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30일 목요일

중국이 세계 대국이 되면 한국은?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일본 순시선의 중국 어부 체포건에 대해 중국이 강경한 입장을 취하자 일본이 곧바로 항복한 사실은 더욱 더 충격적이다. 중국은 이 사건에서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고, 예상외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 동안 중국은 가능하면 주변국가를 건드리지 않은 채 조용하게 자신의 세계 경제대국화를 추진해 왔다. 석유 등 전세계 광물자원을 거의 블랙 홀 처럼 빨아들이면서 군사정치적으로는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곧바로 중국 내의 일본인들을 체포하고 일본경제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수출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일본에 대한 강경자세는 사실 미국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은 아시안 여러나라와 안보회의를 갖는 등 중국 포위전략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아프칸 전쟁, 인도와의 친선 등을 통해  중국을 포위하고 있으며, 위안화 절상 압력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력에 걸맞는 국제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거듭 압력을 집어 넣고 있다. 중국 내부의 인권문제나 사회갈등을 계속 부각시켜 중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경제력의 상승은 반드시 군사 정치력의 상승을 수반한다. 중국이 지금처럼 세계 자원시장에서 미국과 경쟁상대로 등장하고 일본을 계속 압박한다면, 미국의 정책중심은 이제 서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옮겨올 것이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의 신냉전의 등장을 의미한다. 신냉전은 남북 분단을 영구화할 수 있다.

 

최근 일본 우익들이 중국 관광버스에 공격을 가한 일에서 보여주었듯이 중국의 이러한 자세는 일본 우익들의 목소리와 힘을 증대시킬 것이다. 자위대는 주변사태 개입의 명분을 가질 것이고,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의 압력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더 가까워 질 것이다. 세계 2.3위의 경제군사 대국은 한반도 주변에서 또 한번의 힘겨루기에 들어설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 아닌가?

그렇다 100년 한반도 주변의 모습이었다.  그 때는 중국이 망하고 일본이 등장하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북한은 체제유지에 안간힘을 다 쓰고 있으나 중국없이 그것은 불가능하다.

 외교는 국가와 민족 구성원의 운명을 100년 동안 좌우한다.  

중국의 경제력 상승은 한국에게는 기회이자 큰 위기이기도 하다.

어떡할 것인가?

이 정부의 중국 외교의 부재가 이 처럼 심각하게 다가온 적도 없는 것 같다.

 

 

 

 

2010년 9월 29일 수요일

민노당의 북한후계구도에 대한 논평

알려진대로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등극하고 인민군 대장의 칭호를 부여받음으로써 사실상 김정일의 후계자로서 공식화되었다. 이에 대해 민노당을 짧은 논평을 냈다.  

 

북한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민노당은 자체의 입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국민의 눈높이"를 거론하였으며, 실제로는 이 사안은 "북한이 결정한 문제"이니 남한에서 왈가불가할 사안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결론은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위해서 북한을 비판하거나 자극하지 말자는 입장이다. 이 정부의 입장도 그러하다. 북한이 혼란상태에 빠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맞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북한 문제일까?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해서, 혹은 더 좋게 평가해서 북한이 '민족주체성을 유지하고' 개방된 체제로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심각한 권력투쟁이나 권력누수가 발생하기 보다는 김정은으로의 안정적인 권력 승계가 바람직하다고 암묵적인 결론을 내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연결되는 가족 세습은 과연 한국사람들의 눈높이만이 문제이며, 그들의 사정에서는 어쩔수 없는 일일까? 만약 이렇게 되면 과거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도 반미노선을 견지했으니 인정할 수 있는 일이며, 우리의 박정희도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삼성의 이병철-이건희-이재용의 편법 승계도 삼성의 관점에서는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국 실정에서 북한 문제가 이무리 민감한 사안이고, 일방적 잣대로 말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공공성을 생명으로 해야하는 정당이 공적이고 객관적 잣대를 보다는 마치 북한과의 외교적 거래를 해야하는 국가처럼 처신한다면 장차 대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북한의 권력세습을 가족세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변명거리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2010년 9월 27일 월요일

수퍼스타 K

연휴시간 수퍼스타 K 몇 편을 재미있게 보았다.

 

열광이 없는 시대에 그나마 국민들을 열광시킨 흥미있는 행사였다.

백만명 이상의 신청자들 중에서 11명으로, 8명으로 그리고 6명으로 좁혀지는 과정이 너무나 스릴이 있고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도 탈락자를 평가하는 과정이 가수인 전문가 패널의 점수보다 시청자들의 의견, 즉 호감도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는 것이 재미있었다. 즉 대중들의 평가를 전문가의 독점적 평가 위에 둔 것은 대중가수를 선발하는 절차로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실력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동료들과의 관계, 그리고 호감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게 한 점이 이 행사에 대한 관심을 더 달아오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한번의 똑 같은 노래가 아니라, 여러 유형의 노래를 소화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또 자신이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가수들의 노래를 줌으로써  음악성과 곡 소화력, 호소력을 여러각도에서 평가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좋았다.

정말이지 실력이 없거나, 연예기획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스타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장치들을 마련한 것이 대중들의 관심을 폭발시켰으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돈을 들여서 가수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실력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이 무대에서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포츠나 연예는 가난하고 빽없는 젊은이들이 실력만으로 정상의 꿈을 꿀 수 있는 분야다. '슬램덕 밀리어네어' 영화의 주인공처럼 한국의 수 많은 끼있는 젊은이들이 실력만으로 정상에 올라 돈과 명예를 걸머질 꿈을 꾼다. 최근의 한국 연예계도 여러가지 추문으로 시끄러웠는데, 이러한 공개적인 경쟁과 선발절차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신선한 공기를 쐬는 듯한 즐거움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매회의 생존과 탈락의 스릴을 반복하고, 한번에 해도 될 것을 수 차례 반복하는 것은 기획한 방송사의 상업성을 반영하는 것이고 또 그 방식 역시 자본주의적인 경쟁만능 시대의 문화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연예계 스타라는 것이 집단성 보다는 개인의 대중적 호소력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식의 스타만들기 작업 자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 프로를 보면서 이러한 방식의 공개경쟁을 통한 선발이 연예가 아닌 다른 영역에는 과연 적용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여러번에 걸쳐서 실력과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사회가 훨씬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특히 정치 지도자를 선발하는 과정에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이렇게 일거수 일투족 전문가들의 심사와 대중들의 평가를 합산에서 제대로 검증되는 절차를 거친다면 썩은 물이 교체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치이야기는 딱딱하고 재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1988년 청문회의 경험이 있다. 온 국민이 저녁마다 대기업 총수와 군부지도자들이 초선 국회의원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았고, 정치가 얼마나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는지 느낀 적이 있다. 바로 그 청문회 스타들이 이후에 총리도 되고 대통령도 되었다. 당시 청문회를 보면서 대중들은 왜 군부독재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되는지, 누가 진정으로 국민을 대변하는 정치가인지, 앞으로는 어떤 정치가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정치를 국민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수퍼스타 k에서 얻게 되었다.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하면 대중들을 실제 자신의 운명과 처지에 그토록 심대한 영향을 주는 정치의 주체로 등장시킬 수 있을지, 후보 선출, 선거 등의 제도와 절차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정치를 갈아엎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진보정당들이 가장 깊에 고민해야할 지점이 여기에 있다. 민주당의 당권경쟁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병역문제

김황식 총리후보자의 병역 문제가 또 도마위에 올랐다.

한국 남자들에게 병역 문제는 참 묘한 복합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이다.

자신은 2년 ( 혹은 3년 동안 ) 그 개고생을 했는데, 어떤 놈은 빽을 써서 빠진 다음 젊은 시절 그 황금같은 시간에 남보다 출세를 빨리했다고 생각하면 원통하고 분한 감정이 복받치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서 공직자 병역문제를 비판하는 심리는 그들이 애국자여서가 아니라 자신만 피해보았다는 생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고생한 데 대한 보상심리, 그런 것도 작동할 것이다.  

 

그래서 공격을 받는 입장에서는 "너들도 할 수 있으면 다 빠지려 하지 않았느냐", "어느 놈이 떳떳하게 나를 공격할 수 있느냐"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 즉 애국자는 없다는 이야기다. 모두가 다 마찬가지인데, 자신은 애국자인양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이야기다.

 

부분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애국자는 없다. 군대를 자원해서 가는 사람 드물다. 그리고 군대갔다 온사람이 애국자라는 증거도 없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빠지려 한 것도 사실이다. 신검 전날 술을 엄청마시면 간 수치가 높아진다는 루머, 간장을 벌컥 들이키면 X-ray 이상한 것이 찍혀서 빠질 수도 있다는 소문들, 아예 간질병 환자 흉내를 낼 수도 있다는 제안 등 .... 누구는 이렇게 빠졌다는 소문은 옛날 군대가려는 남자들 사이에 돌아다니던 익숙한 소문들이었다.

 

아마도 이들과 보통 한국인들과의 차이는 누구는 의사 형이나 친척을 둬서 진단서를 끊을 수 있었고, 안상수 처럼 여러번 도망다니가가 결국 나중에 어떻게 연령을 념겨서 용케 빠지거나 한 차이일지 모른다.

 

젊은 시절 2,3 년 정말 소중하고 긴 기간이다. 고시지망생에게는 군대라는 단절이 고시에 영원히 불합격할 상황으로 빠질 수도 있는 기간이고, 한창 인기를 누릴 연예인에게는 재기 불가능할 기간일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휴가나오면 군대 안간 친구들이 벌써 글을 써서 제법 연구자 행세하는 것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구는 군대 기간의 뒤쳐짐은 영원히 만회되지 않는다는 겁을 주기도 했다. 내 신세를 생각하면 정말 비참하고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군대에서 겪은 폭력의 체험, 비인간성과 굴욕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명박, 안상수, 김황식이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그들의 사회에서 통하는 자기변명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있다. 보통의 한국 남자들이 군대 자원할 정도로 애국자는 아니었지만,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빠지려 할 정도로 자신의 출세와 경력관리에 목을 메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차이는 그것이다. 맹자님이 말씀하신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던 마음, 그리고 남들이 보통사람들이 하는대로 그냥 따라간 바로 그 사정이다.

 

결국 애국자와 비애국자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출세와 경력관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과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거나 ( 그렇게 할 수단이 없었던) 보통 한국인들과의 차이가 아닐까?

 

그들이 공직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분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투명한 것은 과거이고, 과거만이 미래를 말해준다.

그들은 애국자가 아니기 때문에 공직을 맡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군에 빠진 경력이 의심되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않은 다수의 국민들에게 나라를 위해 봉사하라고 말할 자격이 없고 그럴 권위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의 말이 그의 경력, 즉 실제했던  과거와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0년 9월 22일 수요일

추석단상

추석 자체는 매우 오래된 전통적 명절이지만, 추석이 이렇게 최대의 명절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남쪽에서는 단오와 추석이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가진 명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석이 이렇게 큰 명절이 된 것은 뭐니뭐니해도 산업화 이후였다. 즉 60년대까지만 해도 추석이 이렇게 요란한 명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도시나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들이 고향을 찾는 날이 추석으로 집중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추석이 큰 명절이 되면서 농경사회의 또다른 흔적인 단오는 거의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어쨋든 내 어릴적 기억 속의 단오는 추석이 요란해지면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차가 막혀서 고통스럽지만, 옛날에는 기차에서 5시간 10시간 서서가는 것이 큰 고통이었다. 언제인지 기억이 없으나 서울역에서 귀성객들이 넘어져서 큰 참사가 난 일도 있었던 것 같다. 거의 발디딜 틈도 없는 기차에 올라타서 몸은 거의 공중에 붕뜬 상태로 고향을 가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올라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이 주신 각종 곡식, 과일, 짐보따리를 들고 전쟁하듯이 기차에 올라타는 것도 큰 추석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 기차시절의 고통도 자가용 시절의 고통도 향후 20년에 거의 마무리 될 것이다. 시골의 부모나 형님들이 그 기간 안에 거의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일인가구 수가 더 많이 늘어나 가족의 개념도 바뀔 것이다. 만약 더 이상 찾을 부모님이나 형님이 없다면, 그리고 혼자 연휴를 보내야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우리는 추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아마 그 때도 추석은 휴일로 지정될 것이니, 사람들은 주로 해외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솔로들끼리 모여 놀거나 집에서 빈둥거리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쨋든 추석풍경은 우리가 아직 일가 친척 피붙이와의 만남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하고 진한 사회관계망이 없는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부모 형제와의 만남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고향의 추억을 대신할 정도의 의미있는 추억이나 만남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한국사람들은 과거회귀적이고, 혈연중심적이다.

 

그래서 21세기 추석 행사는 새로운 형태의 만남의 장을 만드는 기획이 되었으면 한다. 가족단위로 추석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부모,형제, 처가를 대신할 수 있는 만남, 즐거운 만남, 그런 것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것 같다. 그러자면 제사를 대신할 수 있는 끼리끼리의 모임을 보다 활성화하는 일, 마을단위 지역공동체의 축제 뭐 그런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솔로들끼리의 축제, 외국인들의 축제, 도시에서의 주민 공동행사 그것이 제사를 대신하거나 보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일본인이 본 '조선인' -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인관

최근 번역된 다카하시 도루의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를 읽었다. 그의 [조선 유학사]를 수년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그의 조선인관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전형적인 일본 어용학자로서 조선지배의 논리를 뒷바침하기 위해서 이러한 저술활동을 했고, 그의 주장 중 일부는 일제 침략의 정당성, 조선의 패망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논리로 최근까지도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조선민족개조론은 이후 친일파로 전락한 춘원 이광수의 조선민족개조론에 직접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철저히 일본 우월주의, 조선열등론에 서 있는 그의 주장은 독자인 한국인들을 대단히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주장 중 상당부분은 근거가 취약하거나 무리한 주장인 경우도 있다. 3.1 운동을 외국 사상에 감염된 청년들이 동료 청년들과 종교단체 구성원들에게 경솔한 신념을 마치 실현가능한 것처럼 퍼트려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에서 그 한계의 정점에 도달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가 조선인들의 특징으로 지목한 순종주의는 한국보다는 1945년 이후 일본에 더 잘 들어맞는 점도 있다. 창의성의 결여 역시 조선인들만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국가주의나 관료주의에 길들여진 일본인의 특징인 점도 있다. 조선인들의 무기력과 정체성 역시 그가 주장하듯이 불변하는 민족성이라기 보다는 조선 조 하의 관인들의 과도한 억압과 착취의 결과, 식민지 하에서 희망을 상실한 조선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의 상당부분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상의 고착과 사상 문화에서의 사대주의, 그리고 정치만능주의다. 조선 조 500년 동안 주자학을 벗어난 창의적인 사상이 나오지 않은 것, 그리고 주자학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나머지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취급하여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외우기 교육이 조선 청년들의 영혼을 지배하게 된 것, 정치만능주의가 자유로운 사고의 전개를 가로막고 사회의 숨통을 조였다는 점은 대체로는 매우 타당한 점이 있다. 물론 조선 유학사를 지나치게 폄하한 것은 이후 한국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은 바 있고 좀더 심층적으로 검토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진단은 사실 그가 조선보다 훨씬 우월한 문명국가라고 보는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니다. 천황제과 군국주의는 일본좌파들을 교조적, 도식적 좌파로 만들었으며,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지금까지도 미국에게 대해서는 감히 비판조차 못한다. 

 

조선 시대의 사상의 고착과 창의적 부족은 근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다지 수정되지 않았다. 나는 1996년에 발표한 '사상의 측면에서 본 한국 근대모습'이라는 논문에서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80년대 좌파 운동권이 교조주의로 빠지고, 과도한 북한 찬양론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교과서적 좌파 밖에 없나라고 한탄한 바 있다. 한국의 이른바 우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아예 사상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다카하시 도루가 비판하였듯이 조선조 말 백성의 고혈을 빠는 이기주의 집단의 모습, 욕망으로 가득한 관리들의 모습에서 별로 더 나아간 바가 없다. 정신적으로 일본에게 무장해제당한 친일파나, 자신의 친일경력을 은폐하기 위해 내세운 반공주의하에서 창의적인 사상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오늘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인론, 조선 유학론은 깊이 되새겨보아야할 내용이 많다. 나는 그의 글이 나온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시점에서 한국의 역사학계나 철학계, 사회과학계가 그의 주장을 보다 철저하게  반박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늘의 영어만능, 미국만능주의, 한국의 대학현실을 보면 그의 주장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다. 아니 그의 다소 억지에 가까운 주장을 민족주의 반일주의 정서에 기초해서 반박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지금도 지속되는 문제점을 고발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자는 지적인 운동을 시작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명박 정부와 그 아래 가신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다카하시 도루가 비판하는 그러한 조선인들의 후예라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21세기의 한국사회도 결국 3.1 운동과 이후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 그리고 4.19 이후의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에 의해 개척될 수 밖에 없다.  단 그들의 투쟁은 훌융했으나 사상은 너무나 빈약했다는 내부 반성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자라나는 청년들이 이러한 역사를 자기화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월미도 60년

인천상륙작전 60년을 맞아 인천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노병들은 감회에 젖어 그날의 영웅적인 상륙의 환희를 회고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어서 수 많은 목숨을 구하고 북진의 계기로 삼은 이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인천상륙 60년을 맞아 또다른 인천상륙도 기억되어야 한다. 바로 월미도 주민 대량 희생 사건이다.

 

전쟁 후 달리 피난할 수 없었던 월미도 수백명의 주민들은 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섬은 곧바로 인민군이 점령했고,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지의 거주자가 되었다. 인천상륙을 앞두고 맥아더는 이 섬의 초토화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섬에 민간인이 거주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이전에 이 섬을 초토화하였다.

 

그래서 피난하지 못한 월미도 주민 상당수는 무차별적인 폭격에 희생되고 일부만 살아남아 인천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60년 동안 우리는 인천상륙의 영웅담만 기억을 했고, 월미도 주민의 희생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전쟁기 민간인의 희생은 어느정도 불가피한 점이 있다. 특히 이 경우 맥아더가 과연 월미도 주민의 생명을 보호하면서도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감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전을 위해 한국인들의 생명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맥아서의 전쟁논리였다.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상륙의 영웅담만 기억하고 월미도 주민 수백명의 폭사는 기억하지 않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직도 월미도에서 천막치고 농성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라면 이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어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미군에 의한 한국인들의 희생을 거론조차 하지 못하는 그 잘난 외교부와 국방부는 묵묵부답이다.

 

기억의 굴절과 편향, 의도된 망각과 한 쪽 측면에 대한 과도한 기억이야말로  

오늘 우리사회에 만연한 부정의의 매우 중요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천안함 희생 군인과 월미도 희생 민간인이 과연 다른 종류의 희생자라고 아직도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실화해위의 월미도 보고서를 읽어보시라.

(www.jinsil.go.kr)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오바마의 미국은 과연 변했는가?

최근 오바마는 두 건의 중요한 연설을 했다. 이라크 전쟁 종식 선언과 9.11 9주년 기념 연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연설은 민주당 후보인 오바마가 과연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와는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지, 미국이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 두 연설을 지켜본 후 느낀 소감은 실망 그 자체였다. 아니 실망을 넘어서 역겨움만 더 했다.

과연 미국은 변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할 가능성이 있는가? 심각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전 종전 선언을 하면서 오바마는 미국인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을 하면서도 이 전쟁이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의해 감행된 전쟁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부시의 이라크 침략이 정당했단 말인가? 이것은 미국의 도덕성에 대한 중요한 질문이다. 수 천명의 미국 군인을 희생시키고 수만명 이상의 이라크 사람을 죽이고도 후세인 제거하고 이라크가 민주화되었으니 잘되었단느 말인가? 오바마는 부시의 이라크 공격 결정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이라크 침략을 '이라크 해방전쟁'이라는 부시의 규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기만적인 것이다. 이라크는 후세인 시절보다 훨씬 심각한 경제적 고통, 전력난, 사회적 갈등에 신음하고 있다. 그래도 후세인이 제거되었으니 잘 된 것 아닌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수십만의 이라크 엘리트들이 거의 미국으로 빠져나갔다. 이라크 석유자원과 미국 등 서방 석유회사의 수중에 놓였다. 이라크 건설산업은 미국과 서방 회사의 먹이감이 되었다.  후세인의 독재가 물론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은 이라크인들 자신의 일이 되었어야 했다.

 

9/11 테러에 대한 규정에서도 마찬가지다. 9/11 테러가 반명문적이고 비인도적인 행동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미국인 희생자들은 마땅히 위로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에 대한 증오로 연결되기 보다는 미국이 반성해야할 계기이기도 했다. 9/11은 미국에 대한 경고이지 문명권 일반에 대한 경고도 아니며, 기독교에 대한 경고는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9/11에 대한 미국 보수세력의 해석은 알카에다, 테러 일반, 이슬람 일반에 대한 증오로 연결되었다. 9/11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대응은 전세계에 테러를 만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바마는 이에 대해서도 응당 답변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미사여구로 포장된 그의 연설은 역겨운 미국 애국주의로 가득차 있다. 9/11이후 지난 9년은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이 결정적으로 의심받게 된 시기였다. 그것은 이라크, 아프칸에 대한 잘못된 전쟁결정에 집약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바나는 불의의 희생자들에 대한 조그마한 애도라도 표시했어야 했다. 국내용이라고는 하나 이 연설들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언술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즉 문명국가인 미국의 책임이라는 말을 여러번 반복하면서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오바마은 부시 정권과 어떤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인들은 이 9/11 9주기에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나?

한국의 정치권, 언론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의 중동정책은 무조건 미국인가?  

이란 금융동결 이후 다가올 후폭풍을 숨죽여 기다라고 있는가?

 

 

 

 

2010년 9월 12일 일요일

집, 우리의 집

나는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ㄷ 자형의 남방형의 지은지 최소 백년은 넘었을 큰 한옥 초가집이었다.

그런데 1961년 여름의 대 수해로 그 고가가 무너졌다.

그래서 그 때 막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부가 새 주택을 지어주었다.

아래 사진의 제일 왼쪽의 기와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웃 집들은 사진에서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이 새 기와집에서 나는 1970년까지 살았다.

내 어릴 적의 모든 기억은 이 집과 뒷산, 마당, 이웃, 집앞의 저수지 등과 함께 하고 있다.

다정한 이웃 일가친척들과 더불어, 어릴적 동네 친구들과 더불어 산과 들을 누비며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내 정신세계가 훨씬 황량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내 어릴적 모든 추억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나 역지 객지를 떠 돌다, 지금까지 22년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근대'를 쫒아가느라 옛 우리네 집, 한옥을 버렸고, 마을을 버렸고, 그 추웠던 겨울 외풍의 기억도 함께 저 멀리 버렸다.

그리고 서울과 대도시는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으로 채워졌다.

아파트 위치, 아파트 평수는 우리의 지위과 능력의 가늠자가 되었다.

집은 거주공간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집(아파트)를 지을수록 집 없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약 3,40년 지속된 이 아파트 문명이 저물어 가는 느낌이다.

이미 아파트가 지배적인 거주지가 된 마당에 금방 다른 곳에 살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친듯이 쫓아온 근대, 편리성과 환금성과 투기성의 상징인 아파트를 버리고 주거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아파트 선호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외국인들이 한옥을 지키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한옥 지킴이 외국인 때문에 재개발안이 부결되었다고 한국인 주민들이 시위하는 기이한 풍경이 지금 동소문동에서 연출되고 있다.

북촌개발은 거대한 투기장이 되었고 북촌은 밤이 되면 유령도시가 된다.

애초부터 문화에 대해, 주거에 대해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수십년 동안 정부는 마을 부수기를 계속 해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을 부수기 작업을 돈과 바꾸었다.

우리의 영혼과 추억을 판 댓가로 우리는 돈을 벌었고, 그 돈은 수 많은 가난한 거주자들을 추방하는 불도자의 폭력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근대라는 폭력, 편의성, 환금성, 효율성의 상징인 아파트 문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 보고, 우리가 걸어갈 새 주거문화를 만들어 보자.

초라해도 가족에게 안식을 주는 곳, 생활 있고 추억을 만들 수 있고

이웃이 있는 집을 생각해 볼 때다.

 

 

2010년 9월 10일 금요일

중앙일보의 이명박 견제

한국에서 '계급'이라는 개념은 노동자들보다는 언제나 부자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언론에게 언제나 더 잘 들어맞는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계급'이 무엇인지, '계급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때도 언제나 가장 계급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발언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동을 설명할 때 보다는 부자들의 의식과 언술, 행동을 설명할 때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들은 '가진자'라는 말만 사용해도 상대방을 좌파라 몰아세우고 펀가르기를 한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그들의 언술은 '국민'으로 포장되어 있을 때도 언제나 가진자의 입장에 서 있다.

한국의 이른바 보수신문은 세련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러하기 보다는 대단히 '이율배반적이고 부도덕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상식인들을 역겹게 한다.

 

중앙일보를 보자.  

중앙일보는 사설과 칼럼, 기사를 통해 매일 충실하게 재벌 대기업, 부자, '가진자'를 대변하는 '계급' 이익 옹호 투쟁을 수행한다.

이명박의 '공정한 사회'에 대한 딴지걸기에서 잘 드러난다. 9월 10일자 사설에서 중앙일보는 '공정한 사회'가 '권력층의 도덕률'에서 멈추어야지 이념이 되어서는 곤란하고 말하고 있다. 즉 '공정'은 권력의 자기관리에 머물러야지 '능력있는 자'를 역차별하거나, 특정집단의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론을 맺으면서 공정사회론은 '기존질서에 대한 공격으로 비칠 수 있다'고 따끔하고 그리고 강력하게 제동을 걸고 있다.  

즉 중앙일보는 이명박의 공정사회론이 정권의 권력남용을 막자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지배이념이나 가치관, 규칙이나 규범이 되어 부자들과 능력있는자를 공격하는 포퓰리즘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장을 날린다.

즉 공정사회론이 한국사회의 대기업을 비롯한 힘있는 자 일반의 반칙과 편법을 문제삼는 데 까지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권 너희들이나 제대로 하고, '우리'는 건드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 까지는 중앙일보가 부자들의 '계급적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그런데, 중앙일보의 이율배반과 불공정은 이 사설에서 능력이 있어도 고위층과의 관계로 역차별을 받아서 안된다는 주장에서 드러난다.

즉 중앙일보는 노무현 정부당시 인사청문회에서 언제나 능력의 논리 보다는 '코드인사'를 문제삼고 심각하게 비판한 경력이 있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에서는 한번도 '코드인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주 부도덕한 이중잣대이다. 그들의 기준대로 '능력이 있다면' 코드인사가 문제가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친한 사람은 무조건 공격해 왔다. 이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불공정한 행동이다. 

 

그런데 중앙일보의 더 중요한 불공정한 행동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실제 우리사회는 불공정한 일로 가득차 있다. 중소기업은 매일매일 대기업으로부터 '후려치기' 등 말도 안되는 불공정한 대접을 받고도 말도 못 끄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손을 놓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수없이 불공정한 일을 겪고 있다. 지방은 중앙으로부터, 시간강사들은 대학으로부터, 학벌이 없는 사람들은 기업이나 사회 일반으로부터, 연구조교는 교수들에게, 학생들은 교사에게, 졸병은 장교들에게, 돈없는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참전군인들은 국가로부터  수없이 많은 불공정한 처사를 당하면서 분을 꾹꾹 누르면서 살아왔거나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불공정에 대해 중앙일보는 어떻게 발언했는가?

 

한국사회는 불공정의 덩어리다. 이번 유명환 파동은 그 빙산의 일각이지만, 공직자인 장관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이명박이 지적하였듯이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은 우리경제를 좀먹고 있고, 활력을 박탈하고 있다. 좋은 아이템을 가진 창업자들이 있어도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사업할 의욕 자체를 박탈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재벌이라는 것 자체가 불공정의 화신이다. 재벌가에 태어난 이유만으로 수조원의 주식부자가 될 수 있고, 검찰, 법원, 언론, 지식사회가 모두 이러한 불공정을 문제삼지 않는 나라에서 어찌 공정을 말할 것이며,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과거의 불공정?

한국전쟁기 군, 경찰로부터 학살당하고 숨소리조차 내지못한 피학살자들 문제보다 우리사회에 불공정한 일이 있나? 군사정권 하에서 간첩으로 몰려 몸 망가지고 온 가족 흩어지고 정부의 사과한번 받아보지 못한 일보다 불공정한 일이 있던가?  

 

그런데 중앙일보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그러한 불공정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우리경제에 만연한 대기업, 대형 마트의 영세상인과 중소기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공정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거론하는 것은 그들의 말대로 '기존질서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 공정사회가 두렵다.

물론 자신이 심각하게 불공정한 보도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두려울 것이다.  

언론만 공정했더라도 우리사회가 이렇게 망가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중앙일보 그들에게 있다.

 

그들은 이명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정' 좋아하다 큰 코 다친다. 너 조심해...  

 

 

 

 

 

 

 

 

 

 

 

2010년 9월 9일 목요일

청소년 446명이 자살하는 나라

지난해 우리 국민 중 자살한 사람은 모두 15,413명으로 1년전에 비해 2,555명이 증가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4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인데, 남자가 여자 보다 배 가까이 많았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은 31명으로 1년전보다 19.3%가 늘었고, 자살자 수와 자살률은 2007년 이후 3년 연속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다른 나라와 비교한 자살률에서도 OECD 평균 보다 2.5배 이상 높았습니다.

 

자살자의 분포를 보면 20,30대 청소년 층에서는 사망원인 중1위가 자살이었고, 지역적으로는 대전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10대 청소년의 경우 전년도 자살자 수는 446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40% 이상 자살률이 높아졌다고 한다. 브라질 신문에서는 한국 자살률은 브라질의 살인 사망률보다 높아고 보도했다고 한다. 한국은 자살률에서 가히 세계 최고 국가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나 시민사회는 팔짱만 끼고 있다. 연령별 자살원인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작업도 시도하지 않고 있다. 청소년 사망을 막기위한 대책이라는 것이 기껏 학교에 전담교사를 더 많이 배치해야한다는 식이고, 청년과 노인 자살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즉 정부는 자살을 여전히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고 있다.

 

1845년 엥겔스가 지적한 것처럼 상당수의 자살은 '사회적 살인'이다. 즉 자살로 몰아가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며, 그 중에서 가난은 가장 중요한 자살의 배경이다. 사회적 고통과 병리가 개인에게 살아야 할 의지를 빼앗아가고 그들에게 달리 선택지를 주지 않을 때 개인이 선택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다.

 

한국과 자살률 1위를 다투고 있는 헝가리의 사례를 보면 한국 자살률의 원인이 설명이 된다. 과도한 시장주의로 인한 사회적 안전망 부재, 높은 청년 실업률, 심각한 빈부 격차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마아니치 신문에서도 일본과 한국의 자살률을 비교하면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10년새 노인 자살률이 3배 증가한 사실이 그것을 뒷바침해주고 있으며, 경남에서 독거노인이 가장 많은 김해시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그런데 미래를 꿈꾸며 살아야할 10대 청소년 자살률이 이렇게 높은 사실은 가장 충격적이다. 이것은 단순히 양극화와 복지부재만으로 설명되지 않은 우리사회의 청소년, 학생 죽이기 교육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 심각해진 전국 학생 하나로 줄세우기 교육, 자사고 확대 등의 경쟁주의 교육정책이 주범이다. 안그대로 극도로 지쳐있는 학생들을 더욱 쥐어짜서 청소년들을 아직 여물기도 전에 시들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이 정부의 교육이다.

 

상황이 이럴진데도 이 정부나 사회는 반성이 없다. 정당도 시민사회도 침묵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일회성 정책이나 캠페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사안이다. 우선 자살은 사회적 살인이라는 점이 공론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사실상의 정치적, 사회적, 정책적 살인을 저지르면서 그것을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정책이라는 거짓말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도한 경쟁주의, 승자독식, 실업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성장이 복지를 보장한다, 경쟁이 생산성을 높인다는 이 허구적 논리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아야 한다.

 

우선은 지친 청소년, 좌절한 청년, 외로운 노인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쉼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시장이 장학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 중 1순위는 청소년 자살율을 낮추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우리사회의 게임의 룰를 어떻게 변경할 것인가의 문제다.

 

 

 

 

 


 

2010년 9월 5일 일요일

유명환 장관 건 다시 생각해보기

외교부 직원 중 외교부 고위직 자녀가 41%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시사저널 등 잡지에서도 한번 취재,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유명환 장관 건이 계기가 되어 온 사회가 이 건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이유는 '현대판 음서제'가 청년실업자로 넘쳐나는 한국사회에 불을 지른 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험제도가 그나마 최소한의 정당성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시험 외의 방법으로 특권층 자녀가 고위 공직자로 특채되었다는 사실이 젊은이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 같다.

 

외무고시의 경우 고시제도를 점점 폐지하고 사관학교를 신설하자는 방침이 수립되었고, 행정고시 역시 면접과 서류로만 전문가를 특채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 마당에 그래도 고시제도가 없는 집 자식들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즉 현재와 같이 한국사회의 투명성과 힘센자들의 도덕성의 수준이 형편없는 상태에서는 공개 시험을 없앨 경우 필연적으로 그들만의 리그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진단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과거제도가 타락한 조선 조 말에도 고급관리들 자녀들이 합격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고, 합격 후에도 관리로 추천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 예가 있고, 과거제도의 타락을 개탄한 많은 선비들이 아예 과거시험을 거부하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중국 고전만 달달외워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은 물론 아무런 창의력도 없는 선비들이 관리가 되어 나라를 이끌어갔기 갔기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많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폐해는 이후 100여년 동안의 고시제도와 그것에 의해 선발된 관리, 법조인의 행태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따라서 고시제도의 폐지는 그 자체로는 피할 수 없는 대안이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합리적으로 공직자 특채제도를 운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이미 한국 지배구조나 자본주의가 계층 이동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데 있다. 고위직이나 외교관 자녀들은 부모따라 외국에 나가서 영어나 외국어를 습득할 기회가 많고, 여러가지 스팩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실 아주 합리적인 절차로 선발한다고 해도 다른 지원자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즉 합리성의 이름으로 사실상 전문성과 어학실력을 기를 기회를 훨씬 더 많이 가진 특권층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특권층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결국 기회의 평등,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조건의 개방을 전제로 하지 않는 절차적 합리성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고시제도로의 회귀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지금부터 어떻게 전문성을 쌓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 이러한 전문직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선발제도를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있다. 즉 선발과정에서 단순히 외국어 능력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외교정책 등에 대한 구술 시험, 사회봉사, NGO 활동의 경력 등을 포함하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여러자질을 골고루 집어넣을 뿐더러, 심사 위원 구성에서도 외부인사를 적당히 끼워넣은 방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합리적인 심사가 될 수 있도록 내부자의 발언권을 제한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이 고안되어야 한다.

 

외교사관학교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의 외교부가 운영하는 사관학교는 확실히 정치 외교 기업등 기득권 층 자녀들의 잔치가 될 것이고, 그렇게 길러진 외교관은 현재의 외교관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도 있다. 교수진 구성, 학생 선발 등에서 국민적인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2010년 9월 4일 토요일

실업

실업상태에 있다는 것은 매일 죽는 것이다. 고용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실업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청년실업률도 사상최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강력한 실업대책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생산기지기이자 최대의 소비시장인 미국의 실업률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아래의 표를 보면 2000년 당시에 선진각국 중에서 최저의 실업률을 자랑하던 미국이 지금의 세계 최고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실업률은 유럽에서 실업률이 가장 높은 프랑스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미국의 노동시장이 유연하기 때문에 노동시장이 경직된 유럽에 비해 실업률이 낮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미국 경제학 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

 

미국과 선진각국의 실업률 비교

The unemployment rate increased more dramatically in the U.S. than in other countries with major economies over the past decade.

Notes

Notes

The 2000-2009 numbers reflect annual data. The numbers for 2010 are the latest monthly numbers available for each country.

 

미국은 노동시장이 유연하기 때문에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으나 사용자들은 노동자를 해고한 이후에 이윤이 발생하면 그들을 재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구입 등 생산성 향상에 주력한다. 해고의 부담도 없으니 재고용의 부담도 없다. 생산성과 이윤 자체가 목표니 더불어살아야 한다는 철학도 없다.

 

경제가 어려우면 사람을 잘라서 기업을 유지하는 것이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지 최선의 최고의 방법은 아니다. 어렵다고 사람을 쉽게 자르면 잘린 사람은 자신이 소모품 취급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회사는 물론 사회 일반에 대해 절대로 충성심이나 소속의식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즉 기업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이러하면 사람들도 기업을 수단으로 대한다. 그것은 인간성의 실종이고 문명의 파탄이다.

 

미국의 높은 실업률은 미국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미국을 교과서로 알고 미국을 추종하는 한국은 어떠한가? 과연 한국에 기업윤리나 노동윤리가 존재하는가? 기업이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면 사람들도 기업을 버린다.  경제란 결국 사람이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세상이 구매력없는 실업자로 넘쳐나는데 어떻게 소비시장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시장인 미국의 실업률이 이렇게 높은데 미국시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국경제가 어떻게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2010년 9월 3일 금요일

외교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서인가?

이번 유명환 장관 딸 특채 건을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장관인줄 몰랐다는 속이 보이는 외교부의 공식 변명과 자기 딸이 특채되는 것을 애초부터 말리지 않았을 뿐더러 적극 말리는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장관에게 매달고 있는 부하들에게 사실상 무언의 '압력'의 신호를 보냈을 수도 있는 장관의 행동, 그것이 초점이다. 즉 장관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외교부가 이렇게 겁없이 행동할 수 있는 이유였다.

 

외교부는 특권조직이다. 외무고시 출신이 아닌 사람은 그 조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순혈주의가 가장 잘 적용되는 곳도 그곳이다. 대를 이어 외교관이 되는 집안도 여럿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외교부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다. 지난 10년 간의 민주정부 하에서도 외교부는 건재했다. 그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이니 특권의식, 선민의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정부 들어서는 아예 통일부까지 외교부가 점령했다.  그리고 한미 쇠고기 협상을 이끈 농수산부의 주역들도  외교부 출신이니 이제 정부 여러부처가 외교부 식민지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과거 외교부 즉 국무부 엘리트는 가장 건드릴 수 없는 그들만의 특권층( establishment)을 형성한 바 있고, 냉전시절 그들이 미국의 운명, 아니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미국이 아무리 군사주의를 내세우는 제국이어도 군인 혹은 국방부는 절대로 외교관이나 정치가 위에 설수 없었다.  즉 미국의 국가권력의 핵심에는 외교가 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 특권이 누구를 위한 특권인가가 문제다. 한국 외교부의 철학은 냉전반공, 친미주의다. 한국 외교, 한국 외교부는 미국의 이익이 한국의 이익이라는 전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 외교부의 공식언어는 영어이며, 외교부의 세계관은 미국의 것이다. 외교부에게 미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젊은 외교관 일부가 이러한 전통적인 틀을 벗어나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지만, 이 정부 들어서는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한국전쟁기 미군 희생관련 자료 조사차 공무원의 자격으로 미국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중 주한 외교부 직원의 응접을 받은 적도 있다. 공사관이 한국의 차관급 공무원이 미국방문하는 것에 대해 응접을 하는 것은 자신의 공식활동이니 특별히 감사해야할 일은 아니지만, 이들과 식사 등을 하면서 답답했던 적이 있다. 즉 내가 미국의 잘못된 일을 밝히러 간 것에 대해 불편해 하는 태도가 역력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이 미국에 주재하고 미국 눈치를 살펴야 하는 외교부 직원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즉 한국인들이 강대국의 전쟁터가 되어 불의의 희생을 당한 일이 있고, 미국의 책임역시 크다는 점, 그리고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미군의 책임을 밝히는 일에 대해 약간이라도 이해를 해 주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아예 한국전쟁기의 미군 피해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은 물론, 진실위원회 활동을 매우 불편해했고 무관심했다.

나는 그들을 한국 국민의 세금으로 활동하는 외교관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센 미국에게 무모하게 노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제발 한국국민의 입장에 서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와 한국 외교부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철저하게 국익의 입장에 서 있지만, 한국 외교부는 좋게 말하면 우리 국익이 미국에게 철저히 편승해서 안보를 유지하고 경제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나쁘게말하면 한국의 장단기 국익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국익 자체에 관심이 없다. 중국과 러시아를 저렇게 멀어지게 하는 것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 특권의식이 아닌 철학과 역사관이 있는 외교부 직원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나는 그들의 특권의식, 무지, 국민에 대한 근본적 무책임성, 오만이 이번 사태의 실질적인 배경이라고 본다.

거창하게 민족, 인권의 가치까지 요구하지 않겠다.

제발 국민의 입장, 힘없는 국민의 입장에 한번이라도 서 달라.

그것을 부탁한다.

 

외교부가 바로 서는 날, 그날이 국가가 '국민의 국가'가 되는 날이다.  

 

 

 

 

 

 

 

 

 

2010년 9월 2일 목요일

유명환 장관

"민주당 찍는 젊은 애들 북한가서 살아라"라는 발언을 해서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 유명환 장관이다. 입각 후에도 유독 정치적인 발언을 많이 했던 사람이고, 리비아 사태, 이란 문제 등 실익 차원에서도 대한민국 외교를 궁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바로 그다. 현 정부의 대북관계에서도 통일부를 제치고 외교부가 주도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즉  미. 중관계에서 실익을 챙기기 못하고 미국일변도의 냉전외교에 의존하여 국가를 위기에 빠트렸다는 점에서 사실 경질되어야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개각에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드디어 또 한번 한국의 이른바 보수의 본색이 드러났다. 오직 1명을 특해하는 5급 직원 선발과정에서 자신의 딸을 뽑은 것이다. 그것도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전문계약직이라고 한다. 정규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자기는 전혀 몰랐는데 밑의 사람들이 그냥 하다보니 그렇게 뽑았다고?

아마 전혀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조직을 아는 사람이라면 밑의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너무 잘 알 것이다.  

 

더구나 그의 딸은 1차에서는 부적격자였다가 2차 재공고에 뽑협다. 통상 공고기간인 10일을 어기고 한 달이나 공고를 해서 외국어 자격증 서류를 갖추도록 했다는 의혹도 있다.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매지 말라는 속담처럼, 자기가 현직 장관인 부서에서 특채자를 뽑는 일이라면 아무리 합리성의 외양을 갖추었다고 해도 이런 식의 서류와 면접만으로 뽑는 절차를 거친다면 반드시 말이 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다. 객관적으로 그의 딸이 가장 적임자였을 수도 있지만, 공개시험이 아닌 마당에 누가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겠는가?  

 

기업이나 정부에서 면접의 합리성을 높이기 위해 외부 전문가를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들러리에 불과하고 내부자가 사실상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외부 심사위원이 5명 중 3명이었다고 하나 이런 식의 면접을 해 본 사람이면 외부심사위원 3명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물론 자기 딸이 최적임자이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 딸을 배제한다면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다. 상식을 갖춘 공직자라면 자신의 딸이 고시를 통해 외교부에 들어오게 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자신의 딸이 그 일에 적임자라고 해도 반드시 문제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비상적인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승복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공개경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는 자긴의 사적 이익을 챙기는 일에는 물불과 체면을 가리지 않지만 그 수준은 아직 전근대 시절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