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7일 일요일

강만길의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을 대충 다 읽었다( 대충이란 내가 같은 시점에 다른 유사위원회에 활동을 한 까닭에 부록처럼 실린 친일반민규명위의 활동일기는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만길 교수가 78세라니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나도 그 만큼 늙었다는 이야기겠지....  나는 그가 토론자로 참여했던 [창작과 비평] 1977년 겨울( 가을? ) "분단시대의 민족문화"라는 좌담에서 개안의 희열을 느낀 바 있다. 아마도 자세히 기억은 할 수 없으나 그 좌담회에서의 그의 발언들도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분단시대라....

이승만, 박정권 시기를 그렇게 명명했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시점에서는 식민지 시대 연구서도 거의 없었다. 국사학자들이 식민지 시대 연구를 모두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후 역사에 대해 제도권 학자가 언급한다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옹졸한 박정권을 이러한 시각을 갖는 학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고난은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권력의 발톱이 할퀸 것이었다.

 

그가 유신시절을 겪으면서 비판적 사학자가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연구의 출발점이 조선시대 상업사 등 사회경제쪽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창밖에서 진행되는 뜨거운 역사를 모른채하면서 수백년 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역사학자로서 올바른 자세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시대가 사람을 만들었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덕택에 전공도 바꾸었고, 현대사, 통일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한국 역사학자로서는 매우 드문일이다. 그러나 외국의 역사학자들은 언제나 지금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외도를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학계가 잘못된 것이다. 일제 실증사학의 전통이 아직 한국 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전문 학술논문을 양산한 대신에 논객으로 등장하여 '잡문'을 쓰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 여러 곳에서 동료 학자들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가 많이 의식하고 있다. 동시대 인물인 김용섭 교수 등과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나는 강만길 교수에게 점수를 더 많이 주고 싶다. 아카데미즘의 이름으로 아무런 정치사회적 발언도 하지 않은 학자의 아카데미즘의 내용이 과연 우리가 깊이 새길 대단한 내용이 있을까?

 

강만길 교수의 학문과 실천은 그 시대에 누군가가 반드시 했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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