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6일, <한겨레21> 제891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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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도전자 잡아베던 독재시대 국가원수모독죄
비판·풍자 용납 않는 엠비시대 다시 살아나
지난 10월13일 서울 롯데백화점 주변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연행된 대학강사 박정수씨에게 대법원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공용물건 손상죄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원은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형법상 금지하는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애초 구속영장을 신청한 남대문서 형사과장은 “중요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국격을 높이는 국가 홍보물을 더럽히는 것이 (시민의) 정상적 사고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씨는 애초 경찰이 단순 재물손괴 혐의로 조사를 했다가 ‘윗선’의 지시로 ‘공안 사건’으로 키웠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경찰에게 물었더니, 경찰청장에게 보고되고 청와대에도 보고됐기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MB 비판하면 ‘불경죄’로 다스려
총리실 불법사찰 건의 최대 피해자인 (주)KB한마음 사장 김종익씨는 애초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을 빌미로 유죄가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에서 쫓겨났고 소유 주식을 포기했으며, 경찰과 검찰은 공금횡령과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등을 들어 그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의 공식 죄목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 결정서에서 피해자는 자연인 이명박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적시돼 있다. 검찰은 수개월을 끌다 대통령 명예훼손을 인정하는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결국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고, 사기업의 회장직과 개인 소유의 주식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의 범죄가 된 것이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하라”고 고함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을 장례식 방해 혐의를 적용해 벌금 3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일반인들은 그런 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생소한 법조항을 끄집어내 그를 형사처벌했다.
지난 3월 문화방송 경영진은 ‘검찰과 스폰서’ ‘4대강의 비밀’ 등 사회적 큰 반향을 일으킨 의 간판급 연출자인 최승호 PD를 비롯해 핵심 인력 교체를 강행했다. 최승호 PD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노조는 성명에서 “MB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불경죄’를 범하기라도 하는 듯, 최승호 PD가 MB 정권의 뿌리인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다루려 하자 을 거칠게 흔들어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사교양국장은 1년 이상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사람은 예외 없이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경찰, 검찰, 법원, 문화방송 경영진 등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람을 처벌한 명분과 법조항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하나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김종익씨에게 적용한 죄목인 ‘대통령 명예훼손죄’는 최고권력자가 명예훼손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독재 시절 여러 민주인사를 옥죄다가 노태우 정권하에서 폐지된 형법상 ‘국가원수모독죄’의 정신이 깔려 있는 셈이다. 제작자들에 대한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훼손죄 기소,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국가정보원 명예훼손 기소 등 같은 범주에 속하는 정부 쪽 기소 사건 역시 법이 국민의 보호막이 되기는커녕,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의 칼이 되어 정부 정책과 최고권력자에 대해 작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마구 휘둘러대는 것과 같다.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거나 대통령을 사실상 국가와 동일시한 상태에서 권력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언론은 무조건 앵무새처럼 대통령을 찬양해야 하고, 국민은 ‘입을 닥쳐야 하는’ 독재체제하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발상이 이명박 정부에서 살아났다.
최능진
이승만에게 도전해 살해당한 최능진
군사독재 시절 국가원수모독죄의 원형은 전근대 시절과 일제 식민지 시절의 불경죄였다. 1948년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최능진은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이승만의 당선을 저지하려고 같은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그해 10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돼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즉각 정전, 평화 호소 대회’를 추진했지만, 수복 뒤 군법회의는 인민군 치하에서 그의 활동이 국방경비법 32조(이적죄) 위반에 해당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그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총살형을 당했다. 원래 그는 일제하에서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일하다가 공산당과 마찰을 빚어 월남한 인물이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며 친일 경찰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1946년 경무부장에 의해 파면되기도 했다.
장준하
선거 당시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은 집요하게 최능진의 등록을 방해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는 극적으로 후보등록을 했다. 기호 1번이 된 그는 독립운동 경력을 부각시키고 이승만의 친일 경찰 기용을 비판해 인기가 높았으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대문 경찰서장은 본인이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당선 무효를 주장했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이틀 전인 5월8일,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의 날인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의 등록을 무효화했다. ‘혁명의용군 사건’ 역시 조작 의혹이 짙고, 전쟁 중 군법회의의 사형 판결도 평화적으로 전쟁을 종식하려 했던 행위에 정치보복으로 응답했다는 비판이 많다(2009년 8월1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헌법상 근거가 없는 군법회의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 판결을 확정판결로 볼 수 없다고 결정했다).
최능진의 비극적 최후는 실정법과 재판의 형식을 거쳤다고는 하나, 당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앙되던 이승만에게 감히 도전하면 어떤 정치보복을 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후 국가원수모독죄가 적용된 1988년까지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대통령을 비꼬거나 정치적으로 도전한 인물들에게는 긴급조치 위반 등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무서운 보복과 처벌을 가했다.
일본에선 없어진 ‘국가원수모독죄’
최능진과 마찬가지로 장준하도 일제 말 일본군 학도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편입돼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인 박정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경력 때문에 5·16 쿠데타 이후부터 그는 박정희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는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규탄했고, “일본 패망이 없었으면 박정희는 여전히 독립투사를 학살하는 일본군 장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박정희는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공격했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돼 3개월간 투옥됐고, 그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등산에 나섰던 그는 한 벼랑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과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히려 했으나, 죽은 지 24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다. 사고사라고 보기 어려운 정황이 너무나 많은데도 아직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최능진과 장준하는 국가 지도자에게 감히 도전했다가 온갖 수난을 당한 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공통된 점은 이들이 모두 국가 지도자로서 국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두 인물을 공격했다가 보복의 칼을 맞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약점이 있거나 위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농담에도 성난 얼굴을 하는 법이다.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중국의 법은 어떤 자라도 황제에게 경의를 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그 법은 이 경의를 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구실로 그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죽이고 그가 죽이고 싶은 가족은 모두 죽일 수 있다”라고 불경죄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즉 법이 합리성과 공정성의 원칙이 아니라 인격의 원리에 입각해 있고,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해 그에게 어떤 도전도 금하는 전통시대 중국의 법문화를 비판했다.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한 법의 정신은 군국주의 일본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메이지 헌법 3조에는 ‘천황의 신성불가침’ 조항이 있고, 형법에서는 ‘황실에 대한 죄’ 조항이 있었다. 천황제를 비판한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는 이 불경죄 조항으로 처벌을 받았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박열도 대역죄인이 되어 해방 때까지 무려 21년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의 우익 지도자들은 이 대역죄·불경죄의 조항을 살리려 했다.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자유당의 기타우라 게이타로는 “도대체 26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불경죄를 미국식으로 삭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널리 국민 일반의 지식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를 위해 그 찬부를 묻고 싶다”고 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도 두 법을 존치시켜달라고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헌법이 법 아래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천황이나 황족만이 형법상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에서는 없어진 이 법이 한국에서 1988년까지 ‘국가원수모독죄’로 살아숨쉬었다.
MB 나온 웹자보 삭제 요구 받아
지난해 서울 청량리에서 탈성매매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는 단체 ‘성매매 없는 세상, 이룸’에서 웹자보(인터넷판 대자보)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유한 건물인 서울 양재동의 영일빌딩에서 성매매업소가 영업 중임을 풍자하려고 빌딩의 업소 사진과 함께 합성사진을 실은 것이다. 그러자 담당공무원들은 웹자보 삭제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사무실과 상담소 대표의 개인 휴대전화에까지 수시로 전화를 해댔으며, 이런 식이면 앞으로 상황이 어려울 것이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불경죄는 사라졌으나 불경죄의 정신은 권력자나 관료들에게 아직까지 살아 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싫어하거나 저잣거리 광대들의 농담조차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딱딱한 머리의 권력자, 국가나 국가원수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 아래 국민은 국가 혹은 국가원수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시대나 군국주의 시대의 사고를 가진 관료가 바로 그들이다. 이 칼은 과거에는 최능진·장준하 같은 도전자를 잡아서 베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예술가나 소시민의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로 살아났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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