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8일 월요일

3.1 절에 생각하는 친일파

이용구 송병준 등 한일합병을 추진했던 일진회의 원래 명칭은 '진보회'였다. 이들이 추구했던 것은 청국과의 낡은 관계의 단절, 수구 보수세력과의 단절을 통해 신 문명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글로벌 스탠다드, 규제완화나 시장경제의 우위를 외치는 목소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일본은 신문명이었고 시대의 조류였다. 그들이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신문명, 약육강식의 논리는 결국 제국주의 침략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제국주의가 그들의 권력과 부를 뒷바침해주는 한 그들은 그 제국주의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만주 신경의 군관학교로 간 이유는 "칼을 차고 싶어서"였다. 즉 '압박의 설움'을 칼을 차는 지위를 얻음으로써 만회하려 한 것이다. 박정희라고해서 왜 일본인의 차별과 압제가 좋았겠는가? 단지 그는 정치 상황을 전면적으로 극복하려하기 보다는 그 상황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자신이 덜 차별을 받는 존재가 되거나 그들의 권력권에 들어감으로써 상황을 개인적으로 돌파하려 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친일파라는 말은 사실은 적절치 않다. 권력과 부를 누리고 싶어했던 사람들, 일본에 협력해서라도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모든 사람이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다. 일본인에게 협력해서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은 개나 돼지와 다름없는 일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경찰이나 군 장교가 된 것은 다르다. 그것은 압제의 첨병이 선 것이기에 양심을 가진 사람은 차마 하지 못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일제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독립투쟁을 한 사람들의 표준을 갖고서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라고 질타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들에게 민족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퍼붓기 보다는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일에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가 있었는가라고 묻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사지어도 치악의악식자 미족여의 (士志於道 恥惡衣惡食者 未足輿議 )

공자님 말씀이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도 거친 음식과 나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없다" 고 말했다.

즉, 겉으로는 거창한 이념을 내세우거나 세상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공인이었으면서도 실제로는 거친음식과 나쁜 옷을 견딜 수 없어했던 사람이기에 자신이 하는 일이 나라를 팔아먹도 동포를 고통에 빠트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을 제공해 주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 가장 악질적인 인간은 파시스트, 반인도적 범죄에 가담한 존재로서 처벌되었어야 하지만, 대다수는 그냥 공직에 등장하지 않도록 막고 생업이나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 맞다. 박정희의 경우도 그냥 군인으로 남았으면 훨씬 좋았을 인물이다. 그가 일국의 대통령이 되기에는 매우 적절치 않은 인물이었다. 보통의 관리나 군인은 그렇지 않아도 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는 적어도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거친 음식을 참을 수 있어야 하는 존재다.

한국에서 친일파 문제 거론은 이런 현재적 의미를 상실한채 도덕적 비판의 대상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과거의 친일파를 매도하기 보다는 오늘 이명박 정부 하에서 '맛난 음식과 좋은 옷'을 누리기 위해 다수 국민을 고통과 죽음에 빠트리는 일을 앞장서서 하고 있는 정치가와 관리들, 바로 그들을 문제삼아야 한다. 군사독재 하에서 그런 일을 하다가 지금도 잘 나가고 있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누구인지 밝히고 그들이 공직에 남아있지 못하로독 해야 한다.

2011년 2월 25일 금요일

고영복 교수 별세


나의 석사논문 지도교수이신 고영복 교수께서 별세하셨다.

말년에 간첩사건으로 고생을 하셨다. 전쟁기 의용군 징집, 60년대에 월북했다가 남하한 삼촌을 만난것이 간첩행위까지 되어 2년 동안 영어의 생활을 했다.

또 한 사람의 분단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그는 독특한 처세를 한 분이다. 유신시절이나 5공 시절에는 어용교수로까지 불려질 정도로 박정권, 전두환 정권에 깊이 협조했다. 새마을운동을 옹호하고 정당화해주는 글도 썼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정권협조가 운동권 학생들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서울대 사회학과의 운동권 학생들 치고 그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학생시절 학생운동으로 연루되어 투옥되거나 찍혓다가 지금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몇 사람도 그의 추천이 아니면 교수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용교수와 운동권학생 보호교수라는 이 양면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는 국내파 학자였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는 비주류였다.

1982년, 내가 5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타전공학생으로 사회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그는 이미 50대 중반의 상당한 원로(?) 교수였다. 내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4.19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려고 프로포절을 제출하니 학과에는 고영복 교수를 지도료수로 배정했다.

그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기초로 친절하게 지도를 해 주셨는데, 나를 상당히 힘들게 했다.

대체로 젊은 교수는 좀 깐깐한 편이고 나이가 든 분들은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것이 보통인데

그는 예상했던 것 보다는 상당히 까다로운 교수였다.

그래서 논문을 처음부터 완전히 고쳐쓰기를 3,4 번 한 것 같다. 요즘처럼 피씨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고지 수백매를 처음부터 새로 쓴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내 논문에 대해서도 그다시 후한 점수를 주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내 석사논문은 그다시 잘 된 논문이 아니다. 정치경제학과 알튀세르 이론을 한국에 적용하려고 시작했다가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주류 부르주와 사회학의 이론을 적용하는 잡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군복부와 학교교사 생활을 하다가 수년 후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그는 이미 정년을 내일 모레 앞 둔 최고 원로교수가 되어 있었고, 퇴임한 이후에는 사회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번역거리등 일거리를 주시기도 했다. 들은 소문에 의하면 강연료 원고료 등을 한푼도 쓰지 않고 평생모아 오프스텔을 장만해서 연구소를 만드셨다고도 한다.

나도 박사과정 시절 돈이 없이 고생하다가 그의 배려로 책을 집필하여 약간 도움을 받기도 했다.


출옥후 몇 사람의 제자들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고, 위원회있을 때 한 두 번 통화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인사를 드리려 가겠다고 해도 본인이 병중이므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거절하셨다.


많은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준 고영복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그의 사회학에 대한 평가도 시작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1년 2월 24일 목요일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의 세계사적 의미

리비아가 내전 상태다. 벵가지는 시위대에게 점령되었지만, 트리폴리는 카다피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무력은 카다피가 장악하고 있지만, 이미 그의 연설이나 진압의 명분은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그의 무력도 언제까지 지탱될 수 있을지 알수 없다. 군대에 대한 장악력의 상실은 카다피의 몰락을 의미할 것이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에, 민주화 이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서방은 제재의 수단이 거의 없다. 문제는 적나라한 폭력만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두고 봐야하겠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어디까지 번져나갈지 알 수 없다. 아마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순조롭게 이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부족 간 갈등과 학살 이 만연할 가능성도 있다. 적어도 향후 30년 간 이 지역은 갈등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민주화 도미노가 장차의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는 미국 헤게모니의 후퇴 혹은 몰락이다. 둘째는 석유의존 경제의 후퇴다. 세째는 제국주의의 종식, 그리고 국가라는 지배제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중동의 왕조체제와 전제주의는 미국와 유럽의 지지 속에서 가능했다. 미국와 유럽의 지지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다. 리비아는 그것에서 탈출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그들과 암묵적인 밀뭘관계에 있었다. 중동 석유자원 확보을 위해 미국과 영국은 이들 왕조와 전제주의를 옹호해왔다. 이제 그 명분이 사라졌다. 그래서 중동 북아프리카의 민주화는 탈냉전후에도 지속된 식민주의와 결별하는 것이고 진정한 자유법치국가의 수립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는 운동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발전단계는 이미 자유법치 국가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서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의 비동시성의 동시적 전개의 성격이 있다.

그래서 이 혁명은 미완의 탈식민혁명이자 동시에 자유법치국가의 완성, 그리고 그것의 극복이라는 이중적인 혁명이다. 이집트의 민주화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재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 이명박 정부가 그렇듯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독재와 폭력을 사용해서 추진해 온 것이다. 왕조체제 붕괴 운동은 21세기에도 지속되는 근대화 운동이자, 탈식민운동이지만, 동시에 21세기적 탈국가운동으로서의 의미도 가질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일련의 사태가 갖는 세계사적 의미는 80년대 남미의 민주화 보다 더 심대해 보인다.

2011년 2월 23일 수요일

리비아의 비극

지금 50전후의 사람들은 30여년 전에 한국에 상영되었던 '사막의 라이온'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리비아의 전설적인 독립영웅 오마 목타르의 일대기를 그린 매우 감동적인 영화였다. 카다피는 자신이 오마 목타르의 후예임을 자랑했고, 우리세대가 갖고 있던 리비아에 대한 이미지도 바로 외세를 추방하고 독립을 쟁취한 오마 목타르와 겹쳐 있었다.

나는 그의 혁명 교본 '그린 북'을 1982년에 번역한 적이 있는데, 그 책은 인류 최초의 직접민주주의가 리비아에서 실천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실제 리비아에 가보지 않아서 과연 리비아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가 실천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그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더구나 27살의 청년 대위가 거의 무혈 쿠데타에 성공해서 군인복장을 하고 사막의 천막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과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 이후 리비아는 나의 기억,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팬암기 폭파 사건 등을 통해 강경한 반미노선을 계속 걷고 있다는 정도의 이미지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연대나 반이스라엘 노선을 명확히 않는 것으로 보아 서방과 모종의 밀월관계에 있다는 의혹도 있었다( 그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하여튼 카다피 아들의 기자회견에 이어, 가다피 자신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거의 천여명의 시위대를 학살한 지도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내전의 발발'을 경고하는 그의 아들의 기자회견은 인민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마치 나라의 수호신인것처럼 말하는 것 같아 매우 오만방자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리비아는 이집트와 여러가지 점에서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카다피는 스스로 혁명가임을 자처하는 확신범이다. 여러 부족이 결집된 부족국가여서 그렇겠지만, 반정부 시위를 부족간 갈등으로 이해하고, 자신이 물러나면 부족 간의 내전이 발생해서 결국 국가가 공중분해된다고 협박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반미, 반외세 혁명의 순교자가 되겠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공권력이 국민들을 학살하고도 저항세력을 외세의 압잡이라고 역공을 하고 있다.

즉 가다피와 그의 자식들은 그들의 권력욕을 혁명의 대의로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으며, 실제로 자신이 국가의 수호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인근 튀니지나 이집트와 달리 리비아에서 공중폭격까지 동반한 진압작전( 실제로는 대량학살)이 발생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혁명의 대의로 포장된 국가권력은 더욱 무섭다. 모든 저항세력을 반혁명 분자로 몰아부치고 스스로의 입지를 계속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대의를 갖고서 출발했더라도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할 수 밖에 없다. 서구 자유민주주의도 많은 한계를 안고 있지만, 제3세계 민족사회주의 역시 실패한 모델임이 수 차례 입증되었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그 폭력을 언제나 인민들을 향해 행사할 수 있는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
인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권력만이 인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서울대 교수의 폭행 사건, 어떻게 볼까?

김인혜 서울대 교수의 학생 폭행, 자기 사적인 행사 참여 강요, 수업 부실, 학생 협박 건이 세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서울대에서는 직위해제를 한 다음 진상을 조사할 모양이다. 본인은 그러한 교육이 음대의 관행이었다고 변명을 하는 것 같다. 당사자인 김 교수의 알려진 행동과 변명들을 보면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준을 넘어섰다. 아마 그러한 세계에서만 살아온 사람이어서 그런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를 정도인 것 같다. 상당히 중증환자다.

이것이 다른 교수나 학생들 사이에서 계속되어온 수십년 이어져 온 관행인지는 알수는 없다. 적어도 10여년 정도 계속 했다고 하니 21세기 들어선 이후 이러한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 서울에서 계속 진행된 것은 분명한 일인 것 같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수 없이 많은 피해자들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이 사건은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고 지칭되는, 그 분야의 최고의 학생들이 모이는 서울대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문학이나 과학을 공부하지 않는 음대학생들이라고 해서 봉건적이고 도제적인 관습에 이렇게 적응해 왔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자식들이고, 누구보다 이러한 학교 문화를 못견뎌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참고 침묵하면서 살아왔다. 무엇이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의 영혼을 그렇게 병들게 만들었을까?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예외일까? 정도의 차이일까? 자세히 드러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대학사회에서 이러한 일은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체육대학의 선배 폭행사건, 음대 무용학과 등의 입학비리, 교수 제자 성희롱 사건 등 빙산의 일각처럼 나오는 사건들이 사실 이 사건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학사회는 아직 21세기에 진입하지 않았고, 상당수의 사학의 운영과 지배구조, 대학문화는 19세기 수준에 머불러 있다. 사학법 개정을 극력반대한 상당수 사학재단(( 그 상당수는 종교재단이다)이 그렇게 극력반대했는지를 알면된다. 사학은 근대사회 내의 봉건 왕국이다. 한때 비리사학에서 동토의 왕국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남한에도 섬처럼 존재한다.

이 사건은 음대, 음악전공자의 특성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학, 특히 재단과 학생 교수, 교수와 제자 간에 맺어지는 관계의 성격이 대단히 일방적인 권력관계. 즉 폭력을 용인하는 관계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음대 학생들은 그 교수의 눈 밖에 나면 자신의 출세와 밥벌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가 미치는 세력권 하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학생들이 이 사회에서 버티고 또 성공하기 위해서 기존의 음악계는 그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발적 노예화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이 이러한 부당한 권력행사가 폭력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학생들로서는 교수들에게 충성하는 것 외의 출구가 없는 셈이다. 일방적 권력관계는 폭력과 야만을 낳는다. 인재의 선발과 충원, 포상과 처벌이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저항한 사람을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는 어떤 사회에서도 아러한 일은 발생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젊은이가 과연 자유로운 영혼, 민주적 정신을 가진 교육자, 음악가, 훌융한 연주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사회에서 자라난 학생들이 우리사회를 혁신시킬 수 있는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청년이 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아마 서울대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대학에서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립 서울대의 명예와 자본심을 뭉갠 사건이자, 음악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의 위신을 형편없이 추락시킨 사건이다. 여전히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모두가 공범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들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
세계 일류대학을 지향하는 국립대법인 추진? 소가 웃을 일이다.

매우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서울대에서 음대, 예술대를 떼어내야 한다.
필자가 15년 전부터 주장해 왔지만, 서울대 학부를 없애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히 그렇다.
서울대의 사회적 권력이 커질수록, 서울대 교수의 학생들에 대한 권력이 커질수록, 사회적으로 서울대 학벌주의가 자라집고 있는한 폭력은 계속될 것이고 그 위세를 활용해서 이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침묵과 복종은 계속될 수 있다.

2011년 2월 20일 일요일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200여명 가량( Human Rights Watch에서는 84명)의 시위대가 보안경찰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타피의 40년 철권통치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바레인에서도 많은 시위대가 사망하고 부상을 당했다. 튀지지와 이집트에서 점화된 아랍권 민주화 운동은 이제 석유 생산국 리비아와 바레인으로 옯겨붙었고, 이란, 예멘 모로코 등에서도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 민주화 시위는 제2의 프랑스 혁명으로 불려질 정도로 그 의미가 심대하다. 보통선거와 삼권분립, 법의지배를 내용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아직 이들 지역에는 수립되지 않았고 시위대가 요구하는 것도 왕권 혹은 전제주의 정권의 철폐, 공안통치의 종식, 언론의 자유 등 근대 자유민주주의 혁명에서 나타났던 구호들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민주화는 80년대 남미와 아시아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 보다 세계사적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이란과 리비아는 또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이란은 1979년 친미적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는 반미혁명에 성곻하였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해 그 민주화가 대체되었으며, 리비아의 카다피 역시 쿠데타를 통해 미국, 영국의 식민주의 추방하고 석유자원을 국유화하는 등 반미적인 입장을 명백하게 했다. 이 두 나라는 반미혁명에 성공했지만, 민주주의 대신에 새로운 형태의 독재와 이슬람의 종교적 봉건주의가 자라잡았다.

그런데 이 두 나라를 제외한다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가 남미 민주화와 공통된 점은 구식민주의가 물러간 자리에 새롭게 들어온 신식민주의 즉 미국을 필두로 한 냉전 제국주의에 의해 민주화와 자유화가 심각하게 차단되었고, 왕조 혹은 장기독재 체제가 미국의 후원 하에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철저하게 자신의 국익에 기초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이란을 포기하기 위해 이 지역의 독재정권을 지지해왔다. 그래서 이란과 리비아의 만주화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집트, 바레인의 경우에 대해서는 그저 원론적인 입장 표명만 해 온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초점은 확실히 바레인이다. 바레인은 인구가 120만 밖에 안되는 소국이지만, 미국의 5함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란의 핵을 직접 맞대면하고 있는 중동지역 내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레인에서 이집트와 같이 왕조체제가 무너진다고 하면 그 결과는 이집트에 못지않을 정도로 심각할 것이다. 바레인이 무너지면 중동 최후의 보루, 미국의 최우방이자 가장 심각한 왕조 독재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가 흔들리게 된다. 이것은 미국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래서 미국은 바로 협상에 의한 점진적 민주화, 즉 이슬람 근본주의가 들어서지 않고 반미정권, 반 이스라엘 정권이 들어서지 않는 민주화를 기대하고 있다. 아니 단순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적극 개입하고 있다.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음은 북한이다"라고 즐겁게 감상하면서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라고 있는가? 아니면 적극적인 중동, 북아프리카 정책을 마련하고 있는가? 대미편중의 외교 노선 위에서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한국은 바레인이 흔들리면 미국과 같은 처지에서 더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석유가 인상은 불가피해 보이고 중동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미국이상으로 이번 사태로부터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적인 중동정책이 없이 오직 미국만 따라해온 한국의 외교노선은 심각한 시험대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의 도미노를 마땅히 반겨야하지만, 더욱 더 냉정하게 사태의 추이를 바라볼 필요가 있고 그것에 기초한 대안 마련에 치중해야 한다.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불꺼진 송도' 뉴스를 보고 - '국제', '글로벌'은 사기다

어제 저녁 TV 뉴스에서 '불꺼진 송도'의 실태를 보았다.
송도 오피스텔에 당첨되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라며 너도나도 몰려들던 일이 생각이 났다. 나야 돈이 없어서 투자할 생각도 한 적이 없고 있어도 하지 않았겠지만, 주변에서 그 곳에 청약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하니 이런 일이 발생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인천시와 언론에서 무슨 동북아 금융 허브니 국제도시니, 국제학교니 떠들고 여러 대학이 송도에 제2 캠퍼스를 만들어 영어로 강의하니 떠들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어제 뉴스를 보니 국제도시라고 자랑하던 송도에는 한국사람 몇 사람만이 왔다갔다 한다고 한다.

과연 부동산 침체가 없었으면 송도는 국제도시가 되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을 기획한 사람이나 그곳을 갖고서 돈 벌이한사람이나 모두 진정으로 국제적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들이다. 그들은 한국서 권력과 돈을 거머쥐고 잘나가는 것에 관심이 있지 한국이 진정으로 국제적인 시야와 감각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국제도시가 되려면 외국자본을 끌어들어와야 하는데 모슨 메리트로 그들을 끌어온단 말인가? 두바이처럼 완전 면세 노동조합 없는 경제 자유구역을 만들자는 이야기인가?

한국에서 국제니, 글로벌이니 떠드는 것은 거의 사기라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 글로벌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북한 문제를 풀어야 하고,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
한국에서 영어 우상숭배도 사실 국제용이 아니라 국내용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국제, 글로벌 자격증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실제로 외국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국내용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국제는 사실상 미국이다.

서울의 유수대학에서 글로벌 전형이니, 글로벌 경영이니 이름틀 붙여서 우수학생을 유치하려 한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에 각 대학에서 국제학부를 경쟁적으로 신설한 일을 알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그것은 거의 사기다. 그 학부에서 영어로 강의한다는 것 외에 무슨 국제적인 것이 있겠는가? 이집트에서 저런 큰일이 일어나도 아랍언어는 물론 문학과 역사, 정치와 시회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나라에서 무슨 국제를 운운하는가? 사기 대학과 그런 사기에 넘어가는 학부모들, 이것이 비록 허풍과 사기가 있더라도 일확천금할 수 있으면 좋은게 아이냐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얼빠진 한국인들의 모습니다.

나는 대학 초년 시절에 외국 물 먹고 영어잘하는 사람들이 외국의 좋은 것 민주적인 배워서 훨씬 더 민주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유신체제에 굴종하고 학생들에게 대단히 권위적인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외국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는 했지만, 그들이 하는 대화 내용은 외국사람들도 공유하는 일반적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등, 한국 문제를 어떻게 해결마면 좋냐는 등 사실 우리가 더 잘 아는 내용을 식민지 백성이 모국의 지배자에게 물어보듯이 하는 것을 또 한번 더욱 크게 실망했다.

진정으로 국제적인 조직이나 사람은 국제니 글로벌이니 떠들지 않고 그들이 겪어온 일을 열심히 배워서 국제적인 문제에 함께 동참할 능력을 가진 조직이나 사람이다.
국제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면세조치만 취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국제적인 감각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언어는 수단이고, 정신이나 감각, 지식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정신이나 감각은 반드시 외국에 갔다 온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만이라고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대학이 이 사기의 대열에 앞장서는 것이 참으로 서글프다. 오늘도 '국제어' 배워서 '국제적인 인물'이 아닌 국내에서 잘 나가는 인물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뛰는 한국인들이 애처롭다. 불행히도 국내에서 잘 나가는 자리는 아주 제한되어 있다. 진정으로 국제적인 인물을 만들어 국제사회에 기여해야할 이 시대적 과제와는 한 참 떨어져 있다.
이제 이 정신나간 국제, 글로벌 운운 그만 둘 때가 되었다. 대학이 정신차려야 한다.

2011년 2월 11일 금요일

이집트 - 1막 종료, 2막 시작

나세르의 이집트는 박정희 시절 우리 청년들에게도 본받을만한 하나의 사례였다.
신상초가 쓴 [나세르와 아랍혁명]은 당시 학생들의 필독서 중의 하나였다.
"어떻게 이집트는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민족민주 혁명에 성공했는가"가 우리의 관심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나세르가 죽고 사다트가 등장하면서 이집트는 우리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이집트는 중동의 미국 교두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최우방국인 이집트가 30년동원 무바라크의 철권통치 하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그것을 후세인 독재로부터 이라크를 해방시킨다는 그럴듯한 담론으로 포장하여도 우리는 더 심각한 독재국 이집트를 미국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제대로 된 중동전문가가 없다. 언어,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있어도 정치경제사회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언론 중에서 중동을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도 찾기 어렵다. 미국의 입만 처다보거나, 미국의 세계관으로 중동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의 중동인식은 한심한 수준이다. 그런데 튀지지에 이어 이집트가 우리를 깨어나게 했다.

드디어 무바라크가 사임했다.
18일의 투쟁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300여명의 희생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집트는 역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것은 아랍권에서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붕괴시킨 드문 사례가 되었다. 아랍은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다. 아직도 국왕이 통치하는 나라들이 여럿있을 뿐더러, 인권침해도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전통적인 이슬람 지배가 가장 약한 이집트에서 독재의 고리가 끊어졌다. 그 파장은 튀니지의 민주화보다 훨씬 클 것이다.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독재국가의 국왕들이 떨고 있을 것이다.
아니 가장 크게 떨고 있는 존재는 미국일 것이다.

이집트는 아직 긴급조치 하에 있다. 군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
상징적 독재자는 물러갔으나 그가 만든 악명높은 2007년 헌법과 계엄령은 살아있다. 군은 물리력을 가진 실질적인 최고의 권력체다. 그리고 수 많은 기득권 세력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다. 미국은 이집트에 반미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근본주의 세력이나 이슬람 형제단의 힘은 미약하다. 30년 철권통치가 유지되어오는 동안 저항세력은 거의 궤멸되었고, 노벨상 수상자인 엘바라데리 정도가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리의 60년 4.19 데모처럼 이승만이 물러가는 1막은 종료되었으나 진정한 민주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둘러싼 각축이 시작되는 2막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이다. 한국의 2막은 민주당의 혼란과 군부 쿠데타로 마무리되었다. 이집트의 2막은 어떻게 될까? 대안세력이 없는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군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7,80년대가 아니므로 군부가 전면에 등장하여 군부독재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가 직면한 심각한 불평등과 빈곤, 부패,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집단이 없는 상태이므로, 한국의 1960년 처럼 대중의 불만은 폭발할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선거로 특정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경우 군부가 온건한 민간지도자 배후에서 섭정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이집트는 향후 적어도 10년 동안 심각한 정치적 갈등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군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친미 지도자 육성을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선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이 파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어쨋든 이라크의 시민혁명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고, 이제 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이집트가 산유국은 아니지만, 사우디가 흔들린다면 이제 미국은 더욱 치명적인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당장 알제리, 예멘, 요르단 등의 향배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결국 미국에 기대어 중동 석유 자원 선을 대고 있는 한국은 어디로 가야한 것인가우리는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해야할 시점에 왔다.

2011년 2월 2일 수요일

'공짜'의 논리

복지 문제가 국가적 의제로 떠오르자 보수세력의 딴지걸기가 거세다.
그들은 '무상'을 '공짜'라고 부르면서 공격하고 있다.
"내 돈 건드리지 마", 증세 논쟁에 대한 그들의 답변이다.
기업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놓으니 돈도 없는 놈들이 '공짜'로 먹겠다고 덤벼든다는 논리다.

이 논리의 바닥에는 기업은 기업주의 소유라는 의식, 돈은 내가 번 것이라는 매우
비뚤어진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기업주의 노력만의 결실이 아니다. 이것은 상식이다. 국가, 국민, 사회가 없는데 어찌 기업이 있을 것인가? 국민의 세금에 바탕을 둔 국가의 각종 혜택이 없이 어찌 오늘의 한국 대기업이 있을 것인가? 과연 국민이 없이 삼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들은 세금을 규제라 생각한다. 그래서 MB는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보험료도 지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금은 기업의 이윤에 대해 국가와 국민이 기여한 것에 대한 당연한 부담이다.
사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그 부담이 사실 너무 미미한 나라에 속한다.
그들은 여차하면 기업 외국으로 빼돌린다고 협박한다. 그렇다면 말로 하지말고 실제로 빼가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들이 쉽게 떠날 수 있는지를 지켜보자. 다국적, 초국적 기업이라는 것은 허구다. 미국의 기업정책과 기업들을 보라. 그들은 사실 미국 국민의 세금으로 지탱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든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은 공짜가 아니다. 미래의 주역들이 이 사회에 대해 애착과 연대의식을 갖도록 해주는 미래의 투자다. 노인 복지는 공짜가 아니다. 열심히 일한 댓가로 노동능력이 없어지더라도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준다는 국가의 사인이다. 복지는 국민을 하나로 묶여주고, 경쟁보다는 연대를 통해 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자는 미래의 투자와 신뢰의 표시다.

무상으로 밥을 먹은 아이들은 국가에 대해 감사하고 국가를 위해 일하려 하지만, 자기 돈으로 밥먹은 아이들은 오직 부모에게만 감사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가족 구성원에게는 좋은 아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부도덕한 인간이 너무나 많다.
복지는 공동체성을 회복시켜주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해주는 사회교육이다.

이명박과 조중동이 퍼드리는 공짜 논리는 매우 비뚤어진 것이다.
오직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상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겠기만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지의 철학을 먼저 세우고 복지 각론에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