부 등 각종 공안기구의 지휘 명령 계총에 있었던 당사자들이 처벌을 당하기는커녕, 자신의 자연 연령이 다할 때까지 기득권을 누리며 살았다. 그리고 긴급조치 하에서 단순 시위 가담 학생들에게 중형을 내린 판결을 내린 판사가 한국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의 재판부는 일부 재심사건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뒤집었지만 사법부 자체는 이에 대해 공식 반성을 한 적이 없고, 검찰은 앞의 주장처럼 지금까지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유신체제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의 파시즘을 끌어들이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물론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파시즘과 유신체제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의 민주주의 절차의 정지 상태, 삼권분립 원칙의 정지, 법의 이름을 빈 사실상의 테러 통치, 엄격한 감시체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유신체제는 일제 말의 식민지 파시즘, 그리고 동시대의 유럽 파시즘의 적자이다. 단지 70년대라는 세계사적 시간의 조건 때문에 유신체제가 과거의 일제 말 총동원체제나 히틀러의 파시즘보다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외향을 갖추었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른다.
청산, 극복되지 않는 유신체제는 우리의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신 시절 건설회사 사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이 그 시기의 찌꺼기를 붙잡고 이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를 극복하는 것은 바로 수많은 박정희, 수많은 이명박이 움직이고 있는 공안기구, 행정부, 검찰, 정치, 기업, 사회의 극복 문제와 맞닿아 있다. 우선 유신체제가 어떤 정치체제였는지, 그 시절 인간성이 어떻게 유린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오늘의 한국을 이해하고 미래의 인권이 보장되는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2. 유사 파시즘, ‘법에 의한 전제’로서 유신체제

1) 성격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의 부칙에 “이 헌법의 제정과정에 대해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이 유신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10월 유신이나 긴급조치가 예외상태의 선포, 즉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던 폭력 지배체제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신헌법은 국민주권, 권력분립, 기본권 존중 등 민주주의 원칙을 위배한 법이었다. 대통령은 국회를 언제나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관의 성격을 상실,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입법, 사법, 행정부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었으며, 야당과 재야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서는 여당 인사들에 대해서도 고문과 테러가 만연했다. 시, 군, 읍, 면, 동 이장을 주민 동원과 주민 감시하는 요원으로 만들었으며, 학원을 병영화하고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행정직원을 학생을 사찰하는 요원으로 만들었다. 지역에서는 관제 준국가 조직이 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 등 관제 학생조직이 지배하였다. 국민이나 학생들은 폭력의 공포 때문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에서는 노조 활동 자체가 사실상 불법화되었고, 공장 새마을 운동은 철저하게 위로부터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신체제는 71년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어 오던 절차적 민주주의, 정당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내세운 논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민족적 사명을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온 대의기구에 대해 누가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우리의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대 냉전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것은 전연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신’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이 그것은 일본의 제국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 메이지(明治) 시대의 입헌군주적 근대개혁, 정치가 통치권에 종속되는 시대의 정신을 70년대 한국에서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육사출신 한국의 청년 장교들은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 히틀러가 했던 일, 다이쇼오(大正) 데모크라시 이후 천황제 하에서 일본의 청년장교들의 군벌정치와 쿠데타 기도를 반복하였다. 국가 지상주의, 군의 정치적 중립의 헌법원칙 무시, 절대적 규율과 철저한 상명하복 원칙, 국민탄압과 인명경시 등이 그 내용이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은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재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지 오래입니다”라는 비장한 군인정신의 표출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히틀러도 “국가사회주의자에게는 단 하나의 신조만이 있다. 민족과 조국이 그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군국주의 하 일본의 청년장교들도 “애국충정은 눈물겹도록 지극한 데가 있었고”, “세계적으로 가장 애국적이고 감투정신이 투철” 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요컨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다고 하는 언술을 실제 ‘고통을 겪고 있는’ 외로운 저항자로서가 아니라, 이미 권력자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사적 욕망이나 이해가 ‘국가’의 담론 안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히틀러와 일본의 군부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자국의 경제발전과 완전고용을 창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각각 수백만의 유대인과 수 백만 명의 중국, 조선인을 학살하거나 처참한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유신체제 하에서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비전향 장기수 등 백여 명 이상이 법의 이름으로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구타로 사망하였고, 장준하 선생 등 많은 민주인사들이 의문사를 당했으며,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고문, 구타, 린치 등 야만적 폭력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유신은 관료적 효율성을 체제운영의 기본원리로 삼았다. 박정희의 유신체제 수립의 명분도 바로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에서 찾았다. 박정희는 "우리나라는 8.15 해방 후 민주주의를 정착시킬만한 정치적 토양의 배양도 없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분별없이 이식한 까닭에 민주주의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왔다. 헌정사는 비생산적인 논쟁과 당리에 얽매인 파쟁으로 점철되었고 질서보다는 혼란이 설득과 타협보다는 극한적인 대립과 투쟁이 결혼에의 승복보다는 결론에의 저항이 오히려 기승을 부리는... ” “국력의 배양과 축적을 위해서는 정치경제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그 역량을 생산적으로 조직화하여... 비능률과 낭비의 요소들을 제거하여 국력증진을 합리적으로 조작하는 기능적 장치가 또한 있어야 했다” 그래서 100억불 수출 조기달성, 중화학 공업시대의 개막, 본격화한 해외건설 수출 대단위 공업단지 건설 등을 달성했다. 이렇게 본다면 독재보다 더 효율적인 체제는 없는 셈이다.
유신헌법 선포, 통과 직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며, 계엄 하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91.5 퍼센트 지지라는 놀라운 찬성률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의견의 피력이나 비판 자체가 철저히 봉쇄되고 야당이 참관이 차단된 공포 상태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 김대중과 가까운 야당 국회의원들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 국민투표는 일견 국민의 의사를 집약하는 직접 민주적 장치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회정치를 정지시키고 주민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국민의 이름으로 일인 독재를 정당화하는 장치로서 기능하였다. 모든 선거 과정은 중앙정보부가 각 분실에 하달한 95 퍼센트 득표공작 명령 하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던 시점인 1933년 11월 12일 독일 국민들 95 퍼센트가 히틀러를 지지한 것을 연상시킨다.
유신헌법 통과 후 모든 언론은 검열을 받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신문사에 아예 상주하여 보도가능한 뉴스와 그렇지 않는 뉴스를 나누어 지정했고 심지어는 헤드라인의 크기나 특정기사의 돋움처리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였다. 동아 조선 등은 광고주 압박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중정이 요구하는 인사조치 즉 문제 직원들을 해임하였다. 이후 중정은 이들의 재취업까지 방해를 하였다. 초중고 교장들을 모아서 “10월 유신의 선봉이 되자”고 결의를 다졌다. 서울시 공무원 2 만여명은 10월 유신이라는 리본을 달고 다녔고, 전국에서 관제 대모가 열렸다. 중정은 각종 노사분규에도 직접 개입하였다. 동일방직의 ‘똥물사건’ 등도 중정의 적극 개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 중정, 보안사, 경찰은 블랙리스트를 작성, 공유하면서 민주노조운동에 가담한 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막았다.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형식상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정부는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하여 후보 등록과정에서부터 정부비판적 인사들이 출마하는 것을 차단하였으며 대의원은 거의 친정부적 인사로 구성될 수 밖에 없었다.
10월 유신 이후 입법부의 1/3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채워졌다. 유정회 국회의원들은 대통령 비서실의 추천과 박정희의 추인으로 결정되었는데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유정회 국회의원이 된 대학교수는 제1기 11명, 제2기 21명, 제 3기 21명이었고 유신정책심의회 조사연구 교수는 모두 70명이었다. 유신체제 하 국회 운영은 연중 임시국회 1회, 정기국회 1회 정도에 불과하였다. 국회를 열어놓고 떠드는 것보다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유정회는 국회 정치에 대한 박정희 불신을 현실화한 기구였으며 “국회가 정쟁의 장이 아닌 능률적인 의안처리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방침 하에 야당의 대정부 비판을 정쟁으로 규정하고 적극 저지했다.
대법원의 경우 유신헌법 하에서 대법원 판사들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그 동안 대법원장이 갖고 있던 법관 임면권을 대통령에게 이전시켰다. 또한 헌법위원회를 설치하여 대법원이 갖고 있던 위헌법률심사권 뿐만 아니라 탄핵결정권 위헌정당 해산권을 부여했고 대통령이 헌법위원회의 9인 중 3인을 선임하는 동시에 국회에서 선출하는 3인과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을 임명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법부는 대통령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 대통령의 의중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은 재임용에서 탈락시켰고, 탈락시킨 후에는 변호사 개업도 어렵게 만듦으로써 정권 반대 판결의 가능성은 차단하였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서울 형사지법원장과 수석부장판사를 통해 시국 사건의 판결을 ‘조정’하였다. 그래서 사실상 모든 시국사건 판결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였다.
유신체제는 우익단체를 준국가기구로 만들었다. 그래서 반공연맹은 국가법인체로 발전되었다. 즉 반공연맹을 사실상의 국가기구로 만들어서 국가의 기능을 대행하도록 한 셈이다. 반공연맹은 내외문제연구소를 흡수하고 이후 67년에는 공산권문제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60년대 후반부터 교과과정심의회를 설치하여 교육에까지 개입하였다. 반공연맹의 안보교육은 교사, 학생, 해외파견 기술자, 직능 지역단체 조직요원과 중앙요원을 중심으로 1주 23시간에서 67시간까지 이루어졌다. 1972년 유신체제 수립이후 반공연맹은 전국 시군구에 지부를 둔 전국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새마을 교육을 총력안보체제를 위한 국민동원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박정권은 새마을 교육운동을 유신이념 실천도량으로 정의하였다. 박정권은 국민들을 최말단 행정조직인 반단위로 조직하기 위해 1976년 4월 30일 매월 말일을 반상회의 날로 정해서 전국적으로 일제히 반상회가 열리도록 하였다. 일제말의 국민반, 애국반 등 조직이 완벽하게 부활하였다.
당시 농촌에는 수많은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었는데, 이 모든 것은 행정기관의 직접 통제를 받았으며 단체의 장은 말단 행정기관의 끄나풀이었다. 노금노는 73년 봄 자신이 맡고 있었던 직책을 열거하였는데, 마을금고 회계, 50여호를 대표하는 수반장, 새마을 사업 추진위원, 새마을 지도자, 마을 협동 회장 등이었으며 그 외에도 농협 총대, 엽연초 조합 총대, 농지위원, 지도소 자원 지도자, 4H 독농가, 시범농가, 산림계장, 이장, 민방위 대장, 예비군 소대장, 절미저축부인회, 명예반장, 명예파출소장, 정당의 책임자, 반공연맹 책임자 등의 직책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걸핏하면 무슨 교육이다 동원해가지고 높은 양반들 일장 훈시 하는데 댓가지 숫자 채워주는 것이 고작이고, 새마을 회관에 가서는 ‘때려잡자 김일성‘, ‘처부수자 공산당‘을 외치고, 새마을 사업 역시 마을민의 자발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협조하지 않으면 찍히는 마을이 되기 때문에 ‘국가시책‘에 충실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던 일이었다.
박정희가 일당 독재를 실시하지 않았으며, 선거와 의회정치를 완전 폐지하지는 않았고, 사법부 기능을 정지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신체제는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일제 말 총력전 제체보다는 법과 민주주의의 외피를 약간이나 견지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만이 비상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었고, 중정 등 공안기관이 모든 국가기관 위에 서 있었으며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공공연한 무차별적 연맹, 테러와 고문, 재판 없이 현행범이 아닌 사람을 구속시킬 수 있었던 법의 정지 상태, ‘법에 의한 전제(autocratic rule by law), ’대다수 국민들에게 대한 공포감 조성에 기초한 점에서 파시즘에 가까웠다. 긴급조치는 바로 유신체제의 성격을 가장 잘 집약해 주고 있다. 그것은 법의 이름을 빈 사실상의 폭력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지배를 대중적 지지에 의한 파시즘, 혹은 대중독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유신헌법 통과에 대중들이 지지를 보냈고, 박정희가 추구한 안보/성장주의 연합세력으로 민중이 참가했으며, 당시의 민주화 운동에 대중들이 거의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분석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선 대중들은 독재정권과 동등한 혹은 하위의 파트너가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수준의 책임주체도 아니었다. 당시 한국 대중들은 이 지배체제의 구축과 운영과정에서 초대된 적이 없고, 또 발언권을 가진 적도 없으며, 또 그 체제가 대중들의 경제적 이익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작동된 적도 없다. 박정희 성장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탈빈곤의 열망을 사로잡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들이 조직적으로 대표성을 갖고서 체제 유지에 가담했다고 보기 어렵다,
유신체제 하에서 국가가 포섭해야할 ‘사회’는 극히 미약했다. 그래서 유신체제는 유럽 파시즘와 여러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만 조선조의 군주제도와 전근대적 권위주의, 일제 말의 천황제 군국주의, 대만의 총통제, 북한의 일성 체제 등 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전체주의와 여러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국가주의의 사상적 기원이 유교적 충의 논리, 독일 국가주의에 모두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박정희의 유신도 일본의 국가주의와 독일 파시즘가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극우 이데올로기이자 지배체제로서 파시즘 혹은 유사파시즘은 시기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안보 위기, 민주주의의 좌초, 경제위기와 중간층 몰락, 도덕적 진공 등의 배경과 맥락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국가 혹은 공권력에 대한 과도한 충성요구, 폭력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경향들, 지도자에 대한 종교적 숭배시 등의 내용을 특징으로 한다.

2) 배경

10월 유신은 1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국가 만들기, 극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그 토대를 갖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메이지(明治) 계엄체제, 군부독재, 국가주의가 해방 후 반공주의 체제에 그대로 이전되면서 10월 유신의 정치문화적 토양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5.16과 10월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두 번의 쿠데타는 바로 일제 식민지와 분단국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의 산물이자 그 연장이라 볼 수 있다. 40년대 전시 하 일본의 총력전 체제처럼 전쟁과 평화의 차이를 없애버린 10월 유신은 국가 내의 모든 정치 사회의 작동과 일상의 질서를 규율한 사실상의 전쟁체제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을 맞아 시행했던 ‘전쟁정치’의 후속편이었다.
이는 독일에서 히틀러 나치즘의 등장과 유대인 대량학살이 19세기말 비스마르크 시대의 정치문화에서 씨가 뿌려진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 군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군사영역을 민간 감시에서 제외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군주제가 사라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독일에서 과거 군주제의 유산과 권위주의가 나치즘을 낳게 만들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 독일의 정부조직과 정치문화가 제1차 대전후 가혹한 배상조치로 인한 타격과 대공황 기의 경제위기를 틈타 히틀러의 집권과 유대인 대랑 학살, 즉 ‘최종결정’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제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의 유신 쿠데타가 발생한 먼 배경은 구조적으로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내전 상황과 만성적 국가 안보위기, 그러한 조건을 반영하는 일제 식민지 법제, 한국식 대통령제, 즉 대통령에게 비상시 대권을 부여한 법과 제도에 있었다.
팩스톤(Paxton)은 파시즘은 "폭력적 지배의 정당성을 보편적인 경구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 정체성의 가장 확실하다고 간주되는 요소로부터 이끌어 낸다" 고 지적한 바 있다. 대체로는 종교, 건국의 신화, 민족의 신화 등이 그것인데, 한국의 경우는 한국전쟁, 반공주의, 70년 미.중 관계 정상화와 동서화해 이후의 남한 국가 정체성의 위기의식 등이 그 위치를 차지한다. 대체로 아도르노(Adorno)가 말한 것처럼 사회에 내재하는 문화 종교적 권위주의와 정치적 파시즘은 친화력을 갖는데, 보수적 권위주의 심리적 토양은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편견, 자민족중심, 인종주의, 독단주의, 가부장주의 등이 바로 그것이다. 편견과 독단주의는 표준적인 것, 혹은 공동체 내의 이질적인 존재 혹은 정서적 거부감을 주는 세력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과 노골적인 멸시, 더 나아가서는 그들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용인하고 그에 동조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과거 유럽 여러나라와 미국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 그 좋은 예라면 50년대 이후는 국가 혹은 집단 내의 권위에 도전하는 평등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거부감과 탄압이 대표적이었다. 파시즘은 통상 규율, 복종, 순응을 강조하고 상급자에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인간을 칭찬한다. 권위주의 퍼스넬리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토양에서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다.
이승만은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한편으로는 미국주도의 ‘지유진영’의 일원이라는 ‘의사 보편주의’ ‘전도된 제1세계주의’에서 구했지만, 그의 ‘혈맹론’은 미국에의 정치군사적 종속을 달리 표현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것을 계승하였지만 노골적 북진통일대신에 경제의 압도적 우월성에 기초한 통일을 국가의 존립 근거로 삼았다. 1945년 해방과 미국 후원 하의 국가 건설은 ‘개인’과 ‘사회’를 국가로부터 해방시킬 틈을 만들었지만, 곧 이은 지구적 냉전과 한국전쟁은 식민지적 지배체제를 다시 복원시켰다. 이승만의 경찰국가는 일인 독재는 박정희식 군사국가와 일인독재를 예비한 것이었다. 미국의 안보우산에 종속된 한국은 미군철수, 데탕트를 통해 그 안보우산이 흔들리면 체제위기를 맞는다. 71년 무렵의 향토예비군 창설, 방위산업 육성, 중화학 공업화는 이러한 안보위기의 대응 전략이었다. 박정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나름대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핵개발을 서두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과의 대립을 상수로 놓은, 분단 하의 체제유지 전략의 일환이었다.
한편 유럽 파시즘은 주로 경제위기가 이러한 내부의 군사주의와 맞물렸을 등장하였다. 그것은 대중의 경제적 곤궁과 불안에 기초한다. 독자적인 판단력도 갖지 않은 채, 상부로부터의 부당한 명령도 무조건 복종하는데 길들여진 군인과 관료들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파시즘은 쉽게 뿌리를 내리는데, 실제 지금까지 파시즘은 사실상 군사주의 국가, 그리고 전쟁 상황에 있는 국가들에서 주로 나타났다. 군사주의 원리는 정부 영역내의 입법, 사법 영역의 독자성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회사 등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을 군대와 같은 모습으로 재편을 하고, 모든 조직의 상관을 군대의 지휘관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한다. 이 군사주의를 수반하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안보의 위기의식과 적에 대한 집단적 공포는 국가 내부의 의심되는 구성원들에 대한 고문, 테러, 학살 등 반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인 억압을 정당화한다. 형식적인 민주주의인 선거가 존재하기는 하나 그것은 조작되고, 여론을 뒤틀려지는데, 이 모든 왜곡이 ‘동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경제위기와 대중의 불안 등을 기반으로 한 파시즘과 독재는 경제 발전, 물질적 번영, 완전고용과 안정적인 성장 등을 정당화의 기반으로 삼는다. 1939년 히틀러 당시 독일이 바로 그러했고, 초기의 경제성장 전략이 약간의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던 72년 전후 박정희 정권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남미의 관료적 권위주의 국가의 성립이론을 끌어들여 10월 유신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70년 전후 박정권이 전태일 분신, 광주대단시 사건 등의 고도성장의 부작용에 직면하기는 했으나, 남미의 관료적 권위주의에 비견할만한 수출경제의 위기에 직면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크다.
한국의 경우 유신의 보다 직접적 계기는 내부의 경제위기보다는 데탕트로 인한 안보위기, 북한의 도발의 위협, 이와 관련된 국가 정체성의 위기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남북 비밀교류)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더 직접적으로는 미군철수 국면에서의 새로운 안보체제 수립의 필요성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월 유신이 과연 중화학 공업화, 수출고도화를 추진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 때문에 추진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0월 유신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성장을 이룰 수 없었는가? 초기 산업화에서 자원동원의 극대화를 위해 군사독재가 효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반드시 그러한 전체주의적 억압과 동원이 없었다면 과연 성장을 추진할 수 없었을까? 물론 대공황의 위기를 겪은 이후 나치는 경제 활력을 가져왔고, 실업률 격감했고, 성장은 지속되었다. 범죄는 감소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었다. 히틀러는 질서와 번영을 가져왔다. 박정권 역시 8.3 조치 등을 통해서 위기를 돌파하고 중화학 공업화의 드라이브를 걸면서 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사회학에서 주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행위 동기, 즉 ‘때문에’ 동기와 ‘위하여’ 동기 중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유신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서도 이 문제가 쟁점이 된다. 박정희의 각종 언술과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60년대 후발과 70년 초의 미국의 베트남전 확전에 따른 주군둔 철수 정책, 그와 맞물린 북한의 대남도발이 가장 일차적인 위기를 조성하였으며, 71년 전후 일련의 내부 정치적 반대세력의 강력한 도전, 미중 관계 정당화 등 외적 안보위기 등 압박 요인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 분단국가 존립 정당성의 위기, 71년 총선에서의 야당의 약진과 대선에서의 김대중의 강력한 도전과 힘겨운 승리, 내부의 정치적 반대세력의 거센 저항, 1975년 월남 패망으로 인한 위기의식 속에서 박정희는 거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 이승만이 직면했던 그러한 국가존립의 위기를 느꼈으며, 그것은 박정권에게는 거의 ‘패닉 수준’이었다고 판단된다. 유신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두 번째의 ‘예외상태’ 선포였다.

3. 유신체제의 성격 : 공안통치와 용공조작

1)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 공안 통치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72년 10월 유신은 한국전쟁기 다음으로 필자가 ‘전쟁정치’라 부른 통치방식을 나타난 시기였다. 박정희는 “조국의 현실이 백척간두에 처해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준전시 상태가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태” 라고 규정했고, 즉 준전시라는 상황 규정 아래 적과의 전쟁을 위해 국가의 모든 구성원을 총동원하고 내부의 적, 적으로 지목된 집단과 개인을 외부의 적과 동일시하는 체제가 전쟁정치의 배경이 된다. 이 경우 체제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밖’ 즉 적으로 분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억압과 통제, 법의 이름을 빈 처형(사법살인)을 가한다. 즉 이들 밖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지 이야기다. 이 경우 ‘안’의 사람들을 가연 안전하고 생명과 자유를 보전할 수 있을까? 실제 밖의 사람들이 비인간화되면 안의 사람들도 노예화된다. 안의 사람들도 경제적 욕망 충족 외에 이들은 어떠한 의사도 표현할 수 없는 식물적 존재로 살기를 요구받는다. 전쟁정치는 군대 대신에 공안기구가 모든 국내정치를 좌우하고 법은 껍데기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안의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5.16 쿠데타 이후 곧바로 결성된 중앙정보부는 대통령의 직접 지휘를 받는 ‘국가 내의 국가’, 정부 위의 정부로서 역할을 했지만, 1972년 유신 이후 그 정도는 더욱 심해져서 사실상 모든 정치, 사법, 학원, 언론, 노동 영역에까지 중앙정보부 활동은 확대되어, 중앙정보부는 최고의 권력기관으로서 역할을 했다. 중앙정보부는 관료, 학자, 간첩, 깡패로 구성된 거대한 그림자 정부였고, 일제 시대의 독립투자를 잡아서 고문하던 악명 높은 특고(特高)의 적자였다.
국정원 과거사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71년 총선에서 중앙정보부는 ‘풍년사업이라는 공작명으로 김대중 후보의 낙선 활동을 벌였다. 이 선거에서 거의 전 공무원과 군인들이 박정희를 찍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결과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한편 그 전인 67년 총선에서 박정희는 김형옥 중앙정보부장에게 김대중, 김영삼 등 유력 야당 후보가 출마한 7개의 선거구를 ’정책지구‘로 선정하여 반드시 이길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박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야당정치인은 물론 여당 정치인까지 사찰을 하였고, 의정활동에까지 개입을 하여 의원들을 위축시켰는가하면 의원의 사생활까지 사찰을 하여 약점을 잡은 다음 필요시에 협박용 카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비위사실 수집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여자관계를 포함한 모든 사생활까지 사찰을 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에서도 중앙정보부는 모든 행정기관을 감시 통제하는 등 전방위의 역할을 하였다. 중정은 선거에 임해서는 총괄적 주도 및 관리, 야당 후보 사찰, 사퇴 및 낙선 공작, 선거결과를 뒤집기 위한 사후공작 등을 실시하였다.
야당 탄압은 주로 정치자금 줄을 조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후보가 온건한 이철승 후보에게 패배하여 당수직을 내놓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중정은 정치공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유신체제에 협조적인 온건한 야당인사인 이철승을 총수로 앉히기 위한 공작은 1979년 전당대회에도 이루어졌다.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람은 탄압을 받았다.
유신체제 이전과 이후의 활동과 성격에서 가장 뚜렷하게 변하는 부서가 사법부였다. 1971년 사법파동 이전까지 사법부의 독립성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중앙정보부는 ‘조정’의 이름으로 판결에 개입하였는데 특히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사건 등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개입하였다. 긴급조치 2호 10항은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 수사 보안업무를 조정 감독한다”라고 하여 중앙정보부가 긴급조치 관련 재판에 개입할 수 있을 길을 열어 놓았다. 실제로 인혁당 사건 등 군법회의 법정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입회를 했기 때문에 판사나 검사는 사실상 들러리에 불과한 점도 있었다. 심지어는 공판조서 변조 의혹을 제기한 변호사를 직접 연행하기도 했다. 민청학련 관련자 수사, 수감 시에는 중정 요원이 서울 구치소에 고정 배치되어 변호인 접견 등을 통제하기도 했으며 검찰 수사 과정에도 입회를 해서 피의자가 고문에 의한 진술을 부인하면 중정에 다시 보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은 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중앙정보부는 언론과 노동 분야에고 깊이 관여했다. 박정희는 언론담당조정반을 중앙정보부 내에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일방직 사건 등 70년대 노동사건에는 어김없이 중정이 개입하였다. 당시 중정 요원은 회사나 산별노조 사무실에 상주하다시피하였고, 경찰은 중정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모든 보고서가 청와대와 중정에 직접 올라갔고, 그들에 의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정책적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편 중정과 청와대는 동일방직 등 해고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배포함으로써 노동통제에도 직접 개입하였다. 전쟁상태에서 언론이나 노동의 자율성은 공안의 개입 영역이 된다. 특히 단순한 노동조합 결성이나 노동쟁의도 공안적 사안으로 간주된다.
시국 사건에 대한 이러한 판결은 재판을 받는 당사자 뿐 아니라, 그것을 목격하거나 보도를 통해 들은 모든 국민을 규율하는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즉 사회 ‘밖’의 존재, 간첩에 대한 공개적 범주화, 그리고 ‘밖’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비인간화와 학살에 준하는 가혹한 처벌은 안의 존재를 공포에 질리게 하여 복종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가졌다. 안과 밖의 정치적 경계선, 밖은 도덕적 경계선, 책임감과 동정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 영역이 된다. 이 경우 체제가 좀도둑도 비첩(匪諜)으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 71년 광주대단시 사건 가담자들도 구속된 후 간첩으로 몰려서 고문을 당했다. 밖의 사람들은 ‘자수’라는 방법을 통해 ‘귀순’이라는 용어로 ‘안’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60년대말 이수근 위장 귀순은 엄청난 정치적 효과가 있었다. 정치공작은 내부의 적을 제거하고, 이 적의 제거 작업을 온 국민에게 가시화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복종을 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2) 유신체제 하의 ‘간첩 조작’

권력자가 갖는 공포는 내부의 적, 잠재적 적에 대한 탄압을 가져온다. 당시 박정희가 가겼던 위기의식과 공포는 긴급조치의 선포로 나아갔고, 인혁당 조작 사법 살인 등을 저지른 배경이 되었다. 과거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일본 천황제 파시즘 하에서 공산당에 대한 공포의 조장과 집단 증오감 형성은 국가 내에서의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다음, 그들에게 처벌을 가해서 국민적 공포를 조장하며, 간첩의 위험을 온 사회에 일상적으로 유포하고 또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모든 사회구성원을 상호 감시하게 만들고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해왔다.
공안기관이 멀쩡한 사람들이나 약간이라도 의심되는 행동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정치공동체의 적', 혹은 범죄자로 조작해 내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생각해 낼 수도 없는 국가 범죄행위다. 국가가 국민적 ‘적을 적발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불순분자, ‘적을, ’간첩‘을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폭력성과 전제적 성격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행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70, 80년대 한국에서 그런 일은 수없이 발생했고, 최근까지도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다. 경찰, 중앙정보부(국정원), 보안사 등은 자신들이 심어놓은 정보 망원의 밀고를 받거나, 또 의심되는 사람을 고문하거나, 또는 약점이 있는 사람을 잡아서 그와 뒷거래를 해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이것은 이들 기관이나 그것에 속한 개인이 최고 권력자에게 성과와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특진을 하는 등 보상을 바라며 하기도 했고, 위로부터의 성과의 압박을 받아 수동적으로 시행하는 경우도 있다. 즉 약간 ‘냄새가 나는’ 사람의 동창, 친구, 친척, 과거 안면있는 사람 등 지푸라기라도 하나 있으면 이들을 연결하여 고문을 통해 ‘작품’을 그려내고, 그림이 될 것 같으면 마치 “무슨 중대한 것을 발굴해 낸 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얼굴에 화색이 도는 낮 빛을 하는” 빨갱이 제조, 관제 공산당 제조, 범죄자 제조는 한국의 공권력이 심심하면 저질러온 가장 패륜적인 행위였다.
조작에 의한 간첩 만들기는 일제가 가장 전형적으로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일제시기 특고의 후예이자 그로부터 훈련을 받은 간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 국립경찰은 이승만 정부 수립단계에서부터 인위적으로 좌익, 간첩을 조작하여 좌익탄압의 정치적 목적을 얻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 사회주의 활동이 합법적이고 북한과의 내왕의 기회가 있었던 재일동포, 북한에 납치되어 북한으로부터 사상 교양 교육을 받는 적이 있었던 납북어부, 해방 정국이나 4.19 직후 민족주의 사회주의 활동 경력을 가진 인사들, 서독에 유학하여 북한이나 사회주의 사상에 노출될 기회가 있었던 유학생들이나 유럽거주 주민들, 한국전쟁기 부역혐의가 있거나 의용군에 징집된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 주로 대상이 되었다.
유신치하 가장 대표적인 최대의 조작 사건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인민혁명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국가변란기도사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사건 직후부터 박정권이 위기를 돌파하고 민주화 운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관련자들을 고문해서 ‘만들어낸’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거론되어 왔는데 국정원 진실위원회의 진실규명과 법원의 판결로 최종적으로 그 조작사실이 확인되었다.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 조총련, 인혁당과 곁탁하여 국가변란을 기도했다고 발표하면서 1034명을 검거하여 57명을 구속하였고, 인력당 재건위 관계자 27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였다. 박정권은 학생데모를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 사건으로 확대발표하였다. 1975년 4월 8일, 인혁당 및 민청학련 관련자 8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고 8명은 무기징역, 6명은 징역 20년 형이 확정된 후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8명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에 의하면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은 반정부 데모를 위한 투쟁기구에 불과하며 유인물에 언급된 것에 불과하지 실체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것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 성격 역시 역할분담을 통해 동시다발 데모를 하자는 조직이었지 당시의 정부 발표 즉, ‘폭력으로 정보를 전복하여 공산국가 건설을 기도한 반국가단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였다. 즉 유신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학생데모는 ‘노농정권 수립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건설’로 조작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상황보고에 의하면 중앙정보부는 이적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였으며 대통령 담화내용과 수사결과가 일치하도록 전형적인 짜맞추기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인혁당’ 관계자인 도예종, 서도원 등이 여정남을 포섭해 전국적인 학생봉기를 배후에서 지원하려했다는 수사발표 역시, 여정남이 서울의 학생운동지도자들과 접촉한 것은 사실이나, ‘민청학련’ 지도부를 조종, 지도할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학생들이 이들 ‘인혁당’ 관계인사들과 전혀 접촉사실이 없었으며 조총련과의 연계 역시 없었다는 사실 등을 통해 전형적인 조작 사건임이 드러났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역시 관련자들이 개인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소지했을 수도 있고, 북한방송을 청취한 사람도 있어서 일부가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들이 구체적인 결사를 조직하여 반체제 활동을 하거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증거가 없고, 또 일부 의심받을 행동을 이유로 ‘반공법’ 저촉여부는 물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으로 사형까지 당할 이유는 없는 것이며, 관련자들에게 강압적인 수단(고문)을 사용해서 조서를 작성한, 다음 거대한 공안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을 전격적으로 처형한 국가범죄와 국가폭력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문서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 이용택은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진술하여 재심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8명을 18시간 만에 사형시킨 것은 박정희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만들었으며,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여 다음 날 곧바로 화장을 하였는데 이는 고문 흔적을 지우려했다는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박정권은 기껏해야 1.2 년 형을 살릴 정도의 처벌을 당할 구 혁신계 관련자들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으로 조작하여 이들을 사형시킨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민청학련, ‘인혁당’ 외에 대표적인 ‘간첩 만들기’는 유럽거점 간첩으로 이름붙인 김규남 등 사건, 최종길 교수 사건 등이 있다. 그러나 규모로 보면 재일동포, 납북어부 등이 가장 많다. 휴전선 접경지역에서 생계를 위해 고기잡이를 하다가 북한에 피납되고, 또 가족이 있는 남으로 내려왔던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어부들이 남한해상에서 북한경비정에 피랍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귀환하면 수십 일 동안 구타, 고문 등을 가하여 북한해상에서 월선조업을 하였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 처벌하였다. 진실위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혐의 없는 자라도 입건하라'는 지시를 경찰에 하달 하였고, 검찰은 법원에 사건을 기소하면서 '국가 시책에 의한 사건'이라고 기재하여 기소했다. 정보과 형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빰을 때리거나 군화발로 걷어차기 예사였고, “다른 사람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고 하는데 너는 왜 부인하느냐고 다그친 다음,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이후 정치적 필요에 의해 납북귀환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처벌하였다. 1970년대 초 "옆집에 온 손님 간첩인가 살펴보자"라는 표어가 온 나라의 마을마다 담벼락 등에 기재되어 있었는데, 옆집에 온 손님도 간첩일 수 있다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켜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론에 지속적으로 간첩을 검거했다고 발표하여 국민들이 공포감을 갖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는데 실제로 69년 이후 북한의 간첩 남파가 줄어들면서 남파간첩들이 정권이 원하는 대로 검거되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권은 간첩을 '국가정책으로' 양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납북귀환어부가 간첩 제조를 위한 가장 좋은 재료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등 공안기관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첫째 납북귀환어부는 대부분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거나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 자기 방어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둘째 납북귀환어부는 피랍되어 북한에 머물렀던 기간에 사회주의와 북한체제의 우월성 등을 교육받았고, 북한의 우수한 산업시설과 관광지 등을 견학 하였고, 남한에 내려가면 북한의 우월성을 지인들에게 홍보하라는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납북어부는 조금만 가공하면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반제품’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정권에게는 황금어장이었다.
이 조작 간첩 사건의 피의자들은 그런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당국에 불려가서 처음 들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70년대 중앙정보부는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제조하는 생산 공장의 역할을 하였다. 80년대는 치안본부 대공분실, 보안사 등이 경쟁적으로 그 역할을 하였다. 70년대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의 사전 양심선언은 바로 구속된 이후 심한 고문을 받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향후에 내가 하는 발언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미리 진실을 고백한다는 취지였다.
이 조작은 상당부분은 경찰,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공안기관끼리의 실적졍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80년대 들어서 보안사가 안기부를 압도하면서 ‘간첩 만들기’ 경쟁이 시작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보안사는 안기부를 압도하기 위해 재일동포라는 황금어장에 주목하고 수많은 재일동포들을 간첩으로 ‘제조’하였다. 70년대는 과거 약간이라도 혐의가 있어나 반정부 데모를 시도하는 등 일련의 근거를 잡아서 그것을 잡아서 확대, 과장했다면 80년대는 아예 노골적인 공작 차원에서 없던 일까지 조작하는 일도 있었다. 이 조작의 씨앗은 해방후 친일경찰에서 시작되었고, 유신치하에서 본격화되어 80년대에 가장 노골화되었다. 공안 조작은 공권력이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거짓을 하여 국민을 겁박하는 일이다.
‘간첩 만들기’는 곧 간첩 아닌 사람, 즉 국민 만들기 과정이다. 간첩 만들기와 동시에 진행되는 국민 만들기는 균이 정화된 ‘정화된 국민’ 즉 사상적으로 균질적이고 복종적이며 선거 외에는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국민이다. 복종하지 않는 국민은 잠재적으로 간첩으로 지목될 위험성이 있다. 전향을 거부한 장기수는 ‘현저한 위험’을 가진 인물이 되어 무한대의 기간 동안 구금당해야할 존재였다. 모든 구성원이 적과 나로 이분화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단순한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요구도 간첩행동이 될 수 있다. 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당시 체포된 사람들도 간첩으로 몰려 고문과 구타를 당했고, 이후의 노동쟁의, 농민의 저항도 모두 공안사건으로 취급되었으며 주모자들은 빨갱이로 몰렸다.

3) ‘거짓’에 기반을 둔 유신체제

유신체제는 동의보다는 폭력에 의거하여 유지되었을 뿐 아니라 위기를 과장했거나 거짓으로 조작하였다. 우선 유신체제를 정당화한 안보위기론은 크게 과장되었다. 1967,8년도에 북한의 대남 도발이 격화되기는 했지만 1969년 이후에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유신 직전인 1970,71 년 들어선 이후에는 오히려 적대행위가 감소하였다. 북한은 일본 유럽 국가 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미국과의 접근도 모색하였다. 게다가 71년들어 북한은 군사비를 삭감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즉 71년 직후 닉슨 독트린과 데탕트가 남북한의 적대를 완화시킬 수 있는 국제적인 조건을 조성하였을 지언성 안보위기를 가중시켰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1972년 시점에서 ‘안보위기’가 있었다고 해도 이는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박정권 자신이 규정한 매우 주관적인 것이었다. 객관적 위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북한의 가시적 도발이나 위협에 의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미군철수로 인해 미국의 전폭 지원과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정치적 지배를 유지해온 남한 지배세력의 위기였다. 따라서 자신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라고 말한 것은 과장 혹은 조작된 것이었다.
박 정권은 10월 유신 직전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7.4 공동성명은 남북화해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냉전 하의 각종 적대적 법령의 개폐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이은 10.17 비상사태 선언은 비상계엄, 헌법개정, 대통령 권한 강화 등 오히려 냉전을 명분으로 하여 1인 체제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남북대화는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최면술’이었다는 지적도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유신체제는 긴장해소 평화공존이라는 국제정치의 흐름과도 배치되는 것이었고, 몇 달 전에 발표한 7.4 공동성명의 정신이나 방향과도 상반되는 것이었다. 유신 체제는 7.4 공동성명에서 제기한 민족과 통일을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통일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방안도 내놓지 않았던 기존의 입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박정희 자신이 10.17 비상조치의 배경으로 강조하고 있는 남북대화의 적극적인 전개 필요성도 사실상 ‘거짓’이었다. 그는 유신체제가 7.4 남북 공동성명에 기초한 평화통일의 필요성 때문에 성립되었고 그것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박정권을 진정으로 평화통일을 추구한 적이 없었다.
박정희는 정당정치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통치와 정치를 분리하고 통치는 대통령 자신만이 담당하는 성역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특히 물밑에서는 북한 최고 권력자들과 비밀 교섭을 하고 남북 공동선언을 서두르면서도 남한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위협을 들먹인 것은 국민 기만이었다. 김형욱은 북한과의 비밀접촉이 독재체제 강화를 위한 계략이지 분단된 민족을 통합하는 민족사적 대경륜의 서막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번에 간파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박정희와 이후락 등 권력실세가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이를 급진전시키는 방향으로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7.4 남북 공동선언은 데탕트 분위기에 대한 남북 지배세력의 위기의식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적대적 불신이 있었지만 급기야 이러한 공동선언을 발표하게 된 것은 미 중 회의에서 그들에게 의존하던 한국이나 북한의 입장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박정권은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통일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를 겉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파시즘적 정치체제의 수립의 명분으로 삼았다. 같은 시점 북한역시 김일성 1인 체제를 공고화하는 헌법을 발표하는 등 남한과 역시 동일한 과정을 겪었다. 특히 박정희는 유신헌법 찬단 투표를 앞두고도 국민에 대해 협박성 발언을 했는데,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라고 하면서 개헌안이 통과된다면 마치 북진통일을 하거나 계엄보다 더 비상조치를 하겠다는 식의 위협을 가하였다. 국민들에게 위협을 가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통일에 대해 아무런 진정성도 구체적인 방안이나 정책도 갖지 않는 상태에서, 개헌안 통과를 통일과 연관시키는 것 자체가 국민 기만이었다.
1974년 이후에는 박정권은 월남 패망이나 육영수 여사 서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국내외적인 사건을 게기로 반공 억압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는데 이는 박정희가 7.4 공동성명은 물론 유신체제의 수립 필요성에서 역설한 민족 혹은 통일의 이상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초기 냉전시절의 탄압을 훨씬 강화시키는 조치들이었다.
또한 박 정권은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 사범으로 몰아서 처벌하였으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을 이적시하였다. 그리고 북한에 내왕하여 간첩 혐의를 받던 사람들을 서둘러 처형하기도 했다, 이 역시 겉으로 표방한 남북 공동성명의 정신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행동들이었으며, 남북 교류, 통일은 오직 통치자가 관여할 사안이며, 국내 정치 혹은 국민 일반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행동들이었다.
박정희의 ‘통일’ 명분이 허구인 것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조직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통일’ 주체 국민회의는 실제는 ‘통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것은 유신이 통일을 대비한다는 것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인데, 설립된 후 8년 동안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단 한 건의 의미 있는 통일정책도 수립된 적도 없고 통일논의도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두 차례 단일후보로 추천된 박정희 부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 그들의 모든 역할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정해진 대통령을 뽑는 형식적인 선거인단에 불과했다. 이러한 들러리 조직, 통일과 무관한 조직을 만들어 마치 그것이 국민적 대표기구인 것처럼 선전한 것도 기만적인 것이었고, 국민들이 그 속을 훤하게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당시 계엄 찬반투표를 비롯한 모든 선거도 청와대의 기획과 공안기관의 철저한 감시와 위협 속에서 진행되었으면서도 마치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인 것처럼 포장한 것도 사실상 기만적인 것이었다.
한편 ‘긴급조치’ 선포 이유도 거짓이었다. “천재, 지변,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 국가의 안전보장, 공공의 안녕질서의 위협 등 내정 외교 등 국내외 정세의 위기에 대처한다”는 긴급조치는, 실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통계를 통해 보면 오직 재정조치 한건을 제외하면 모두가 “공공의 안녕질서” 즉 국내 반정부 저항운동을 막기 위한 것임이 드러났다. 앞에 열거한 모든 위기는 사실상 내부 반대세력의 도전이라는 한 가지를 말하기 위해 그냥 덧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국가비상사태’, ‘유신헌법제정’, 긴급조치의 명분으로 내건 통일의 필요라는 것은 완전히 거짓 명분에 불과했다는 점이 명백하다.
인혁당 재건위 관계를 전격 처형한 것은 ‘법 아닌 법’(긴급조치)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 가장 심각하게 법을 위반한 것은 박정권 자신이었다. 1972년 남북 정상회담의 법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았고, 7.4 남북공동성명도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문서였다. 왜냐하면 이후락의 방북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며, 따라서 남북공동성명 역시 공식 문서가 볼 수 없었다. 북한과는 공식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와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두 국가가 ‘민족대단결’을 추구한다는 것도 사실상 기존 한국의 실정법, 국가 공식입장과 배치된 것이었다. 물론 박정권은 통치행위라는 명분으로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법의 지배라는 원칙이 통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전제군주시절의 논리를 정당화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기존의 반공주의는 사실상 허구였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유신이후 박정권이 그렇게 강조한 ‘국가’역시 메이지 헌법의 고쿠타이(國體)를 연상시키는 군국주의 냄새가 많이 나는 개념이지만, 그것의 진정성 역시 의심스럽다. 박정희는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국가를 하나로 알고 국력배양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1972.12.27 제8대 대통령 취임사) “국가없는 민족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1975.1.12 연두기자회견) “ 무엇보다도 국민총화를 굳게 다져가야”(1975.2.13) “ 국가가 있어야 학교가 있고 학문이 있다”( 1977.1.12 연두교서). “국가의 생존이 개인의 자유에 우선한다” 이것은 “국가에 의해 모든 것을, 국가에 반역하는 것은 아무것도, 국가 밖에는 아무 것도”를 위친 뭇솔리니의 외침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국가주의의 논리는 같은 시기 7.4 공동성명에서 나온 ‘ 민족대단결’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분단 하 한국이 민족대단결을 추구하려면 국가주의를 완화하거나 해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7.4 공동성명의 ‘민족대단결’이 북한의 요구를 양보하여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라면, 거꾸로 북한의 주장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정도로 남한 정부는 자신의 국가철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어떤 경우든지 여기서 말하는 국가지상주의는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결국 10월 유신 이후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해 일방적으로 충성하도록 요구한 것은 박정권의 주관적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세력에 대한 충성 요구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가 말하는 국가는 곧 유신정권이었고, 국가위기는 권력의 이익, 즉 자신과 정권의 위기의식을 달리 표현한 것이었다. 여기서 국가는 사실상 ‘사적 이해’를 전도시킨 것이었다. 박정희의 국가 강박증은 사실상 지켜야할 민족과 국가의 정신과 내용의 결여, 국가다움의 결여를 거꾸로 표현한 것이다. 박정희는 천황의 직속부대인 일본군에 들어가 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남로당 당원이었다. 그는 한국의 ‘국민국가’를 부인하는 최전선에 섰던 부인할 수 없는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민족,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적이 없고, 오직 시세에 편승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결국 그에게 국가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만 보장해준다면 그것이 일본 천황제 국가이건 독립된 남북한 국가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실제 국가나 민족에 대한 충성이 설득이 아닌 폭력의 방법으로 요구될 때, 실제로 국가나 민족은 텅 빈 것이 된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주장하였듯이 천황제의 초국가는 ‘텅빈 국가’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강조하는 애국주의는 대체로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의 하위에 위치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국가주의는 보편적 가치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 수량적 성장 지표, 후진국 콤플렉스, 북한과의 체제경쟁, 강박증 등이 그 국가주의의 실제 내용이다. 박정희 개인의 이력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4. 병영적 규율과 ‘절멸’ 의 담론

유신체제 하의 중화학 공업 실무책임자는 당시 한국의 국가 체제는 주식회사 체제를 넘어서 대통령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대와 같은 체제였다고 말한다. 당시 한국은 거대한 군대와 같은 조직이었다. 긴급조치에 의해 저항하는 국민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인 ‘명령’이 법적 지위를 갖고서 최고의 규율로 존재했다. 한국은 북한과의 대결을 일상 과제로 하는 군대와 같았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나 경찰이 투쟁한 전투의 대상은 북한이 아니라 바로 한국 내의 정치적 반대세력이었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강조는 바로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무시, 일인의 독단적 의사결정의 정당화의 다른 표현이다. 가장 효율적인 정치는 논의가 없이 최고 권력자가 결정하여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능률, 효율 등의 용어를 매주 빈번하게 구사하였다.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존재, 능률적인 존재는 살아남아야 하고 쓸모없는 존재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역시 나치 이전 독일에서 빈번했던 사고방식이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위해 문화까지도 총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 우리나라의 정치도 그 목표와 방향이 생산 증가와 일치하여야 한다” 생산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억제를 의미한다.
1974년에 발표된 긴급조치 4호 위반자에 대해서는 계엄령에 의거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을 하도록 했다. 이것은 입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상태에서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민간인도 모두 군인처럼 취급될 수 있다는 말이고, 국가가 군대조직처럼 되었으니 민간인은 오직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 국민들이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한 것이다. 실제로 형량의 구형도 제주 4.3 당시와 한국전쟁기의 군사재판과 동일했다. “첫줄은 사형, 둘째 줄은 무기” 이런 식으로 인혁당 관련자들을 재판하였다.
거듭되는 간첩사건 발표, 온 사회에 내건 간첩신고 슬로건은 국민들을 위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70년대 온 동네에 붙여놓았던 포스터 “간첩은 표식없다” 이 구호는 선량한 사람도 위장간첩일 수 있다는 판단, 간첩은 어느 곳에서 모든 곳에서 다 있는 존재가 된다. 소극적으로 사회적 일탈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탈자를 지정하고 처벌하여 사회적 경계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통해 집단의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집단 재현하는 것 정치적으로 폐쇄된 국가는 더 쉽게 마녀사냥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은 간첩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복종을 한다. 즉 간첩조작의 실제 효과는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복종 유도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는 누구나 상호 감독을 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어 진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
병영체제가 극단화되면 반대세력 혹은 사회적으로 ‘부수적인 존재’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면 신체적으로 절멸시키는 체제다. 절멸체제의 내용은 절멸의 실천, 그리고 절멸되어야할 인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일시하는 것(ideological identification) 이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침략자들에게는 원주민 저항자이고 독일 파시즘에게는 사회적 소수자나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문제를 전면적인 무한대의 힘을 사용해서 해결하는 것이다. 절멸대상은 위생학적으로 제거되어야할 존재다.
나치 이전과 나치 초기의 독일, 그리고 천황제 군국주의 하의 일본의 공통점은 사회의 의학화, 즉 위생학적 비유를 사회에 적용한 점이었다. 창녀, 장애인, 알콜 중독자, 동성애자 등 일탈자들은 사회적 건강을 더럽히는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들은 소독되어야할 존재로 간주되었다. 사회를 몸으로 비유한 다음 이들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병균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래서 이들이 독일에서 먼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 역시 인종주의적 위생학의 관점에서 소독되어야할 병균적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그것이 대량학살을 가져오게 된 논리였다. 실제 독일은 물을 끓여 먹거나 침실에 병균 오염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소득을 실시하는 등 온 사회 영역에서 청결 캠페인을 벌렸는데, 그것은 바로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그대로 실천되었다. 생활상의 위생학은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1983년 이른바 ‘더러운 전쟁’ 시기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인사들이 낳은 어린이 납치사건도 이러한 절멸적 담론과 실천의 결과였다. 즉 좌익의 아이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그들로부터 분리시키자는 것이 당시 독재정권의 어린이 납치의 배경이었다.
사회의 오염을 막자는 논리가 독일에서 인종주의로 표현되었다면, 반공주의역시 이러한 위생학, 의학적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처칠은 그러한 위생학적 비유를 한 원조격인 존재고, 미국의 로스토우(Rostow)도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박정희는 공산주의를 바로 위생학적 비유를 사용해서 설명하였다. 즉 공산주의는 병균과 같은 존재이므로 소독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병균으로 간주되면 그것이 특정 인종이든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이든 사회에서 제거되어야할 존재로 간주되고, 그들에 대한 동정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즉 유신 체제하의 완전 격리, 혹은 절멸의 대상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비전향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전향공작 사회안전법 제정을 통한 영구 구금조치가 대표적이었다.
1975년 유신시절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새로운 형태의 폭력화된 법의 대표적인 예이다. 유신헌법 상의 제10조 1항(모든 국민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보안처분을 당하지 아니한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사회안전법은 국가보안법 반공법을 위반하여 처벌받은 사상범에게 전향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재범할 위험성이 없을 때까지 무한정으로 수감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보안처분(보호관찰, 주거제한, 보안감호)가 존재한다. 이중 보안감호는 사실상의 형벌이었다. ‘절대적 부정기형’, 얼마든지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1936년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과 1941년 치안유지법 3장의 예방구금 제도를 고스란히 승계하였다. 보안처분 사법철차를 거치지 않고 심의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법무부 장관이 결정하는데 2년 단위로 무기한 가능한 기간 갱신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실정법을 어기지도 않은 사람을 평생 감옥에 넣어 둘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보안처분의 면제요건은 반공정신의 확립, 즉 반공주의자가 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서(시행령 제11조 제1항 1호) 충족된다. 이것은 과거 이승만 시절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우와 같다. 과거에는 전쟁이 발발해서 이들을 모두 학살을 했지만 박정권은 이들을 평생 감옥에 가두어두려 하였고, 석방조건은 반공주의자로 확실한 전향을 했다는 증거다. 즉 박정원은 사람의 마음까지 통제하여 그의 완전한 전향을 확인받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사상범에 대해서 어떤 방법을 두더라도 추가적 감시 통제장치를 두겠다는 것이다. 사회안전법 제정과정에서 보면 반국가분자에 대한 단호한 대책이 요구된다는 논의가 있었다.
사회안전법 제정과 보안처분을 통해 반국가 인사를 영원히 구금하려는 취지에 대해 그들 스스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였다. 사실상의 형벌로서의 보안처분은 일제의 유산이자 동시에 나치시대의 유산이다. 특별예방(개선, 교육)과 이를 통한 사상범의 재사회화란 사실상 파시즘의 체제유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그것은 유신체제가 이미 감옥에 갖혀 있거나 출옥하더라도 어떤 사회활동도 하기 어려운 장기수, 사상범들을 기존의 형벌로 다스릴 수 없어서 보안처분까지 이중 삼중으로 해서 이들을 완전히 통제 하에 두거나 폭력으로 전향을 강제할 정도로 허약한 체제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박정희 등 집권세력이 가진 ‘두려움’, 내부의 ‘적’의 힘에 대한 과대평가는 바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들에 대한 즉각 처형과 이러한 보안처분 조치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병영질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절멸’ 시키려는 체제는 정치적 표현 의지를 가진 지식인, 학생, 사상범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학교 교사들, 일반 국민들도 일단 약간이라도 저항의 의지를 보이는 순간 절멸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당시의 보통 국민들도 경찰이나 관청 등 권력기관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언제나 전전 긍긍하였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인간보다는 상부의 지시가 우선시되고,,“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도처에 나타났고, 재개발을 위한 철저지역에서 “철거민에 대한 가혹한 인권유린은 공산당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는가하면, “전체사회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질되는 현실”이 나타났다.
이 시기를 살았던 50대 이상의 한국의 농민,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30년대 말 40년대 초 일제 말 전시동원 파시즘 체제에서 겪었던 것을 두 번 겪는 셈이었다. 일제 말기와 달리 70년대에는 월남 파병, 중화학 공업화, 중동 붐의 경제적 성과가 어느 정도 가시적이었고 따라서 노동자와 대졸 출신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분명히 그 과실이 공유되었지만 다수의 노동자나 농민은 여전히 그러한 혜택 밖에 존재하였다. 유신체제는 또한 관의 절대권력 체제였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힘이 있는 집단의 부패와 부정, 편법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이 노예적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극소수의 재야인사나 학생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채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일제 말기에 그러했듯이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6. 유신체제의 부역자들과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

독일의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1946)에 의하면 나치즘에 협력한 죄로 처벌당한 사람은 주요책임자, 적극지지자, 나치 수혜자, 단순가담자, 무혐의자로 구분되는데, 이 법의 기본 강령을 보면 “나치즘의 폭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거나 혹은 정의와 인류애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나 그 상황을 이용하여 자기이익을 챙김으로써 나치즘과 군국주의에 책임있는 사람들”이 처벌의 대상이었다. 주로 나치즘 희생자나 반대자에게 정치적 이유로 범행을 저지른 자들, 주로 나치당이나 산하단체에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기준을 유신체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유신체제 하의 간첩조작, 인권탄압, 폭력행사, 반대세력에 대한 고문과 중형 구형에 가담한 사람들, 그것을 통해 개인적 이득을 챙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신체제 하의 최고 권력기관은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였으므로 간첩조작, 학원탄압, 노동탄압 등을 기획하거나 집행한 청와대와 중정의 책임자 급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각료들, 여당 의원들, 검찰과 사법부, 경찰의 지휘부에 있었던 사람들, 유신정우회에 들어간 지식인 출신 국회의원들, 유신을 찬양한 교수들, 반공단체 간부들 등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유신체제 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동시에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인권차원에서 한국사회에 친일청산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실상 유신체제 청산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선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보.배상 작업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역시 긴급조치 등 법의 무효화를 통해 일괄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당시 유신협력자에 대한 단죄는 보복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서는 안되지만, 당시 정권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적극 지지하거나 집행한 사람, 그것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규명되어야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유신체제 하에서 자신들이 한 행동이 애국이라고 강변한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해 모든 인간은 죄를 짓고 산다. 내 경우엔 시대가 나를 죄인, 역적으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의 잣대는 분명히 다르다. 유신정권 시절의 ‘애국’이 지금은 천인공노할 죄가 된 걸 보면 모르겠나.

아마 이것은 나치의 부역자들도 동일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판사이름이 적시된 긴급조치 판결문 요약문을 공개하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 대법원은 “대법원은 실정에 따른 판결을 현재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여론몰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며 “현직 법관들의 경우 당시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배석판사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전했고, 조선, 중앙, 동아는 긴급조치의 폭압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인민재판’이라고 험악한 담론으로 반박하였다. 애초부터 명단공개가 아니라 판결문 정리 보고서에 불과하고 판사명단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적시한 것에 불과한데 그것을 구태여 ‘공개’라고 규정했던 이들 언론은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수 있겠는”가 식으로 나갔다. 독재에 부역하였다가 비판받게 된 것을 마치 좌익에 수난당하는 우익 애국자, 의인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긴급조치 사건을 맡았던 판사들은 대부분 하필 그 때 그 직책에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판결문에 이름을 남기에 되었을 것이다. 과거사위의 이번 결정은 판사들더러 법전을 보지 말고 나중에 욕먹지 않을 판결만 궁리하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련자 명단공개가 긴급조치 문제를 정리하는 길이라면 공개 대상은 긴급조치 위반 사범을 잡아들였던 정보기관과 검찰, 경찰, 긴급조치 발동 논의에 참여했을 청와대 참모와 국무위원들 까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결국엔 유신헌법 국민투표에서 90% 넘게 찬성해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줬던 국민의 책임까지 물어야 될 판이다.”

동아일보 등 언론사, 사법부, 대학은 부분적으로는 유신체제의 피해자라 볼 수 있다. 중정의 압력을 받아 달리 저항을 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부의 압력을 그대로 받아들여 가해자의 일원이 된 측면도 있다. 기자들에 대한 해고조치, 학생들 제적, 제명조치, 긴급조치 유죄 판결은 모두 이들 기관이 내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관이 자신이 피해자라고만 강조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유신체제의 부역자들은 ‘우연하게’ 그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판사들 중에서도 다소 무리하게 형을 구형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엄연히 구별되었다. 위의 [조선일보] 사설은 자신의 법 소신에 비추어 절대로 처벌되어서는 안 될 청년들에게 중형을 구형했던 현실에 거부감을 느끼며 주저했던 판사들을 마치 욕먹지 않을 궁리를 하는 사람으로 몰아 부쳤는가 하면, 오히려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출세를 위해 무리한 판결을 한 사람을 칭찬하고. 이들이 법전에 나와 있는 대로 판결할 수 밖에 없다고 실정법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사실상 중정을 비롯한 모든 정부기관의 선거공작 하에서 자발적 의사표현을 포기하고 공포 속에서 유신헌법 지지를 했던 국민들을 마치 자발적 찬성을 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이러한 협박과 공포 속의 선거를 마치 자유로운 찬반이 가능했던 것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영구 변호사(74·당시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부장판사)는 76년 수업 중 정권을 비방한 혐의(긴급조치 9호 및 반공법 위반)로 기소된 한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또 양영태 변호사(67·당시 광주고법 판사)는 7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비방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한 농민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그해 말 지방으로 ‘좌천성 발령’이 났고 한 달 만에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양 변호사도 그해 말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발령이 나지 않았고, 고등법원에 2년 정도 더 있어야 했다. 이러한 불이익을 당한 사례를 통해 보았을 때 중정과 청와대의 압력으로부터 사법부가 자유롭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소신대로 판결을 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처벌을 당할 사안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법관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 정당하고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결을 내린 사람들 중 양승태가 대법관으로, 김황식씨가 총리로 있다는 사실은 오늘 한국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 정의의 수준을 가늠케 해 준다. 유신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적어도 이러한 인물들이 대법원장이나 총리의 자리로 올라갈 수는 없고, 설사 능력이 탁월하여 추천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무리한 판결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사죄 정도를 하고 넘어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온 국민을 포섭할 수는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협박을 통한 복종을 유도함과 동시에 할 수 있는 한 영향력 있는 정치적 반대자들은 계속 포섭하였다.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그 대표적인 포섭대상이었다. 야당지의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던 소장 언론인, 동아일보의 유혁인, 최영철, 이동욱, 한국일보의 임방현, 임홍빈, 조선일보의 이종식, 동양통신의 김성진 등이 대표적이었고,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신상초, 서울대 법대의 갈봉근, 한태연 등이 대표적이었다.
나치의 부역자였지만 뛰어난 법학자였던 칼 슈미츠는 독일이 나치 하에서 벗어난 지 수십년을 더 살았지만, 대학에서는 추방당했다. 학자로서 그의 기여는 무시할 수 없지만 공적인 지위에서 역할은 할 수 없었다. 이들 유신의 협력자들이 왜 비판적 언론인에서 적극적인 유신 부역자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향후에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나치당의 비밀경찰이나 SS 요원들, 제국주의 일본의 악명 높은 정치경찰 특고 요원, 731부대 요원 등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였던 것처럼 유신체제 하의 중정간부, 학생들이나 반정부 인사를 기소한 검사, 긴급조치 재판을 담당한 판사, 어용 지식인들 모두 당시로서는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권력에 저항할 용기가 없는, 경쟁에서 승리한 우수한 인재들은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독재정권 혹은 파시즘에 적극 협력할 가능성이 높다. 심한 경쟁을 통과했을수록 자신의 기득권을 더욱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그것을 통해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어렵사리 얻은 지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속한 정치공동체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일을 하고도 아무런 도덕적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과거 파시즘 부역자, 식민지 하 부일협력자들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말’로 먹고사는 존재들이라, 온갖 해괴한 논리를 끌어다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이들이 이후 사회 각 영역에 미친 피해역시 적지 않다.

7. 결론 : 현재진행형으로서 유신체제

유신체제의 모든 것은 일제 하 전시동원체제를 그대로 모방, 연장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국가, 민족, 국민의 이름으로 시행되었고, 여기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황이라는 상징대신에 대통령이라는 법 위의 최고 권력자가 있었고, 명령이 법을 대신하였으며, 공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이 법의 이름으로 행사되었다. 국민들에 대한 사상적 통일성 강요, ‘국민운동’의 이름을 빈 위로부터의 동원, 말단까지 연결된 주민 세포조직을 통한 주민 상호감시, 상명하복의 철저한 관료체제, 공격적인 업적주의와 극단적인 위계질서, 학교의 군사교련과 병영화, 비뚤어진 도덕주의, 즉 근검, 절약, 청결, 위생, 질서 등 가족중심, 개인적 가치의 강조 등이 그것이다. 일본에서 사라진 전시 병영체제는 30년 후 한반도에서는 잠복되어 있다가 다시 부활하였다. 일제 말의 전쟁체제가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하다가 급기야 피폐해졌듯이 유신체제도 1978년 이후에는 경제적으로도 현저하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유신체제 하 인혁당 재건위 사건처럼 국가를 뒤흔들만한 조작사건은 시간이 지난다음 모두 그 진실이 밝혀지게 되고, 그러한 조작의 당사자는 처벌도 지탄도 받지 않지만, 간첩으로 지목된 사람 중 일부는 이미 고문, 사형 등을 통해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상태가 된다. 공안기관은 간첩 조작을 통해 충분한 정치적 목적을 거두고 그것에 부역한 사람들은 권력의 힘을 통해 경제적 이득까지 누리게 되었으나 피해자들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온 사회는 바로 이러한 조작으로 인해 큰 상처를 안게 된다. 그래서 간첩 조작은 사회를 파괴시킨다. 공권력에 대한 불신, 이웃에 대한 불신이라는 상처가 그것이다.
정치 불신, 사법 불신은 유신체제가 이후 오늘까지 한국사회에 남긴 가장 부정적 유산이다. 법정에서 피의자가 재판부에게 훈계를 하고, 방청객들이 “이제 재판이냐 개판이지”라고 야유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의 만연한 ‘법정 모독’이야 말로 사법부 권위가 가장 땅에 떨어진 현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시절 판사들은 검사들이 써준 기소장을 자구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판결문으로 옮겼다.
국가보안법이 그러하지만, 극단적 국가주의, 공포의 조성은 인간의 내면성을 유린한다. 즉 온 국민은 자신이 사상 검증의 대상으로 삼고, ‘위험한 국민’으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생업에만 충실한 착한 국민으로 보이기 위해 몸조심을 하게 된다. 유신체제 하의 이것은 시민사회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조용환 변호사 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은 천안함 건에 대해 ‘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상을 문제 삼았고, 결국 대법관 임용을 거부하였다. 즉 개인의 사상을 법적 규제의 대상으로 삼는 사상통제는 일제의 총독부 지배체제의 유산이며, 유산체제에서 극성을 부렸다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것은 국가가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통제의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다. 즉 유신 체제를 겪었던 현재의 50대 이상의 사람들, 일제 말까지 겪은 80대 이상의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부당한 일을 겪어도 권리주장을 하는 주체로 나서기를 꺼린다.
유신시절의 관료기구의 상명하복의 문화는 이명박 정부에서 부활하였다. 경찰의 촛불시위 진압, 용산참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명박의 정당정치 불신, 경제 효율성 중시 사고는 박정희의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국가안보 논리가 경제논리로만 대체된 것이다. 총리실 불법사찰, 공안기관의 불법 사찰과 활동, G20 쥐그림 사건 등 모든 정치적 반대를 공안적 시각으로 보는 이 정부의 시선 역시 유신적 사고가 연장된 것이다. 그 근본은 두려움이다. 비록 투표를 통해 집권을 했다고 하더라도, 정권의 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된 경우, 극히 미미한 반대 의사표현도 반체제 세력으로 확대되어 보인다. 약점과 콤플렉스는 학살과 인권침해의 기반이 된다. 박정희의 국가주의, 이명박의 8.15 건국절 기념 소동, 촛불진압, 용산 참사 등은 모두 이 정권이 가진 공포심과 강박증에 기초한 과잉 대응이었다.
유신체제의 미 청산은 오늘의 검찰의 정치화, 언론의 무책임성을 가져온 한 원인이 된다. 미철리히 부부의 “애도하지 않는 독일인”에는 죄의식, 부끄러움, 공포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히틀러 시대의 청산에 대해 애도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자신과 히틀러를 통일시하고 저항하지 않고 참여했던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못함으로써 나치시대의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반대의 상황, 그 시대를 지배했던 그 움직임과 방향, 형태를 결정했던 지성과 도덕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극복되어야만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처리되고 해결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애도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사회가 무엇을 버려야하는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것은 사회가 과거의 극복을 통해 집단적으로 지혜를 갖게 되는 상황, 도덕심을 회복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오늘 유신시절에 청장년이었던 50대 이상의 한국인들이 유신체제 하의 폭력이나 인권침해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察其所安( 논어, 선을 행하더라도 즐거워하지 않으면 그것은 기만이다)
-국가, 민족, 통일, 경제성장, 그 아무리 높은 가치를 내걸었어도 그것이 진정성에 기초하지 않았고 즐겁게 추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강박증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기만이다.
- 폭력을 동원한 국가주의, 애국심 고취, 그것은 허구다.

2011년 10월 13일 목요일

어제 박원순- 나경원 토론을 보고

박변이 후보 토론에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많아 어제는 졸리는 눈을 비비고
대략 다 보았다. 그 전보다는 좀 좋아진 것 같기는 하나 아쉬운 점이 여러 곳에서 보였다.
개인적인 토론자질의 측면도 있지만 참모진의 준비결여도 드러났다.

시민운동을 해온 품성 좋은 사람이니 정치권에서 약간 닳아빠진, 그리고 눈 똑바로 뜨면서 사사건건 말을 끊는 나경원과 맞대응하기에는 본인의 성격과 이력이 허락하지 않은 점도 있을 것이다.

서울대 사회계열을 법대로 바꾼 것을 도덕성 운운하는 나경원의 발언에 대해서는 입닥치라는 식으로 강하게 나섰어야 하는데 너무 방어적으로 나갔다.

통계를 적절할 때 사용해야 하는데, 그냥 열거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정권심판 프레임을 강조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나경원은 자신을 한나라당과 분리시키려고 기를 썼는데
이를 더 공략했어야 했다. 나경원은 지역구 의원이고, 지역구에서 그가 뭣을 했는지를 부각시키면 갈등조정 문제, 서민문제, 복지문제 등을 집중 비판할 수 있었을덴데 그녀가 판사시절 조정 경력 등 엉뚱한 자랑으로 이 쟁점을 비켜 넘어가는 것을 방치했다. 갈등 조정은 민주당 다수인 시의원들과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을 좌지우지하는 토건세력들과 집없는 서민들, 대형 수퍼와 망해가는 자영업자들 문제인데 이 점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MBC가 설정한 순서를 약간 무시하기도 했어야 했다. 일자리 문제는 서울시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오히려 전국적인 문제고, 서울시는 주거와 복지가 핵심이다. 그런데 이 프레임에 말려서 별로 설득력없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눈에 거슬렸다. 이 경우 서울시 예산 중 토건예산 부분 축소하여 복지 등 서비스 예산 확충 등을 강조했어야 했을 것 같다. 강북의 대학과 연구 클러스터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살아온 것을 나경원과 대비시켜서 강점을 강조했어야 하는데, 그 점에서도 소극적이었다.
이것은 시민설득의 장이 아니라, 시민에게 자신이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부각시켜 감동을 주여아하고 정치투쟁의 현장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을 잠시 망각한 것 같다.

나경원이 소포트웨어니 하면서 거짓말하는 것을 강하게 몰아부치지 못하는 것이 영 아쉬웠다.
마지막 멘트 역시 좀 부족했다. 십판과 대안을 적절히 섞어야 하는데 심판의 측면만 과도하게 부각된 점도 있었다. 외국의 성공사례 등도 적절히 인용했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박변의 준비부족도 드러났다. 철학의 부족도 감지되었다. 서울시민, 특히 3,40대가 고통받고 있는 주거문제를 강하게 부각시키지 못했고, 서민들 중 구체적 대상 즉 계층별 세대별 문제들을 집중 부각시키지 못했다.

말을 잘하고, 논쟁에 승리한다고 점수를 많이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회의원 경력자인 나경원보다 시정을 잘 이끌 수 있다는 점을 좀더 부각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쩔 것인가? 박변의 한계인 점도 있지만
참모들 좀 분발해야겠다.

2011년 10월 7일 금요일

[세상 읽기] 불처벌 / 김동춘


2011년 10월 3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990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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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관·사법부·정치권·언론이
가해 쪽과 공생관계일 때
불처벌은 관행이 된다

영화 <도가니>로 온 나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관객들은 족벌 학교법인, 경찰과 검찰, 지역사회 등 힘있는 세력의 유착에 의해 아무런 방어능력 없는 장애 어린이들의 인권이 처참하게 유린되어도 가해자는 면죄부를 받게 된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치를 떨고 있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는 사실보다 과장된 점이 있고, 실제 당시에 그런 유착이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해자는 공소기각 처리되거나 ‘공소권 없음’으로 면죄부를 받았고 1심에서 실형을 받은 사람도 2심에서는 모두 집행유예 받은 반면, 오히려 사건을 고발한 교사는 파면이라는 보복적 처벌을 당한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지 아동 성폭력 사건도 아니며, 장애인 인권 문제만도 아니다. 관객들은 아무런 힘도 발언권도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당해도 결국 찍소리 못하고 살거나 항의하다가 결국 경찰의 물대포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이 비통한 현실에 분노하였으며, 족벌 비리사학과 같은 ‘동토의 왕국’은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세계로 버젓이 남아 같은 비리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경찰·검찰·법원 등 공공기관이 강자의 범죄에 대해서는 대체로 ‘불처벌’ 혹은 솜방망이 처벌의 결론을 내리는 영화의 장면이 실제 현실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가 세간의 여론을 뒤흔들자 정부도 전국 복지시설 실태조사를 한다고 난리법석이고, 국회도 특수학교에도 개방형 이사를 도입하자는 이른바 ‘도가니법’을 다시 끄집어내려 한다. 그러나 일시적 분노와 임기응변식 대응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정부에서 우리는 비리 혐의가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 무죄, 사면 복권되는 일을 여러 번 지켜보았고, 숱한 비리를 저질러서 쫓겨났던 사학 관계자들이 법원과 교육부의 합법적 결정에 의해 속속 복귀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

사회는 ‘주고받음’으로 유지된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에 따른 보답을 하지 않으면 사회관계가 단절되고, 서로는 잠재적 전쟁상태에 돌입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쪽이 명백한 피해를 입었는데 책임지거나 처벌받는 사람은 없고 피해자는 아무런 보·배상을 받지 못할 때, 관계는 깨질 뿐만 아니라 갈등이 폭발하여 사회는 실제적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광주 5·18 당시 최고 실세였던 허화평처럼 “5공화국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이라고 정당화하고, 당시 신군부의 핵심이자 이후 5공 시절 비자금 조성에도 가담한 안현태처럼 처벌을 당하기는커녕 죽어서도 국립묘지에 묻힌다면 우리는 그런 나라를 어떻게 봐야 할까?

<도가니>의 성폭력을 고문, 학살, 간첩조작, 군대 내 폭력, 부당해고 등으로 바꾸고, 그 사건의 피해자인 장애 어린이를 한국전쟁기 피학살자, 5·18 피해자, 군사정권하의 고문피해자, 군 의문사 관련자, 납북어부·재일동포 등 간첩조작 희생자, 철거현장 폭력 피해자, 부당해고 노동자로 바꾸면 어떨까? 과연 이것들이 모두 전혀 다른 문제일까? 폭력은 언제나 자기방어능력 없는 약자들이나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향해지고, 족벌 사학처럼 아무런 내부 감시세력이 없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수사기관·사법부·정치권·언론이 가해 쪽과 공생관계일 때, 불처벌은 관행이 된다.

지난 9월30일 광주 국감장에서 ‘도가니’ 사건을 고발했던 교사가 나와 울먹이면서 “아이들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한 말은 사실 우리 사법부와 국가가 해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