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2일 일요일

집, 우리의 집

나는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ㄷ 자형의 남방형의 지은지 최소 백년은 넘었을 큰 한옥 초가집이었다.

그런데 1961년 여름의 대 수해로 그 고가가 무너졌다.

그래서 그 때 막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부가 새 주택을 지어주었다.

아래 사진의 제일 왼쪽의 기와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웃 집들은 사진에서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이 새 기와집에서 나는 1970년까지 살았다.

내 어릴 적의 모든 기억은 이 집과 뒷산, 마당, 이웃, 집앞의 저수지 등과 함께 하고 있다.

다정한 이웃 일가친척들과 더불어, 어릴적 동네 친구들과 더불어 산과 들을 누비며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내 정신세계가 훨씬 황량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내 어릴적 모든 추억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나 역지 객지를 떠 돌다, 지금까지 22년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근대'를 쫒아가느라 옛 우리네 집, 한옥을 버렸고, 마을을 버렸고, 그 추웠던 겨울 외풍의 기억도 함께 저 멀리 버렸다.

그리고 서울과 대도시는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으로 채워졌다.

아파트 위치, 아파트 평수는 우리의 지위과 능력의 가늠자가 되었다.

집은 거주공간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집(아파트)를 지을수록 집 없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약 3,40년 지속된 이 아파트 문명이 저물어 가는 느낌이다.

이미 아파트가 지배적인 거주지가 된 마당에 금방 다른 곳에 살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친듯이 쫓아온 근대, 편리성과 환금성과 투기성의 상징인 아파트를 버리고 주거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아파트 선호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외국인들이 한옥을 지키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한옥 지킴이 외국인 때문에 재개발안이 부결되었다고 한국인 주민들이 시위하는 기이한 풍경이 지금 동소문동에서 연출되고 있다.

북촌개발은 거대한 투기장이 되었고 북촌은 밤이 되면 유령도시가 된다.

애초부터 문화에 대해, 주거에 대해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수십년 동안 정부는 마을 부수기를 계속 해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을 부수기 작업을 돈과 바꾸었다.

우리의 영혼과 추억을 판 댓가로 우리는 돈을 벌었고, 그 돈은 수 많은 가난한 거주자들을 추방하는 불도자의 폭력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근대라는 폭력, 편의성, 환금성, 효율성의 상징인 아파트 문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 보고, 우리가 걸어갈 새 주거문화를 만들어 보자.

초라해도 가족에게 안식을 주는 곳, 생활 있고 추억을 만들 수 있고

이웃이 있는 집을 생각해 볼 때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