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독일자유대학 2


어제 memory and history 행사 무사히 마쳤다.
나는 한국 대표로 초청받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시아 전체 대표( ?? ) 였다.
라틴아메리카 대표 1명, 그리고 아시아 대표인 나, 나머지는 독일과 미국에서 왔다.
사실 대표라는 말은 농담이다. 무슨 운동 경기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최 측에서 학술횅사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시아 쪽을 배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국인가? 어제 주최측인 다램 인문학 연구소 소장인 쿠퍼교수에 물어보았다.
그는 중국인들은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 말 조심을 하고, 일본인들은 자기 문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을 선택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학자들이 생각해볼 중요한 이야기였다. 한국학자들의 역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사람 중에 왜 나를 선택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마 독일어로 번역된 저서도 있고, 한국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만 하고 있다. 아마 자유대학에서 한국교수 누가 추천했을 것이다. 소장은 어제 마지막 회식을 하면서 그는 이번 행사에 내가 많이 기여했다고 인사를 했다. 의례적인 인사인지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 사람들 모르는 것 이야기 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 사례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통해 기억을 어떻게 신빙성 있는 진실로 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의견을 표명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여성학자 Elizabeth Jelin은 정치학자(? ) 이고 나머지는 모두 역사학자, 문학 전공자들이었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는 좀 따분했다. 최근 20년간 역사학계에서의 기억연구 붐에 대한 논란, 기억이 어떻게 역사학 연구의 풍부화에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 기억연구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 역사기술에서 기억이 갖는 중요성 등이 주요 주제였다.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했다는 Gabrielle Spiegel 이 좌장 역할을 했고, 나머지 발표자들도 이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는 학자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특별히 흥미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이미 내가 다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실천적 영역이나 문제의식의 차원에서는 우리는 그들의 선생이 될 자격이 있다. 단 책상에 앉아 각국의 유사 사례를 정리하거나 이론화할 여유가 없을 따름이다.

인문학자들이라 그런지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현실정치 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내 발표에 대해서도 약간 겉도는 질문만 제기되었고, 독일의 집합적 기억에 대해서도 미국의 전후 점령 등을 언급하지 않아서 좀 답답했다. 학살연구와 마찬가지로 기억연구도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인상이었는데 이 행사에서 중요인물 2 사람이 유대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억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약간의 긴장도 있었다. 이스라엘 출신이자 미국에서 활동하는 발표자는 자신은 팔레스타인의 강제이주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고 오직 두 집단의 상이한 기억만 다루겠다고 말했는데, 과연 오늘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괄호에 넣고 기억을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기억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관적인 현상인데 여기서 어떤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개별발표보다 훨씬 긴장된 것은 마지막의 대중토론 시간이었다. 통상 독일에서 학술행사는 이렇게 진행되는 모양인데 이번 행사도 독일 교육부 지원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언론홍보, 그리고 시민 교육 차원에서 반드시 마지막에는 공개행사를 갖는 것 같았다. 대학의 사회서비스, 공공지식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은 학생들인 것 같았지만 그대로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도 여러 명 참석했다. 개별 발표는 그냥 발표하고 질문에 답하면 되었지만 이런 행사는 청중질문에 대해 즉답을 하기도 해야하고, 또 발표자들끼리 토론도 해야하므로 영어 듣기와 표현에 능하지 않는 나로서는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대로 나에 대한 질문은 없었지만, 어떤 할아버지가 당신들 역사학자들이 나치 학살에 대해 수백권의 책을 썼는데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당신들이 할 수 있는일이 무엇인가라고 아주 심각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도대체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해명을 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에 대한 질책인 것도 같아서 따끔했다. 그런데 내가 들어도 동료 참석자들의 답변은 좀 시원치 않았다. 내가 그 할아버지라면 학살이나 큰 역사적 사건 울궈먹으면서 먹고사는 인간들 아닌가라는 질문을 거꾸로 던지고 싶었다. 학자들끼리의 토론 말미에 대중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은 좋았다. 우리도 대학의 학술행사가 이렇게 운명되면 좋을 것 같다. 하여튼 아시아대표로 고군분투했다. 영어가 서툴로 하고싶은 말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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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독일 자유대학



독일 베를린에 왔습니다.
오늘부터 이틀간 열리는 '기억 그리고 역사' 학술행사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학기가 진행중이라 출장이 좀 부담스럽습니다만, 중요한 행사인것 같아 초청에 응했습니다.
(프로그램은 내 홈피에 있습니다.
http://dckim.skhu.ac.kr/bbs/zboard.php?id=blog)
9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 이른 아침같습니다.
호텔 근처 자유대학 풍경입니다.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세대인가 계급인가, 아니면 세대가 계급인가


http://weekly.changbi.com/581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109135215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주소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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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2011년 11월 9일


김동춘 / 성공회대 교수



세대인가 계급인가, 아니면 세대가 계급인가
[창비주간논평] 서울시장 선거의 민심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 세대투표의 특징이 두드러졌다고들 말한다. 출구조사에 의하면 20~40대의 압도적 다수가 박원순을 지지하고, 특히 30대의 경우 박원순 지지자가 나경원 지지자의 3배나 된다는 사실이 그 중요한 근거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계급투표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는 지적이 있다. 소득이 높은 강남 3구의 투표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고, 그중에서도 압구정동에서는 나후보가 79%를 얻는 등 나후보 지지율 상위 10개동은 대부분은 강남구였으며, 박후보는 대학생 밀집 거주지역을 비롯해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구로동, 창신동 등에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이 출구조사가 엄밀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이 조사만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강남구의 경우 인구구성을 확인하여 실제 강남구의 30,40대도 거의가 나후보를 지지했는지 검증해보아야 하고, 거꾸로 30,40대 대부분이 소득이나 재산 여부를 불문하고 박후보를 지지했는지 여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50대 이상과 40대 이하의 투표행태가 현격하게 갈린다는 것, 저소득층이 밀집 거주하는 지역의 투표율이 낮다는 것, 아파트가격이 높은 지역의 투표율이 높고 나후보 지지율이 높다는 것을 종합해보면, 이번 선거는 세대투표 경향이 두드러진 가운데 빈곤층과 부유층의 차별적인 투표행태가 그 밑에 깔려 있다는 점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하층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두드러지고, 상대적으로 부르주아가 자기 집단이익에 더욱 민감하다는 기존의 이론도 이번 선거에서 또 한번 확인되었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세대의식'이 반영된 것인가

그런데 과연 언론이나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세대, 계급의 개념이 과연 지금 한국인의 투표성향, 더 나아가 정치의식, 사회의식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계급이나 세대는 사회적 응집체 중의 하나다. 그런데 '계급'이 주로 경제질서에서 같은 위치, 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을 말한다면 세대는 생물학적·사회역사적 시간대에서 특정한 위치를 공유하는 집단, 즉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특정한 정치경제적 사건을 비슷한 나이에 겪은 사람들을 말한다. 만하임(K. Mannheim)은 신선한 접촉의 경험, 즉 젊은 나이에 특정 공간에서 어떤 큰 사건을 같이 겪음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기억'으로 각인될 때 이들은 세대의식을 공유하고 그것은 이후 지속적으로 이들의 의식과 정치행동을 좌우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를 두고 젊은 '세대'가 박후보를 지지했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도 좋을까?

앞의 정의에 따르면 486세대, 4․19세대 등 정치적 경험과 뚜렷한 가치지향을 공유한 사람들은 분명히 세대라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의 30대, 40대가 각각 별도의 세대가 되거나, 20대까지 묶어 40대 이하를 하나의 세대로 부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물론 30대 이상의 경우 청년시절에 IMF 경제위기를 겪었다는 점, IT기술과 인터넷 문화에 어릴 때부터 노출되었다는 점, 월드컵 경험 등의 공통점을 들 수는 있다. 그리고 40대 이하가 모두 SNS에 익숙하다는 점을 들 수도 있지만, 이들이 이번 선거 이전에 하나의 공유된 사회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사한 가치와 행동을 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이번 박후보에게 거의 몰표를 안겨준 30대의 경우 2007년 대선 때는 그 반대의 투표행태를 보였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세대현상은 오히려 노년에 더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50대 이상, 특히 60대 이상이 압도적으로 나후보를 지지했는데, 한국전쟁과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겪은 60대 이상은 과거에는 물론 10여년간 거의 모든 투표에서 매우 일관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0대 이하를 묶어주는 고리는 세대의식이 아니라 이들이 온몸으로 겪고 있는 현재의 비정규직화, 실업, 주거 등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대'라는 외피로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롬니((M. Romney)는 "이것은 계급전쟁이다"라고 공격했다. 월가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이 금융자본주의의 탐욕과 CEO들의 부도덕한 돈잔치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2010년 우익의 티파티(Tea Party)운동이 뜰 때와 유사하게 무정형적이고 계급의식도 약하며 정치엘리뜨 일반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에서 스페인, 그리스에 이르는 유럽·북아프리카 전지역 청년들의 저항운동도 사실상은 심각한 청년실업과 빈곤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크다. 즉 청년들의 좌절은 전세계적 현상이고, 그것은 미국 주도의 시장자본주의, 1%가 99%를 가져가는 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60년대 반전세대의 문화적 저항과는 달리 '세대'라는 외피를 통해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비정치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 최근 칼럼은 지금까지 미국은 후세대가 항상 이전 세대보다 좋았고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것이 어려워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미국에나 한국에서 정규직 아버지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아들을 걱정하고, 비정규직 아버지는 아들을 정규직으로 만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가 자녀의 정규직 채용시 가산점을 요구하는 것처럼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계급상황을 개인적으로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가짜 해결사'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의 청년들처럼 한국의 20~40세대도 이 고실업과 비정규직화, 사회적 양극화, 대자본의 거침없는 탐욕,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하는 기성 정치권과 언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순을 온몸에 안고 있는 존재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역시 이들이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므로, 결국 '세대'로 지칭되는 현실의 밑에는 전통적 세대현상이 아닌 잠재적인 계급현상, 더 나아가 경제양극화에 응답하지 못하는 현재의 정치적 대표체제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관된 의식이 없고 무정형의 집단이므로 2007년 '이명박 밀어주기' 때처럼 앞으로 대자본의 편을 들면서 실업, 복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선전하는 가짜 해결사, 즉 우익세력에 또다시 기웃거릴 수도 있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세대라는 형식으로 잠재화된 계급집단의 불만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결과는 내년의 정권교체에 청신호를 주고는 있지만, 이 불만은 정권심판의 구호만으로 결집될 수 없으며, 설사 현재의 야당 중심으로 정권교체를 하더라도, 이들에게 또다시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 이들을 일관된 의식을 갖는 사회세력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지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청된다.

2011.11.9 ⓒ 창비주간논평

[세상 읽기] 크레인과 굴뚝 / 김동춘


2011년 11월 14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53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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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적 안 잡으면 백성이 죽는다”
큰 도적 잡아, 일하는 사람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정치세력 어디 없나?

309일 동안 고공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 내려온 김진숙씨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고 한다. 노사 합의에 따라 농성을 풀고 내려온 사람을 ‘업무방해’죄로 구속을 했다면 더 큰 갈등이 발생했을 것이다. 혹시 큰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던 국민들도 크게 안심을 했고, 그간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섰던 희망버스 기획자들이나 참가자들 모두 크게 안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진중공업 사태로 숨을 돌리는 순간 쌍용자동차에서는 열아홉번째 희생자가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퇴직 노동자가 돈 벌러 나간 사이 그의 부인이 집에서 숨을 거두었고, 두 아이는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의 주검 옆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다.
크레인에 올라갔던 노동자는 무려 300일 이상의 농성 끝에 살아서 내려오기는 했으나 공장 굴뚝과 지붕에 올라갔다가 개처럼 끌려 내려왔던 노동자들은 곧바로 회사 정상화 이후 복직 약속 종이 한 장 달랑 든 채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한 사람씩 죽어가고 있다. 그들이 올라갔던 크레인과 굴뚝은 보통사람들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인간 존재의 막장이나 극한지대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 길이 없었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저 높은 곳으로 살기 위해 올라갔다. 곤봉과 최루탄을 쏘아대는 경찰, 무기를 든 용역직원, 업무방해로 구속영장 들고 서 있는 검찰, 경찰과 용역의 폭력에는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언론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땅에는 그들이 서 있을 공간은 없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이들을 ‘떼잡이’라고 부르고, 검찰은 ‘업무방해’, ‘공무집행방해’ 등의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라 부른다. 이명박 정권 집권 2년도 안 된 2009년 11월에 이미 구속노동자는 334명을 넘었고, 쌍용자동차 한 회사에서만 구속노동자가 무려 86명에 달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노동자들도 해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용자나 언론이 강조하지 않아도 노동자들 자신이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 수십년간 열심히 일했는데, 경영 위기에 처하면 오직 노동자들만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고, 해고자 선별 과정이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사쪽의 온갖 협박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파업하다 해고되면 빨간 딱지를 붙여 다른 곳에 재취업도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를 그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고, 정당과 정치권, 노동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노조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목숨을 각오한 결사항전에 나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감사론(監司論)에 빗대어 보면, 굶주린 나머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작은 도적은 사실 도적이 아닌데도 무조건 구속되고, 남의 돈을 개인 돈처럼 빼돌리거나 투자를 잘못해서 충직한 머슴을 거리로 내몬 사람들,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로비 자금을 챙긴 ‘큰 도적’들은 언제나 위세 당당하여 야경꾼이나 포도청, 사헌부는 물론 나라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처벌하지 못한다. 도저히 이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인들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크레인이나 굴뚝에 올라가 소리치고,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백성들은 소리 없이 죽어간다.

나라와 사회의 진짜 주인인, 땀을 흘려 생산을 하는 자들이 궁지에 몰려 크레인으로 올라가거나 생계형 범죄를 저질렀다고 감옥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우리는 원한다. 다산 선생 말대로 “큰 도적을 잡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죽는다”. 큰 도적 잡아서 일하는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정치세력 어디 없나?

피 묻은 총검을 든 한국 ‘자유민주주의’ [2011.11.14 제885호]

2011년 11월 14일, <한겨레21> 제885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7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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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총검을 든 한국 ‘자유민주주의’ [2011.11.14 제88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독재와 쿠데타로 자유주의의 원리를 배반한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우리 한인은 자유민으로 죽을지언정 남의 노예 백성으로 살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우리가 혈전 마당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표명한 것입니다. 우리 평민과 군인들이 각각 가진 것을 다 사용해서 세계 모든 자유민의 원수를 일심으로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이승만)
“우리는 침략자를 물리치고 국토를 통일하여 자유대한을 건설할 권리가 있음을 전세계에 엄숙히 선언한다.”(‘38선 정전안을 결사반대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인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의 꿈은 분쇄하고 세계의 자유 인류의 평화를 이룩해야 할 우리의 앞날에는 아직도 허다한 난관과 시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박정희)


유신헌법이 강조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2009년 8월 교과서 검정 신청을 3개월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뉴라이트 쪽의 주장을 받아들여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을 새롭게 발표했고, 2010년에는 이미 검정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사’로 고쳐 쓰도록 했다. 2011년 교육과정에서는 지난 8월9일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 고시했다. 그리고 이번에 고시된 개정 교육과정에는 위원회에서 논의된 적도 없는 내용을 추가했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도록 고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때아닌 자유민주주의냐 민주주의냐 논란이 일었다. ‘역사교육과정 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이 교육과정에 일일이 개입하고 국가기구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교육과정 개발, 집필 기준 작성, 검정까지 주도하도록 하여 사실상 정권의 입김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기존 교과서 내용 수정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거의 쿠데타적인 방식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고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는가?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떠나서는 서술될 수 없다. …하나였던 한반도의 북부에 불법적으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고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침략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권희영)라고 그 이유를 주장한다. 즉 대한민국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칙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독재를 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단지 권력구조의 측면에서만 일시적으로 자유의 원칙을 제한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결국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이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의 전문에는 우리 헌법 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런데 유신체제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표현과 결사의 자유, 법치, 삼권분립을 가장 심각하게 제한하고 조작간첩 사건 등 국가가 사실상 범죄를 자행한 시기였다. 그런데 유신헌법이 이렇듯 국가를 신성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가장 무시하고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실이 바로 오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즉 유신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유’(민주)다. 이 ‘자유’(민주)는 공산독재는 배격하나 반공독재와 자본독재,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용인할 여지를 남긴다.


이승만과 자유당, 천황제의 적자들

물론 이 사상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에 속하는 우드로 윌슨과 해리 트루먼은 민주정부와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내세우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들, 특히 윌슨 시대의 독일, 트루먼 시대의 소련 공산주의 독재의 사슬에서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을 도덕 혹은 정의의 담론으로까지 승격시켰다. 이들에게 자유와 시장경제는 도덕적, 더 나아가 종교적 함의까지 갖는다. 그런데 윌슨의 ‘자유’는 사실상 제국주의 국가의 자유임이 이미 판명 났다. 그의 민족자결은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될 수 없는 강자의 논리였다. 트루먼의 ‘자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전쟁에 이런 관점에서 접근했다. 트루먼에게 한국전쟁은 자유세계와 공산노예의 투쟁이었다. 즉 트루먼과 미국에 자유세계는 선의 세계, 문명세계이고 공산주의는 악의 세계, 야만의 세계였다. 그에게는 한국과 같이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시장경제만 유지한다면 ‘자유’의 이름하에 진행된 옛 제국주의 파시즘 세력(친일파)의 부활, 반인권적인 식민지적 경찰통치의 부활, 군과 경찰의 노골적 폭력과 학살이 일어나도 알 바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 윌슨의 제자이며 트루먼의 후원하에 한국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윌슨과 트루먼의 보편주의는 바로 이승만의 ‘자유세계’ 관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승만에게 ‘자유’와 ‘독립’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구 집권과 정적 탄압을 위한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비상계엄 선포, 전시라는 이름하에 의심되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 거의 재판도 없이 죽일 수 있었던 특별조치령, 민간인을 군인으로 취급해 구속할 수 있었던 국방경비법, 인민군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을 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체포해 처형한 수복 뒤의 지옥과 같던 서울이, 피난민의 생명과 재산이 외국군인 미군의 무차별적 폭력과 자의적 작전 결정에 의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할 수 있었던 이 땅이 이들에게는 ‘자유세계’였다.

“자유대한의 푸른 하늘엔/ 학두루미가/ 펄펄 나르네/ 춤을 추네/ 얼마나 그리던 자유였더냐/ 우리는 지금 자유 찾았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갖었네.”( 박종화, ‘구름 위에 넌짓 실어’)

제1공화국의 자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기초로 하나 경찰의 전제정치, 우익 청년단의 고문과 테러를 수반했다. 그래서 가공할만한 선거조작과 부패를 저지르고, 어린 학생들에게 총칼을 겨눈 집단이 바로 이승만의 수족 ‘자유당’이었다. 일본의 ‘자유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유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희생하고라도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우위를 내세운 천황제의 적자였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 역사학자들이 천황제의 전쟁범죄를 감추고 이웃 국가 침략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자민당과 자유주의 사관은 사실상 미국이 만들어준 자유세계의 일원이자 사유재산 비판을 대역죄인 취급한 천황제의 적자들인 셈이다.


유신 쿠데타 북에 먼저 알린 박정희

그러니 박정희가 국회의원 3분의 2 선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절차적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그것도 통일을 위한다는 거짓 명분을 들이대고 국민을 거의 겁박해 90% 이상의 지지로 통과시키고, 긴급조치라는 초유의 대통령 명령을 법으로 대신하던 시절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강변한 것은 이승만이 말한 ‘자유’의 후렴에 해당하고 멀리는 그가 일본의 명치유신과 조선총독부 통치하의 전시동원 체제와 억압을 남한에 다시 실천한 장본인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었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채 온 국민에게 사상적 순결성을 강요하고, 국가에 대한 일방적 충성을 강조한 천황제 파시즘의 후계자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민주적 질서’의 수호자가 된 셈이다. 이승만의 계엄령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국가의 긴급권 행사, 즉 개인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통제했는데, 이 자유의 제한이 바로 ‘자유’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역설이 발생한 셈이었다. 그렇게 되니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던 어린 학생들이 자유당과 반공연맹을 불태우는 일이 발생했고, 박정희의 긴급조치를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 “자유민주주의 유린”이라고 공격한 종교인들이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다.

만약 백번 양보해 이승만이 말한 자유와 박정희가 말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반공 혹은 국가 억압 정당화의 논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파시즘을 명백하게 반대한다는 점을 법과 절차, 행정집행에서 명시해야 하고 국민, 국가 그리고 민족의 입장에서 그것을 배반한 사람을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이후 현재까지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발언을 하거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에 테러를 행사하는 극우세력에 대해 ‘자유민주적’ 헌법정신과 각종 형법을 적용해 처벌한 예가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민에 대한 테러를 자유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 국가인 미국의 한국 국민에 대한 범죄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했으며, 박정희의 경우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북한 당국과 비밀히 협상을 했고, 국가의 기밀 사항까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인 북한에 먼저 통고해주었다. 유신 쿠데타를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알려주는 반국가적 조처까지 취한 것이다(박명림, ‘박정희 시기의 헌법정신과 내용의 재해석’, <역사비평>, 2011년 가을).

여기서 과거의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오늘날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싣자는 뉴라이트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냉전 시절 자유주의에 대해 앤서니 아블라스터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가이거나 혹은 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반혁명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가까워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러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한국의 앞날을 예견하듯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범위라는 공화국도 원한다. 그들의 온건한 범위를 넘어서면 그들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들은 행복하게 혁명이라는 관념을 즐긴다. 그러나 그들은 1848년 인민폭동의 광풍 앞에서 공포에 질려 후퇴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문명과 질서를 구하기 위해 계엄령의 총검 뒤에 숨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

사실 공산주의에 두려움을 가졌던 1945~60년의 기간처럼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원리를 그렇게도 비열하게 배반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87년까지, 아니 2011년 오늘 이 시점까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원리를 비열하게 배반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오직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를 내세우는 파시스트거나 천황제 파시즘의 후예라고 공격하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외친 사람들에게 총검을 들이댄 자유(민주)주의였다. 오늘도 그들은 절차와 법을 지키자는 사람들 앞에 주먹을 과시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너희들 인민민주주의자 아니냐고.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