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0일 월요일

연봉 7,000에 파업을?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30일 KBS 라디오연설에서 “ 연봉 7천만원을 받는다는 근로자들이 불법파업을 벌이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면서, “평균 2천만원도 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아직도 많”은데 “그 세 배 이상 받는 근로자들이 파업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수준은 연봉 7천만원에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성기업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2011년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3월 31일 기준, 재직중인 전체 직원의 평균 연봉은 4천5백만원선이다.
실제 근무경력이 8년차인 생산직 노동자 A모씨의 2011년 3월 월급명세서를 보면 세전 총임금은 242만원으로 단순 계산해 연봉을 사정하면 2,880만원 수준이다. 역시 8년차인 B모씨의 2011년 2월분 월급명세를 보면 세전 총임금은 180만원으로 연봉으로 치면 2160만원 선이다.

그러나 노조 측에 따르면 7,000 받는 노동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자만 그것은 전체 노동자 100명 중 5명 정도에 불과하고 ‘연봉 7천만원’은 “28년차 노동자가 정규 근무시간 여덟 시간 외에 한 달에 잔업을 80시간 하고, 야간근무를 꼬박 2주 동안 해야 가능한 금액”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마저도 사정이 ‘좋아서’ 잔업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디어 오늘, 2011.5.31)(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609 )

이대통령의 언술은 노조를 깨기 위해 사측이나 보수언론에서 주로 사용하는 '귀족노동자' 담론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서,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용어구사였다. 그것은 정치 선전, 선동의 언술이기 때문이다. 선거 때도 아닌 시점에 대통령이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공격적인 언술, 선전, 선동의 언술을 사용한다면 그는 국민적 신뢰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노동관이다. 7,000받는 노동자는 파업해서는 안되고 2,000만원 받는 노동자는 파업해도 좋다는 것은 70년대식 노동관이자 노동자를 경제동물로 보는 시각이다. 이번 유성기업의 파업이유는 임금이 아니라 근무교대 문제였다. 일주 단위로 주야교대를 하는 경우 노동자들이 겪는 육체적 고통과 건강 침해는 이미 과거 지하철 노조 사레에서 부터 많이 지적되어 왔다. 몸이 망가져도 돈만 많이 받으면 좋다는 이 낡은 노동관을 대통령이 갖고 있다는 것은 국민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고와 언술이 더 심각한 것은 실제 그가 2,000받는 비정규직은 파업해도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파업은 커녕 노조에 가입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가 모를리 없다. 그렇다면 그의 언술은 진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유성기업 노동자를 공격하기 위한 마타도어에 불과한 것이다. 즉 파업자체를 거부하는 그의 생각을 감추고 유성기업의 파업을 공격하기 위해 이런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봉 7,000을 받는 노동자도 파업할 수 있다. 노동자의 단결권이나 행동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권리다. 그런데 그는 이 발언을 통해 사실상 헌법상의 권리를 부정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21세기 한국의 대통령이니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권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불행한 자여, 한국의 노동자들이로다.

2011년 5월 29일 일요일

미국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이라크 철군?

이라크 수상 알 말라키(Nouri al-Maliki)가 올해 미군 철군이후에도 약간의 병력을 남겨둘 것을 고려중이라 한다. 계획대로하면 올해 미군은 이라크에서 전원 철수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돌연 이라크 재건과 군.경 훈련을 위한 일부 요원을 남겨두는 문제를 생각하는 중이고,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의회의 동의를 얻을 작정이라 한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부르스 커밍스가 어떤 언론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미군은 한번 들어오면 좀처첨 나가지 않는다"고. 한국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미군은 1949년 한국에서 완전 철수했으나 500명의 고문단을 남겨두었고, 기들은 사실상 고문단이 아니라 군 지휘를 실질적으로 관장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지금까지 60년 동안 주둔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둔군이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시킨 토양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고 있다. 사실 주둔군이 더 심각하게 오염시킨 것은 토양이 아니라, 바로 정신이다. 정신은 한번 주입되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국부의 유출을 수반한다. 미친 미국 유학 열풍, 영어 열풍이 바로 그것이다.

어쨋든 나는 말라키 수상의 발언을 들으면써 쓴 웃음이 나왔다. 올 것이 왔구나.
사실 그의 발언의 진정한 배경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미국은 언제나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즉 그들 스스로 미국을 원하도록 만들고, 원하는 발언을 하도록 만든다. 절대로 공개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겨도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한 것이었지 미국이 요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면 종족분쟁이 점화될 위험성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잠잠해졌지만 테러가 재발할 위험도 있다. 그러니 미군 철수를 가장 두려워하는 세력은 바로 현재 미국이 앉혀놓은 이라크 집권세력이다. 사실 미군이 그들에게 주는 의미는 국가재건이 아니라 바로 그들 이해와 안보, 즉 집권세력과 기득권 층의 안보인지 모른다. 그 약점을 미국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안보를 지켜주기 위해 소수의 미군이라도 남기는 것이다.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군사적 효과 보다는 정치적 상징적 효과가 더 크다. 즉 미국이 당신들을 지켜준다. 그리고 당신들의 정책결정에 우리가 개입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게 개입했다. 군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아마 대다수의 이라크 사람들은 지난 60년 동안 미군이 전세계 각지 300여곳 이상 지역에 주둔하면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거의 모를 것이다. 미군은 자신의 경험이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축적되어 있지만, 전 세계 사람들은 미군 주둔이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를 알 수 있는 공유된 정보가 없다. 그들 각자는 모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자신만의 것이고,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다. 필리핀 주둔의 노하우가 독일과 일본 주둔에 참고가 되고, 한국 주둔의 노하우가 이라크에 적용이 된다. 그래서 정보와 지식의 극도의 비대칭이 힘입어 오늘도 제국은 군림한다.

2011년 5월 24일 화요일

Agent Orange

내가 고엽제를 처음 본 것은 1975년이었다.
그 때는 그것을 제초제라 불렀다.
사과 과수원을 했던 우리 집은 사과 나무 밑 풀을 제거하는 것은 큰 골치거리였다. 여름은 매일매일이 풀과의 전쟁이었다.
외지 유학생이라 사정을 자세히는 몰랐으니 잠간 방학 중 집에 와 보면 풀 제거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데 그 때 바로 이 기적의 농약이 들어왔다. 한번 뿌리기만 하면 신통하게
풀이 노랗게 말라죽어서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고민 끝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내가 분명히 들었던 말이 있다. 이 제초제는 한번 뿌리면 독성이 땅 속에 30년동안 남아서 그 곳에서 제배하는 곡식이나 과일을 통해 우리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참 무서운 농약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 이 독성이 강한 농약을 포기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 풀 제거하는 데 너무 힘이 드니까 사용할 수 밖에 없는가?
대다수 사람들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 독성이 어떤 것인지 아직 알 길이 없었고,
그 것이 어느정도 무서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왜관, 부천 등지에서 화학물질, 베트남전에서 쓰고 남은 고엽제를 수백드럼 파묻었다고 한다. 미 당국은 과학적으로는 그것의 독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 결과는 나중에 나타나는 것이었으니 실제 그것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수도 있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 인권의 기준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니 당시 미군의 행동을 설사 한국정부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심각하게 문제제기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군은 자기 땅에다 이런 독성강한 물질을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휘관 급에서는 그러한 행동이 결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한번 토양이 오염되면 복원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독성 물질을 한국 땅에 이렇게 대량으로 묻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한미관계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들에게는 모두 보상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독성을 군인들에게
미리 고지하지 않은 것은 당국의 기본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참전자들의 소송을 위한 지원도 없다.

약소국가의 슬픔이다. 고엽제로 평생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분노 대신에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 문제를 바라볼 때다.
한국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자.

김수영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난다.


가다오 나가다오

이유는 없다 ----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美國人들과 蘇聯人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寂寞이 오듯이
革命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革命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夕陽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같기도 한 것이니

이유는 없다 ---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美國人과 蘇聯人은 하루바삐 가다오
美國人과 蘇聯人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差異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美國人]과 [蘇聯人]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
[四月革命]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夕陽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같기도 할 것이니

지금 참외와 수박을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
오이, 호박의 손자며느리값도 안되게
헐값으로 넘겨버려 울화가 치받쳐서
고요해진 명수할버이의
잿물거리는 눈이
비둘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동안에
나쁜 말은 안하니
가다오 가다오

지금 명수할버이가 멍석 위에 넘어져 자고 있는 동안에
가다오 가다오
명수할버이
잿님이할아버지
경복이할아버지
두붓집할아버지는
너희들이 피지島를 침략했을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들은 아직 젖도 떨어지기 전이었다니까
명수할버이가 불쌍하지 않으냐
잿님이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두붓집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가다오 가다오

선잠이 들어서
그가 모르는 동안에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서푼어치값도 안되는 美. 蘇人은
초콜렛, 커피, 페치코오트, 軍服, 手榴彈
따발총..... 을 가지고
寂寞이 오듯이
寂寞이 오듯이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1960. 8. 4>

2011년 5월 22일 일요일

저조원칙 ( 한겨레 칼럼)




세상 읽기] 저조원칙 / 김동춘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중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문학가인 왕멍(王蒙)은 ‘저조(低調)원칙’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기, 즉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선을 지키자는 것이 그가 말하는 저조원칙이다. 그가 말하는 저조는 진보를 포기하고 현상을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하되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단호히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표준을 세운 다음 남을 거기에다 맞추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적과 나를 구분하여 적을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는 저조원칙과 제일 거리가 멀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열정이 필요하지만,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면 저조원칙이 필요하다. 법의 집행이 그러해야 한다.
법이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되면, 그것은 정치행위이고 폭력이다. 판검사가 이해당사자의 돈을 받거나 영향력에 휘둘리면 최고로 흉악한 범죄자가 된다. 만약 그들이 정치의 기본 원리인 ‘적과 나’의 구분을 기준으로 수사를 하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 결과는 소송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온 국가와 사회를 타락시키게 될 것이다. 중세시대와 군사독재 시절이 그랬다. 오늘 한국의 사법부와 검찰은 어떠한가?

‘안기부 엑스파일’, 즉 삼성그룹이 로비 대상으로 삼은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한 노회찬 전 의원은 항소심에서 무죄가 되었으나 대법원은 오히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을 인정하고 파기환송하였다. 애초 검찰은 불법도청 자료라는 이유로 삼성이나 해당 검사들에 대해서는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이번에 대법원은 “대화의 시점이 2005년 이 사건을 공개했던 때로부터 8년 전의 일로서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검사가 재벌기업에서 떡값을 받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즉 범죄행위이지만 그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가고 “도둑이야” 소리를 지른 사람만 처벌한 꼴이 되었다. 검찰은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건으로 자신이 소유하던 회사에서 쫓겨나고 주식까지 포기한 김종익씨 사건에서도 숱한 관련 증거가 드러난 청와대의 개입 사실 등 불법사찰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조차 하지 않다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가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고발 건에 대해서는 경조사 부조금까지 샅샅이 뒤져 그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기소를 하였다. 최근 법원은 건설업자로부터 접대를 받아 ‘스폰서 검사’로 거론되었던 한승철 전 검사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검사가 기업과 유착한 사건은 증거가 나와도 공익적 사안이 아니라거나 대가성이 없다는 등 온갖 논리를 동원하여 면죄부를 주고, 정부·대기업·검찰·사법부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고발한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보복하듯이 처벌하는 모습을 우리는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수없이 많이 목격하였다. 바로 ‘적과 나’의 원리, 즉 한쪽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무죄이고 다른 쪽은 적이기 때문에 유죄라는 원리에 따라 수사·판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사법부와 검찰이 사회의 기본을 지키는 일, 즉 저조원칙을 저버리면 힘이 곧 정의가 되고, 국가의 신뢰와 정당성은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우리는 민주화 이전 수십년 동안 검찰·사법부가 저조원칙을 포기하고 독재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선 이후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수가 “기업하기 좋은 법적 환경을 만들자”고 할 때부터 이미 저조원칙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정 세력에 대한 과도한 처벌과 다른 쪽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봐주기가 지난 3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일찍이 간디는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자기희생 없는 종교, 인격 없는 교육 등을 척결해야 할 악이라고 지목하였다. 간디가 말한 이 모든 악들은 오늘 이명박 정부하의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만, 오늘 나는 그의 ‘원칙 없는 정치’ 다음에 하나를 더 끼워넣겠다. “권력과 돈에 휘둘리는 법”.



2011년 5월 21일 토요일

노무현 전대통령 2주기

노무현 전대통령 2주기를 맞았다.

초선의원이던 그와 많이 만났던 나는 그의 초선시절 정치인으로서의 업적을 잘 알고 있고 그가 어떤 정치가인지도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
5공청문회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일도 있다.
문송면 군 수은중독 사망 사건 폭로하고 산재문제의 심각성을 정면으로 제기한 것이다.
문송면 군에 대한 그의 국회 연설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런데 이 점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노동단체, 산재관련 운동단체에서도 이 점을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일은 알려져있기는 하나, 세간의 평가가 좀 인색한 편이다.
그것 때문에 그를 국회의원만들어준 YS와 등을 지기도 했다.
직업정치가로서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 일이었다.
운동둰 (주류) 출신 정치가와 운동권 주변부 출신 노무현 의원의 행동이 대비되던 시점이었다.
운동권 주류( 이른바 유명대학 출신 학생운동권) 들에 대한 그의 불신은 여기서 시작되었고,
그의 불신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수성가형인 그의 스타일은 그것 때문에 또 많은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의 결점은 두드러졌다. 관료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결국 운동권의 손을 빌려야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나친 자기과신을 한 나머지 자기판단을 우선시하였다.
그의 고립은 어느정도는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국가를 책임지는 조직인으로서 그는 행동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 행동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명박의 압승은 상당부분 그의 작품이었다.

그를 추모하는 물결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후에 사랑을 받기 보다는
정치가, 대통령으로서 그는 더 잘 했어야 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 지식인이 되었는데, 사실은 대통령 시절에 그것을 실천했어야 했다.
그의 낭만주의는 큰 매력이지만, 대통령으로서는 낭만을 버렸어야 했다.

안타깝다. 지금까지 그 만한 정치가가 없었지만, 시대는 그 정도의 인물만 만들어냈다.

2011년 5월 20일 금요일

이 검찰을 어찌할 것인가? - 김종익 불구속 기소

검찰이 김종익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한다.
회사돈 1억 5천을 횡령했다고 한다. 그것을 수사하기 위해 그가 몸담았던 회사 직원들 경조사에 부조금 낸 내역까지 조사를 했다고 한다. 만약 검찰이 삼성 이건희 비자금 수사를 이정도로 치밀하게 했다면 한국 검찰 역사에 기록할만한 위대한 수사라 칭찬할만하고, 세계 검찰 올림픽(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금 메달 감이다. 애초 수사권이 없는 총리실은 불법적으로 그를 사찰하다가 이명박 비판하는 동영상 올린 것, 즉 대통령 명예훼손 건으로 그를 수사했으나 실제 수사목적은 이광재 정치자금 조사를 위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이 사건은 청와대가 깊이 개입한 것임이 판명되었으나 최소 윗선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못하는 부실수사로 일관하였으며, 결국 불법사찰 건은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그들은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먼지털듯히 수사하였으나 그가 회사돈을 유용했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조전혁의원의 막가파식 폭로와 고발에 의거 또 다시 수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가 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각종 경조사 참가, 직원 선물비 지출 등을 또다시 먼지 털듯이 조사를 하였다. 평범한 기업인을 불법으로 사찰하고 회사에서 쫒아내고 주식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를 '골수 노사모'라고 거짓으로 몰아부치기도 했고, 이광재 지사와 일면식도 없는 그를 잘못된 추정에 의해 비자금 조성해서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라고 단정을 하였다.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cluster_list.html?newsid=20110521032008019&clusterid=343116&clusternewsid=20110518222820477&p=khan


정말 어이없는 일은 그가 회사 돈을 횡령했다고 하는데, 어디에다 썼는지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애초 수사목적이 그가 회사돈으로 비자금 조성해서 정치권에 전달했다는 것인데, 그가 일면식도 없는 이광재 지사에게 얼마를 언제 보냈는지 전혀 밝히지 못하고 그냥 회사돈을 유용했다고만 단정하고 기소를 했다는 사실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수사를 도저히 이해할 방법이 없다. 그들은 무엇때문에 정황적으로 보아 아무런 혐의도 없는 일개 기업인을 이렇게 철저하게 수사하여 그를 기소까지 하려 한 것일까?

나로서는 검찰의 복수심이라고 밖에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즉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틀림없이 냄새가 나는' 그를 무죄로 인정하면 자신들의 꼴이 말이 아니고, 불법사찰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그를 불법으로 회사에서 추방한 모든 일과 관련해서 이 정부가 곤경에 처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불구속 기소를 해서 유죄를 입증해야만 이 불법사찰을 폭로한 그에 대해 보복을 가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살아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즉 공권력이 헛발질하고 불법을 저질렀는데,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으니까 무고한 민간인을 더 파괴시키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익씨는 지금 고통 속에서 하루하룰 보낸다. 그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그 심정 이해할 수 있다. 국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공권력이 국민을 대상으로 복수를 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공권력이 복수의 칼날을 간다 !
참으로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한명숙 재판에서 이미 그것을 보았다.
김명호 교수의 재판에서도 판사들의 복수심을 읽은 적이 있다.
법은 중립을 생명으로 하고, 비인격성에 존재의 근거를 둔다. 그런데 검찰과 판사가 복수심을 갖고서 법을 집행하면 죄 없는 국민들 참 많이 다친다.
법의 보복심, 그것은 근대 이전 중세 때의 일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근대와 중세의 구분을 바로 여기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신중세에 있다는 말이 된다.
이명박 정부가 이 사회를 중세로 되돌려 놓았다.

2011년 5월 18일 수요일

31년 전 5월 18일 나는



서울역 앞에 갔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서울역과 영등포역 앞에 비상연락을 해서 모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 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습니다. 10시가 되자 ( 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학생들이 약 500여명 모였던 것 같습니다( 며칠전이었던 서울역 집회에서는 무려 10만명이 결집했으나.... ). 누가 노래를 선창을 하자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갈월동쪽에서 진압군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캠퍼스에서 경찰을 봤을 때의 느낌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땅을 울리며 행진해 오는 군인들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광주에 투입된 그 군인들, 나중에 확인하게 되었으나 같은 복장의 계엄군이었습니다.


학생들 모여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그들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단순 해산이 아니라 체포를 하려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학생 대열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도 서부역( 지금 KTX역 뒷편) 쪽으로 뛰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버스를 타고, 봉천동 산동네에 마련된 숙소로 갔습니다.


광주의 유혈 참극은 그 다음날 전해 들었습니다. 광주 출신 친구들이 버스로 광주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가야하는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했으나 누구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일 경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삐라가 비밀리에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삐라를 뿌렸습니다.


그 후 몇개월, 공포과 분노와 좌절감.....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세월입니다.



어제 토론행사가 있어 광주에 갔습니다. 금남로의 전야제에도 참관했습니다.

광주는 축제분위기였습니다. 토론장에서는 김상봉교수를, 길거리에서는 우연히 공선옥 작가 등도 만났습니다. 과거보다는 젊은이들 사이에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의미있느 변화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의 정치사회적 절망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오늘 광주 가톨릭대 학술행사장에 갔었습니다.

이제 광주의 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를 겪은 기성세대의 수치심을 지금세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덜 무겁게, 즐겁게 광주 5.18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2011년 5월 13일 금요일

직업의 자유? 전관예우?

어제 올린 글이 사라졌습니다. 이 정부 들어 국내 사이트 사찰하는 것이 아주 기분 나빠 구글에 집을 지었는데 아무래도 이 블로그 옮겨야 겠습니다. 하여튼,

판사나 검사가 옷을 벗은 후 자신의 임지였던 곳에서 변호사 개업하는 것이 헌법상의 '직업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비판한 것이었는데, 지금 국무회의 변호사법 개정안 통과로 1년 내에는 마지막 근무지에서 개업을 못하도록 되었지요? 그러면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한 이인규 변호사처럼 1년에 120억을 버는 요술이 사라질까요"라고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의 법조인 양성제도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나 판검사를 동일트랙( 고시제도)에서 양성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변호사를 훈련시켜온 그간의 관행( 사법연수원 제도)와 판검사가 변호사로 개업할 수 있도록 한 제도( 미국식과 독일식의 혼합? )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즉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할 판사나 검사가 사인으로 사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로 곧바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고, 금전적 혜택은 모두 누리되 공인으로서 책임은 지지않는 우리사회의 특수계층, 즉 법률인들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고치고자 수년 동안의 논의 끝에 로스쿨을 만들었는데, 지금 로스쿨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전 제도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두 번째로 이 문제는 제가 주장한 '기업사회'로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업이 지배하는 세상, 즉 기업이 법률시장을 좌우하는 세상에서 이제 변호사가 기업에 고용된 마름 역활을 하고 그 댓가로 엄청난 돈을 챙기는 시대가 된 데서 기인하는 거지요. 판사나 검사는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되고, 그것을 변호사 개업 1.2 년만에 다른 사람이 평생 벌 정도의 돈을 벌어서 벌충하려는 것,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지위불일치를 만회하려는 현상이기도 하지요. 이들에게 공직자로서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도덕적인 훈계에 가까운 것 맞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는 전관예우라는 틀린 개념 써서는 안된다고 어제 주장했습니다만, 그들의 용어를 국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오염에서 우선 벗어납시다. 권력형 부패, 공정겨래위반, 내부정보에 의한 부당 이득 취득 등의 현상을 적절하게 설명할 다른 개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임지에서 개업할 수 있는 한도를 지금 퇴직 관료들에게 적용하듯이 최소 2년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판사나 검사로서 맡았던 사건은 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 자기가 기소한 사건을 변호한다는 것은 너무 엽기적인 일이지요. 이거 정말이지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이것은 직업의 자유 제한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국가가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런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의 논리와 그들 재판관의 면면을 보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판사나 검사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인으로서 임무를 다하도록 하고 명예로 보상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그러하듯이 판사나 검사로 가는 사람은 그 길로 자신의 인생을 걸도록 해야 합니다. 판사 검사가 미래의 직장인 기업이나 로펌을 의식하면 판결이나 기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국민재판, 재판의 국민 참여를 더욱 활성화하고, 변호사법을 위반한 변호사들에 대한 처벌을 그들의 손(대한 변호사회)에 맡겨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정당기능을 활성화하여 법률업무를 정당이 담당하고, 변호사들이 로비스트로서 역할을 하면서 그 댓가로 로펌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일을 줄여야 합니다.

하여튼 이러한 대안들은 제가 평소 깊이 고민한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더 심도있는 국민적 토론이 있었으면 합니다.

* 모든 것을 소송으로 해결하려는 나라, 최악의 나라, 최악의 사회입니다.
법률시장의 팽창, 로스쿨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결코 좋은 일 아닙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이것이 사회학자로서 나의 바램입니다.

2011년 5월 11일 수요일

직업의 자유 침해라?

이른바 '전관예우'를 금지하는 변호사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고 한다.
옷을 벗은 후 1년 동안 마지막 근무지에서 개업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한다.
그러면 1년이 지나면 괞찮다는 이야긴데, 중요 사건 재판이 1년에 끝난다면야 효력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 밖에 안될 것 같다.

정부는 지난 98년 만들었던 전관예우 금지법이 너무 오랫동안 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을 받은 점을 고려해 금지 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이고, 해당 기관도 한정지었다고 한다.

검사나 판사가 자기가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곳에서 변호사 개업하는 것을 막는 것이 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그 위헌판결 내용 좀 보고 싶다. 검사가 변호사되는 것이 직업 바꾸는 것이라고 본 그 '동업자'들의 논리가 어떤지 궁금하다. 검사가 자신이 기소한 사건을, 판사가 자신이 심리하던 바로 그 사건을 내일 모레 변호사가 되어 변호하는 것은 직업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희대의 코미디요 사기다. 그것이 어디 직업 전환인가?

검사, 판사라는 공직자의 직업과 변호사의 직업은 같은 차원의 직업이 아니다. 검사나 판사는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이 주어준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고 변호사는 수임자의 돈을 받아, 수임자의 민원이나 억울함을 해결해주는 사람이다. 국민이 준 세금으로 얻은 정보와 인맥과 경험을 사인 즉 사적 이해집단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업무가 어찌 직업 선택의 자유에 해당할까?
나는 이런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면면을 보고 싶다.

'전관예우'라는 말도 맞지 않다. 그것은 그들의 용어일 따름이다.
이 용어가 언론에 버젓이 등장하는 것도 참으로 국어학자들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그것은 권력형 특혜, 사법비리에 준하는 것이라고 봐야한다. 실정법에 어긋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고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만한 행위다. 이들이 특혜를 받는 이면에는 힘과 인맥에 눌려 재판에 진 힘없는 국민들의 피울음이 있고, 부당한 힘이 시장을 싹쓸이하기 때문에 사건수임 못 맡는 배고픈 변호사들이 있다. 그것은 공정거래 위반이다.

그래서 직업자유 얻은지 1년만에 이인규 중수부장은 120억원을 벌었는가?
그래서 이용훈 대법원장은 수년동안 '자유롭게' 50억원을 벌었는가?
이 정도는 권력형 특혜수입으로는 세계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그리고 이런 수입을 정당한 수입으로 인정하면서 '전관을 예우해주자'는 우리 국민의 관용과 인내의 수준또한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쌍용차 노동자 또 사망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또 사망했다고 한다.
벌써 15명째이다.
극심한 생활고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남은 해고자 2,200명 중에서 몇 명이 더 사망할지 모른다.
쌍용차 진압장면을 보면 이게 국가에서 국민을 대하는 경찰인가 의심스럽다.

http://cafe.naver.com/ccatv.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61&

이렇게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데도 우리사회는 너무나 평온하다.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했던 대검 중수부장 이인규가 일년 동안 120억을 벌었다고 한다. 하늘을 같이하고 있는 한 국가 내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2011년 5월 6일 금요일

초록과 연두


2004년 4월 말 어느날 불광동 구기터널 근처를 버스로 지나가다 산에 피어오르는 신록이 너무 환하고 인상적이어서 그냥 끄적거린 것입니다. 오늘 구름이 걷히면 이런 신록을 볼 수 있겠지요.


2011년 5월 3일 화요일

우리시대의 질병, 우울증

청소년 폭력예방단에 의하면 3560명의 조사대상 학생중 학교폭력을 목격한 학생 1059명(30.2%) 가운데 62%가 '모른척 했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 2008년 53.1%에 비해 10% 가량이 늘어난 수치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같이 피해를 당할까봐(27.5%)가 가장 많았고, 관심이 없어서, 어떻게할지 몰라서가 그 다음으로 많았다고 한다. 요컨데, 동료 학생들이 폭력을 당하는 것을 알고서도 그냥 지나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피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아예 관심을 꺼버린다는 답도 많은 것을 보면, 두가지 이유는 사실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의 고통에 눈을 감는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청소년들만 그럴까? 조사 자체도 없고 통계가 없어서 알수 없지만, 자기 회사 동료 사원이 부당해고 당해도 못본채 한다는 노동자들이 대다수일 것이고, 자신이 일하는 곳의 옆 사업장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농성하는데 공권력이 투입되면 아마 거의 99%의 노동자들이 그냥 구경만 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지금'의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과 동정은 물론, 지원과 지지도 사람을 힘들게 한다. 어떤 일에 한번 관심을 보여주면 계속 연루되어 끊임없이 지지와 지원을 요구한다는 것을 한국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침묵과 방관이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진다. 사실 가족을 제외한 그 모든 이에게 무관심하라고 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질서와 한국사회는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무관심의 댓가는 곧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가족의 끈이 단절될 경우 완전히 개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우줄증, 조울증, 자살은 우리 시대의 큰 질병이다. 우울증 환자의 증가 속도가 무섭다. 노인 우울증은 5년 새 1.7 배가 늘었다고 한다. 젊은 층에게는 조울증이 더 무섭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병의 원인은 물론 다양하지만, 대체로 사회적 관계의 단절, 즉 타인의 관심과 배려를 받지 못하는데서 초래된다. 자신만 살아남아야 하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의 고통을 외면해야 하는 세상에서 경제적 고통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다. 무자비판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도, 부당한 해고의 장본인이 되어도, 말도 안되는 판결의 희생자가 되어도, 길거리 폭력배에게 맞아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동정과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인간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우울증과 자살은 개인적 질병이지만, 사회적 질병이다. 이 질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한 이 세상은 지옥과 같은 곳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