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2011년 12월 5일, <한겨레21> 제888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9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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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공인의 실종 ②-지역명망가 학살하고 연 거짓 우파만의 세상
한국사회는 공적인 인간이 절멸된 뒤 친일파가 만든 결과일 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인사 청문 대상자는 총 89명으로 이 중 82.0%에 달하는 73명이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등 이른바 ‘4+1 필수(?) 불법 과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탈세 또는 탈루, 체납 등 세금 관련 의혹이 57명(64.0%)으로 가장 많았고, 부동산 투기 의혹 44명(49.4%), 위장 전입 의혹 29명(32.6%), 병역 기피 의혹 16명(18.0%), 표절 등 논문 관련 의혹 13명(14.6%) 순이었다.
지역도 다르지 않다. 민선 지자체장 3명을 배출한 경기도 성남시와 전북 임실의 경우, 역대 지자체장 전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거의가 뇌물수수 등의 죄목이었다. 경북의 영천시와 소싸움으로 유명한 청도군은 2005년 이후 시장과 군수가 선거법 위반 등 죄목으로 물러나 매년 선거를 치러 왔다. 충청북도는 민선 4기 동안 도내 지자체장 중 4명이 중도에 낙마했고, 민선 5기 들어서도 지자체장 3명이 기소되었다. 강원도·전라남도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단체장의 비리는 거의 전국적 현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4·3 전후로 지역인물 극명하게 갈린 제주

1953년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고 집권당이나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했고, 수많은 장관과 고위 관료가 왔다 갔지만, 민주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는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말을 들은 지도 참 오래되었다. 가장 힘있던 사람들이 재임 기간 중이나 그 이후 각종 부패 스캔들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고,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잊혀졌다.

나는 이것을 중앙이나 지역사회에서 ‘공인의 실종’, 즉 오직 개인적 권력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들만이 주로 힘있는 자리에 올라할 수 있도록 판이 짜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임명직이나 선출직이나 별로 큰 차이는 없다. 민주화 이후 선거라는 절차를 거치고 있지만, 진정 국민과 주민의 편에 서서 일할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은 현재도 거의 없다. 한국전쟁은 좌익은 물론 중도 혹은 우익 인사 중에서도 공적 대의에 헌신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후부터는 그런 사람이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지역사회의 1차 판갈이는 1945년 8·15 해방 직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통해서였다. 공식 역사는 좌익이 이들 조직을 주도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지역사회에 들어가보면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실제로 해방 직후 지역에서 신망받는 상당수 사람들이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이런 조직에서 활동했다. 2차 판갈이는 정부 수립 전후 이들이 탄압을 받아 제거되고, 곧이어 학살된 사건이다.

제주도에서처럼 4·3 사건 이전과 이후 지역사회의 지도자들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등 지역 자치기구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70% 정도가 일제하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지역의 부호나 극우 인사를 도지사로 앉혔고, 4·3 사건을 겪으며 초기 주민의 신망을 받은 거의 모든 인물들이 타살·학살·실종되었다. 1987년 이후 제주 4·3 사건 재조명 분위기가 활발해지자 지역의 노인들은 “요망한(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고, 물경한(시원찮은) 우리만 살아남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즉 민주화 이후 난폭한 폭도로 몰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리더십이 있는 똑똑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이끌고 가르쳐줄 진정한 선배가 없어 마을의 정기와 맥이 끊겼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4·3 이전의 지도자들과 친일파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다시 판이 짜인 이후의 제주 지역 지배자들을 비교해 “똑똑한 사람 다 죽고 나서 아무개가 도지사가 되니 도민들 모두가 비웃었다”고 말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원로가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친일파들에게 죽임 당한 지역인물들

‘원로 실종’, 즉 존경할 만한 지도자 부재는 제주도만이 현상이 아니라 사실 1950년대 이후 한국 전체의 특징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군 단위에서 주민의 요구는 주로 지역사회의 지주 부호층, 친일 식자층으로 구성된 ‘유지’ 집단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총독부 관리들과의 뒷거래와 진정을 통해 민원을 해결하며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왔다. 총독부 관리나 경찰들이 이들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독점적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이들은 쫓겨났고, 주민의 신망을 받던 항일 인사나 지식층, 양심세력이 주민의 참여를 통해 짧은 기간 지역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역사회는 또다시 식민지 말단 관료 출신, 우익청년단 출신, 중앙에서 유명해져서 고향으로 낙하산 타고 내려온 인사로 채워졌고, 일제 시기와 같은 로비와 진정으로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한국전쟁 기간에 이승만 정부의 군경·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해방 직후 지역사회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이들 대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을 죽인 사람은 일본 경찰 출신과 옛 친일 경력자들이었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반이승만 노선이 죽을죄였다.

전남의 완도·해남 등 지역에서는 일제하에서 청년운동·소작쟁의 등에 참가했던 지역의 활동가,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와 같은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상당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자연스럽게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당, 청년단체 등 지역 정치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의 공출에 반대하거나 이승만 편을 들지 않거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부 수립 전후 수없이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다 전쟁 이전에 경찰에 사살되기도 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보도연맹원 혹은 부역자로 지목돼 대부분 학살되었다. 최평산(1903년생)은 일제 시기 완도군 소안면에 본부를 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 구성원이었고,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대표적 항일 인사였다. 그는 해방 뒤 과거 항일운동 동료들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8년 11월5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소안면의 김장균(1923년생)은 광복군 출신이다. 해방 뒤 귀국해 완도군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책임자가 된 뒤 수배와 구금이 반복되었다. 김장균은 완도읍 죽청리 뒷산에 은거하던 중 1949년 4월13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김남곤(1899년생), 김장안(1905년생), 김유곤(1908년생), 최홍길(1899년생)은 소안사립학교 동문으로 일제강점기 소안면 독립운동 2세대다. 이들은 해방 뒤 소안면 사회운동을 주도해 수시로 경찰에 구금됐다. 1949년 8월 소안면에서 좌익 혐의로 각각 체포된 이들은 완도군 신지면 현재의 명사십리 해안가에서 경찰에 모두 사살되었다.



공인 제거 뒤 만든 지금의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완도군 소안면은 해방 뒤 ‘좌익의 근거지’로 지목돼 초토화됐고, 이렇게 전도된 기억은 지금까지 섬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할아버지·아버지가 모두 좌익계열 운동가였던 완도의 정종래씨는 “세상은 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닌 빨갱이의 후손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는데(<주간경향>, 2007년 8월14일), 독립운동의 공적, 해방 직후 지역사회 운동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빨갱이의 멍에만 짊어진 가족들의 이야기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항일운동가 출신이나 좌익계열 사람들이 사라지자 중도층이나 우익 성향 인사들, 식자층이 지역사회에 등장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 전후 동네에서 구장이나 반장 역할을 했던 사람 중 일부가 전쟁 발발 뒤 인민군이 점령한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는데 인민군은 동네 사정을 잘 알고 글을 할 줄 아는 이들에게 지역 행정을 맡겼고, 수복 뒤 경찰이나 우익 치안대는 이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주민의 모함으로 살해된 경우가 있다.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에는 임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 신자였다. 해방 뒤 타 지방 사람 송해봉이 들어와 천주교를 전파하며 지역의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해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이 천주교에 나가면 결혼도 하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그는 글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복 뒤 임씨들은 자치대를 조직해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결국 눈엣가시 같던 외지인 가톨릭 신자를 없앨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었다. 지역에서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송해봉은 그렇게 이웃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한국의 어느 지방, 지역사회에 내려가도 이런 사례를 만날 수 있다. 결국 한국전쟁 전후 지역사회에서 살해·실종·학살된 사람들이 좌익 인사라고 보는 것은 냉전시대의 시각이다.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벗어던져야 한국 지역정치의 실상이 보인다. 공적 마인드를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이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들이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의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의 소멸사라 해야 맞다. 흔히 사람들은 친일파가 득세해 오늘의 한국 정치와 사회가 이렇게 비뚤어졌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친일파와 경찰이 해방 뒤 지역정치를 주도한 항일운동가, 지역 지도자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학살한 결과라고 말해야 한다.


휴전 뒤 7년 만에 나타난 공적 인간

그래서 전쟁 뒤 한국은 사적 이해,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이 되었다. 식민지 말단 하수인 ‘유지집단’은 또다시 지역사회의 유지, 반공국가의 첨병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공적 인간의 소멸사는 동시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짜 우익’의 탄생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적 도덕으로 무장한 새 인간은 휴전 뒤 정확히 7년 만에 나왔다. 4·19 혁명이 그것이다. “기성세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는 “오직 개인과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인간들은 물러가라”는 이야기였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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