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2일 금요일

국가폭력 낳는 ‘비명령적 명령’ [2011.08.15 제873호]

2011년 8월 15일, <한겨레21> 제873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2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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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낳는 ‘비명령적 명령’ [2011.08.15 제873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용산 참사에서 민간인 학살 부른 한국전쟁기 토벌작전을 보다 ③
군경, 최고권력자의 묵시적 방침과 노선 의식해 강경 진압 나서


2008년 6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불법·폭력 시위에 대한 엄정 대응’ 방침을 천명했다. 이후 전경의 진압은 난폭해졌고, 쓰러진 시민을 군홧발로 폭행하기도 했다. 그해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법치’를 유난히 강조했다.

서울 용산 참사 관련 수사에서 검찰은 경찰특공대의 진압작전과 그에 대한 대항 과정에서의 화재 발생, 철거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다고 결론을 냈다. 검찰은 조사 과정에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서는 두 차례의 서면조사, 경찰관들에 대해서는 단순진술로 마무리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물러난 김석기 청장을 일본 오사카 총영사로 임명했다.


휴지 조각 된 경찰 직무집행 매뉴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의 자서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 공비 토벌작전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보고는 관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를 듣고 싶어했다”라고 회고했다.

한국전쟁기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군이 민간인 700여 명을 학살한 거창사건 당시 9연대장으로 지휘책임이 있던 오익경은 재판정에서 “조속한 시간 내에 공비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비등했으나 이승만은 “그렇게는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노발대발했다. 결국 신성모는 해임 이후 주일대표부 대사로 임명돼 일본으로 갔다.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은 여론이 비등하자 체포돼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나 곧이어 특사로 출감했으며 이후 재임용돼 치안국장까지 승진했다.

용산 진압 당일 최종 결재권자인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사건 당시 근무 중이었으나 무전기를 꺼놓았다고 답변해서 자신은 용산 참사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한 바 있다. 최종 명령자가 작전 중에 무전기를 꺼놓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변명이지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가 막 임명된 시점에 민간인 5명과 특공대원 1명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23명(경찰 16명)을 심하게 다치게 한 무리한 작전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한국 경찰의 경찰직무집행법에도 “경찰관의 직권은 직무수행에 필요한 최소한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하며 이를 남용해서는 아니된다”는 비례의 원칙과 관련한 규정이 있고, 수단은 목적을 실현하는 데 적합해야 한다는 ‘수단 최소 침해의 원칙’과 수단으로 인한 침해가 목적상의 이익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수단의 상당성의 원칙’도 있다. 지금의 ‘민주’ 경찰은 자신이 만든 집회·시위 현장 법 집행 매뉴얼이 있고, 이 매뉴얼에는 화염병 등 위험물질 소지 여부를 파악해서 작전상 장애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며(선 화염병 소진, 후 검거), 국가인권위원회와 경찰청이 공동으로 만든 교재에는 폭력적 집회를 해산하는 경우에도 ‘최소한의 물리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 그런데 용산 참사 때 투입된 특공대원들은 “시위 현장에 인화성 물질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화재 대비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고,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진압 직전 직무집행 매뉴얼을 교육받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오직 특공대장의 재촉 무전만이 그들의 진압작전을 지배했다.

오늘의 경찰은 토벌 투입 이전에 병사들이 지켜야 할 매뉴얼도 없고, 민간인의 생명 보호에 대해 조그만 교육조차 받지 않고 무조건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한국전쟁기 토벌군, 1945년 이전 일본 천황의 군대가 아니다. 그런데 왜 ‘민주’ 경찰의 직무집행을 위한 모든 매뉴얼은 용산 진압작전에서 휴지 조각이 되었는가?


무관심·침묵·불개입은 또다른 명령


군과 경찰은 상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래서 군과 경찰의 작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패나 부수적 피해의 대부분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보다는 상부 명령권자의 지시·명령과 직접 연관돼 있다.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무기를 소지한 경찰과 군의 작전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대단히 엄중하고, 명령계통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그 엄중함과 책임감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군·경찰 최고지휘관의 판단과 명령은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군경 지휘관의 판단과 명령은 자신의 임명권자이자 최고의 지휘관이자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정책 방침을 따른다.



경찰에게 데모 진압은 군에게 토벌작전과 마찬가지다. 예측불허의 전투 상황에서 군과 경찰의 작전은 지휘자의 명시적 명령을 따르지만 이 지휘관은 바로 최고권력자의 묵시적 방침과 노선을 의식한다. 흔히 최고권력자는 명령이 아닌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흔히 ‘비명령적 명령’이라고 한다. 즉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의 평소 방침과 발언, 인사, 포상·처벌을 보고 아랫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야 칭찬받는지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고명령자는 말을 통한 우회적 강조뿐만 아니라 무관심·침묵·불개입을 통해서도 영향을 준다. 즉 대통령이 노동자 파업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도 진압 때 인명피해가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추가하지 않는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진압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신속히 진압하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경찰 총수는 진압작전 때 발생할지 모르는 ‘부수적 피해’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책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며 오히려 강하게 진압하지 않을 경우 문책당할 것임을 알아챈다.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지닌 나라에서 군사작전시 비명령적 명령은 명령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조직문화상 일방적 복종이 중시되고 절대 충성이 승진을 보장해주는 군·경찰·검찰 등 권력기관의 수장들은 실적 쌓기 충성 경쟁을 벌여 대통령이 실제 원하는 것을 2배, 3배로 실천하려 하는 경우도 많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행위에는 언제나 시간 변수가 개입한다. 과거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해석이 지금의 그에 대한 내 행동을 좌우한다. 그런데 관료조직에서 상대방이 내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가장 중요한 타자, 즉 인사권자라면 그가 이전에 어떤 사람을 포상·처벌했는지가 내 행동을 좌우할 것이다.


촛불에 ‘불법 무관용’ 천명한 MB


해방 직후 각종 테러사건을 일으킨 김두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두한은 정부 수립에 공헌이 많으므로 형을 특사한다”라며 풀어주었다. 그 뒤 이승만 정권하의 군·경찰 지휘부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더라도 반공 노선만 철저하면 언제나 면죄부를 받고 승진과 출세도 보장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승만이 정보장교들에게 “누구 조사해봐라”라고 하면 이는 곧 측근들에 의해 ‘처치해버려라’는 말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실제 이승만의 뜻이기도 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토벌에서나 전쟁 직전 지리산 일대 토벌작전에서도 민간인을 많이 죽여서 처벌당한 지휘관은 거의 없었지만 토벌을 제대로 못한 지휘관은 엄한 문책을 당했다. 1951년 거창사건의 경우에도 대대장 한동석은 연대장으로부터 토벌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한 질책을 받은 다음 곧이어 수백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한국전쟁기 군에 의한 학살이 만연한 것은 이런 이승만의 비명령적 명령의 효과로 볼 여지가 많다.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시위에 대해 ‘불법 무관용’ 원칙을 강조했다. 즉 그는 ‘시민의 안전권 보장’과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불법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반드시 추궁하고 불법 사태 종료 뒤에도 불법행위자는 끝까지 추적·검거해 엄벌에 처하겠다고 했다. 시민을 (불법) 시위자와 대비시키고, 시위자는 무조건 진압해 엄한 처벌을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촛불시위 초기 온건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한진희 서울경찰청장이 전격적으로 경질되었다. 그러나 과잉 진압 건으로 퇴진 압력을 받던 어청수 경찰청장은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퇴진 압력에도 거뜬히 자리를 지켰다. 청와대의 신임이 확고했다. 그래서 그는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퇴진했다. 2009년 1월20일 용산 참사 직후 김수정 서울경찰청 차장은 바로 대통령이 촛불시위 진압 당시 강조했던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상황’을 가장 큰 진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대통령과 경찰 총수 등이 강조한 ‘법’ ‘질서’란 시위대나 도시 빈민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시민이란 사실상 정권을 의미했다. 용산 진압의 명령자들은 그 전 해인 촛불시위 당시 대통령이 보인 비명령적 명령에 충실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거창사건 책임자들을 전원 사면·복권시킨 것은 그가 민간인 학살을 죄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당시 사건을 조작하려 했던 김종원의 석방을 이기붕이 반대하자 이승만은 김종원을 충무공 이순신에 비유해 석방시키라는 담화를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떠했나? 이명박 대통령은 쇠고기 협상에서 굴욕적인 타협을 했다고 비판받은 협상 대표 민동석을 외교통상부 차관에 재기용했고,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한나라당 최고위원으로 앉혔다. 협상에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의중대로 행동한 사람이라면 국민의 지탄을 받더라도 끝까지 밀어준다는 강한 신호를 보냈다. 대통령의 이러한 인사·포상 정책은 관료들로 하여금 국민의 인권이나 생명을 무시하더라도 그에게 더욱 강한 충성을 보이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법 위에 있는 대통령의 말과 의중


그래서 군사작전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은 말단 병사나 현장 지휘관보다는 상위의 명령권자, 그리고 그를 임명한 사람에게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한국식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의 말과 의중은 법 위에 있다. 설사 법과 절차를 어겨도 그의 의중에 따르기만 하면 민간인 피해도 용납되는 것은 물론 출세까지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상부의 명령은 엄중하나, 인권 보호는 먼 나라 이야기다. 진압 때 농성자들을 다치지 않게 주의하라는 식의 상부 지시는 하나도 없었지만, 법과 질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농성자들 때문에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인사권자의 지적은 무서운 비명령적 명령으로 다가온다. 한국전쟁기와 마찬가지로 진압부대장에게는 전과의 압박이 모든 작전 과정을 지배했을 것이고 진압 과정에서 발생할 불상사에는 책임질 필요가 크지 않았다. 이 경우 당신이 지휘관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용산 참사의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할 것인가?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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