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6일 월요일

[세상 읽기] 세습의 문화 / 김동춘


2011년 12월 26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19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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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북을 가장 강경하게
비판하는 쪽이 사실상 북과 가장
닮은 집단들이라는 건 역설적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그의 아들 김정은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급부상하였다. 북은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하기 위해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물론 북의 3대 세습을 비판하던 미국도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위기수습과 체제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은 북으로서는 합리적 선택인 것 같다. 정권교체가 어려운 북 체제의 성격상 핵문제 해결과 개혁·개방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남한의 보수집단은 북을 현대판 왕조체제라 비판한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남한에서 북을 가장 강경하게 비판하는 쪽이 사실상 북과 가장 닮은 집단들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재벌, 보수언론, 사학재단에서 이런 2대, 3대 세습은 일반적이며, 세습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유사하다. 수년 전 담임목사직 세습으로 비판을 받던 광림교회는 김선도 목사의 아들을 후임자로 선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광림교회의 전통과 목회 방침을 잘 알지 못하는 목회자가 후임자로 부임하면 성장에 지장을 주고 분열과 분파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삼성은 에버랜드 사건 무죄 선고로 이재용 편법 상속을 위한 법률적 장벽이 없어지자, ‘오너경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사장단의 입을 빌려 “삼성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전임 회장의 경험과 지혜를 활용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명분을 들이대며 그를 삼성의 후계자로 등극시켰다. 국가와 기업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지만 공적 조직을 가족이 사유화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혁명위업 완성’을 위해서건 ‘전통 유지’, ‘성장과 발전’, ‘경험과 지혜 활용’을 위해서건, 오늘 남북한의 세습의 실제 동기는 앞선 창업자의 직계 남성만이 해당 조직을 책임질 수 있는 적임자라 보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실 내부의 관점에서 보면 앞선 지도자의 방침과 철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안전하고, 내부 약점이나 불법사실도 덮을 수 있을뿐더러, 위기상황에서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해주고, 일사불란한 지휘를 가능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2대는 동업자이지만, 3대는 황태자”라는 말도 있듯이, 세습은 권력을 절대화하여 조직이 큰 실패를 해도 그에 대해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고, 심각한 부패를 낳을뿐더러, 구성원을 노예화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극심한 식량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북 주민의 처지는 ‘노조가 없어서’ 백혈병 발병 사망에 대해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죽어간 삼성전자 여직원들의 처지와 얼마나 다를까? 온갖 반사회적 불법을 저지른 담임목사가 구속되어도 “목사님, 우리 목사님” 외치는 세습 대형교회 신도들이나, 오너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족벌 사학과 언론사 직원은 과연 전적으로 다른 처지에 있을까?

오늘 북의 김정은 체제가 단기적으로는 안정을 보장해주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남북한의 새 왕조체제가 그것이 표방하는 진보·보수의 이념과 전혀 무관하게 수구 퇴행적 행태라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것이며 21세기 가치와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 모든 세습은 전쟁, 분단, 조직위기, 성장지상주의를 빌미로 등장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세습을 정당화했던 국내외 환경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조직을 연착륙시키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2011년 12월 26일, <한겨레21> 제891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0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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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도전자 잡아베던 독재시대 국가원수모독죄
비판·풍자 용납 않는 엠비시대 다시 살아나



지난 10월13일 서울 롯데백화점 주변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연행된 대학강사 박정수씨에게 대법원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공용물건 손상죄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원은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형법상 금지하는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애초 구속영장을 신청한 남대문서 형사과장은 “중요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국격을 높이는 국가 홍보물을 더럽히는 것이 (시민의) 정상적 사고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씨는 애초 경찰이 단순 재물손괴 혐의로 조사를 했다가 ‘윗선’의 지시로 ‘공안 사건’으로 키웠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경찰에게 물었더니, 경찰청장에게 보고되고 청와대에도 보고됐기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MB 비판하면 ‘불경죄’로 다스려

총리실 불법사찰 건의 최대 피해자인 (주)KB한마음 사장 김종익씨는 애초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을 빌미로 유죄가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에서 쫓겨났고 소유 주식을 포기했으며, 경찰과 검찰은 공금횡령과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등을 들어 그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의 공식 죄목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 결정서에서 피해자는 자연인 이명박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적시돼 있다. 검찰은 수개월을 끌다 대통령 명예훼손을 인정하는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결국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고, 사기업의 회장직과 개인 소유의 주식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의 범죄가 된 것이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하라”고 고함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을 장례식 방해 혐의를 적용해 벌금 3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일반인들은 그런 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생소한 법조항을 끄집어내 그를 형사처벌했다.

지난 3월 문화방송 경영진은 ‘검찰과 스폰서’ ‘4대강의 비밀’ 등 사회적 큰 반향을 일으킨 의 간판급 연출자인 최승호 PD를 비롯해 핵심 인력 교체를 강행했다. 최승호 PD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노조는 성명에서 “MB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불경죄’를 범하기라도 하는 듯, 최승호 PD가 MB 정권의 뿌리인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다루려 하자 을 거칠게 흔들어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사교양국장은 1년 이상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사람은 예외 없이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경찰, 검찰, 법원, 문화방송 경영진 등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람을 처벌한 명분과 법조항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하나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김종익씨에게 적용한 죄목인 ‘대통령 명예훼손죄’는 최고권력자가 명예훼손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독재 시절 여러 민주인사를 옥죄다가 노태우 정권하에서 폐지된 형법상 ‘국가원수모독죄’의 정신이 깔려 있는 셈이다. 제작자들에 대한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훼손죄 기소,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국가정보원 명예훼손 기소 등 같은 범주에 속하는 정부 쪽 기소 사건 역시 법이 국민의 보호막이 되기는커녕,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의 칼이 되어 정부 정책과 최고권력자에 대해 작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마구 휘둘러대는 것과 같다.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거나 대통령을 사실상 국가와 동일시한 상태에서 권력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언론은 무조건 앵무새처럼 대통령을 찬양해야 하고, 국민은 ‘입을 닥쳐야 하는’ 독재체제하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발상이 이명박 정부에서 살아났다.


최능진


이승만에게 도전해 살해당한 최능진

군사독재 시절 국가원수모독죄의 원형은 전근대 시절과 일제 식민지 시절의 불경죄였다. 1948년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최능진은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이승만의 당선을 저지하려고 같은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그해 10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돼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즉각 정전, 평화 호소 대회’를 추진했지만, 수복 뒤 군법회의는 인민군 치하에서 그의 활동이 국방경비법 32조(이적죄) 위반에 해당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그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총살형을 당했다. 원래 그는 일제하에서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일하다가 공산당과 마찰을 빚어 월남한 인물이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며 친일 경찰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1946년 경무부장에 의해 파면되기도 했다.


장준하

선거 당시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은 집요하게 최능진의 등록을 방해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는 극적으로 후보등록을 했다. 기호 1번이 된 그는 독립운동 경력을 부각시키고 이승만의 친일 경찰 기용을 비판해 인기가 높았으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대문 경찰서장은 본인이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당선 무효를 주장했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이틀 전인 5월8일,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의 날인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의 등록을 무효화했다. ‘혁명의용군 사건’ 역시 조작 의혹이 짙고, 전쟁 중 군법회의의 사형 판결도 평화적으로 전쟁을 종식하려 했던 행위에 정치보복으로 응답했다는 비판이 많다(2009년 8월1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헌법상 근거가 없는 군법회의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 판결을 확정판결로 볼 수 없다고 결정했다).

최능진의 비극적 최후는 실정법과 재판의 형식을 거쳤다고는 하나, 당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앙되던 이승만에게 감히 도전하면 어떤 정치보복을 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후 국가원수모독죄가 적용된 1988년까지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대통령을 비꼬거나 정치적으로 도전한 인물들에게는 긴급조치 위반 등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무서운 보복과 처벌을 가했다.


일본에선 없어진 ‘국가원수모독죄’

최능진과 마찬가지로 장준하도 일제 말 일본군 학도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편입돼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인 박정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경력 때문에 5·16 쿠데타 이후부터 그는 박정희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는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규탄했고, “일본 패망이 없었으면 박정희는 여전히 독립투사를 학살하는 일본군 장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박정희는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공격했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돼 3개월간 투옥됐고, 그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등산에 나섰던 그는 한 벼랑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과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히려 했으나, 죽은 지 24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다. 사고사라고 보기 어려운 정황이 너무나 많은데도 아직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최능진과 장준하는 국가 지도자에게 감히 도전했다가 온갖 수난을 당한 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공통된 점은 이들이 모두 국가 지도자로서 국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두 인물을 공격했다가 보복의 칼을 맞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약점이 있거나 위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농담에도 성난 얼굴을 하는 법이다.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중국의 법은 어떤 자라도 황제에게 경의를 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그 법은 이 경의를 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구실로 그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죽이고 그가 죽이고 싶은 가족은 모두 죽일 수 있다”라고 불경죄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즉 법이 합리성과 공정성의 원칙이 아니라 인격의 원리에 입각해 있고,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해 그에게 어떤 도전도 금하는 전통시대 중국의 법문화를 비판했다.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한 법의 정신은 군국주의 일본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메이지 헌법 3조에는 ‘천황의 신성불가침’ 조항이 있고, 형법에서는 ‘황실에 대한 죄’ 조항이 있었다. 천황제를 비판한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는 이 불경죄 조항으로 처벌을 받았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박열도 대역죄인이 되어 해방 때까지 무려 21년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의 우익 지도자들은 이 대역죄·불경죄의 조항을 살리려 했다.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자유당의 기타우라 게이타로는 “도대체 26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불경죄를 미국식으로 삭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널리 국민 일반의 지식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를 위해 그 찬부를 묻고 싶다”고 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도 두 법을 존치시켜달라고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헌법이 법 아래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천황이나 황족만이 형법상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에서는 없어진 이 법이 한국에서 1988년까지 ‘국가원수모독죄’로 살아숨쉬었다.


MB 나온 웹자보 삭제 요구 받아

지난해 서울 청량리에서 탈성매매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는 단체 ‘성매매 없는 세상, 이룸’에서 웹자보(인터넷판 대자보)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유한 건물인 서울 양재동의 영일빌딩에서 성매매업소가 영업 중임을 풍자하려고 빌딩의 업소 사진과 함께 합성사진을 실은 것이다. 그러자 담당공무원들은 웹자보 삭제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사무실과 상담소 대표의 개인 휴대전화에까지 수시로 전화를 해댔으며, 이런 식이면 앞으로 상황이 어려울 것이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불경죄는 사라졌으나 불경죄의 정신은 권력자나 관료들에게 아직까지 살아 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싫어하거나 저잣거리 광대들의 농담조차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딱딱한 머리의 권력자, 국가나 국가원수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 아래 국민은 국가 혹은 국가원수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시대나 군국주의 시대의 사고를 가진 관료가 바로 그들이다. 이 칼은 과거에는 최능진·장준하 같은 도전자를 잡아서 베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예술가나 소시민의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로 살아났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세상 읽기] 대학에는 ‘대학’(大學)이 없다 / 김동춘


2011년 12월 5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86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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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역사 60년이 지났는데
아직 박사 따려면 ‘미국’ 가야 하고
학부는 오직 ‘간판’ 취득 기관이다


지난 며칠 동안 학술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에 다녀왔다. 느낀 것이 많지만 대학을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이 눈에 가장 많이 들어왔다. 지하철이나 학교 카페에서 스마트폰 갖고 노는 학생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베를린대학으로 가는 전철간에는 책이나 수업교재를 줄 치며 읽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며칠 동안의 인상이지만 프랜차이즈 업체가 어지럽게 들어와 있는 캠퍼스나, 도서관에서 토익·토플·편입 공부 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젊은이들 탓하자는 것 아니다. 대학에서 밥 먹고 있는 한 사람이자 학부모인 나도 책임의 일부를 지고 있다. 한국의 학부는 취업과 출세를 위한 ‘간판’ 따는 곳이다. 그러니 입학이 중요하지,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입학만으로 이후 취업과 출세가 거의 80%는 정해져버리니, 교수와 학생이 학문을 매개로 만날 일이 없다. ‘서열’이 낮은 대학의 교수나 학생은 이런 조건에서 취업률 압박과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정년 보장을 받은 상위권 대학의 교수는 교육에 매진할 동기가 거의 없다. 게다가 대학 강의의 반은 학술 연구는커녕 하루하루의 생계 걱정을 하는 시간강사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대학의 실제 수준은 사실상 대학원을 보면 안다. 그런데 국내 대학원은 텅 비어 있다. 국내 학위로는 행세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학을 제외하면 외국 학생들이 한국의 특정 교수 밑에서 공부하러 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사실상 국민교육기관인 학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 학부모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하고 심지어는 수많은 전사자(?)가 나오는 비극이 계속되지만, 정작 학문과 학자를 생산하는 대학원은 학부의 부속기관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 대학에는 한국 유학생 7만여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학생 수로는 중국·인도에 이어 3위이지만 인구비례로 보면 압도적 1위다. 한국 학생들이 1년 지출하는 돈은 평균 잡아도 대략 2조원이 훨씬 넘을 것이다. 이 돈이면 서울의 큰 대학 5개 이상을 운영하고도 남는다. 그 돈을 10년 정도 국내 대학(원)에 집중 지원하면 일본처럼 구태여 미국 유학 가지 않고서도 자기 땅이나 세계에서 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또 할 의지도 없다. 대학 역사 60년이 지났는데, 아직 박사를 따려면 ‘미국’ 가야 하고, 학부는 오직 ‘간판’, 특정 학벌집단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증 취득 기관으로만 남아 있다. 경쟁해서는 안 될 곳에 과도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국가의 지원과 경쟁이 필요한 곳은 그냥 버려져 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한국에 대학이 없고 학문이 없는데, 실제로 대학은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다.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학부모 부담률은 전체의 90% 정도로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식 학벌사회 편입시키기 위한 투자비용이다. 독일의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고, 등록금이 거의 없다. 요즘 독일 대학도 미국 따라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 때문에 기존의 국가 지원과 평준화 제도를 철회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서열대로 모여 있는 한국 학생들이 평준화된 대학에 다니는 독일 학생들보다 우수하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학부를 평준화하고, 기업이나 사회에 채용 정보를 주기 위해 졸업정원제 등 대학 평가 체계를 엄격히 하되, 오히려 대학원에 집중 지원하고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여 대학(원)을 진정으로 학문하는 곳, 국제적인 수준을 갖춘 곳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2011년 12월 5일, <한겨레21> 제888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9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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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공인의 실종 ②-지역명망가 학살하고 연 거짓 우파만의 세상
한국사회는 공적인 인간이 절멸된 뒤 친일파가 만든 결과일 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인사 청문 대상자는 총 89명으로 이 중 82.0%에 달하는 73명이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등 이른바 ‘4+1 필수(?) 불법 과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탈세 또는 탈루, 체납 등 세금 관련 의혹이 57명(64.0%)으로 가장 많았고, 부동산 투기 의혹 44명(49.4%), 위장 전입 의혹 29명(32.6%), 병역 기피 의혹 16명(18.0%), 표절 등 논문 관련 의혹 13명(14.6%) 순이었다.
지역도 다르지 않다. 민선 지자체장 3명을 배출한 경기도 성남시와 전북 임실의 경우, 역대 지자체장 전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거의가 뇌물수수 등의 죄목이었다. 경북의 영천시와 소싸움으로 유명한 청도군은 2005년 이후 시장과 군수가 선거법 위반 등 죄목으로 물러나 매년 선거를 치러 왔다. 충청북도는 민선 4기 동안 도내 지자체장 중 4명이 중도에 낙마했고, 민선 5기 들어서도 지자체장 3명이 기소되었다. 강원도·전라남도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단체장의 비리는 거의 전국적 현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4·3 전후로 지역인물 극명하게 갈린 제주

1953년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고 집권당이나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했고, 수많은 장관과 고위 관료가 왔다 갔지만, 민주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는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말을 들은 지도 참 오래되었다. 가장 힘있던 사람들이 재임 기간 중이나 그 이후 각종 부패 스캔들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고,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잊혀졌다.

나는 이것을 중앙이나 지역사회에서 ‘공인의 실종’, 즉 오직 개인적 권력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들만이 주로 힘있는 자리에 올라할 수 있도록 판이 짜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임명직이나 선출직이나 별로 큰 차이는 없다. 민주화 이후 선거라는 절차를 거치고 있지만, 진정 국민과 주민의 편에 서서 일할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은 현재도 거의 없다. 한국전쟁은 좌익은 물론 중도 혹은 우익 인사 중에서도 공적 대의에 헌신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후부터는 그런 사람이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지역사회의 1차 판갈이는 1945년 8·15 해방 직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통해서였다. 공식 역사는 좌익이 이들 조직을 주도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지역사회에 들어가보면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실제로 해방 직후 지역에서 신망받는 상당수 사람들이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이런 조직에서 활동했다. 2차 판갈이는 정부 수립 전후 이들이 탄압을 받아 제거되고, 곧이어 학살된 사건이다.

제주도에서처럼 4·3 사건 이전과 이후 지역사회의 지도자들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등 지역 자치기구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70% 정도가 일제하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지역의 부호나 극우 인사를 도지사로 앉혔고, 4·3 사건을 겪으며 초기 주민의 신망을 받은 거의 모든 인물들이 타살·학살·실종되었다. 1987년 이후 제주 4·3 사건 재조명 분위기가 활발해지자 지역의 노인들은 “요망한(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고, 물경한(시원찮은) 우리만 살아남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즉 민주화 이후 난폭한 폭도로 몰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리더십이 있는 똑똑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이끌고 가르쳐줄 진정한 선배가 없어 마을의 정기와 맥이 끊겼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4·3 이전의 지도자들과 친일파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다시 판이 짜인 이후의 제주 지역 지배자들을 비교해 “똑똑한 사람 다 죽고 나서 아무개가 도지사가 되니 도민들 모두가 비웃었다”고 말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원로가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친일파들에게 죽임 당한 지역인물들

‘원로 실종’, 즉 존경할 만한 지도자 부재는 제주도만이 현상이 아니라 사실 1950년대 이후 한국 전체의 특징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군 단위에서 주민의 요구는 주로 지역사회의 지주 부호층, 친일 식자층으로 구성된 ‘유지’ 집단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총독부 관리들과의 뒷거래와 진정을 통해 민원을 해결하며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왔다. 총독부 관리나 경찰들이 이들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독점적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이들은 쫓겨났고, 주민의 신망을 받던 항일 인사나 지식층, 양심세력이 주민의 참여를 통해 짧은 기간 지역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역사회는 또다시 식민지 말단 관료 출신, 우익청년단 출신, 중앙에서 유명해져서 고향으로 낙하산 타고 내려온 인사로 채워졌고, 일제 시기와 같은 로비와 진정으로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한국전쟁 기간에 이승만 정부의 군경·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해방 직후 지역사회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이들 대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을 죽인 사람은 일본 경찰 출신과 옛 친일 경력자들이었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반이승만 노선이 죽을죄였다.

전남의 완도·해남 등 지역에서는 일제하에서 청년운동·소작쟁의 등에 참가했던 지역의 활동가,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와 같은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상당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자연스럽게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당, 청년단체 등 지역 정치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의 공출에 반대하거나 이승만 편을 들지 않거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부 수립 전후 수없이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다 전쟁 이전에 경찰에 사살되기도 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보도연맹원 혹은 부역자로 지목돼 대부분 학살되었다. 최평산(1903년생)은 일제 시기 완도군 소안면에 본부를 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 구성원이었고,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대표적 항일 인사였다. 그는 해방 뒤 과거 항일운동 동료들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8년 11월5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소안면의 김장균(1923년생)은 광복군 출신이다. 해방 뒤 귀국해 완도군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책임자가 된 뒤 수배와 구금이 반복되었다. 김장균은 완도읍 죽청리 뒷산에 은거하던 중 1949년 4월13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김남곤(1899년생), 김장안(1905년생), 김유곤(1908년생), 최홍길(1899년생)은 소안사립학교 동문으로 일제강점기 소안면 독립운동 2세대다. 이들은 해방 뒤 소안면 사회운동을 주도해 수시로 경찰에 구금됐다. 1949년 8월 소안면에서 좌익 혐의로 각각 체포된 이들은 완도군 신지면 현재의 명사십리 해안가에서 경찰에 모두 사살되었다.



공인 제거 뒤 만든 지금의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완도군 소안면은 해방 뒤 ‘좌익의 근거지’로 지목돼 초토화됐고, 이렇게 전도된 기억은 지금까지 섬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할아버지·아버지가 모두 좌익계열 운동가였던 완도의 정종래씨는 “세상은 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닌 빨갱이의 후손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는데(<주간경향>, 2007년 8월14일), 독립운동의 공적, 해방 직후 지역사회 운동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빨갱이의 멍에만 짊어진 가족들의 이야기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항일운동가 출신이나 좌익계열 사람들이 사라지자 중도층이나 우익 성향 인사들, 식자층이 지역사회에 등장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 전후 동네에서 구장이나 반장 역할을 했던 사람 중 일부가 전쟁 발발 뒤 인민군이 점령한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는데 인민군은 동네 사정을 잘 알고 글을 할 줄 아는 이들에게 지역 행정을 맡겼고, 수복 뒤 경찰이나 우익 치안대는 이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주민의 모함으로 살해된 경우가 있다.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에는 임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 신자였다. 해방 뒤 타 지방 사람 송해봉이 들어와 천주교를 전파하며 지역의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해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이 천주교에 나가면 결혼도 하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그는 글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복 뒤 임씨들은 자치대를 조직해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결국 눈엣가시 같던 외지인 가톨릭 신자를 없앨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었다. 지역에서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송해봉은 그렇게 이웃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한국의 어느 지방, 지역사회에 내려가도 이런 사례를 만날 수 있다. 결국 한국전쟁 전후 지역사회에서 살해·실종·학살된 사람들이 좌익 인사라고 보는 것은 냉전시대의 시각이다.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벗어던져야 한국 지역정치의 실상이 보인다. 공적 마인드를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이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들이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의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의 소멸사라 해야 맞다. 흔히 사람들은 친일파가 득세해 오늘의 한국 정치와 사회가 이렇게 비뚤어졌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친일파와 경찰이 해방 뒤 지역정치를 주도한 항일운동가, 지역 지도자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학살한 결과라고 말해야 한다.


휴전 뒤 7년 만에 나타난 공적 인간

그래서 전쟁 뒤 한국은 사적 이해,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이 되었다. 식민지 말단 하수인 ‘유지집단’은 또다시 지역사회의 유지, 반공국가의 첨병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공적 인간의 소멸사는 동시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짜 우익’의 탄생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적 도덕으로 무장한 새 인간은 휴전 뒤 정확히 7년 만에 나왔다. 4·19 혁명이 그것이다. “기성세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는 “오직 개인과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인간들은 물러가라”는 이야기였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독일 튀빙겐 대학




독일 마지막 일정으로 튀빙겐에 가서 한국학과에서 강의를 했다.
6년만이다. 내 책 전쟁과 사회 독일어판 번역자가 이곳의 송문의교수님이어서 그곳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송교수님이 그 때의 팜플렛을 그대로 갖고 계셨다.

튀빙겐은 중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대학도시다. 네카강을 끼고 있는 그림같은 곳이다. 헤겔, 셀링, 휠더르린 등이 이곳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캐플러가 공부한 곳이기도 하고, 헤세가 젊은시절 서점에서 점원노릇도 한 곳이다. 신학과 철학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뇌과학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대학이라고 한다.사회학자인 다렌도르프가 이곳 사회학과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대학도시인 것 같았다.

목요일 저녁 강연장에는 머리 허연 신사가 나타났다. 헨리 폰 보세 목사님이시다. ( 중간명을 보아 귀족 출신인듯? ) 감리교 목사님으로 한국의 한일장신대에서도 강의하신적이 있다고 한다. 놀라는 것은 그가 내 책 독일어판을 매우 꼼꼼하게 읽으신 독자이며,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려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한국에서 왔는데 청중이 너무 적다고 주최측에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독일 반전세대의 한 분이시다. 말미에 질문도 많이 해 주셔서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매우 놀라운 어른으로 비춰진 것 같다.

금요일 아침, 약간 시간이 나서 튀빙겐 시내, 강가에서 산책하고 도서관도 들러보았다.
초콜렛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500년 전 대학 본부나 기숙사 건물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참 좋은 곳이다. 한국의 중소도시에도 흔한 대형수퍼(SSM)도 볼 수 없었다.
프렌차이즈 업체가 무질서하게 들어와 있는 우리나라 큰 대학의 캠퍼스 풍경과 겹쳐졌다.

2011년 12월 1일 목요일

독일자유대학 3




사람들은 미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데 ( 나도 내 책 전쟁과 사회에서 그렇게 적었다)실제 미국은 대학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미국의 세계지배의 힘이 대학에 잇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들 별로 못 만나봤다. 정치가들 중 그런 식견을 가진 사람 더욱 못봤다. 아마 내년 정권 교체가 되어도 지경부, 외교부의 미국 유학파 관료들이 모든 것을 사사건건 발목잡을 것이다.(오해 없기를 내가 모든 미국 유학파를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님) 시장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그들을 무슨 수로 설득할 것인가? 그들은 한국 속의 미국이다. 미국이 대학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사례중 한국 보다 더 좋은 경우는 없다.
론스타의 먹튀도 사실 그들의 공모에 의해서 가능했다.

어제 자유대학 한국학과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모두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아마도 케이 팝, 한류 열풍으로 한국에 관심을 가졌을 청년들인 것 같다. 인종적으로도 다양해보였다. 참석한 어떤 사람의 전언에 의하면 그 동안의 어떤 초청강의보다도 열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 회사에 취직할 목적으로 입학해도 좋다. 한국학의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국학과 건물도 이채로웠다. 단독주택인데 입구에는 장승이 서 있었다.

낮에 베를린 시내 배회를 했다. 구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도 돌아봤다. 지하철에서 놀란 것은 스파트 폰 보면서 노는 사람을 거의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신문과 책을 들고 있엇고 그 중 일부는 글씨가 매우 빽빽한 두꺼운 책도 들고 있었다. 대학으로 오는 마지막 노선에는 대학생들이 복사물이나 책 보면서 공부하는 모습들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지하철, 대학근처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독일의 힘과 수준을 보는 것 같앗다.

간판따기 위해 학교에 와서 수업시간에는 폰 들고 문자질 하는 한국 학생들. 수업시간 늦에 나타거나 쉬는 시간 출석을 불렀다면 사라지는 학생들. 음식 갖고와서 먹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학생들.

대학은 그 나라의 수준이다. 어디 이 사진의 자유대학 한국학과 처럼 저런 주택에서 교수 학생 모여 밤늦도록 토론하는 그런 대학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