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0일 목요일

유신체제 논문( 홈피 접속 불량으로 이곳에 올립니다)

유신체제의 공안 통치와 병영적 사회질서
- ‘전쟁정치’로서 10월 유신

민주주의 먹고는 못 삽니다. 배가 불러야 민주주의가 잘되는 것입니다.
(박정희, 1967.4.29)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기를 그쳤다. 물질과 허세만이 왔다갔다 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의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그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 말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에 발을 들이밀자 말자 발을 썩어 버린다. 그 문드러진 팔다리로 나는 힘차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과의 타협을 우리는 오늘의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더 지독한 마약이 필요하다.

정현종, “노우트 1975“

1. 머리말

지난 8월 2일 대법원은 “긴급조치는 법률이란 명칭을 갖고 있지 않고, 국회 국회 입법과정도 거치지 않았다”고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법률보다 하위의 명령, 규칙 등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대법원에 부여한 헌법에 따라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에 대한 심사권은 최종적으로 대법원에 속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불복하였다. 검찰은 “긴급조치는 당시 유신헌법에 따른 절차를 거쳐 형식적 의미의 법률과 동일한 효력이 있었다”며 “긴급조치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도 국민적 동의를 받았으므로, 긴급조치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긴급조치권 발령의 상황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권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고,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긴급조치 발령상황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혀 긴급조치의 존재 이유를 두둔하는 의견도 밝혔다. 검찰은 이 문제를 대법원과 헌재 간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법학자들은 이미 긴급조치는 법의 자격을 갖추지 않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즉 법의 이름을 빈 사실상의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검찰의 이의제기는 단순히 검찰의 입장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주류 보수세력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것은 1) 유신헌법은 국민적 동의를 받았다, 2)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긴급조치 발령의 정당성이 있다. 3) 당시 판사들은 어쩔 수 없이 실정법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4) 지금 와서 이를 긴급조치를 무효화하거나 당시 판사들의 비판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국론을 분열시킨다. 여기다 더 추가를 하면 “유신통치가 인권침해를 가져온 것은 맞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인권과 민주주의만을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대략 이런 주장들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한국의 보수 세력, 보수 언론들만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국민들도 그것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유신시절을 겪었던 50대 이상 사람들도 사실상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고 있다. 거의 완전한 보도통제, 곧 이은 전두환 정권의 등장, 87년 이후 5.18 광주 문제 중심의 과거청산 작업 등의 이유로 10월 유신 시절 실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단지 외형적 경제성장의 성과만이 일방적으로 전달되어 왔다. 그래서 우선 유신체제에 역사적 사실에 다한 충분한 공개와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유신체제에 대한 평가는 현재 진행형일뿐더러 미래의 한국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만들것인가의 문제와도 여전히 맞닿아 있다.
만약 히틀러 치하의 독일 파시즘에 대해 오늘 검찰과 같은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독일의 정치권에 잇거나 그러한 주장을 유포하는 언론과 지식인이 있다면, 그들은 처벌을 면치 못하거나 파시즘의 망령을 부활시킨 자로 지목되어 사회적 지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히틀러의 파시즘 수족 역할을 했던 니치당원, 나치 친위대, 비밀경찰(게쉬타포) SS, 판사나 검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치에 부역한 학자들까지도 전후에 엄한 처벌을 받아 공적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정 반대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은 그의 딸 박근혜를 내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올려놓았으며, 유신체제 하에서 중앙정보부 등 각종 공안기구의 지휘 명령 계총에 있었던 당사자들이 처벌을 당하기는커녕, 자신의 자연 연령이 다할 때까지 기득권을 누리며 살았다. 그리고 긴급조치 하에서 단순 시위 가담 학생들에게 중형을 내린 판결을 내린 판사가 한국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의 재판부는 일부 재심사건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뒤집었지만 사법부 자체는 이에 대해 공식 반성을 한 적이 없고, 검찰은 앞의 주장처럼 지금까지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유신체제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의 파시즘을 끌어들이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물론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파시즘과 유신체제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의 민주주의 절차의 정지 상태, 삼권분립 원칙의 정지, 법의 이름을 빈 사실상의 테러 통치, 엄격한 감시체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유신체제는 일제 말의 식민지 파시즘, 그리고 동시대의 유럽 파시즘의 적자이다. 단지 70년대라는 세계사적 시간의 조건 때문에 유신체제가 과거의 일제 말 총동원체제나 히틀러의 파시즘보다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외향을 갖추었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른다.
청산, 극복되지 않는 유신체제는 우리의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신 시절 건설회사 사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이 그 시기의 찌꺼기를 붙잡고 이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를 극복하는 것은 바로 수많은 박정희, 수많은 이명박이 움직이고 있는 공안기구, 행정부, 검찰, 정치, 기업, 사회의 극복 문제와 맞닿아 있다. 우선 유신체제가 어떤 정치체제였는지, 그 시절 인간성이 어떻게 유린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오늘의 한국을 이해하고 미래의 인권이 보장되는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2. 유사 파시즘, ‘법에 의한 전제’로서 유신체제

1) 성격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의 부칙에 “이 헌법의 제정과정에 대해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이 유신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10월 유신이나 긴급조치가 예외상태의 선포, 즉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던 폭력 지배체제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신헌법은 국민주권, 권력분립, 기본권 존중 등 민주주의 원칙을 위배한 법이었다. 대통령은 국회를 언제나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관의 성격을 상실,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입법, 사법, 행정부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었으며, 야당과 재야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서는 여당 인사들에 대해서도 고문과 테러가 만연했다. 시, 군, 읍, 면, 동 이장을 주민 동원과 주민 감시하는 요원으로 만들었으며, 학원을 병영화하고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행정직원을 학생을 사찰하는 요원으로 만들었다. 지역에서는 관제 준국가 조직이 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 등 관제 학생조직이 지배하였다. 국민이나 학생들은 폭력의 공포 때문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에서는 노조 활동 자체가 사실상 불법화되었고, 공장 새마을 운동은 철저하게 위로부터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신체제는 71년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어 오던 절차적 민주주의, 정당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내세운 논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민족적 사명을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온 대의기구에 대해 누가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우리의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대 냉전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것은 전연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신’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이 그것은 일본의 제국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 메이지(明治) 시대의 입헌군주적 근대개혁, 정치가 통치권에 종속되는 시대의 정신을 70년대 한국에서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육사출신 한국의 청년 장교들은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 히틀러가 했던 일, 다이쇼오(大正) 데모크라시 이후 천황제 하에서 일본의 청년장교들의 군벌정치와 쿠데타 기도를 반복하였다. 국가 지상주의, 군의 정치적 중립의 헌법원칙 무시, 절대적 규율과 철저한 상명하복 원칙, 국민탄압과 인명경시 등이 그 내용이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은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재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지 오래입니다”라는 비장한 군인정신의 표출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히틀러도 “국가사회주의자에게는 단 하나의 신조만이 있다. 민족과 조국이 그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군국주의 하 일본의 청년장교들도 “애국충정은 눈물겹도록 지극한 데가 있었고”, “세계적으로 가장 애국적이고 감투정신이 투철” 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요컨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다고 하는 언술을 실제 ‘고통을 겪고 있는’ 외로운 저항자로서가 아니라, 이미 권력자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사적 욕망이나 이해가 ‘국가’의 담론 안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히틀러와 일본의 군부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자국의 경제발전과 완전고용을 창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각각 수백만의 유대인과 수 백만 명의 중국, 조선인을 학살하거나 처참한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유신체제 하에서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비전향 장기수 등 백여 명 이상이 법의 이름으로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구타로 사망하였고, 장준하 선생 등 많은 민주인사들이 의문사를 당했으며,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고문, 구타, 린치 등 야만적 폭력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유신은 관료적 효율성을 체제운영의 기본원리로 삼았다. 박정희의 유신체제 수립의 명분도 바로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에서 찾았다. 박정희는 "우리나라는 8.15 해방 후 민주주의를 정착시킬만한 정치적 토양의 배양도 없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분별없이 이식한 까닭에 민주주의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왔다. 헌정사는 비생산적인 논쟁과 당리에 얽매인 파쟁으로 점철되었고 질서보다는 혼란이 설득과 타협보다는 극한적인 대립과 투쟁이 결혼에의 승복보다는 결론에의 저항이 오히려 기승을 부리는... ” “국력의 배양과 축적을 위해서는 정치경제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그 역량을 생산적으로 조직화하여... 비능률과 낭비의 요소들을 제거하여 국력증진을 합리적으로 조작하는 기능적 장치가 또한 있어야 했다” 그래서 100억불 수출 조기달성, 중화학 공업시대의 개막, 본격화한 해외건설 수출 대단위 공업단지 건설 등을 달성했다. 이렇게 본다면 독재보다 더 효율적인 체제는 없는 셈이다.
유신헌법 선포, 통과 직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며, 계엄 하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91.5 퍼센트 지지라는 놀라운 찬성률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의견의 피력이나 비판 자체가 철저히 봉쇄되고 야당이 참관이 차단된 공포 상태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 김대중과 가까운 야당 국회의원들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 국민투표는 일견 국민의 의사를 집약하는 직접 민주적 장치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회정치를 정지시키고 주민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국민의 이름으로 일인 독재를 정당화하는 장치로서 기능하였다. 모든 선거 과정은 중앙정보부가 각 분실에 하달한 95 퍼센트 득표공작 명령 하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던 시점인 1933년 11월 12일 독일 국민들 95 퍼센트가 히틀러를 지지한 것을 연상시킨다.
유신헌법 통과 후 모든 언론은 검열을 받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신문사에 아예 상주하여 보도가능한 뉴스와 그렇지 않는 뉴스를 나누어 지정했고 심지어는 헤드라인의 크기나 특정기사의 돋움처리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였다. 동아 조선 등은 광고주 압박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중정이 요구하는 인사조치 즉 문제 직원들을 해임하였다. 이후 중정은 이들의 재취업까지 방해를 하였다. 초중고 교장들을 모아서 “10월 유신의 선봉이 되자”고 결의를 다졌다. 서울시 공무원 2 만여명은 10월 유신이라는 리본을 달고 다녔고, 전국에서 관제 대모가 열렸다. 중정은 각종 노사분규에도 직접 개입하였다. 동일방직의 ‘똥물사건’ 등도 중정의 적극 개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 중정, 보안사, 경찰은 블랙리스트를 작성, 공유하면서 민주노조운동에 가담한 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막았다.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형식상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정부는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하여 후보 등록과정에서부터 정부비판적 인사들이 출마하는 것을 차단하였으며 대의원은 거의 친정부적 인사로 구성될 수 밖에 없었다.
10월 유신 이후 입법부의 1/3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채워졌다. 유정회 국회의원들은 대통령 비서실의 추천과 박정희의 추인으로 결정되었는데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유정회 국회의원이 된 대학교수는 제1기 11명, 제2기 21명, 제 3기 21명이었고 유신정책심의회 조사연구 교수는 모두 70명이었다. 유신체제 하 국회 운영은 연중 임시국회 1회, 정기국회 1회 정도에 불과하였다. 국회를 열어놓고 떠드는 것보다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유정회는 국회 정치에 대한 박정희 불신을 현실화한 기구였으며 “국회가 정쟁의 장이 아닌 능률적인 의안처리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방침 하에 야당의 대정부 비판을 정쟁으로 규정하고 적극 저지했다.
대법원의 경우 유신헌법 하에서 대법원 판사들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그 동안 대법원장이 갖고 있던 법관 임면권을 대통령에게 이전시켰다. 또한 헌법위원회를 설치하여 대법원이 갖고 있던 위헌법률심사권 뿐만 아니라 탄핵결정권 위헌정당 해산권을 부여했고 대통령이 헌법위원회의 9인 중 3인을 선임하는 동시에 국회에서 선출하는 3인과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을 임명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법부는 대통령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 대통령의 의중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은 재임용에서 탈락시켰고, 탈락시킨 후에는 변호사 개업도 어렵게 만듦으로써 정권 반대 판결의 가능성은 차단하였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서울 형사지법원장과 수석부장판사를 통해 시국 사건의 판결을 ‘조정’하였다. 그래서 사실상 모든 시국사건 판결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였다.
유신체제는 우익단체를 준국가기구로 만들었다. 그래서 반공연맹은 국가법인체로 발전되었다. 즉 반공연맹을 사실상의 국가기구로 만들어서 국가의 기능을 대행하도록 한 셈이다. 반공연맹은 내외문제연구소를 흡수하고 이후 67년에는 공산권문제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60년대 후반부터 교과과정심의회를 설치하여 교육에까지 개입하였다. 반공연맹의 안보교육은 교사, 학생, 해외파견 기술자, 직능 지역단체 조직요원과 중앙요원을 중심으로 1주 23시간에서 67시간까지 이루어졌다. 1972년 유신체제 수립이후 반공연맹은 전국 시군구에 지부를 둔 전국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새마을 교육을 총력안보체제를 위한 국민동원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박정권은 새마을 교육운동을 유신이념 실천도량으로 정의하였다. 박정권은 국민들을 최말단 행정조직인 반단위로 조직하기 위해 1976년 4월 30일 매월 말일을 반상회의 날로 정해서 전국적으로 일제히 반상회가 열리도록 하였다. 일제말의 국민반, 애국반 등 조직이 완벽하게 부활하였다.
당시 농촌에는 수많은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었는데, 이 모든 것은 행정기관의 직접 통제를 받았으며 단체의 장은 말단 행정기관의 끄나풀이었다. 노금노는 73년 봄 자신이 맡고 있었던 직책을 열거하였는데, 마을금고 회계, 50여호를 대표하는 수반장, 새마을 사업 추진위원, 새마을 지도자, 마을 협동 회장 등이었으며 그 외에도 농협 총대, 엽연초 조합 총대, 농지위원, 지도소 자원 지도자, 4H 독농가, 시범농가, 산림계장, 이장, 민방위 대장, 예비군 소대장, 절미저축부인회, 명예반장, 명예파출소장, 정당의 책임자, 반공연맹 책임자 등의 직책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걸핏하면 무슨 교육이다 동원해가지고 높은 양반들 일장 훈시 하는데 댓가지 숫자 채워주는 것이 고작이고, 새마을 회관에 가서는 ‘때려잡자 김일성‘, ‘처부수자 공산당‘을 외치고, 새마을 사업 역시 마을민의 자발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협조하지 않으면 찍히는 마을이 되기 때문에 ‘국가시책‘에 충실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던 일이었다.
박정희가 일당 독재를 실시하지 않았으며, 선거와 의회정치를 완전 폐지하지는 않았고, 사법부 기능을 정지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신체제는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일제 말 총력전 제체보다는 법과 민주주의의 외피를 약간이나 견지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만이 비상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었고, 중정 등 공안기관이 모든 국가기관 위에 서 있었으며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공공연한 무차별적 연맹, 테러와 고문, 재판 없이 현행범이 아닌 사람을 구속시킬 수 있었던 법의 정지 상태, ‘법에 의한 전제(autocratic rule by law), ’대다수 국민들에게 대한 공포감 조성에 기초한 점에서 파시즘에 가까웠다. 긴급조치는 바로 유신체제의 성격을 가장 잘 집약해 주고 있다. 그것은 법의 이름을 빈 사실상의 폭력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지배를 대중적 지지에 의한 파시즘, 혹은 대중독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유신헌법 통과에 대중들이 지지를 보냈고, 박정희가 추구한 안보/성장주의 연합세력으로 민중이 참가했으며, 당시의 민주화 운동에 대중들이 거의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분석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선 대중들은 독재정권과 동등한 혹은 하위의 파트너가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수준의 책임주체도 아니었다. 당시 한국 대중들은 이 지배체제의 구축과 운영과정에서 초대된 적이 없고, 또 발언권을 가진 적도 없으며, 또 그 체제가 대중들의 경제적 이익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작동된 적도 없다. 박정희 성장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탈빈곤의 열망을 사로잡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들이 조직적으로 대표성을 갖고서 체제 유지에 가담했다고 보기 어렵다,
유신체제 하에서 국가가 포섭해야할 ‘사회’는 극히 미약했다. 그래서 유신체제는 유럽 파시즘와 여러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만 조선조의 군주제도와 전근대적 권위주의, 일제 말의 천황제 군국주의, 대만의 총통제, 북한의 일성 체제 등 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전체주의와 여러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국가주의의 사상적 기원이 유교적 충의 논리, 독일 국가주의에 모두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박정희의 유신도 일본의 국가주의와 독일 파시즘가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극우 이데올로기이자 지배체제로서 파시즘 혹은 유사파시즘은 시기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안보 위기, 민주주의의 좌초, 경제위기와 중간층 몰락, 도덕적 진공 등의 배경과 맥락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국가 혹은 공권력에 대한 과도한 충성요구, 폭력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경향들, 지도자에 대한 종교적 숭배시 등의 내용을 특징으로 한다.

2) 배경

10월 유신은 1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국가 만들기, 극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그 토대를 갖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메이지(明治) 계엄체제, 군부독재, 국가주의가 해방 후 반공주의 체제에 그대로 이전되면서 10월 유신의 정치문화적 토양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5.16과 10월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두 번의 쿠데타는 바로 일제 식민지와 분단국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의 산물이자 그 연장이라 볼 수 있다. 40년대 전시 하 일본의 총력전 체제처럼 전쟁과 평화의 차이를 없애버린 10월 유신은 국가 내의 모든 정치 사회의 작동과 일상의 질서를 규율한 사실상의 전쟁체제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을 맞아 시행했던 ‘전쟁정치’의 후속편이었다.
이는 독일에서 히틀러 나치즘의 등장과 유대인 대량학살이 19세기말 비스마르크 시대의 정치문화에서 씨가 뿌려진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 군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군사영역을 민간 감시에서 제외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군주제가 사라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독일에서 과거 군주제의 유산과 권위주의가 나치즘을 낳게 만들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 독일의 정부조직과 정치문화가 제1차 대전후 가혹한 배상조치로 인한 타격과 대공황 기의 경제위기를 틈타 히틀러의 집권과 유대인 대랑 학살, 즉 ‘최종결정’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제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의 유신 쿠데타가 발생한 먼 배경은 구조적으로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내전 상황과 만성적 국가 안보위기, 그러한 조건을 반영하는 일제 식민지 법제, 한국식 대통령제, 즉 대통령에게 비상시 대권을 부여한 법과 제도에 있었다.
팩스톤(Paxton)은 파시즘은 "폭력적 지배의 정당성을 보편적인 경구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 정체성의 가장 확실하다고 간주되는 요소로부터 이끌어 낸다" 고 지적한 바 있다. 대체로는 종교, 건국의 신화, 민족의 신화 등이 그것인데, 한국의 경우는 한국전쟁, 반공주의, 70년 미.중 관계 정상화와 동서화해 이후의 남한 국가 정체성의 위기의식 등이 그 위치를 차지한다. 대체로 아도르노(Adorno)가 말한 것처럼 사회에 내재하는 문화 종교적 권위주의와 정치적 파시즘은 친화력을 갖는데, 보수적 권위주의 심리적 토양은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편견, 자민족중심, 인종주의, 독단주의, 가부장주의 등이 바로 그것이다. 편견과 독단주의는 표준적인 것, 혹은 공동체 내의 이질적인 존재 혹은 정서적 거부감을 주는 세력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과 노골적인 멸시, 더 나아가서는 그들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용인하고 그에 동조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과거 유럽 여러나라와 미국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 그 좋은 예라면 50년대 이후는 국가 혹은 집단 내의 권위에 도전하는 평등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거부감과 탄압이 대표적이었다. 파시즘은 통상 규율, 복종, 순응을 강조하고 상급자에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인간을 칭찬한다. 권위주의 퍼스넬리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토양에서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다.
이승만은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한편으로는 미국주도의 ‘지유진영’의 일원이라는 ‘의사 보편주의’ ‘전도된 제1세계주의’에서 구했지만, 그의 ‘혈맹론’은 미국에의 정치군사적 종속을 달리 표현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것을 계승하였지만 노골적 북진통일대신에 경제의 압도적 우월성에 기초한 통일을 국가의 존립 근거로 삼았다. 1945년 해방과 미국 후원 하의 국가 건설은 ‘개인’과 ‘사회’를 국가로부터 해방시킬 틈을 만들었지만, 곧 이은 지구적 냉전과 한국전쟁은 식민지적 지배체제를 다시 복원시켰다. 이승만의 경찰국가는 일인 독재는 박정희식 군사국가와 일인독재를 예비한 것이었다. 미국의 안보우산에 종속된 한국은 미군철수, 데탕트를 통해 그 안보우산이 흔들리면 체제위기를 맞는다. 71년 무렵의 향토예비군 창설, 방위산업 육성, 중화학 공업화는 이러한 안보위기의 대응 전략이었다. 박정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나름대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핵개발을 서두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과의 대립을 상수로 놓은, 분단 하의 체제유지 전략의 일환이었다.
한편 유럽 파시즘은 주로 경제위기가 이러한 내부의 군사주의와 맞물렸을 등장하였다. 그것은 대중의 경제적 곤궁과 불안에 기초한다. 독자적인 판단력도 갖지 않은 채, 상부로부터의 부당한 명령도 무조건 복종하는데 길들여진 군인과 관료들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파시즘은 쉽게 뿌리를 내리는데, 실제 지금까지 파시즘은 사실상 군사주의 국가, 그리고 전쟁 상황에 있는 국가들에서 주로 나타났다. 군사주의 원리는 정부 영역내의 입법, 사법 영역의 독자성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회사 등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을 군대와 같은 모습으로 재편을 하고, 모든 조직의 상관을 군대의 지휘관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한다. 이 군사주의를 수반하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안보의 위기의식과 적에 대한 집단적 공포는 국가 내부의 의심되는 구성원들에 대한 고문, 테러, 학살 등 반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인 억압을 정당화한다. 형식적인 민주주의인 선거가 존재하기는 하나 그것은 조작되고, 여론을 뒤틀려지는데, 이 모든 왜곡이 ‘동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경제위기와 대중의 불안 등을 기반으로 한 파시즘과 독재는 경제 발전, 물질적 번영, 완전고용과 안정적인 성장 등을 정당화의 기반으로 삼는다. 1939년 히틀러 당시 독일이 바로 그러했고, 초기의 경제성장 전략이 약간의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던 72년 전후 박정희 정권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남미의 관료적 권위주의 국가의 성립이론을 끌어들여 10월 유신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70년 전후 박정권이 전태일 분신, 광주대단시 사건 등의 고도성장의 부작용에 직면하기는 했으나, 남미의 관료적 권위주의에 비견할만한 수출경제의 위기에 직면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크다.
한국의 경우 유신의 보다 직접적 계기는 내부의 경제위기보다는 데탕트로 인한 안보위기, 북한의 도발의 위협, 이와 관련된 국가 정체성의 위기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남북 비밀교류)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더 직접적으로는 미군철수 국면에서의 새로운 안보체제 수립의 필요성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월 유신이 과연 중화학 공업화, 수출고도화를 추진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 때문에 추진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0월 유신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성장을 이룰 수 없었는가? 초기 산업화에서 자원동원의 극대화를 위해 군사독재가 효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반드시 그러한 전체주의적 억압과 동원이 없었다면 과연 성장을 추진할 수 없었을까? 물론 대공황의 위기를 겪은 이후 나치는 경제 활력을 가져왔고, 실업률 격감했고, 성장은 지속되었다. 범죄는 감소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었다. 히틀러는 질서와 번영을 가져왔다. 박정권 역시 8.3 조치 등을 통해서 위기를 돌파하고 중화학 공업화의 드라이브를 걸면서 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사회학에서 주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행위 동기, 즉 ‘때문에’ 동기와 ‘위하여’ 동기 중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유신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서도 이 문제가 쟁점이 된다. 박정희의 각종 언술과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60년대 후발과 70년 초의 미국의 베트남전 확전에 따른 주군둔 철수 정책, 그와 맞물린 북한의 대남도발이 가장 일차적인 위기를 조성하였으며, 71년 전후 일련의 내부 정치적 반대세력의 강력한 도전, 미중 관계 정당화 등 외적 안보위기 등 압박 요인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 분단국가 존립 정당성의 위기, 71년 총선에서의 야당의 약진과 대선에서의 김대중의 강력한 도전과 힘겨운 승리, 내부의 정치적 반대세력의 거센 저항, 1975년 월남 패망으로 인한 위기의식 속에서 박정희는 거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 이승만이 직면했던 그러한 국가존립의 위기를 느꼈으며, 그것은 박정권에게는 거의 ‘패닉 수준’이었다고 판단된다. 유신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두 번째의 ‘예외상태’ 선포였다.

3. 유신체제의 성격 : 공안통치와 용공조작

1)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 공안 통치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72년 10월 유신은 한국전쟁기 다음으로 필자가 ‘전쟁정치’라 부른 통치방식을 나타난 시기였다. 박정희는 “조국의 현실이 백척간두에 처해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준전시 상태가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태” 라고 규정했고, 즉 준전시라는 상황 규정 아래 적과의 전쟁을 위해 국가의 모든 구성원을 총동원하고 내부의 적, 적으로 지목된 집단과 개인을 외부의 적과 동일시하는 체제가 전쟁정치의 배경이 된다. 이 경우 체제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밖’ 즉 적으로 분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억압과 통제, 법의 이름을 빈 처형(사법살인)을 가한다. 즉 이들 밖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지 이야기다. 이 경우 ‘안’의 사람들을 가연 안전하고 생명과 자유를 보전할 수 있을까? 실제 밖의 사람들이 비인간화되면 안의 사람들도 노예화된다. 안의 사람들도 경제적 욕망 충족 외에 이들은 어떠한 의사도 표현할 수 없는 식물적 존재로 살기를 요구받는다. 전쟁정치는 군대 대신에 공안기구가 모든 국내정치를 좌우하고 법은 껍데기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안의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5.16 쿠데타 이후 곧바로 결성된 중앙정보부는 대통령의 직접 지휘를 받는 ‘국가 내의 국가’, 정부 위의 정부로서 역할을 했지만, 1972년 유신 이후 그 정도는 더욱 심해져서 사실상 모든 정치, 사법, 학원, 언론, 노동 영역에까지 중앙정보부 활동은 확대되어, 중앙정보부는 최고의 권력기관으로서 역할을 했다. 중앙정보부는 관료, 학자, 간첩, 깡패로 구성된 거대한 그림자 정부였고, 일제 시대의 독립투자를 잡아서 고문하던 악명 높은 특고(特高)의 적자였다.
국정원 과거사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71년 총선에서 중앙정보부는 ‘풍년사업이라는 공작명으로 김대중 후보의 낙선 활동을 벌였다. 이 선거에서 거의 전 공무원과 군인들이 박정희를 찍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결과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한편 그 전인 67년 총선에서 박정희는 김형옥 중앙정보부장에게 김대중, 김영삼 등 유력 야당 후보가 출마한 7개의 선거구를 ’정책지구‘로 선정하여 반드시 이길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박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야당정치인은 물론 여당 정치인까지 사찰을 하였고, 의정활동에까지 개입을 하여 의원들을 위축시켰는가하면 의원의 사생활까지 사찰을 하여 약점을 잡은 다음 필요시에 협박용 카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비위사실 수집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여자관계를 포함한 모든 사생활까지 사찰을 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에서도 중앙정보부는 모든 행정기관을 감시 통제하는 등 전방위의 역할을 하였다. 중정은 선거에 임해서는 총괄적 주도 및 관리, 야당 후보 사찰, 사퇴 및 낙선 공작, 선거결과를 뒤집기 위한 사후공작 등을 실시하였다.
야당 탄압은 주로 정치자금 줄을 조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후보가 온건한 이철승 후보에게 패배하여 당수직을 내놓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중정은 정치공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유신체제에 협조적인 온건한 야당인사인 이철승을 총수로 앉히기 위한 공작은 1979년 전당대회에도 이루어졌다.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람은 탄압을 받았다.
유신체제 이전과 이후의 활동과 성격에서 가장 뚜렷하게 변하는 부서가 사법부였다. 1971년 사법파동 이전까지 사법부의 독립성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중앙정보부는 ‘조정’의 이름으로 판결에 개입하였는데 특히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사건 등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개입하였다. 긴급조치 2호 10항은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 수사 보안업무를 조정 감독한다”라고 하여 중앙정보부가 긴급조치 관련 재판에 개입할 수 있을 길을 열어 놓았다. 실제로 인혁당 사건 등 군법회의 법정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입회를 했기 때문에 판사나 검사는 사실상 들러리에 불과한 점도 있었다. 심지어는 공판조서 변조 의혹을 제기한 변호사를 직접 연행하기도 했다. 민청학련 관련자 수사, 수감 시에는 중정 요원이 서울 구치소에 고정 배치되어 변호인 접견 등을 통제하기도 했으며 검찰 수사 과정에도 입회를 해서 피의자가 고문에 의한 진술을 부인하면 중정에 다시 보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은 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중앙정보부는 언론과 노동 분야에고 깊이 관여했다. 박정희는 언론담당조정반을 중앙정보부 내에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일방직 사건 등 70년대 노동사건에는 어김없이 중정이 개입하였다. 당시 중정 요원은 회사나 산별노조 사무실에 상주하다시피하였고, 경찰은 중정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모든 보고서가 청와대와 중정에 직접 올라갔고, 그들에 의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정책적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편 중정과 청와대는 동일방직 등 해고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배포함으로써 노동통제에도 직접 개입하였다. 전쟁상태에서 언론이나 노동의 자율성은 공안의 개입 영역이 된다. 특히 단순한 노동조합 결성이나 노동쟁의도 공안적 사안으로 간주된다.
시국 사건에 대한 이러한 판결은 재판을 받는 당사자 뿐 아니라, 그것을 목격하거나 보도를 통해 들은 모든 국민을 규율하는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즉 사회 ‘밖’의 존재, 간첩에 대한 공개적 범주화, 그리고 ‘밖’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비인간화와 학살에 준하는 가혹한 처벌은 안의 존재를 공포에 질리게 하여 복종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가졌다. 안과 밖의 정치적 경계선, 밖은 도덕적 경계선, 책임감과 동정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 영역이 된다. 이 경우 체제가 좀도둑도 비첩(匪諜)으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 71년 광주대단시 사건 가담자들도 구속된 후 간첩으로 몰려서 고문을 당했다. 밖의 사람들은 ‘자수’라는 방법을 통해 ‘귀순’이라는 용어로 ‘안’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60년대말 이수근 위장 귀순은 엄청난 정치적 효과가 있었다. 정치공작은 내부의 적을 제거하고, 이 적의 제거 작업을 온 국민에게 가시화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복종을 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2) 유신체제 하의 ‘간첩 조작’

권력자가 갖는 공포는 내부의 적, 잠재적 적에 대한 탄압을 가져온다. 당시 박정희가 가겼던 위기의식과 공포는 긴급조치의 선포로 나아갔고, 인혁당 조작 사법 살인 등을 저지른 배경이 되었다. 과거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일본 천황제 파시즘 하에서 공산당에 대한 공포의 조장과 집단 증오감 형성은 국가 내에서의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다음, 그들에게 처벌을 가해서 국민적 공포를 조장하며, 간첩의 위험을 온 사회에 일상적으로 유포하고 또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모든 사회구성원을 상호 감시하게 만들고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해왔다.
공안기관이 멀쩡한 사람들이나 약간이라도 의심되는 행동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정치공동체의 적', 혹은 범죄자로 조작해 내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생각해 낼 수도 없는 국가 범죄행위다. 국가가 국민적 ‘적을 적발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불순분자, ‘적을, ’간첩‘을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폭력성과 전제적 성격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행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70, 80년대 한국에서 그런 일은 수없이 발생했고, 최근까지도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다. 경찰, 중앙정보부(국정원), 보안사 등은 자신들이 심어놓은 정보 망원의 밀고를 받거나, 또 의심되는 사람을 고문하거나, 또는 약점이 있는 사람을 잡아서 그와 뒷거래를 해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이것은 이들 기관이나 그것에 속한 개인이 최고 권력자에게 성과와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특진을 하는 등 보상을 바라며 하기도 했고, 위로부터의 성과의 압박을 받아 수동적으로 시행하는 경우도 있다. 즉 약간 ‘냄새가 나는’ 사람의 동창, 친구, 친척, 과거 안면있는 사람 등 지푸라기라도 하나 있으면 이들을 연결하여 고문을 통해 ‘작품’을 그려내고, 그림이 될 것 같으면 마치 “무슨 중대한 것을 발굴해 낸 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얼굴에 화색이 도는 낮 빛을 하는” 빨갱이 제조, 관제 공산당 제조, 범죄자 제조는 한국의 공권력이 심심하면 저질러온 가장 패륜적인 행위였다.
조작에 의한 간첩 만들기는 일제가 가장 전형적으로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일제시기 특고의 후예이자 그로부터 훈련을 받은 간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 국립경찰은 이승만 정부 수립단계에서부터 인위적으로 좌익, 간첩을 조작하여 좌익탄압의 정치적 목적을 얻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 사회주의 활동이 합법적이고 북한과의 내왕의 기회가 있었던 재일동포, 북한에 납치되어 북한으로부터 사상 교양 교육을 받는 적이 있었던 납북어부, 해방 정국이나 4.19 직후 민족주의 사회주의 활동 경력을 가진 인사들, 서독에 유학하여 북한이나 사회주의 사상에 노출될 기회가 있었던 유학생들이나 유럽거주 주민들, 한국전쟁기 부역혐의가 있거나 의용군에 징집된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 주로 대상이 되었다.
유신치하 가장 대표적인 최대의 조작 사건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인민혁명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국가변란기도사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사건 직후부터 박정권이 위기를 돌파하고 민주화 운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관련자들을 고문해서 ‘만들어낸’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거론되어 왔는데 국정원 진실위원회의 진실규명과 법원의 판결로 최종적으로 그 조작사실이 확인되었다.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 조총련, 인혁당과 곁탁하여 국가변란을 기도했다고 발표하면서 1034명을 검거하여 57명을 구속하였고, 인력당 재건위 관계자 27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였다. 박정권은 학생데모를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 사건으로 확대발표하였다. 1975년 4월 8일, 인혁당 및 민청학련 관련자 8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고 8명은 무기징역, 6명은 징역 20년 형이 확정된 후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8명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에 의하면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은 반정부 데모를 위한 투쟁기구에 불과하며 유인물에 언급된 것에 불과하지 실체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것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 성격 역시 역할분담을 통해 동시다발 데모를 하자는 조직이었지 당시의 정부 발표 즉, ‘폭력으로 정보를 전복하여 공산국가 건설을 기도한 반국가단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였다. 즉 유신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학생데모는 ‘노농정권 수립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건설’로 조작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상황보고에 의하면 중앙정보부는 이적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였으며 대통령 담화내용과 수사결과가 일치하도록 전형적인 짜맞추기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인혁당’ 관계자인 도예종, 서도원 등이 여정남을 포섭해 전국적인 학생봉기를 배후에서 지원하려했다는 수사발표 역시, 여정남이 서울의 학생운동지도자들과 접촉한 것은 사실이나, ‘민청학련’ 지도부를 조종, 지도할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학생들이 이들 ‘인혁당’ 관계인사들과 전혀 접촉사실이 없었으며 조총련과의 연계 역시 없었다는 사실 등을 통해 전형적인 조작 사건임이 드러났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역시 관련자들이 개인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소지했을 수도 있고, 북한방송을 청취한 사람도 있어서 일부가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들이 구체적인 결사를 조직하여 반체제 활동을 하거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증거가 없고, 또 일부 의심받을 행동을 이유로 ‘반공법’ 저촉여부는 물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으로 사형까지 당할 이유는 없는 것이며, 관련자들에게 강압적인 수단(고문)을 사용해서 조서를 작성한, 다음 거대한 공안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을 전격적으로 처형한 국가범죄와 국가폭력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문서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 이용택은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진술하여 재심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8명을 18시간 만에 사형시킨 것은 박정희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만들었으며,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여 다음 날 곧바로 화장을 하였는데 이는 고문 흔적을 지우려했다는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박정권은 기껏해야 1.2 년 형을 살릴 정도의 처벌을 당할 구 혁신계 관련자들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으로 조작하여 이들을 사형시킨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민청학련, ‘인혁당’ 외에 대표적인 ‘간첩 만들기’는 유럽거점 간첩으로 이름붙인 김규남 등 사건, 최종길 교수 사건 등이 있다. 그러나 규모로 보면 재일동포, 납북어부 등이 가장 많다. 휴전선 접경지역에서 생계를 위해 고기잡이를 하다가 북한에 피납되고, 또 가족이 있는 남으로 내려왔던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어부들이 남한해상에서 북한경비정에 피랍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귀환하면 수십 일 동안 구타, 고문 등을 가하여 북한해상에서 월선조업을 하였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 처벌하였다. 진실위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혐의 없는 자라도 입건하라'는 지시를 경찰에 하달 하였고, 검찰은 법원에 사건을 기소하면서 '국가 시책에 의한 사건'이라고 기재하여 기소했다. 정보과 형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빰을 때리거나 군화발로 걷어차기 예사였고, “다른 사람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고 하는데 너는 왜 부인하느냐고 다그친 다음,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이후 정치적 필요에 의해 납북귀환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처벌하였다. 1970년대 초 "옆집에 온 손님 간첩인가 살펴보자"라는 표어가 온 나라의 마을마다 담벼락 등에 기재되어 있었는데, 옆집에 온 손님도 간첩일 수 있다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켜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론에 지속적으로 간첩을 검거했다고 발표하여 국민들이 공포감을 갖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는데 실제로 69년 이후 북한의 간첩 남파가 줄어들면서 남파간첩들이 정권이 원하는 대로 검거되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권은 간첩을 '국가정책으로' 양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납북귀환어부가 간첩 제조를 위한 가장 좋은 재료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등 공안기관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첫째 납북귀환어부는 대부분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거나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 자기 방어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둘째 납북귀환어부는 피랍되어 북한에 머물렀던 기간에 사회주의와 북한체제의 우월성 등을 교육받았고, 북한의 우수한 산업시설과 관광지 등을 견학 하였고, 남한에 내려가면 북한의 우월성을 지인들에게 홍보하라는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납북어부는 조금만 가공하면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반제품’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정권에게는 황금어장이었다.
이 조작 간첩 사건의 피의자들은 그런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당국에 불려가서 처음 들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70년대 중앙정보부는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제조하는 생산 공장의 역할을 하였다. 80년대는 치안본부 대공분실, 보안사 등이 경쟁적으로 그 역할을 하였다. 70년대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의 사전 양심선언은 바로 구속된 이후 심한 고문을 받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향후에 내가 하는 발언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미리 진실을 고백한다는 취지였다.
이 조작은 상당부분은 경찰,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공안기관끼리의 실적졍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80년대 들어서 보안사가 안기부를 압도하면서 ‘간첩 만들기’ 경쟁이 시작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보안사는 안기부를 압도하기 위해 재일동포라는 황금어장에 주목하고 수많은 재일동포들을 간첩으로 ‘제조’하였다. 70년대는 과거 약간이라도 혐의가 있어나 반정부 데모를 시도하는 등 일련의 근거를 잡아서 그것을 잡아서 확대, 과장했다면 80년대는 아예 노골적인 공작 차원에서 없던 일까지 조작하는 일도 있었다. 이 조작의 씨앗은 해방후 친일경찰에서 시작되었고, 유신치하에서 본격화되어 80년대에 가장 노골화되었다. 공안 조작은 공권력이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거짓을 하여 국민을 겁박하는 일이다.
‘간첩 만들기’는 곧 간첩 아닌 사람, 즉 국민 만들기 과정이다. 간첩 만들기와 동시에 진행되는 국민 만들기는 균이 정화된 ‘정화된 국민’ 즉 사상적으로 균질적이고 복종적이며 선거 외에는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국민이다. 복종하지 않는 국민은 잠재적으로 간첩으로 지목될 위험성이 있다. 전향을 거부한 장기수는 ‘현저한 위험’을 가진 인물이 되어 무한대의 기간 동안 구금당해야할 존재였다. 모든 구성원이 적과 나로 이분화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단순한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요구도 간첩행동이 될 수 있다. 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당시 체포된 사람들도 간첩으로 몰려 고문과 구타를 당했고, 이후의 노동쟁의, 농민의 저항도 모두 공안사건으로 취급되었으며 주모자들은 빨갱이로 몰렸다.

3) ‘거짓’에 기반을 둔 유신체제

유신체제는 동의보다는 폭력에 의거하여 유지되었을 뿐 아니라 위기를 과장했거나 거짓으로 조작하였다. 우선 유신체제를 정당화한 안보위기론은 크게 과장되었다. 1967,8년도에 북한의 대남 도발이 격화되기는 했지만 1969년 이후에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유신 직전인 1970,71 년 들어선 이후에는 오히려 적대행위가 감소하였다. 북한은 일본 유럽 국가 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미국과의 접근도 모색하였다. 게다가 71년들어 북한은 군사비를 삭감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즉 71년 직후 닉슨 독트린과 데탕트가 남북한의 적대를 완화시킬 수 있는 국제적인 조건을 조성하였을 지언성 안보위기를 가중시켰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1972년 시점에서 ‘안보위기’가 있었다고 해도 이는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박정권 자신이 규정한 매우 주관적인 것이었다. 객관적 위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북한의 가시적 도발이나 위협에 의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미군철수로 인해 미국의 전폭 지원과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정치적 지배를 유지해온 남한 지배세력의 위기였다. 따라서 자신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라고 말한 것은 과장 혹은 조작된 것이었다.
박 정권은 10월 유신 직전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7.4 공동성명은 남북화해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냉전 하의 각종 적대적 법령의 개폐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이은 10.17 비상사태 선언은 비상계엄, 헌법개정, 대통령 권한 강화 등 오히려 냉전을 명분으로 하여 1인 체제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남북대화는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최면술’이었다는 지적도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유신체제는 긴장해소 평화공존이라는 국제정치의 흐름과도 배치되는 것이었고, 몇 달 전에 발표한 7.4 공동성명의 정신이나 방향과도 상반되는 것이었다. 유신 체제는 7.4 공동성명에서 제기한 민족과 통일을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통일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방안도 내놓지 않았던 기존의 입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박정희 자신이 10.17 비상조치의 배경으로 강조하고 있는 남북대화의 적극적인 전개 필요성도 사실상 ‘거짓’이었다. 그는 유신체제가 7.4 남북 공동성명에 기초한 평화통일의 필요성 때문에 성립되었고 그것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박정권을 진정으로 평화통일을 추구한 적이 없었다.
박정희는 정당정치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통치와 정치를 분리하고 통치는 대통령 자신만이 담당하는 성역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특히 물밑에서는 북한 최고 권력자들과 비밀 교섭을 하고 남북 공동선언을 서두르면서도 남한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위협을 들먹인 것은 국민 기만이었다. 김형욱은 북한과의 비밀접촉이 독재체제 강화를 위한 계략이지 분단된 민족을 통합하는 민족사적 대경륜의 서막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번에 간파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박정희와 이후락 등 권력실세가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이를 급진전시키는 방향으로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7.4 남북 공동선언은 데탕트 분위기에 대한 남북 지배세력의 위기의식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적대적 불신이 있었지만 급기야 이러한 공동선언을 발표하게 된 것은 미 중 회의에서 그들에게 의존하던 한국이나 북한의 입장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박정권은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통일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를 겉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파시즘적 정치체제의 수립의 명분으로 삼았다. 같은 시점 북한역시 김일성 1인 체제를 공고화하는 헌법을 발표하는 등 남한과 역시 동일한 과정을 겪었다. 특히 박정희는 유신헌법 찬단 투표를 앞두고도 국민에 대해 협박성 발언을 했는데,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라고 하면서 개헌안이 통과된다면 마치 북진통일을 하거나 계엄보다 더 비상조치를 하겠다는 식의 위협을 가하였다. 국민들에게 위협을 가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통일에 대해 아무런 진정성도 구체적인 방안이나 정책도 갖지 않는 상태에서, 개헌안 통과를 통일과 연관시키는 것 자체가 국민 기만이었다.
1974년 이후에는 박정권은 월남 패망이나 육영수 여사 서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국내외적인 사건을 게기로 반공 억압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는데 이는 박정희가 7.4 공동성명은 물론 유신체제의 수립 필요성에서 역설한 민족 혹은 통일의 이상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초기 냉전시절의 탄압을 훨씬 강화시키는 조치들이었다.
또한 박 정권은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 사범으로 몰아서 처벌하였으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을 이적시하였다. 그리고 북한에 내왕하여 간첩 혐의를 받던 사람들을 서둘러 처형하기도 했다, 이 역시 겉으로 표방한 남북 공동성명의 정신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행동들이었으며, 남북 교류, 통일은 오직 통치자가 관여할 사안이며, 국내 정치 혹은 국민 일반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행동들이었다.
박정희의 ‘통일’ 명분이 허구인 것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조직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통일’ 주체 국민회의는 실제는 ‘통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것은 유신이 통일을 대비한다는 것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인데, 설립된 후 8년 동안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단 한 건의 의미 있는 통일정책도 수립된 적도 없고 통일논의도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두 차례 단일후보로 추천된 박정희 부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 그들의 모든 역할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정해진 대통령을 뽑는 형식적인 선거인단에 불과했다. 이러한 들러리 조직, 통일과 무관한 조직을 만들어 마치 그것이 국민적 대표기구인 것처럼 선전한 것도 기만적인 것이었고, 국민들이 그 속을 훤하게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당시 계엄 찬반투표를 비롯한 모든 선거도 청와대의 기획과 공안기관의 철저한 감시와 위협 속에서 진행되었으면서도 마치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인 것처럼 포장한 것도 사실상 기만적인 것이었다.
한편 ‘긴급조치’ 선포 이유도 거짓이었다. “천재, 지변,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 국가의 안전보장, 공공의 안녕질서의 위협 등 내정 외교 등 국내외 정세의 위기에 대처한다”는 긴급조치는, 실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통계를 통해 보면 오직 재정조치 한건을 제외하면 모두가 “공공의 안녕질서” 즉 국내 반정부 저항운동을 막기 위한 것임이 드러났다. 앞에 열거한 모든 위기는 사실상 내부 반대세력의 도전이라는 한 가지를 말하기 위해 그냥 덧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국가비상사태’, ‘유신헌법제정’, 긴급조치의 명분으로 내건 통일의 필요라는 것은 완전히 거짓 명분에 불과했다는 점이 명백하다.
인혁당 재건위 관계를 전격 처형한 것은 ‘법 아닌 법’(긴급조치)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 가장 심각하게 법을 위반한 것은 박정권 자신이었다. 1972년 남북 정상회담의 법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았고, 7.4 남북공동성명도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문서였다. 왜냐하면 이후락의 방북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며, 따라서 남북공동성명 역시 공식 문서가 볼 수 없었다. 북한과는 공식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와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두 국가가 ‘민족대단결’을 추구한다는 것도 사실상 기존 한국의 실정법, 국가 공식입장과 배치된 것이었다. 물론 박정권은 통치행위라는 명분으로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법의 지배라는 원칙이 통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전제군주시절의 논리를 정당화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기존의 반공주의는 사실상 허구였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유신이후 박정권이 그렇게 강조한 ‘국가’역시 메이지 헌법의 고쿠타이(國體)를 연상시키는 군국주의 냄새가 많이 나는 개념이지만, 그것의 진정성 역시 의심스럽다. 박정희는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국가를 하나로 알고 국력배양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1972.12.27 제8대 대통령 취임사) “국가없는 민족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1975.1.12 연두기자회견) “ 무엇보다도 국민총화를 굳게 다져가야”(1975.2.13) “ 국가가 있어야 학교가 있고 학문이 있다”( 1977.1.12 연두교서). “국가의 생존이 개인의 자유에 우선한다” 이것은 “국가에 의해 모든 것을, 국가에 반역하는 것은 아무것도, 국가 밖에는 아무 것도”를 위친 뭇솔리니의 외침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국가주의의 논리는 같은 시기 7.4 공동성명에서 나온 ‘ 민족대단결’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분단 하 한국이 민족대단결을 추구하려면 국가주의를 완화하거나 해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7.4 공동성명의 ‘민족대단결’이 북한의 요구를 양보하여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라면, 거꾸로 북한의 주장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정도로 남한 정부는 자신의 국가철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어떤 경우든지 여기서 말하는 국가지상주의는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결국 10월 유신 이후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해 일방적으로 충성하도록 요구한 것은 박정권의 주관적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세력에 대한 충성 요구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가 말하는 국가는 곧 유신정권이었고, 국가위기는 권력의 이익, 즉 자신과 정권의 위기의식을 달리 표현한 것이었다. 여기서 국가는 사실상 ‘사적 이해’를 전도시킨 것이었다. 박정희의 국가 강박증은 사실상 지켜야할 민족과 국가의 정신과 내용의 결여, 국가다움의 결여를 거꾸로 표현한 것이다. 박정희는 천황의 직속부대인 일본군에 들어가 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남로당 당원이었다. 그는 한국의 ‘국민국가’를 부인하는 최전선에 섰던 부인할 수 없는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민족,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적이 없고, 오직 시세에 편승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결국 그에게 국가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만 보장해준다면 그것이 일본 천황제 국가이건 독립된 남북한 국가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실제 국가나 민족에 대한 충성이 설득이 아닌 폭력의 방법으로 요구될 때, 실제로 국가나 민족은 텅 빈 것이 된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주장하였듯이 천황제의 초국가는 ‘텅빈 국가’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강조하는 애국주의는 대체로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의 하위에 위치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국가주의는 보편적 가치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 수량적 성장 지표, 후진국 콤플렉스, 북한과의 체제경쟁, 강박증 등이 그 국가주의의 실제 내용이다. 박정희 개인의 이력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4. 병영적 규율과 ‘절멸’ 의 담론

유신체제 하의 중화학 공업 실무책임자는 당시 한국의 국가 체제는 주식회사 체제를 넘어서 대통령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대와 같은 체제였다고 말한다. 당시 한국은 거대한 군대와 같은 조직이었다. 긴급조치에 의해 저항하는 국민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인 ‘명령’이 법적 지위를 갖고서 최고의 규율로 존재했다. 한국은 북한과의 대결을 일상 과제로 하는 군대와 같았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나 경찰이 투쟁한 전투의 대상은 북한이 아니라 바로 한국 내의 정치적 반대세력이었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강조는 바로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무시, 일인의 독단적 의사결정의 정당화의 다른 표현이다. 가장 효율적인 정치는 논의가 없이 최고 권력자가 결정하여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능률, 효율 등의 용어를 매주 빈번하게 구사하였다.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존재, 능률적인 존재는 살아남아야 하고 쓸모없는 존재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역시 나치 이전 독일에서 빈번했던 사고방식이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위해 문화까지도 총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 우리나라의 정치도 그 목표와 방향이 생산 증가와 일치하여야 한다” 생산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억제를 의미한다.
1974년에 발표된 긴급조치 4호 위반자에 대해서는 계엄령에 의거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을 하도록 했다. 이것은 입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상태에서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민간인도 모두 군인처럼 취급될 수 있다는 말이고, 국가가 군대조직처럼 되었으니 민간인은 오직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 국민들이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한 것이다. 실제로 형량의 구형도 제주 4.3 당시와 한국전쟁기의 군사재판과 동일했다. “첫줄은 사형, 둘째 줄은 무기” 이런 식으로 인혁당 관련자들을 재판하였다.
거듭되는 간첩사건 발표, 온 사회에 내건 간첩신고 슬로건은 국민들을 위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70년대 온 동네에 붙여놓았던 포스터 “간첩은 표식없다” 이 구호는 선량한 사람도 위장간첩일 수 있다는 판단, 간첩은 어느 곳에서 모든 곳에서 다 있는 존재가 된다. 소극적으로 사회적 일탈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탈자를 지정하고 처벌하여 사회적 경계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통해 집단의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집단 재현하는 것 정치적으로 폐쇄된 국가는 더 쉽게 마녀사냥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은 간첩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복종을 한다. 즉 간첩조작의 실제 효과는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복종 유도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는 누구나 상호 감독을 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어 진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
병영체제가 극단화되면 반대세력 혹은 사회적으로 ‘부수적인 존재’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면 신체적으로 절멸시키는 체제다. 절멸체제의 내용은 절멸의 실천, 그리고 절멸되어야할 인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일시하는 것(ideological identification) 이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침략자들에게는 원주민 저항자이고 독일 파시즘에게는 사회적 소수자나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문제를 전면적인 무한대의 힘을 사용해서 해결하는 것이다. 절멸대상은 위생학적으로 제거되어야할 존재다.
나치 이전과 나치 초기의 독일, 그리고 천황제 군국주의 하의 일본의 공통점은 사회의 의학화, 즉 위생학적 비유를 사회에 적용한 점이었다. 창녀, 장애인, 알콜 중독자, 동성애자 등 일탈자들은 사회적 건강을 더럽히는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들은 소독되어야할 존재로 간주되었다. 사회를 몸으로 비유한 다음 이들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병균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래서 이들이 독일에서 먼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 역시 인종주의적 위생학의 관점에서 소독되어야할 병균적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그것이 대량학살을 가져오게 된 논리였다. 실제 독일은 물을 끓여 먹거나 침실에 병균 오염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소득을 실시하는 등 온 사회 영역에서 청결 캠페인을 벌렸는데, 그것은 바로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그대로 실천되었다. 생활상의 위생학은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1983년 이른바 ‘더러운 전쟁’ 시기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인사들이 낳은 어린이 납치사건도 이러한 절멸적 담론과 실천의 결과였다. 즉 좌익의 아이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그들로부터 분리시키자는 것이 당시 독재정권의 어린이 납치의 배경이었다.
사회의 오염을 막자는 논리가 독일에서 인종주의로 표현되었다면, 반공주의역시 이러한 위생학, 의학적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처칠은 그러한 위생학적 비유를 한 원조격인 존재고, 미국의 로스토우(Rostow)도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박정희는 공산주의를 바로 위생학적 비유를 사용해서 설명하였다. 즉 공산주의는 병균과 같은 존재이므로 소독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병균으로 간주되면 그것이 특정 인종이든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이든 사회에서 제거되어야할 존재로 간주되고, 그들에 대한 동정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즉 유신 체제하의 완전 격리, 혹은 절멸의 대상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비전향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전향공작 사회안전법 제정을 통한 영구 구금조치가 대표적이었다.
1975년 유신시절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새로운 형태의 폭력화된 법의 대표적인 예이다. 유신헌법 상의 제10조 1항(모든 국민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보안처분을 당하지 아니한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사회안전법은 국가보안법 반공법을 위반하여 처벌받은 사상범에게 전향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재범할 위험성이 없을 때까지 무한정으로 수감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보안처분(보호관찰, 주거제한, 보안감호)가 존재한다. 이중 보안감호는 사실상의 형벌이었다. ‘절대적 부정기형’, 얼마든지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1936년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과 1941년 치안유지법 3장의 예방구금 제도를 고스란히 승계하였다. 보안처분 사법철차를 거치지 않고 심의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법무부 장관이 결정하는데 2년 단위로 무기한 가능한 기간 갱신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실정법을 어기지도 않은 사람을 평생 감옥에 넣어 둘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보안처분의 면제요건은 반공정신의 확립, 즉 반공주의자가 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서(시행령 제11조 제1항 1호) 충족된다. 이것은 과거 이승만 시절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우와 같다. 과거에는 전쟁이 발발해서 이들을 모두 학살을 했지만 박정권은 이들을 평생 감옥에 가두어두려 하였고, 석방조건은 반공주의자로 확실한 전향을 했다는 증거다. 즉 박정원은 사람의 마음까지 통제하여 그의 완전한 전향을 확인받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사상범에 대해서 어떤 방법을 두더라도 추가적 감시 통제장치를 두겠다는 것이다. 사회안전법 제정과정에서 보면 반국가분자에 대한 단호한 대책이 요구된다는 논의가 있었다.
사회안전법 제정과 보안처분을 통해 반국가 인사를 영원히 구금하려는 취지에 대해 그들 스스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였다. 사실상의 형벌로서의 보안처분은 일제의 유산이자 동시에 나치시대의 유산이다. 특별예방(개선, 교육)과 이를 통한 사상범의 재사회화란 사실상 파시즘의 체제유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그것은 유신체제가 이미 감옥에 갖혀 있거나 출옥하더라도 어떤 사회활동도 하기 어려운 장기수, 사상범들을 기존의 형벌로 다스릴 수 없어서 보안처분까지 이중 삼중으로 해서 이들을 완전히 통제 하에 두거나 폭력으로 전향을 강제할 정도로 허약한 체제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박정희 등 집권세력이 가진 ‘두려움’, 내부의 ‘적’의 힘에 대한 과대평가는 바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들에 대한 즉각 처형과 이러한 보안처분 조치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병영질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절멸’ 시키려는 체제는 정치적 표현 의지를 가진 지식인, 학생, 사상범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학교 교사들, 일반 국민들도 일단 약간이라도 저항의 의지를 보이는 순간 절멸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당시의 보통 국민들도 경찰이나 관청 등 권력기관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언제나 전전 긍긍하였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인간보다는 상부의 지시가 우선시되고,,“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도처에 나타났고, 재개발을 위한 철저지역에서 “철거민에 대한 가혹한 인권유린은 공산당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는가하면, “전체사회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질되는 현실”이 나타났다.
이 시기를 살았던 50대 이상의 한국의 농민,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30년대 말 40년대 초 일제 말 전시동원 파시즘 체제에서 겪었던 것을 두 번 겪는 셈이었다. 일제 말기와 달리 70년대에는 월남 파병, 중화학 공업화, 중동 붐의 경제적 성과가 어느 정도 가시적이었고 따라서 노동자와 대졸 출신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분명히 그 과실이 공유되었지만 다수의 노동자나 농민은 여전히 그러한 혜택 밖에 존재하였다. 유신체제는 또한 관의 절대권력 체제였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힘이 있는 집단의 부패와 부정, 편법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이 노예적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극소수의 재야인사나 학생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채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일제 말기에 그러했듯이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6. 유신체제의 부역자들과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

독일의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1946)에 의하면 나치즘에 협력한 죄로 처벌당한 사람은 주요책임자, 적극지지자, 나치 수혜자, 단순가담자, 무혐의자로 구분되는데, 이 법의 기본 강령을 보면 “나치즘의 폭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거나 혹은 정의와 인류애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나 그 상황을 이용하여 자기이익을 챙김으로써 나치즘과 군국주의에 책임있는 사람들”이 처벌의 대상이었다. 주로 나치즘 희생자나 반대자에게 정치적 이유로 범행을 저지른 자들, 주로 나치당이나 산하단체에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기준을 유신체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유신체제 하의 간첩조작, 인권탄압, 폭력행사, 반대세력에 대한 고문과 중형 구형에 가담한 사람들, 그것을 통해 개인적 이득을 챙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신체제 하의 최고 권력기관은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였으므로 간첩조작, 학원탄압, 노동탄압 등을 기획하거나 집행한 청와대와 중정의 책임자 급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각료들, 여당 의원들, 검찰과 사법부, 경찰의 지휘부에 있었던 사람들, 유신정우회에 들어간 지식인 출신 국회의원들, 유신을 찬양한 교수들, 반공단체 간부들 등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유신체제 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동시에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인권차원에서 한국사회에 친일청산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실상 유신체제 청산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선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보.배상 작업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역시 긴급조치 등 법의 무효화를 통해 일괄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당시 유신협력자에 대한 단죄는 보복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서는 안되지만, 당시 정권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적극 지지하거나 집행한 사람, 그것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규명되어야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유신체제 하에서 자신들이 한 행동이 애국이라고 강변한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해 모든 인간은 죄를 짓고 산다. 내 경우엔 시대가 나를 죄인, 역적으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의 잣대는 분명히 다르다. 유신정권 시절의 ‘애국’이 지금은 천인공노할 죄가 된 걸 보면 모르겠나.

아마 이것은 나치의 부역자들도 동일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판사이름이 적시된 긴급조치 판결문 요약문을 공개하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 대법원은 “대법원은 실정에 따른 판결을 현재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여론몰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며 “현직 법관들의 경우 당시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배석판사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전했고, 조선, 중앙, 동아는 긴급조치의 폭압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인민재판’이라고 험악한 담론으로 반박하였다. 애초부터 명단공개가 아니라 판결문 정리 보고서에 불과하고 판사명단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적시한 것에 불과한데 그것을 구태여 ‘공개’라고 규정했던 이들 언론은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수 있겠는”가 식으로 나갔다. 독재에 부역하였다가 비판받게 된 것을 마치 좌익에 수난당하는 우익 애국자, 의인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긴급조치 사건을 맡았던 판사들은 대부분 하필 그 때 그 직책에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판결문에 이름을 남기에 되었을 것이다. 과거사위의 이번 결정은 판사들더러 법전을 보지 말고 나중에 욕먹지 않을 판결만 궁리하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련자 명단공개가 긴급조치 문제를 정리하는 길이라면 공개 대상은 긴급조치 위반 사범을 잡아들였던 정보기관과 검찰, 경찰, 긴급조치 발동 논의에 참여했을 청와대 참모와 국무위원들 까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결국엔 유신헌법 국민투표에서 90% 넘게 찬성해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줬던 국민의 책임까지 물어야 될 판이다.”

동아일보 등 언론사, 사법부, 대학은 부분적으로는 유신체제의 피해자라 볼 수 있다. 중정의 압력을 받아 달리 저항을 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부의 압력을 그대로 받아들여 가해자의 일원이 된 측면도 있다. 기자들에 대한 해고조치, 학생들 제적, 제명조치, 긴급조치 유죄 판결은 모두 이들 기관이 내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관이 자신이 피해자라고만 강조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유신체제의 부역자들은 ‘우연하게’ 그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판사들 중에서도 다소 무리하게 형을 구형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엄연히 구별되었다. 위의 [조선일보] 사설은 자신의 법 소신에 비추어 절대로 처벌되어서는 안 될 청년들에게 중형을 구형했던 현실에 거부감을 느끼며 주저했던 판사들을 마치 욕먹지 않을 궁리를 하는 사람으로 몰아 부쳤는가 하면, 오히려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출세를 위해 무리한 판결을 한 사람을 칭찬하고. 이들이 법전에 나와 있는 대로 판결할 수 밖에 없다고 실정법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사실상 중정을 비롯한 모든 정부기관의 선거공작 하에서 자발적 의사표현을 포기하고 공포 속에서 유신헌법 지지를 했던 국민들을 마치 자발적 찬성을 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이러한 협박과 공포 속의 선거를 마치 자유로운 찬반이 가능했던 것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영구 변호사(74·당시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부장판사)는 76년 수업 중 정권을 비방한 혐의(긴급조치 9호 및 반공법 위반)로 기소된 한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또 양영태 변호사(67·당시 광주고법 판사)는 7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비방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한 농민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그해 말 지방으로 ‘좌천성 발령’이 났고 한 달 만에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양 변호사도 그해 말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발령이 나지 않았고, 고등법원에 2년 정도 더 있어야 했다. 이러한 불이익을 당한 사례를 통해 보았을 때 중정과 청와대의 압력으로부터 사법부가 자유롭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소신대로 판결을 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처벌을 당할 사안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법관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 정당하고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결을 내린 사람들 중 양승태가 대법관으로, 김황식씨가 총리로 있다는 사실은 오늘 한국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 정의의 수준을 가늠케 해 준다. 유신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적어도 이러한 인물들이 대법원장이나 총리의 자리로 올라갈 수는 없고, 설사 능력이 탁월하여 추천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무리한 판결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사죄 정도를 하고 넘어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온 국민을 포섭할 수는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협박을 통한 복종을 유도함과 동시에 할 수 있는 한 영향력 있는 정치적 반대자들은 계속 포섭하였다.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그 대표적인 포섭대상이었다. 야당지의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던 소장 언론인, 동아일보의 유혁인, 최영철, 이동욱, 한국일보의 임방현, 임홍빈, 조선일보의 이종식, 동양통신의 김성진 등이 대표적이었고,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신상초, 서울대 법대의 갈봉근, 한태연 등이 대표적이었다.
나치의 부역자였지만 뛰어난 법학자였던 칼 슈미츠는 독일이 나치 하에서 벗어난 지 수십년을 더 살았지만, 대학에서는 추방당했다. 학자로서 그의 기여는 무시할 수 없지만 공적인 지위에서 역할은 할 수 없었다. 이들 유신의 협력자들이 왜 비판적 언론인에서 적극적인 유신 부역자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향후에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나치당의 비밀경찰이나 SS 요원들, 제국주의 일본의 악명 높은 정치경찰 특고 요원, 731부대 요원 등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였던 것처럼 유신체제 하의 중정간부, 학생들이나 반정부 인사를 기소한 검사, 긴급조치 재판을 담당한 판사, 어용 지식인들 모두 당시로서는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권력에 저항할 용기가 없는, 경쟁에서 승리한 우수한 인재들은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독재정권 혹은 파시즘에 적극 협력할 가능성이 높다. 심한 경쟁을 통과했을수록 자신의 기득권을 더욱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그것을 통해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어렵사리 얻은 지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속한 정치공동체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일을 하고도 아무런 도덕적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과거 파시즘 부역자, 식민지 하 부일협력자들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말’로 먹고사는 존재들이라, 온갖 해괴한 논리를 끌어다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이들이 이후 사회 각 영역에 미친 피해역시 적지 않다.

7. 결론 : 현재진행형으로서 유신체제

유신체제의 모든 것은 일제 하 전시동원체제를 그대로 모방, 연장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국가, 민족, 국민의 이름으로 시행되었고, 여기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황이라는 상징대신에 대통령이라는 법 위의 최고 권력자가 있었고, 명령이 법을 대신하였으며, 공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이 법의 이름으로 행사되었다. 국민들에 대한 사상적 통일성 강요, ‘국민운동’의 이름을 빈 위로부터의 동원, 말단까지 연결된 주민 세포조직을 통한 주민 상호감시, 상명하복의 철저한 관료체제, 공격적인 업적주의와 극단적인 위계질서, 학교의 군사교련과 병영화, 비뚤어진 도덕주의, 즉 근검, 절약, 청결, 위생, 질서 등 가족중심, 개인적 가치의 강조 등이 그것이다. 일본에서 사라진 전시 병영체제는 30년 후 한반도에서는 잠복되어 있다가 다시 부활하였다. 일제 말의 전쟁체제가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하다가 급기야 피폐해졌듯이 유신체제도 1978년 이후에는 경제적으로도 현저하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유신체제 하 인혁당 재건위 사건처럼 국가를 뒤흔들만한 조작사건은 시간이 지난다음 모두 그 진실이 밝혀지게 되고, 그러한 조작의 당사자는 처벌도 지탄도 받지 않지만, 간첩으로 지목된 사람 중 일부는 이미 고문, 사형 등을 통해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상태가 된다. 공안기관은 간첩 조작을 통해 충분한 정치적 목적을 거두고 그것에 부역한 사람들은 권력의 힘을 통해 경제적 이득까지 누리게 되었으나 피해자들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온 사회는 바로 이러한 조작으로 인해 큰 상처를 안게 된다. 그래서 간첩 조작은 사회를 파괴시킨다. 공권력에 대한 불신, 이웃에 대한 불신이라는 상처가 그것이다.
정치 불신, 사법 불신은 유신체제가 이후 오늘까지 한국사회에 남긴 가장 부정적 유산이다. 법정에서 피의자가 재판부에게 훈계를 하고, 방청객들이 “이제 재판이냐 개판이지”라고 야유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의 만연한 ‘법정 모독’이야 말로 사법부 권위가 가장 땅에 떨어진 현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시절 판사들은 검사들이 써준 기소장을 자구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판결문으로 옮겼다.
국가보안법이 그러하지만, 극단적 국가주의, 공포의 조성은 인간의 내면성을 유린한다. 즉 온 국민은 자신이 사상 검증의 대상으로 삼고, ‘위험한 국민’으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생업에만 충실한 착한 국민으로 보이기 위해 몸조심을 하게 된다. 유신체제 하의 이것은 시민사회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조용환 변호사 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은 천안함 건에 대해 ‘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상을 문제 삼았고, 결국 대법관 임용을 거부하였다. 즉 개인의 사상을 법적 규제의 대상으로 삼는 사상통제는 일제의 총독부 지배체제의 유산이며, 유산체제에서 극성을 부렸다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것은 국가가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통제의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다. 즉 유신 체제를 겪었던 현재의 50대 이상의 사람들, 일제 말까지 겪은 80대 이상의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부당한 일을 겪어도 권리주장을 하는 주체로 나서기를 꺼린다.
유신시절의 관료기구의 상명하복의 문화는 이명박 정부에서 부활하였다. 경찰의 촛불시위 진압, 용산참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명박의 정당정치 불신, 경제 효율성 중시 사고는 박정희의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국가안보 논리가 경제논리로만 대체된 것이다. 총리실 불법사찰, 공안기관의 불법 사찰과 활동, G20 쥐그림 사건 등 모든 정치적 반대를 공안적 시각으로 보는 이 정부의 시선 역시 유신적 사고가 연장된 것이다. 그 근본은 두려움이다. 비록 투표를 통해 집권을 했다고 하더라도, 정권의 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된 경우, 극히 미미한 반대 의사표현도 반체제 세력으로 확대되어 보인다. 약점과 콤플렉스는 학살과 인권침해의 기반이 된다. 박정희의 국가주의, 이명박의 8.15 건국절 기념 소동, 촛불진압, 용산 참사 등은 모두 이 정권이 가진 공포심과 강박증에 기초한 과잉 대응이었다.
유신체제의 미 청산은 오늘의 검찰의 정치화, 언론의 무책임성을 가져온 한 원인이 된다. 미철리히 부부의 “애도하지 않는 독일인”에는 죄의식, 부끄러움, 공포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히틀러 시대의 청산에 대해 애도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자신과 히틀러를 통일시하고 저항하지 않고 참여했던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못함으로써 나치시대의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반대의 상황, 그 시대를 지배했던 그 움직임과 방향, 형태를 결정했던 지성과 도덕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극복되어야만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처리되고 해결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애도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사회가 무엇을 버려야하는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것은 사회가 과거의 극복을 통해 집단적으로 지혜를 갖게 되는 상황, 도덕심을 회복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오늘 유신시절에 청장년이었던 50대 이상의 한국인들이 유신체제 하의 폭력이나 인권침해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察其所安( 논어, 선을 행하더라도 즐거워하지 않으면 그것은 기만이다)
-국가, 민족, 통일, 경제성장, 그 아무리 높은 가치를 내걸었어도 그것이 진정성에 기초하지 않았고 즐겁게 추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강박증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기만이다.
- 폭력을 동원한 국가주의, 애국심 고취, 그것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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