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8일 일요일

국가범죄의 책임 가리기와 역사 바로쓰기


http://weekly.changbi.com/54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70613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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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2011년 7월 6일


김동춘 / 성공회대 교수




<국가범죄의 책임 가리기와 역사 바로쓰기>
대법원의 울산보도연맹사건 원심판결 파기환송 건을 보면서



한국의 뉴라이트와 주류언론, 그리고 이 정부는 몇년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해 정말 수고가 많다. 그런데 죄 없는 국민을 많이 죽여야 건국의 영웅이 되는 것일까? 1950년 7,8월 북한 인민군의 침략으로 대한민국이 형편없이 무너져내리던 시점에 이승만의 직접지휘하에 있던 CIC(방첩대), 헌병, 경찰 사찰과에서는 전국 수십만명의 '요주의(要注意)' 인물을 불법으로 체포하여 골짜기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이다. 우리 국민이 모두 알고 있는 속어 '골로 간다'는 말은 이 사건 이후 생겨났고, 이후 수십년간 "빨갱이는 인간취급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공안당국의 암묵적 실천도 여기서 시작되었고, 수많은 국민의 평생을 옥죄었던 연좌제도 바로 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울산보도연맹사건 판결의 반전과 재반전

필자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조사를 지휘했으며 2009년 11월 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실을 공식적으로 규명했다. 그리고 지난 6월 30일 울산지역 보도연맹사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판결이 대법원에서 내려졌다. 대법원은 고등법원이 2009년 8월 18일 내린 결정, 즉 "울산 보도연맹사건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요구는 시효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보상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판단하라며 되돌려보냈다.

애초 이 사건에 대한 1심 법원의 판결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즉 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시효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 규명을 결정한 날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므로 국가는 피해자 유족들에게 보상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유족들이 이미 1960년 4·19 직후 유해발굴도 했고 가해자에 대한 소송도 했기 때문에 사건 내용을 알고 있었으며, 설사 군사정권하에서는 권리주장을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민주정권 수립 이후에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민사상의 손해배상청구시한인 3년이 경과하여 국가는 이들에 대해 보상을 할 책임이 없다고 1심 결정을 뒤집었다.

그러나 이번에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결정을 또다시 파기하면서, 전시중 국가기관이 저지르는 위법행위는 외부에서 거의 파악하기 어려워 원고들로서는 손해배상청구권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이러한 집단학살사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절차에 의해서는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고들이 권리행사를 할 수 없었고 (…) 그동안 이 사실을 은폐해왔던 피고(국가)가 이제 와서 뒤늦게 원고들이 집단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취지로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여 그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상실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국가범죄에 의한 피해 구제할 보·배상 특별법을

즉 국가가 불법으로 사람들을 죽여놓고, 이후에도 수십년간 연좌제의 멍에로 신음해온 유족들이 이 문제를 발설하는 것조차 겁박을 하고 또 유족회 활동가들을 처벌까지 해왔는데, 이제 와서 왜 사건 직후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았느냐고 적반하장 격으로 따지면서 시효가 지났으니 당신들은 권리주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고등법원의 판결이 상식과 현저히 거리를 둔 것이라면 대법원의 판결은 크게 환영할 만하다. 따라서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여 평생 한을 품고 살아온 유족들에게 비록 적은 액수라도 국가가 뒤늦게 자그마한 위로를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판결을 지켜보는 우리는 제3자로서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든다. 즉 그렇게 많은 피해자들이 일일이 자기 돈을 들여서 소송을 하고, 법원이 건 별로 판단해서 피해자에게 보상조치를 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과, 전쟁중이라고는 하나 그렇게 수십만명의 인명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반인도적 범죄의 책임자에 대한 형사적 단죄가 왜 없는가라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범죄의 피해자에게도 민사상의 채권자-채무자 관계의 규칙을 적용하고 있는데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특히 이처럼 국제법에서 통용되는 반인륜적 범죄에 해당하는 학살사건에 대해 민사상의 채권-채무관계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심히 의심스럽다.

국가폭력에 의한 가해 사실과 피해 여부는 국가가 직접 조사해서 인정한 다음 피해자의 신청을 받아서 심사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법원에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고, 스스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즉 국가는 중요 범죄의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가 주장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겠다는 극히 오만한 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당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전국적으로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개인별 구제를 신청해야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것처럼 이런 중요한 집단학살사건은 법원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모든 피해를 일괄 구제하기 위한 별도의 보·배상 관련 특별법이 필요하다.


반인도적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와 역사 바로쓰기

마지막으로 이승만정부하의 군 정보국, 헌병, 경찰 치안국 등 주요 권력기관이 모두 관련되어 있는 이 학살사건에 대해 당시 관련자는 거의 사망했고 공소시효도 지났기 때문에 실정법상으로 그들을 단죄하기는 어렵지만, 역사적 면죄부까지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정부 들어서 이러한 국가범죄는 완전히 묵살되어버리고 이승만의 나라세우기를 미화하거나 백선엽 전쟁영웅 만들기 등 '현대사 바로잡기'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는데, 이는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를 두번 죽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엄청난 반인륜 범죄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국민 교육 없이 유족 개개인을 민사상으로 보상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국제인권규범을 적용해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매우 환영할 만하지만, 향후 이 소송의 향방은 국가의 잘못된 공권력 집행에 대한 피해 국민의 명예회복 여부,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의 인권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추가적인 법적 장치 마련, 역사 바로쓰기 작업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2011.7.6 ⓒ 창비주간논평

[세상 읽기] 요동치는 세계: 청년의 좌절과 항거 / 김동춘


2011년 8월 15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918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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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년시위, 중동 사태, 재정위기…
배경과 성격은 상당히 다르지만
모든 현상에 관통하는 흐름이 있다

세계는 지금 혼돈의 와중에 있다. 영국에서는 런던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빈민가에서 이주 청년들이 폭동을 일으켜 온 나라가 난장판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도 대규모 청년시위가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수십만명의 청년들이 거리에 텐트를 치고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웃 시리아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연일 계속되어 2000여명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리비아는 여전히 내전중이고 튀니지·이집트는 민주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미국은 심각한 재정적자를 땜질식 처방으로 막아내고 있지만 높은 실업에 신음하고 있다.

비록 배경과 성격은 상당히 다르지만 이 모든 현상에 관통하는 흐름이 있다. 첫째는 정부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과도한 예산 삭감과 친자본 위주의 정책을 펴면서 대다수 국민들에게 안전과 복지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정부가 최악의 경우에는 학살자였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기능 부재 상태이다. 이 점에서는 이른바 선진국·후진국 간의 차이도 거의 없다. 둘째는 정의의 실종이다. 가진 자의 탐욕이 도를 넘었고, 불평등과 차별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대중 시위나 폭동이 나타난 유럽과 중동 여러 나라는 복지예산의 대폭 삭감, 실업, 부패, 그것과 관련된 심각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거의 차단되어 청년들의 좌절이 심각한 상태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셋째,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온 세계에 만연해 있다. 기성 정당이나 정치권이 대중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함으로써 청년 대중들의 불만이 시위, 폭동, 그리고 무장저항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정당 간의 차이를 불문하고 정치엘리트의 권력 독점은 대중들을 정치에서 완전히 소외시키고 있으며, 영국의 언론재벌 머독의 정치권·경찰 유착과 도청 사건에서 볼 수 있었듯이 정부·대자본·거대언론 간의 카르텔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의 티파티 운동도 바로 공화·민주 양당 정치엘리트의 권력 독점에 대한 우익적인 하층 백인들의 좌절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의 경우 설사 개혁적 입법안이 마련되어도 대법원은 그 위에서 헌법 해석을 독점하면서 그것을 좌절시킨다. 정부의 보호 기능과 정치권의 대변 기능을 상실한 세상에서 선출되지 않은 이들 자본·언론·사법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농단하고, 이들에게 포획된 선출된 권력은 자신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하다.

나라마다 조건이 다르지만, 대체로는 지난 20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구적 신자유주의, 즉 시장과 대자본이 사회·정부·정치를 압도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다. “사회, 그런 것은 없다”는 신자유주의 선구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예언이 음울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 오늘의 세계 전역에서 터져 나오는 시위와 폭력 사태다.

폭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따름이지 우리 사회는 속으로 더 심하게 골병들어 있다. 그런데 여전히 ‘국가’ 안보, 경제 ‘성장’, ‘선진화’, ‘경쟁력’ 등 20세기식 담론을 구사하는 세력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고 있다. 한편 부자들의 이익이 침해되면 ‘관습헌법’과 같은 해괴한 논리까지 들고나올 사법 권력이 떡 버티고 있고, 거대 언론이 공론장을 오염시킬 일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야권은 정권 교체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는 것 같다. 선거나 정당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선출된 권력이 직면할 한계를 직시하면서 더 심층적인 대안을 찾자는 이야기다.

모범 시민 콤플렉스

이번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에서 언론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쟁점 중 하나가 민주당의 '투표거부' 운동, 그리고 싫더라도 일단 시민으로서 투표는 참가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 투표에 참가해서 반대의사를 표현한 사람들이다. 언론에서는 참가자 중 약 3 퍼센트 정도가 여기에 속한다고 추정하였다.
물론 오세훈 지지자들 중에서도 이해관계 때문에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의무라는 철석같은 신념을 갖고서 투표방에 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태도를 모범시민 콤플렉스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투표거부 운동을 한 민주당에 대해 비판적 의견이 약간 조성된 것들도 바로 이들 모범 시민들의 거부감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의 '투표거부'는 공당으로서는 좀 적절하지 못한 감이 있다. 그냥 불참도 하나의 의사표시입니다라고 구호를 바꾸었거나 투표 문항이 사실상 찬반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좀더 교육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착한 시민, 모범 시민으로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시민으로서 투표에 참가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아마도 40대 이상의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법을 어기지 않고 언제나 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 이런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들에게 주입된 '시민교육' 에 대해 우리는 전면적으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일제와 군사정권의 노예교육을 주목해야 한다. 안중근을 법정에 새운 일본 검찰은 안중근이 불효라는 점을 적극 지적하면서 야단쳤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제의 보통교육과 조선인 교육은 모두가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인간 양성에 두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독일 강제수용소의 최고 책임자 히믈러의 좌우명은 "무엇을 하든지 예절바르게"였다. 파시즘은 언제나 법과 질서를 내세우면서 국민들에게 순종을 강요하였고, 일탈을 죄악이라고 가르쳤다. 해방후 이러한 모범인간 육성 교육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국가를 물신화하는 것이었다. 유신 찬반투표를 묻는 선거의 투표율은 99 펴센트를 넘었다.

민주국가에서 선거참여가 중요한 권리행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물신주의, 선거물신주의는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선거의 메뉴판에는 최상의 후보가 등장하지 않는다. 분단 하 한국에서는 좌익은 물론 진보적 자유주의자도 메뉴판에 등장할 수 없게 되었고, 돈이 없는 사람은 메뉴판의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즉 무조건 선거 참여론은 메뉴판에 오직 불고기와 돼지갈비만 올려놓고 고기 못먹어서 김치찌게와 된장찌게를 찾는 고객에게 왜 주문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다.

유권자들은 선거에 임해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선택지가 있다.

메뉴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투표장에 가지 않을 권리
선거가 세상을 바꾸지 않을 것 같아 투표장에 가지 않을 태도

투표장에 가되 무효표를 만들어 거부 의사를 표시할 권리
투표장에 가되 그 중 최선은 아니지만 차악을 택할 권리
투표장에 가되 그 중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후보를 택할 권리

즉 유권자들의 행동에는 적어도 이 다섯가지의 별개의 태도가 담겨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투표는 정확히 말해 후보를 선출하는 투표가 아니라 의사를 표현하는 투표다.
따라서 선거와 투표는 성격이 다르다. 투표장에 가지 않을 분명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더구나 메뉴판이 찬반도 아니고 애매한 문구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드시 투표장에 가야 한다는 이 모범생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들 국가나 법과 제도에 순종적인 인간들을 이 메뉴판의 성격과 기원, 법의 성격과 기원에 대해 깨닫도록 해주는 진정한
민주시민 교육이 필요하다.
일제 노예교육의 유산은 21세기에도 한국사회에 드리워져 있다.








2011년 8월 21일 일요일

현대판 애절양(哀絶陽), 자식 4명 버린 어머니

경남 남해경찰서는 19일 자신의 갓난아기 4명을 잇따라 내다버린 혐의(영아유기)로 주부 정아무개(39)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정씨는 지난달 24일 오후 2시40분께 경남 남해군의 한 사회복지시설 화장실에서 혼자 아이를 낳은 뒤, 비닐봉지에 아이를 담아 근처 주택가 빈터에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정씨는 2006년 8월2일, 2008년 8월15일, 지난해 5월29일에도 아이를 낳아 빈터 등에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남편이 월 150만원 밖에 못 버는 택배기사였기 때문에 이렇게 아이들을 4명이나 버렸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명한 시 애절양이 생각이 났다.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 본인, 갓 태어난 아기까지 군역을 하는 것으로 등록되어 가혹한 세금을
추징당하게 되니까 그것이 두려워 남자의 성기를 잘라버린 사람의 슬픈 이야기다.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노전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소리

哭向懸門呼穹蒼[곡향현문호궁창]: 현문을 향해 슬피울며 하늘에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부복상가유]: 쌈터에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남자가 그 걸 자른 건 들어본 일이 없다네

舅喪已縞兒未조[구상기호아미조]: 시아비 상복 막 벗고, 아기는 탯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삼대가 다 군보에 실리다니

薄言往塑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가서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里正咆哮牛去皁[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마굿간 소 몰아가고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조정에선 모두 태평의 즐거움을 하례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누구를 보내 위태로운 말로 포의로 내쫓는가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자식 낳아 군액 당한 것 한스러워 그랬다네

蠶室淫刑豈有辜[잠실음형기유고]: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 당했던가

閩子去勢良亦慽[민자거세량역척]: 민땅 자식들 거세한 것 그도 역시 슬픈 일인데

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 자식낳고 사는 이치 하늘이 준 바이고

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건도녀]: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騸馬豶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 불깐 말 불깐 돼지 그도 서럽다 할 것인데

況乃生民恩繼序[황내생민은계서]: 대 이어갈 생민들이야 말을 더해 뭣하리요

豪家終歲奏管弦[호가종세진관현]: 부호들은 일년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粒米寸帛無所捐[입미정백무소연]: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똑같은 백성 두고 왜 그리도 차별일까

客窓重誦시鳩篇[객창중송시구편] :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그 시절
세금이 그 얼마나 가혹하면 남자의 그것(?)을 잘라 자식을 낳지 않으려 했을까?
그리고 오늘
생활고가 얼마나 가혹했으면 자기가 낳은 자식을 4명이나 버렸을까?

경찰은 정씨에게서 정신적 이상 등 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언론은 이를 두고 '비정한 엄마'라 했지만 비정한 것은 엄마가 아니라 세상이다.
다산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조정에서는 태평"을 즐기고 "부호들은 일년내 풍류만 즐기" 는데 백성들은
거세를 해야 살아남은 세상이니 과연 백성의 비정함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전관예우로 어떤 검찰출신 변호사는 일년에 120억을 벌었다 하고, 대기업 가족들은 가만 앉아서 주식 차액만으로 수십조원을 벌었다고 하는데, 월 150만원 밖에 못버는 택배기사의 아내는 몇 십만원이 없어서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을 버리는 세상이다.

다산이 살던 시대에서 200년이 지났건만, 과연 지금 우리는 문명국가에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삶의 질이 27위라고 말한다. 지금 동시대의 OECD 국가 중에서 생활고로 자식을 4명이나 버리는 국민이 있는 나라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2011년 8월 18일 목요일

조남호 청문회 유감

청문회 생중계를 보지 않고 언론보도만 봐서 한계가 있겠지만,
조남호 청문회는 대체로 도덕성에 대한 질타와 호소 (읍소)로 일관된 것 같다.

국회 청문회는 그가 정리해고 과정에서 법을 어겼는지, 그리고 기업으로서 종업원, 노동조합 그리고 국민에 대해 어떤 점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했는지에 두었어야 했다.
기업의 경영권에 관한 내용은 사실상 건드리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실패판 경영자 운운 비판도 그에게는 치명타가 아니다. 정동영 의원이나 김진숙씨가 문제삼은 자살한 두 사람을 그가 알고 있었는가 모르는가의 문제는 도덕적 영역이 법적 사회적 영역은 아니다. 정리해고 철회에 대해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가 이런 점을 확실히 준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초점은 정리해고 관계법의 '긴급한 경영상의 이유'에 합당한 조치였는지가 초점이다. 이 점에서 홍희덕 의원과 이범관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 즉 주주에게 440억 배당한 일을 문제삼은 것이 오히려 핵심에 다가선 것이다. 임원 임금인상과 정리해고는 사실상 모순인데, 이것은 '기업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해고의 실제 목적과 관련된 것이다. 즉 공장의 완전 이전 의도, 탈세의도, 그리고 부산 영도의 거대한 땅부지 매각으로 인한 이익을 노린다는 세간의 의혹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어야 했다.

한진중공업의 영도 땅 부지가 어떻게 조성된 것인지 잘 알수 없으나 한진의 박정권과의 깊은 유착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대한항공, 한진의 성장은 3,4,5공의 특혜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진의 자산은 국민 세금으로 상당 부분 얻은 것이므로, 이 점을 문제삼아서 한진 공장이전의 국가적 사회적 책임 문제를 추궁했어야 했다. 사기업이지만 사실상 국민기업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은 그 점을 파고들어 정리해고의 부당성을 지적했어야 했다. 당연히 부산시, 부산시민도 여기에 대해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는데 이번 청문회에서 그러한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한진이 필리핀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착취 때문에 그 나라 노동자들에게도 악명이 높다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기업의 노사관계에 대해서도 문제삼았어야 했다.
그런데 한진 노동자 측의 목소리도 거의 없었다.

결국 이 청문회에서 무엇을 얻었는지가 참 의심스럽다. 그리고 왜 청문회를 하자고 했는지, 민주당에서는 무슨 전략으로 임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는 마지막에 정치권은 물러서 달라고 말했다. 노사자율로 하겠다는 것이다.
한 기업이 공장을 통째로 외국으로 옮기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데 어떻게 이게 노사자율의 문제인가?
또한 국회위원은 정치권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 부산시민, 그리고 국민을 대표해서 그에게 물었던 것이다. 과연 국회위원들은 그 역할을 했나?



2011년 8월 17일 수요일

갑자기 정의의 사자가 된 국회의원들

국회지식경제위원회에서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등을 소환해서 대기업의 행태에 대해 질타를 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이화수 의원은 "30대 재벌 계열사는 2006년 500개에서 지금 1080개로 늘었다"며 "재벌들이 유통·식품·학원 등 업종까지 침범해 중소기업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고 질타했다. 민주당 조경태 의원도 "대기업이 중소기업 영역을 침범해 심지어 떡집, 어묵가게까지 진출하고 있다"며 "대기업의 과도한 영역 침범은 경제의 선순환 구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전경련은 개발시대의 이익단체 성격을 탈피해야 한다"며 "발전적으로 해체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을 마련하는 싱크탱크를 설립하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강창일 의원도 "전경련을 해체하는 것이 대기업과 국민경제를 위해 낫다"고 지적했다.

질의 과정에서는 탐욕, 야수, 정글, 먹이사슬 등 대기업 행태를 비난하는 원색적 단어가 등장했고, 경제단체장들은 부자 증세를 거론한 미국의 부호 워런 버핏을 본받아야 한다는 쓴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조경태 의원은 "일본 기업가 중에 '배부른 사자는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기업가는 국민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경제학의 극히 기초적인 교과서라도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기업은 도덕군자가 아니다. 이익이 되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것이 기업의 생리다. 그들이 중소기업 고유업종에 마구 침범하는 것은 그들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아니라, 그렇게 해도 아무런 처벌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주식시장의 52%를 점하고 제조업의 매출의 41%를 점하는 것은 총액출자제한 페지, 법인세 등 각종 감세조치 등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의 예상했던 결과였다.
전경련이 있기 때문에 대기업들의 경제력 집중이 더 심화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국회를 포함한 모든 감시기관이 승자의 독식을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장려한 결과가 이렇게 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건희 회장 한번 소환도 하지 못한 국회가 그 책임의 상당부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와서 겉으로는 무슨 정의의 사자차럼 호통을 치고, 저녁에는 이들에게 손벌리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는 정치가들이 있는한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그들이 대기업에게 이렇게 호톨칠 정열이 있으면 우선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전면 비판해야 한다. 그것은 하지 않은채 기업주 앞에서 국민들 보라고 쇼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2011년 8월 12일 금요일

돈 많은 사람들의 녹색 희망? [2011.08.15 제873호]

2011년 8월 15일, <한겨레21> 제873호에 올라온 기사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2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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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사람들의 녹색 희망? [2011.08.15 제873호]

[출판] 부유한 자들의 정당으로 우경화 길 걷는 독일 녹색당 비판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8월호


지난 5월30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22년까지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첫 번째 원전 포기 선언이었다. 여기에는 1998년부터 비롯된 사민-녹색 연립정부의 반원자력 정책의 역사와 더불어 올해 들어 약진한 녹색당의 노력이 한 바탕을 이루었다. 나아가 독일 미디어들은 2013년 녹색당 총리의 탄생을 점치고 있다. 메르켈 총리도 “2013년 총선에서 기민당과 녹색당 간 연정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녹색당, ‘자전거를 타는 자유당’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기 마련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 디플로>) 한국판 8월호는 독일의 녹색당 바람에서 도리어 ‘위기’의 징후를 읽는다. 올리비에 시랑 <르 디플로> 특파원은 녹색당이 ‘자전거를 타는 자유당’으로 변신했다고 비난한다. 당의 본거지인 함부르크에서 녹색당이 부유세 감축을 승인하고 복지수당과 실업수당의 통합에 동의하는 등 “15년 전부터 완벽한 행동의 변화를 보여왔다”는 것이다. 68혁명의 후계자이자 좌파에서 출발한 녹색당은 풍부한 연정 경험을 거치며 이미 집권 체질로 ‘우경화’됐다. 이는 당 노선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정치인’이라 불리며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요슈카 피셔는 부총리와 외무장관을 지낸 이력을 바탕으로 컨설팅 회사 ‘요슈카&코(co)’를 설립해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 BMW와 지멘스, 유럽 거대 할인마켓 레베 등이 주요 고객이다. 이 밖에도 녹색당 경력을 팔아 원자력 업체에 취직하는 등 돈방석에 앉은 요슈카 피셔‘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그렇다면 녹색바람의 진원과 종착지는 어디일까. 시랑은 16년 동안 녹색당에서 일하다 당을 등진 노르베르트 하크버스크 판사의 말을 인용한다. “열정도 없고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실용주의 노선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녹색당이) 순풍을 타고 있다. …부자도 많지만 빈자도 많은 함부르크에서 헐벗은 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거나 녹색당을 찍지 않을 것이다.” 소외계층이 굳이 우경화한 녹색당을 찍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녹색당의 자유주의화가 못마땅한 <르 디플로>에 유럽 정치권이 보낸 지난 3년은 ‘금융위기의 뒤치다꺼리’를 해온 시절이었다. 경제학자인 프레데리크 로르동은 이제 본격적인 탈세계화를 선언하자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현 상황을 ‘세계화’라 부르기로 쉽게 의견을 모았듯이, 현 자본주의 질서와의 단절도 아주 쉽게 ‘탈세계화’라고 부르기로 의견 일치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깡패 자본주의’


세계화로 통칭되는 약탈적 자본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깡패 자본주의’(Gangster Capitalism)로 도드라진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백주 대낮에 철거 용역이 주민들에게 식칼을 휘두르고 여성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거나 성폭력을 가해도 경찰이 비디오게임을 보듯 지켜본다”며 “폭력·청부업자들이 공권력과 합작하거나 공권력을 대신하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폭도 자본주의’(Mob Capitalism), ‘깡패 자본주의’라 명명한다. 그는 “한국의 철거·파업 현장의 용역 폭력을 보면, 한국은 약자에게 가난이 어떻게 죽을 죄가 되는지를 가장 처절한 방식으로 가르쳐주는 자본주의 국가”라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타락한 형태의 자본주의”라고 비판한다. “공공성은 완전히 실종되고 철저한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곳에는 법도 공권력도 정지된다”는 그의 말에서 용산참사와 유성기업, 한진중공업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국가폭력 낳는 ‘비명령적 명령’ [2011.08.15 제873호]

2011년 8월 15일, <한겨레21> 제873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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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낳는 ‘비명령적 명령’ [2011.08.15 제873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용산 참사에서 민간인 학살 부른 한국전쟁기 토벌작전을 보다 ③
군경, 최고권력자의 묵시적 방침과 노선 의식해 강경 진압 나서


2008년 6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불법·폭력 시위에 대한 엄정 대응’ 방침을 천명했다. 이후 전경의 진압은 난폭해졌고, 쓰러진 시민을 군홧발로 폭행하기도 했다. 그해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법치’를 유난히 강조했다.

서울 용산 참사 관련 수사에서 검찰은 경찰특공대의 진압작전과 그에 대한 대항 과정에서의 화재 발생, 철거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다고 결론을 냈다. 검찰은 조사 과정에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서는 두 차례의 서면조사, 경찰관들에 대해서는 단순진술로 마무리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물러난 김석기 청장을 일본 오사카 총영사로 임명했다.


휴지 조각 된 경찰 직무집행 매뉴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의 자서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 공비 토벌작전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보고는 관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를 듣고 싶어했다”라고 회고했다.

한국전쟁기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군이 민간인 700여 명을 학살한 거창사건 당시 9연대장으로 지휘책임이 있던 오익경은 재판정에서 “조속한 시간 내에 공비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비등했으나 이승만은 “그렇게는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노발대발했다. 결국 신성모는 해임 이후 주일대표부 대사로 임명돼 일본으로 갔다.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은 여론이 비등하자 체포돼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나 곧이어 특사로 출감했으며 이후 재임용돼 치안국장까지 승진했다.

용산 진압 당일 최종 결재권자인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사건 당시 근무 중이었으나 무전기를 꺼놓았다고 답변해서 자신은 용산 참사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한 바 있다. 최종 명령자가 작전 중에 무전기를 꺼놓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변명이지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가 막 임명된 시점에 민간인 5명과 특공대원 1명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23명(경찰 16명)을 심하게 다치게 한 무리한 작전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한국 경찰의 경찰직무집행법에도 “경찰관의 직권은 직무수행에 필요한 최소한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하며 이를 남용해서는 아니된다”는 비례의 원칙과 관련한 규정이 있고, 수단은 목적을 실현하는 데 적합해야 한다는 ‘수단 최소 침해의 원칙’과 수단으로 인한 침해가 목적상의 이익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수단의 상당성의 원칙’도 있다. 지금의 ‘민주’ 경찰은 자신이 만든 집회·시위 현장 법 집행 매뉴얼이 있고, 이 매뉴얼에는 화염병 등 위험물질 소지 여부를 파악해서 작전상 장애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며(선 화염병 소진, 후 검거), 국가인권위원회와 경찰청이 공동으로 만든 교재에는 폭력적 집회를 해산하는 경우에도 ‘최소한의 물리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 그런데 용산 참사 때 투입된 특공대원들은 “시위 현장에 인화성 물질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화재 대비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고,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진압 직전 직무집행 매뉴얼을 교육받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오직 특공대장의 재촉 무전만이 그들의 진압작전을 지배했다.

오늘의 경찰은 토벌 투입 이전에 병사들이 지켜야 할 매뉴얼도 없고, 민간인의 생명 보호에 대해 조그만 교육조차 받지 않고 무조건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한국전쟁기 토벌군, 1945년 이전 일본 천황의 군대가 아니다. 그런데 왜 ‘민주’ 경찰의 직무집행을 위한 모든 매뉴얼은 용산 진압작전에서 휴지 조각이 되었는가?


무관심·침묵·불개입은 또다른 명령


군과 경찰은 상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래서 군과 경찰의 작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패나 부수적 피해의 대부분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보다는 상부 명령권자의 지시·명령과 직접 연관돼 있다.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무기를 소지한 경찰과 군의 작전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대단히 엄중하고, 명령계통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그 엄중함과 책임감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군·경찰 최고지휘관의 판단과 명령은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군경 지휘관의 판단과 명령은 자신의 임명권자이자 최고의 지휘관이자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정책 방침을 따른다.



경찰에게 데모 진압은 군에게 토벌작전과 마찬가지다. 예측불허의 전투 상황에서 군과 경찰의 작전은 지휘자의 명시적 명령을 따르지만 이 지휘관은 바로 최고권력자의 묵시적 방침과 노선을 의식한다. 흔히 최고권력자는 명령이 아닌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흔히 ‘비명령적 명령’이라고 한다. 즉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의 평소 방침과 발언, 인사, 포상·처벌을 보고 아랫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야 칭찬받는지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고명령자는 말을 통한 우회적 강조뿐만 아니라 무관심·침묵·불개입을 통해서도 영향을 준다. 즉 대통령이 노동자 파업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도 진압 때 인명피해가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추가하지 않는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진압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신속히 진압하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경찰 총수는 진압작전 때 발생할지 모르는 ‘부수적 피해’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책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며 오히려 강하게 진압하지 않을 경우 문책당할 것임을 알아챈다.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지닌 나라에서 군사작전시 비명령적 명령은 명령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조직문화상 일방적 복종이 중시되고 절대 충성이 승진을 보장해주는 군·경찰·검찰 등 권력기관의 수장들은 실적 쌓기 충성 경쟁을 벌여 대통령이 실제 원하는 것을 2배, 3배로 실천하려 하는 경우도 많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행위에는 언제나 시간 변수가 개입한다. 과거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해석이 지금의 그에 대한 내 행동을 좌우한다. 그런데 관료조직에서 상대방이 내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가장 중요한 타자, 즉 인사권자라면 그가 이전에 어떤 사람을 포상·처벌했는지가 내 행동을 좌우할 것이다.


촛불에 ‘불법 무관용’ 천명한 MB


해방 직후 각종 테러사건을 일으킨 김두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두한은 정부 수립에 공헌이 많으므로 형을 특사한다”라며 풀어주었다. 그 뒤 이승만 정권하의 군·경찰 지휘부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더라도 반공 노선만 철저하면 언제나 면죄부를 받고 승진과 출세도 보장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승만이 정보장교들에게 “누구 조사해봐라”라고 하면 이는 곧 측근들에 의해 ‘처치해버려라’는 말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실제 이승만의 뜻이기도 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토벌에서나 전쟁 직전 지리산 일대 토벌작전에서도 민간인을 많이 죽여서 처벌당한 지휘관은 거의 없었지만 토벌을 제대로 못한 지휘관은 엄한 문책을 당했다. 1951년 거창사건의 경우에도 대대장 한동석은 연대장으로부터 토벌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한 질책을 받은 다음 곧이어 수백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한국전쟁기 군에 의한 학살이 만연한 것은 이런 이승만의 비명령적 명령의 효과로 볼 여지가 많다.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시위에 대해 ‘불법 무관용’ 원칙을 강조했다. 즉 그는 ‘시민의 안전권 보장’과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불법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반드시 추궁하고 불법 사태 종료 뒤에도 불법행위자는 끝까지 추적·검거해 엄벌에 처하겠다고 했다. 시민을 (불법) 시위자와 대비시키고, 시위자는 무조건 진압해 엄한 처벌을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촛불시위 초기 온건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한진희 서울경찰청장이 전격적으로 경질되었다. 그러나 과잉 진압 건으로 퇴진 압력을 받던 어청수 경찰청장은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퇴진 압력에도 거뜬히 자리를 지켰다. 청와대의 신임이 확고했다. 그래서 그는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퇴진했다. 2009년 1월20일 용산 참사 직후 김수정 서울경찰청 차장은 바로 대통령이 촛불시위 진압 당시 강조했던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상황’을 가장 큰 진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대통령과 경찰 총수 등이 강조한 ‘법’ ‘질서’란 시위대나 도시 빈민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시민이란 사실상 정권을 의미했다. 용산 진압의 명령자들은 그 전 해인 촛불시위 당시 대통령이 보인 비명령적 명령에 충실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거창사건 책임자들을 전원 사면·복권시킨 것은 그가 민간인 학살을 죄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당시 사건을 조작하려 했던 김종원의 석방을 이기붕이 반대하자 이승만은 김종원을 충무공 이순신에 비유해 석방시키라는 담화를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떠했나? 이명박 대통령은 쇠고기 협상에서 굴욕적인 타협을 했다고 비판받은 협상 대표 민동석을 외교통상부 차관에 재기용했고,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한나라당 최고위원으로 앉혔다. 협상에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의중대로 행동한 사람이라면 국민의 지탄을 받더라도 끝까지 밀어준다는 강한 신호를 보냈다. 대통령의 이러한 인사·포상 정책은 관료들로 하여금 국민의 인권이나 생명을 무시하더라도 그에게 더욱 강한 충성을 보이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법 위에 있는 대통령의 말과 의중


그래서 군사작전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은 말단 병사나 현장 지휘관보다는 상위의 명령권자, 그리고 그를 임명한 사람에게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한국식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의 말과 의중은 법 위에 있다. 설사 법과 절차를 어겨도 그의 의중에 따르기만 하면 민간인 피해도 용납되는 것은 물론 출세까지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상부의 명령은 엄중하나, 인권 보호는 먼 나라 이야기다. 진압 때 농성자들을 다치지 않게 주의하라는 식의 상부 지시는 하나도 없었지만, 법과 질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농성자들 때문에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인사권자의 지적은 무서운 비명령적 명령으로 다가온다. 한국전쟁기와 마찬가지로 진압부대장에게는 전과의 압박이 모든 작전 과정을 지배했을 것이고 진압 과정에서 발생할 불상사에는 책임질 필요가 크지 않았다. 이 경우 당신이 지휘관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용산 참사의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할 것인가?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8월 10일 수요일

40년 전 경기도 광주(성남), 오늘의 영국

어제 광주대단지 8.10 사건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성남 시청에서 열렸다.
그 동안 민간주도로 진행되던 이 사건 기념 행사가 시청에서 열리게 된 것은 아마도 민주당 이재명씨가
시장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광주대단지 사건'을 지역의 부끄러운 역사로 간주하여 지워버리려하는 보수 쪽 시의원들은 이 행사를 위한 추경예산을 통과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행사는 지역언론사 협의체 주도로 열려게 되었다.
어제의 행사에서도 약간의 긴장이 있었다. 주최즉은 나와 조명래 교수를 불러서 '난동사건'이 아닌 빈민항쟁의 성격을 부각시키려 하였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이러한 시각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왜 광주대단지 사건이 성남 탄생의 배경으로 거론되어야 하며, 지역정체성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가라는 것이 그들의 항변이었다.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광주대단지 사건은 20세기 한국 최대의 빈민폭동이자 한국정부의 도시건설, 주거정책, 철거민 및 무허거정착지 주민 대책의 시원을 이룬다. 용산참사에 이르는 한국 도시정책의 성격은 여기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시건이 난동사건으로 공식규정되어 모두가 그것을 잊어버리려 해 온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아무도 이 사건을 연구하려고 하지도 않아서 사실 비전공자인 내가 10년전 그리고 어제 두번이나 학술행사에 불려갔다.
하여튼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는 중상층의 도시 분당과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성남 지역 간의 화합을 어떻게 이룰 것이며, 지금 시작된 성남 재개발을 어떤 철학과 정책적 기조 하에 추진할 것인지는 성남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데 광주대단지 사건이 오늘의 영국 폭동과 자꾸 겹쳐지는 것은 이 두 사건 모두 도시폭동이라는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광주대단지 사건도 주로 20살 전후의 청년들이 주도하였고, 오늘의 영국 폭동도 그러하다. 당시의 젊은이들도 심각한 실업과 빈곤에서 절망의 끝에 폭력으로 분노를 표출하였고, 오늘 영국 젊은이들도 그러하다. 당시의 젊은이들도 관용차와 관공서를 불태웠듯이 이번의 영국 청년들도 가게를 불태우고 일부 관공서를 공격하기도 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이 두 사건에서 공히 나타난다. 좌절과 분노는 이 두 사건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조다.

그리고 광주대단지에서는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일자리를 달라는 등 청원성 구호를 내걸었다. 광주대단히 사건은 이웃을 타겟으로 삼지는 않았다. 즉 도덕 공동체가 붕괴된 상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 영국은 지역공동체의 완전히 붕괴상태를 보여준다.
당시 광주대단지는 모두가 못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영국은 쇼윈도우에 진열된 상품과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청년들의 좌절감이 더 큰 요인이다. 즉 기회와 불평등, 사회적 배제, 미래에 대한 불안 즉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심각한 양극화가 오늘 영국 폭동의 실제 배경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폭력의 방식으로 표출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점에서 40년전 광주대단지와 오늘의 영국, 그리고 세게는 매우 닮아있다. 폭력은 정치의 실종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정부와 정치가 이들 가난한 청년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상황. 그것에 대해 우리는 해결책을 내 놓아야 한다.




2011년 8월 9일 화요일

영국의 폭동확산, 어떻게 볼까?

런던 북부 지역에서 시작된 폭동이 버밍햄, 맨체스터 등 주요도시로 확신되었고,
런던에도 더 많은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청년들은 대형 쇼핑 몰 창문을 부수고 물건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경찰력을 6,000명에서 16,000명으로 증강했지만, 폭동 진압에는 역부족이다.
각 도시의 시민단체나 지역지도자들이 지역공동체 보호를 위해 나섰다고 한다.
폭동이 얼마나 더 확산이 될지, 정말 계엄령이라도 선포될지 알수는 없지만, 이 폭동이 주는
의미는 대단히 의미 심장하다.

실업과 빈곤이 만연한 지역, 복지의 사각지대, 소수자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주는 메세지가 있다. 이것은 좌절과 분노의 표출이지 그 어떤 대안이나 목표도 없다.
약탈과 방화는 심각한 범죄행위다. 그러나 사실상 영국의 경찰이나 언론, 대기업 금융가 자체가
심각한 범죄행위를 이미 저질렀다. 머독과 도청 스캔들이 바로 그것이다. 경찰의 권위, 집권 보수당의
도덕적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지난 30년 이상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과격한 민영화는 온 영국 국민을 탐욕의 노예로 만들어서
사회를 묶어주는 시멘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1992년 LA 흑인 폭동이 연상이 된다.
약자가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희망을 갖지 못하고, 도덕적 유대가 파괴된 사회에서 나타난 전형적 현상이다. 광범위한 약탈은 그러한 사회 해체의 징후다. 사회를 해체시킨 장본인이 바로 대처 전 수상이다. .
"사회,그런 것은 없다" 대처의 유명한 말이 아닌가? 이 폭동은 바로 '사회'가 없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디 경제가 사회없이 굴러가는가? 신자유주의자들이 답해야 한다.

이 폭동은 물론 정당한 것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지만, 폭동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은 바로 30년 동안 영국을 이 모양으로 만든 신자유주의 세력, 어설픈 제3의 길을 주장한 노동당 엘리트들이다.

영국의 신문들도 지금 허둥대고 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분석할지.





2011년 8월 8일 월요일

런던 대폭동



런던 북부 Tottenham, Edmonton, Brixton 지역에서 며칠 째 폭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데모대는 상가, 백화점, 건물의 창을 마구 부수고, 물건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경찰은 200여명을 체포했지만 폭동 진압에는 역부족이다.

이 사위는 지난 주 목요일 Mark Buggan 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에서 촉발되었다. 특히 소수자 혹인 등에 대한 경찰의 인종적 차별이 분노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 폭동지역은 빈곤, 실업가 런던에서도 매우 심각한 곳으로 알려져있으며 아동 사망률도 런런의 다른 지역의 4배에 달하고 실업은 두 배에 달한다고 한다.

폭동 가담자는 주로 소수자, 흑인 청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직 자세한 분석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다.
이 시위는 작년 이래 런던에서 계속되던 시위 즉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시위, 실업가들의 가두시위, 50만 노동조합원의 데모 등에 이은 광범위한 대중적 불만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근본원인은예산삭감이며,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이다.
상위 10%가 나머지보다 100배 더 잘 살고, 사회이동의 기회가 가장 심각하게 차단된 곳이 영국이다.
이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한 이 폭동을 잠재울 방법은 없어 보인다.
과연 한국은 어떠한가?

2011년 8월 7일 일요일

아랍의 봄, 이스라엘의 여름



이스라엘 11개 도시에서 수십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들은 생활고 해소, 사회정의, 부패척결을 외치고 있다.
이스라엘의 빈곤선 이하의 인구는 무려 24% 로서 OECD 국가 중 최하위라고 한다( 한국은 15%)
그리고 불평등의 정도( 지니계수)도 OECD 국가 중 거의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물가 상승은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집값이 무려 2배나 폭등하여 온 국민들은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스라텔 정부가 불법 침공과 학살을 그렇게 벌일 때 반대시위한번 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 문제가 닥치니 이렇게 시위를 하고 있다.
바로 아랍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해 최강경 내탄야후 정부가 지금 경제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안보를 빌미로 하여 국내 대기업에 특혜를 주고 국민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은 장본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오늘의 경제 문제는 사실 자기들의 외교안보 문제와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이 국가안보지상주의와 반공주의가 재벌에 대해 무소불위의 힘을 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웃 시리아에서 무려 2,000명이 민주화과정에서 사망한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관심하다. 이스라엘 양심세력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원컨데 이번의 시위가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아랍권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
국민국가라는 테두리, 그리고 미국의 후원하에 자기들말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깨어나야 중동의 평화가 올 것 같다.
국민들을 저렇게 학살한 시리아 독재정권이나 이스라엘 내탄야휴 정권이나 따지고 보면 미국의
중동정책의 파트너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 적대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중동의 변화는 미국의 변화를 압박할 것이고, 그것은 세계질서를 요동치게 만들 것이다.
물론 한반도의 변화도 동아시아 질서를 변화시키고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듯이 말이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대한민국 '우익'의 생얼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이른바 한국 '우익'의 생얼이 또다시 드러났다.

김상태는 공군참모총장과 성우회 회장을 지낸 한국 군 출신의 대표주자이다.
그는 25억원을 받고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마틴사(社)에 군사기밀을 넘겨왔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1984년 공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예편한 뒤에도 퇴역장성들 모임인 '성우회' 대표를 역임하는 등 한국 우익의 상징적 인물로 활동을 했다. 성우회 회장이던 2006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전시 작전통제권을 회수하려 하자 이를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매국적 행위라며 강력 반대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말했던 매국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다. 미국에 군사기밀을 넘기는 것은 애국이고, 자주국방을 하자는 것은 매국이라는 것인데, 자주국방이 되면 왜 그의 이익이 침해되는지 드러난 셈이다

그는 2007년 대선때 누구보다더 이명박 후보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성우회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퇴임사를 통해 "지난 2년은 어느 때보다 친북세력의 발호로 국가안보가 위협받은 기간이었다"며 "성우회원을 비롯한 국민들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국가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돼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우익에는 4가지 부류가 있다. 생계형 우익, 출세형 우익, 범죄은폐용 우익, 소신형 우익이다.
이번의 김상태는 그 전에 작통권 반환을 그렇게 반대했으니 겉으로는 소신형 우익인것 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번 국가기밀을 미국에 돈 받고 팔아넘긴 일을 보니 범죄은폐형 우익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 똥별의 대명사 이상훈 전국방부장관이 연상이 된다.
그는 노무현 전대통령 삼족을 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봉은사에 좌파본부가 있다고 색깔 공세를 폈던 사람인데 과거 진로건설, 현대정공으로부터 금품을 받았고, 율곡사업 관련 구속된 적이 있던 사람이다.

심리학적으로볼 때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험악한 담론을 사용하는 사람들수록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다. 공격성은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자신의 죄가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강경 우익은 범죄은폐형 우익일 가능성이 크다.
소신우익은 결코 상대방을 험악한 담론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거 전혀 새로운 것 아니다. 해방 후부터 그러했다.
이들 범죄은폐형 우익이 대한민국의 우익의 주역으로 어떻게 행세해왔는지, 진짜 우익이 어떻게 이들에게 탄압을 받았는지 장차 내가 밝힐 예정이다. 지금 연재중인 <한겨레 21>지면을 통해서 ....

2011년 8월 3일 수요일

군 출신 중 애국자를 보고 싶다

군에 사병으로 근무하던 중 나는 진짜 반공주의자나 애국자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을 존경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군이 그렇게 겉으로 떠드는 국가관이 투철한 애국자,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지휘관을 2년 근무하는 동안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물론 내가 말단 부대 사병으로 근무했으니 내가 접한 장교들 수는 그리 많지 않고 나의 경험도 제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내가 본 장교들은 거의가 승진과 출세에 목을 매단 관료들이었다.
한국의 장교 교육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진짜 반공주의자, 진짜 국가관이 투철한 장교들은 진급에서
모두 탈락했기 때문일까? 한국군대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일까?

80대 군 원로가 중요한 군 기밀을 미국에 빼돌리고 25억을 챙겼다고 한다.
이 사람이야 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국가의 기강, 국가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해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 아닌가? 이런 자가 최고 지위까지 올라간 군대, 그 군대는 어느나라 군대일까?

그런데 대법원에 따르면 2005년 이후 지금까지 6년반 동안 재판받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자만 25건에 5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육·해·공군 본부나 방위사업청 ,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군수(軍需)와 정보·작전 분야를 맡다가 예편한 뒤 우리 군의 미래 전략과 이에 필요한 다양한 신무기 도입 관련 기밀들을 빼내서 돈을 챙겼다고 한다. 검찰 측 관계자는 "적발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광범위하게 만연돼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50여명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전원 집행유예나 선고유예 등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우방에 정보를 넘겨 현실적인 위험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게 주된 이유다.
하하하 이럴 땐 크게 웃어야 한다. 미국 기업에 외환은행을 넘긴 경제관료들도 모두 우방 기업에게 외화유치 차원에서 기업을 념겼으니 국가에 손실을 초래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는 이야기인가?
그러니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헐값에 넘긴 사람들 한 사람도 처벌당하지 않은 것 당연한 일 아닌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건, 즉 미 해군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재미교포 로버트 김(71·한국명 김채곤)씨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등 대북 정보를 주미 한국대사관에 넘겼다는 이유 등으로 징역 9년에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만 미국을 짝사랑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군은 과연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군 출신 군 원로 중 진짜 애국자를 보고싶어하는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일까?

2011년 8월 1일 월요일

[세상 읽기] 정치만능에서 벗어나야


2011년 7월 25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889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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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한 일 중 최악은 바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할 조직들까지
온통 ‘적과 나’로 정치화시킨 것이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비하한 대표적인 일본인 식민사학자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 사회는 정치력 일색으로 이루어져 정치 하나로 지탱되고 있다.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이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의 여러 주장 가운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많지만, 이 점은 씁쓸하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길은 정치로 통하고, 각 사회 부문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정치로 가고, 온 국민이 온통 정치 이야기를 술자리의 안줏거리로 삼는 지극히 정치적인 인간들의 나라, 그것이 조선시대와 그 이후 우리의 모습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한 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악의 것이 있다면 바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할 조직들까지 온통 ‘적과 나’로 정치화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촛불시위 이후 기업의 시민단체 후원금 차단 조처에서 시작하여 최근 <문화방송>(MBC) 라디오의 진행자 교체 및 출연자 제한 사건이나, 비리재단에 사학 되돌려주기, 검찰의 전교조 정치후원금 수사 등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진 모든 사건의 성격은 거의 동일하다. 정치단체가 아닌 기업, 교육, 언론 모든 영역에서 ‘좌파 적출’의 기치 아래 ‘적과 나’의 정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일단 모든 조직에 자기 사람을 앉힌 다음에는 그를 통하여 내부에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자리에서 밀어내거나 지방으로 좌천시키거나 아예 해고시켜 버리는 일은 바로 표적이 되는 인물이 아무리 그 일에 적임자라고 하더라도 ‘우리 편’이 아니면 밀어내겠다는 논리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관료조직은 물론이고 기업, 미디어, 학교, 심지어는 종교단체까지도 모두 권력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고, 국민들도 검찰, 언론, 관료조직이 하는 모든 일을 정치행위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적이니까 무조건 처벌되어야 하고, 우리 편이니까 봐주어야 한다는 이 후진적인 정치논리가 부활함으로써, 밀려난 사람들은 모두 실력과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정권교체를 해서 복수를 해주어야 한다는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다. 그래서 야권은 정권을 반드시 교체하여 모든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현 집권 세력은 재집권에 성공하여 이런 복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예 재기하지 못하도록 없애려 할 것이다. 말단 공무원의 승진이나 연구재단의 프로젝트 선정까지도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게 되고 방송사의 일개 프로 제작 내용도 정권의 입김을 받는 나라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정책대안이 꽃필 수 없고, 소신 있는 전문가, 참기업인, 참언론인, 참종교인이 길러질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다카하시 도루가 말한 것처럼, 권력을 둘러싼 적대적 대립은 온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하였고 궁극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자, 우리 사회가 다시 조선시대로 가야 하는가?

내년 선거를 둘러싼 야권연합 논의가 활발하다. 다가오는 전투의 수장이 누가 될지 초미의 관심이다. 물론 전투에서는 승리해야 하고 승리를 위해 장수의 구실이 최고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야권 역시 “이겨서 전리품 나눠 갖자”는 동기에 움직인다면 설사 이긴들 국민들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반듯한 나라를 만들어서 국민의 어깨를 누르는 짐을 내려주자는 큰 정치의 이상이 없다면 승리가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국민들을 선거에서 후보 고르는 소비자가 아닌 정책 논의의 제안자로 만들고, 지역 사회 참여 정치의 주체로 만드는 진정으로 새로운 접근법만이 이 정치만능의 악순환의 덫에서 벗어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