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9일 화요일

어제 PD수첩 보셨나요?

어제 PD 수첩에 방영된 총리실공직자윤리위원회의 민간인 사찰 건 보셨나요? 공기관이 한 무력한 시민을 파멸로 이끌로 반성하지 않는 모습 보셨는지요?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무도한 일들을 벌였는지 보셨나요?

제가 맨날 강조하는 학살이 인권침해가 과거 일이라고 여전히 생각하시는 분들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피해자 김종익 선생은 나와 20년 이전부터 아는 사이입니다.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 번역한 분입니다. 한문 잘 하시는 은행원이지요. 세상에 그렇게 착하고 인격적으로 훌융한 분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어제 티비 나왔듯이 동작경찰서에서 법인카드 3년간 사용 내역 빗자루로 쓸듯이 수사했지만, 밤늦은 시간 접대비 유흥비 한 건 나오지 않는, 정말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깨끗한 CEO 입니다. 자신들의 잣대와 상식으로 기업가는 털면 무조건 한건은 불법이 나온다는 예단 하에 접근했다가 한 건도 안나오니 자신들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법인카드 아무리 털어도 먼지하나 안나오니 그냥 둘 수는 없어서 대통령 명예훼손죄로 걸어넣은 거지요. 이건 정말 공권력이 갈데까지 간 것입니다. 깨끗한 김종익 사장 잘 못 건드렸다가 자신들도 큰 코다친 것이지요. 잘못했으면 원상회복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뭉개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파멸시키고도 반성도 없습니다. 이게 이 정부의 모습이고 한국 공권력의 벌거벗은 모습니다.

 

이광재 정치자금 수사와 이 건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즉 노무현 수사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부 들어선 이후 저들이 무엇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나는 이 사실을 사건 발생당시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그냥 위로만 해드리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감추어진 것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김종익씨가 원직에 복직하고 사장으로서 직무를 다시 수행하며, 강탈당한 주식을 다시 찾고, 이 일의 최고 윗선의 명령자가 누구인지가 밝혀질 때 까지 적극 관심을 갖고 함께해주십시요. 

 

2010년 6월 28일 월요일

전작권 이양, 3년이 아니라 30년도 모자란다.

이 정부가 천안함 사태를 빌미로 전작권 이양 시기를 3년 반 뒤로 늦추었다고 한다.

 3년7개월여 정도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한 것은 우리가 전작권을 돌려받았을 때 갖춰야 할 군사적 대응 능력을 2012년까지 갖추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우리 군이 독자적인 정보획득 능력이나 전술지휘 통신체계, 정밀타격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데 지난 몇년간 준비를 해 보니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2007년 합의했을 때 당시의 계획은 '도상계획'이었기 때문에 실제 준비를 한 결과 2015년 정도가 돼야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 우리 군은 6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60년을 준비했는데도 모자란데, 과연 3년 지나면 독자적인 전술지휘 통신체계, 정밀타격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북한과 경제력이 거의 대등해진 70년대를 기점으로 삼더라도 이미 40년의 시간이 경과하였다.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에다, 연 30조 이상의 국방비를 지출하는 나라가 재래전의 군사력을 제외하고는 남한과 전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북한의 침략을 독자적으로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주한미군에게 연 수조원을 지출하면서도 독자적인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다는것은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는가?

 

독자적인인 정보 획득능력이나 정밀타격 능력을 갖추는 것이 과연 소프트웨어 문제인가 하드웨어 문제인가? 군사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알 수 없으나, 하드웨어에서는 북한은 더이상 한국의 적수가 되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20년전에 나온 이야기다. 석유를 중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독자적인 국방력을 기른다는 이야기인가? 한국은 미국과 같은 첨단의 군사대국을 지향하는가?

 

이번 천안함 사태는 한국의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가 어렵다는 것을 실증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작전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볼수는 없는가? 그리고 남북한 긴장을 조성하고, 북한의 심기를 건드린다음, 북이 강경하게 나오나까 전작전 이전을 연기하자는 이야기는 원인을 결과로 혼동하고, 원인을 제거할 생각을 하기 보다는 결과를 갖고서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닌가?

 

독자적인 방위능력이 없다는 것은 기술적, 물리적 현실이 아니라 정신적 현실이라고 봐야한다. 1950년 7월 14일 당시는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북한에 맞서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은 노예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번의 3년의 연기는 사실상 숫자에 불과하고,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모자란다는 명분을 제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즉 북한이 망하지 않는 한 우리는 미국없이는 살수 없는 나라라는 논리는 언제나 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의 위협의 실재는 명분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은 미국의 개입이 수많은 이승만들, 수많은 이완용들의 정치적 입지를 지켜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남북한이 화해하고 북미외교가 수립되고 평화체제가 만들어지면 전작권의 이양이라는 개념자체가 필요없어진다. 중국은 이제 하나가 되어 무시못할 경제대국이 되었는데, 우리는 언제나 적대에서 벗어나 더 이상 미국좋은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강만길의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을 대충 다 읽었다( 대충이란 내가 같은 시점에 다른 유사위원회에 활동을 한 까닭에 부록처럼 실린 친일반민규명위의 활동일기는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만길 교수가 78세라니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나도 그 만큼 늙었다는 이야기겠지....  나는 그가 토론자로 참여했던 [창작과 비평] 1977년 겨울( 가을? ) "분단시대의 민족문화"라는 좌담에서 개안의 희열을 느낀 바 있다. 아마도 자세히 기억은 할 수 없으나 그 좌담회에서의 그의 발언들도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분단시대라....

이승만, 박정권 시기를 그렇게 명명했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시점에서는 식민지 시대 연구서도 거의 없었다. 국사학자들이 식민지 시대 연구를 모두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후 역사에 대해 제도권 학자가 언급한다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옹졸한 박정권을 이러한 시각을 갖는 학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고난은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권력의 발톱이 할퀸 것이었다.

 

그가 유신시절을 겪으면서 비판적 사학자가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연구의 출발점이 조선시대 상업사 등 사회경제쪽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창밖에서 진행되는 뜨거운 역사를 모른채하면서 수백년 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역사학자로서 올바른 자세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시대가 사람을 만들었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덕택에 전공도 바꾸었고, 현대사, 통일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한국 역사학자로서는 매우 드문일이다. 그러나 외국의 역사학자들은 언제나 지금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외도를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학계가 잘못된 것이다. 일제 실증사학의 전통이 아직 한국 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전문 학술논문을 양산한 대신에 논객으로 등장하여 '잡문'을 쓰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 여러 곳에서 동료 학자들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가 많이 의식하고 있다. 동시대 인물인 김용섭 교수 등과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나는 강만길 교수에게 점수를 더 많이 주고 싶다. 아카데미즘의 이름으로 아무런 정치사회적 발언도 하지 않은 학자의 아카데미즘의 내용이 과연 우리가 깊이 새길 대단한 내용이 있을까?

 

강만길 교수의 학문과 실천은 그 시대에 누군가가 반드시 했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두드러져 보인다.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한국전쟁 6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지났다.

남북한의 관계는 아직도 철창을 경계로 해서 갈라져 있다.

상대를 철창에 집어 넣어야 내가 산다고 말한다.

 

강대국이 한반도 내, 외부에 들어와 있는 마당에 섣부른 민족주의의 열정은 수 많은 인명을 앗아갈 위험하고 무모한 우물안 개구리의 사고였으며, 자유 세계라는 '보편논리'는 종속적 현실을 은폐한 노예의 사상이었다.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정운찬 총리

국회 국토해양위가 22일 세종시 수정법안을 부결시킴에 따라 지난 8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던 세종시는 결국 `폐기'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정운찬 총리의 거취가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그는 지난 21일 열린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 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이렇듯 중차대한 국가 대사(세종시 수정안)를 상임위 차원에서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없이 국민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쫓기듯 표결하고 끝낼 리 없다고 확신한다"며 국회를 강하게 압박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요구한 대로 이 안건이 본회의에 올라간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결국 세종시 문제 해결의 구원투수로 이 정부의 총리로 기용된 정운찬 총리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였듯이 용도 폐기될 처지에 놓였다. 아마 정운찬 총리는 세종시 건이 부결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야당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충청도 대표선수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정부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런데 별로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다. 


나는 서울대 총장 시절 그와 만나서 인사한 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정운찬 총리를 잘 모른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만하면 원만한 인격자이고 서울대 총장을 맡을만한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2007년 대선후보 거론되었을 때, 후보 수락 여부를 저울질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고, 이번에 기용된 것도 단순히 총리 한번 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의 욕심은 성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충청도 대표로서도 이제 경쟁력을 상실했고, 학자의 이미지, 혹은 지식인 대표로서도 이미 이미지를 완전히 구겼기 때문이다. 탈법의 백화점 4대강 문제는 물론이고, 이 정부 들어서 진행된 비상적인 일들과 과거 그가 보여준 모습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가 합리적 자유주의자로서의 소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정부의 탈법, 불법, 비상식적인 일들을 총리의 자격으로 제동을 걸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지난 참여연대의 유엔 안보리 편지 건으로 그는   "애국심이 있다면 유엔에 가져가 우리 조사결과가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 "어느 나라 국민인지 의문이 생긴다." ( 방해꾼 참여연대? 정운찬 총리의 '불편한 애국심' - 오마이뉴스)라고 발언했다. 이러한 발언은 합리적 자유주의자로서 정운찬의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다. "애국심", 그와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이다.

 

학자가 권력에 들어가면 자기 소신도 굽혀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실상은 학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며, 자유주의 소신을 지킬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정운찬 총리는 학교로 돌아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한나라당에 들어간 운동권 출신들 처럼 살아남기 위해 더욱 더 이명박 정부의 돌격대 역할을 더 거칠게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역할도 하기 전에 용도폐기 될 것인가의 문제만 남았다. 나는 그가 전자의 모습을 보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점점 더 추해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진흙밭을 구르는 바닥 정치가로서 나설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가 그러한 용기와 정열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기는 하나 그는 세상의 어려운 일을 앞장서서 해결을 경력도 없고, 그러한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경력도 없다. 그는 언제나 주변사람들로 부터 대우만 받으면서 살아온 전형적인 서울대 교수 출신 학자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를 동정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저지른 모든 탈법과 불법, 반인권, 부자위주 정책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인물이고 어쩌면 준엄한 법적,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731부대'가 뭔지도 몰랐던 초기 그의 모습은 그의 역사에 대한 무지, 역사의식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서울대 총장자격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일국의 총리가 되기에는 자격미달이었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일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2010년 6월 18일 금요일

지금은 이승만 시대?

참여연대 앞에 연일 가스통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는 모양이다. 이들이 구사하는 담론이나 행동은 참으로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로 수준이하이다. "우리편 아니면 모두 빨갱이"라는 말은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나온 이야기들이고, 이승만 친위부대였던 정치깡패들의 논리였으며, 군사독재 시절의 논리였다. 그것은 적과 나를 이분화시키는 말의 폭력이지만 실제 폭력이었다. 그 말은 곧바로 폭력, 학살, 고문을 정당화했던 담론들이었다.

 

여기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화가 불가능하다. 소통은 차단되고 주먹이 말 보다 앞선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빨갱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사람을 불법적으로 죽여 놓은 살인자가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합리적 보수 ?  대한민국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 거친 행동을 제기하는 보수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그 반대다. 이들의 폭력의 언어는 바로 이 정부에서 나온 것이다. 정총리가 말했다.

"어느나라 사람이냐"

그것은 국가에 무조건 충성을 요구하고 충성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던 파시스트의 언어다.

정부가 파시스트의 언술을 앞장서서 사용했는데, 몸이 근질근질한 50년대 열혈 아저씨들이 그냥 있을 수 있는가?

게다가 조선, 중앙 등 소위 보수 언론은 "등에 칼 꽂아"라는 섬뜩한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검찰은 공안사건으로 취급하겠다고 했다.

영락없다. 지금은 이승만 시대이다.

 

정부는 이 가스통 폭력 시위를 그냥 즐기면서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앞장서서 선동하고 있다.

이승만이 말했다. "김구 그 사람 빨갱이 아니던가? "

"빨갱이는 포살해야 돼"

김구는 암살당했다. 전쟁 터지고 수 많은 보도연맹원들 학살당했다. 무법천지였다.

모든 군과 경찰은 알고 있다. 사람을 마구 죽여도 이승만은 자신에게 면죄부를 줄 것이라는 것을. 아니 이승만이 자기 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학살의 시대가 지났다고 말한다.

양천경찰서에서 고문이 시작되었다. 어디 양천구청 뿐이겠는가?

나는 학살이 60년전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역사의식의 무지에 놀란다. 지금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학살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가 사치다.

법은 법전에만 존재한다.

정신차리자.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중앙일보, 이거 신문맞나?

"참여연대, 국민 등에 칼 꽂아"

바른사회 시민회의의 입장이라고 인용했지만, 중앙일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타이틀로 뽑았다.

 

"중앙일보 서민의 등에 칼 꽂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술자리나 사석에서 말이다. 험악한 증오감이 찬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그러나 언론이 이렇게 거친 증오감을 그대로 표출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것은 말의 힘을 빈 폭력이고 수 많은 폭력을 부추기는 전단지와 다를 바 없다.

 

거친 증오감을 그대로 타이틀로 뽑은 신문, 그것은 더 이상 신문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아니 중앙일보는 이미 오래 전에 그것을 포기했는지 모른다.  

 

참여연대의 안보리 서한은 이 정부 보다 훨씬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고민해 온 경력이 있는 시민단체의 지극히 정당한 의사표현이고, 그 원인 제공은 이 정부에 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석연치 않은 설명을, 그것도 제대로 조사도 마치지 않고서 서둘러 발표하고, 그것이 국가의 입장이요 국민의 입장이니 무조건 복종하라는 논리가 이 밝은 세상에 어디 통할 수 있는가?

 

천안함 보고서는 이명박 정부의 보고서이지 국가의 보고서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태에 대해 책임을 가진 당사자이며 국가 안보를 소흘리하여 46명의 젊은 군인들을 저승으로 보낸 책임 주체의 하나이며, 그것 만으로도 국민에게 석고대죄해야 할 존재이다. 이북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다가, 이북이 내려오니 적과 내통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만 보도연맹원들을 참살한 이승만 정부의 적반하장도 이와 같았다.

 

그런데, 위험한 전쟁선동을 하던 중앙일보가 드디어 참여연대에 집단린치를 가하고 있다.

국민들 입장에서 참여연대 행동이 좀 과도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 보도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바로 그 옆 면의 수경스님 관련 보도다. 이것은 완전히 사실을 180%로 뒤집은  것이다. 중앙일보는 "환경, NGO 운동 했지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었다"라고 타이틀을 뽑았다. 이것만 보면 마치 수경스님이 그 동안의 시민단체 활동에 환멸을 느껴 행방을 감춘 것으로 되어있다.

 

수경스님의 활동 중단은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의 충격에 의한 것이고, 이 명박 정부에 대해 마지막으로 “아무리 그래도, 민심이 천심인데 국민들의 마음이 하늘의 뜻인데 무지막지하게 할 수 있겠느냐”는 고언을 남겼다. 그는 “이 대통령은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며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다. 대통령 밑의 사람들이 문제가 많은 것 같다”고도 했다.

 

수경스님이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수행자로서 본연의 모습을 가겠다는 것이지, 결코 자신이 환경운동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완전히 자신의 입맛대로 편집하여 하나의 소설을 썼다.

메이져 신문이 사실상 전단지인 나라? 이런나라에서 공론이 , 의사소통이 존재할 수 있을까?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다케우치 요시미

한국전쟁 6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한 올해는 우리가 전통, 식민지화, 전쟁, 근대, 산업화 문제를 총체적으로 성찰해야할 중요한 해 입니다.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하여 미국 혹은 서양 문명의 대리자로서 행세한 일본은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적 침략과 식민지화를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전후의 도쿄 재판은 일본의 침략의 야만성을 지적을 했으나 철저한 청산을 하지 않고 봉합을 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대한 단죄는 또다른 제국주의인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제국주의는 제국주의를 심판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침략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조선은 38선 획정에도, 도쿄 재판에도, 샌프란시스코 협약에도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식민지 굴욕은 연장되었습니다. 그 대신 서로간에 원수가 되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식민지 과거도 청산하지 않고, 전쟁의 책임도 묻지 않은 채 근대화의 길로 나갔습니다. 한국전쟁은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체제의 연장이라 볼 수 있고, 분단 하 근대화, 경제성장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미, 일, 한반도의 삼각 구도, 혹은 중국을 포함한 4각 구도의 시야에서 지난 100년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100년전과 마찬가지로 외세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즉 반성과 청산이 없는 상태에서 주체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경제력만으로는 국제무대의 주역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일본이 잘 보여주고 았습니다. 전후 60년 동안 일본의 불구정치와 한국의 불구정치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노령화의 그늘은 일본에 이어 한국에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을 보다 철저하게 반성하는 노력이 없습니다. 아직도 정신 못차린 상태입니다.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교사징계건으로 본 한국사회

교육부가 민노당에 후원금을 낸 교사들을 빨리 징계하려고 안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엄한 처벌은 밥줄을 끊는 것, 즉 해고다. 교육부는 민노당 당원으로 활동한 것도 아니고 단지 후원금을 냈다는 이유로 관련 교사들을 가장 엄한 처벌인 파편, 해임 조치하려 한다. 그들은 교직에서 영원히 추방되어야할 가장 해로운 존재라는 말이다. 교육부는 교사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자격 상실인 성범죄, 각종의 파렴치한 범죄, 출세를 위한 금전 상납 등에 연루된 교사, 교장들에게도 이러한 처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즉 민노당 후원을 한 교사는 교사로서 존재할 자격이 없는 대역죄인이라는 것이 교육부의 입장이다.

 

그들은 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교사들이 특정 정당에 편향된 정치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교장 교감 등 간부들의 노골적인 한나라당 지지와 보수 교육감 밀어주자는 운동은 증거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정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자들의 정치는 용서할 수 없지만 윗사람들의 정치는 그냥 로비일 따름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감히 아랫 것들이 정치를 하다니 !".  여기서 우리는 정치는 선비의 전유물이며 백성을 무조건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하는 정신적 노예로 취급했던 유교적 봉건의 논리와 조우하게 된다. 여기서 법은 필요없다. 공정성과 합리성도 필요없다. 힘없는 자들이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악이라는 논리 외에는 무엇으로도 이번 교육부의 처사를 설명할 수 없다.

 

한 사회의 진면목은 그 사회가 무엇을 범죄로 규정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사회의 지배논리는 바로 "부패, 부정, 파렴치, 범법보다 권력에 반대하는 것이 훨씬 더 심각한 범죄라는 논리로 요약된다. 아무리 반사회적이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반공주의만 견지해 준다면.... 상관에게 철저하게 복종하고 그 시책에 묵묵히 따라면 준다면.... ", 그들의 잘못은 모두 용서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바로 이 논리가 오늘의 무자비한 교사 징계 조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법은 상식과 도덕으로 정당화되지 않으면 폭력이다.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징계는 강자의 권력유지 논리 외의 아무엇도 아니다. 우리모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자. 누가 이번의 교사 징계를 주도하는지, 어디서 그 정책이 내려오는지를. 그리고 법의 이름으로 이러한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조치를 칭찬하고 정당화하는지를...

 

 

 

 

 

 

 

 

2010년 6월 8일 화요일

노무현 실패의 교훈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과 친노세력이 축배를 드는 모양이지만, 기쁨보다 불안감이 큰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도 그들이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를 명확하게 정리한 것 같지 않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퇴임후에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구상하는 사상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사실 그에게 사상이 있었다면 재임중에 실천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시점에 사상과 정책으로 무장한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었어야 했으며, 만약 없었다면 재임중에 그러한 역량을 키우려는 조그만 노력이라고 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정치현실에서 그것을 기대하기는 좀 무리였고 노무현도 그러한 노력을 한 흔적이 없다.  정치가가 동시에 정책적 일관성과 철학을 겸비한 사상가일 수 없는 한국정치의 현실 속에서 그 역시 별다른 존재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러한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민주화와 개혁을 표방하는 세력은 관료들에게 포위되어 결국 관료들에게 굴복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 엄중한 현실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성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권력만 잡으면 되는가?  

 

노무현 정부가 이루어낸 많은 업적이 있지만, 경제정책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받아들였던 점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자신이 좌파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이었다고 보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무현 시절 강남 집값 잡는다고 공급주의 정책노선에 따라 판교개발을 하겠다고 했을 때 느꼈던 허탈감, 그것은 경제관료들에게 포위되었던 노무현 정부의 적나라한 모습 그 자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최고의 경제, 복지 전문가라고 자임한 나머지 이들 관료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을 동원하려 하지 않았다.결국 진보진영에서는 그들과 대적할만한 전문가나 세력이 없었고, 결국 경제정책은 경제관료들이 원하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노무현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마치 1945년 준비되지 않은 해방을 맞았던 독립운동가들처럼, 준비되지 않은 채 이승만 하야를 맞았던 당시의 데모대 처럼, 언제나 이른바 민주세력은 준비되지 않은 채 굴러들어온 권력을 맞이하였다. 이 준비되지 않은 정치세력 앞에 나타난 가장 준비된 세력은 관료들이다. 나라가 망해도 자신의 이익만은 끝까지 지치는 가장 강력한 연속성을 갖고 있는 무서운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세상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그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들은 한편에서는 국가개입주의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시장만능주의로 무장되어 있고, 특히 한국 경제관료의 90&는 미국의 경제교과서를 신봉하는 시장주의자들이다. 관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개발주의와 국가간섭주의를 옹호하고, 그리고 노동자나 약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기업의 편에 서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존재들이다.

 

막스베버는 강력한 정당만이 관료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처럼 일관된 이념과 사상으로 무장한 정치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누구도 관료들을 통제할 힘을 갖지 못한다. 정권은 유한하나 관료들의 권력은 무한하고, 전문성과 법지식으로 무장된 관료들 앞에 정치지도자의 오기와 배짱은 통하지 않는다. 노무현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불신했고 말만 앞세운 운동권 세력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못한다고 단정하고서 자신이 모두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큰 착오였다.

 

그런데 현재의 민주당에서 노무현에 필적할만한 인물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면면을 보면 그 정도의 야성과 전투성, 승부근성과 건강한 양심을 갖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준비된 정책팀이 없었던 그 정도의 야성과 양심과 기개와 전투력으로 노무현은 버틸 수 있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정도의 기개도 관료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었는데, 현재의 민주당이 무슨 수로 지자체의 관료들을 압도할 수 있으며, 또 그들을 개혁의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민주당은 지방토호들과 그들과 유착한 관료들의 성장주의 개발주의 논리를 제압할 수 있을까? 지역을 살려야 한다는 경쟁주의에 버틸 수 있을까?

 

노무현 정부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한다.

민주당이 올리는 승리의 축배가 몹시 불안하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지금부터가 문제다

힘든 과정을 거쳐 도지사, 시장, 시의원에 당선된 사람들은 지금 당선 축하 전화를 받으면서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만 선거라는 것은 사람을 완전히 빨가벗기는 일이고, 진흙탕을 굴러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고통과 어려움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고통의 정도만큼 당선의 기쁨도 클 것이다. 그런데 비판하는 자리에서 직접 칼자루를 쥐는 자리로 올라서는 순간 위기는 시작된다. 4년 동안 지역권력 잡은 기쁨 맛보고서 나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모르되, 수 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지지, 땀과 헌신의 결과로 그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해야할 임무와 과제가 대단히 엄중한 것은 물론이다.

 

특히 이번 지자체장이나 의회는 민주당 및 야당 연합이 주도를 해서 운영할 수 있는 곳이 다수이므로 그 공과 과는 곧바로 다음 대선과 총선으로 연결되고, 진보세력 일반에 대한 평가와 직결되어 있다. 즉 당선자는 개인이 아닌 셈이다. 이번선거를 친노의 부활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미 엄중한 평가와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앚어서는 안된다. 노무현 정부의 좌절과 실패를 거울삼아 향후의 지방정부 운영에 만반의 준비를 해서 진용을 갖춘다음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이제 진보세력은 또다시 심판대에 서서 재기불능상태에 빠질 수 있다.

 

진보세력은 행정 경험이 일천하고 지역정치에서 소수자이다. 공무원을 다루는 훈련도 되어 있지 않고, 조그만 일로 서로간에 분열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지역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린 토착 세력, 건설족들, 각종 관변단체들과의 일전이 기다리고 있다. 새롭게 자리를 차지한 시장이나 의원들이 이들의 먹이사슬을 함부로 건드리면, 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고, 그것은 지역정치를 마비시키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결국 수십년 보수의 아성으로 자리잡아온 지역정치를 물갈이하는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는데 취약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고서 이들과 대결해야 하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다.  

  

 공무원들과의 힘든 싸움이 지금부터 시작이다. 관료들을 잡지 못하면 관료들에 포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노무현 정부도 따지고 보면 관료들에게 포위되어 결국 그들에게 잡아먹혔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로 무장된 경제관료들의 힘은 막강하다. 각종 규정과 법의 해석, 예산집행의 실권은  모두 관료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다. 이들을 달래고 설득하여 개혁 자치의 우군으로 만드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다. 전문가의 자문, 시민단체의 지원으로 결코 해결할 수 있는 정치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지난 2년 아니 멀리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보수세력 독점의 지역정치에 신물난 사람들은 이제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겠지 하면서 크게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의 요구를 민원처리 차원에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주체화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지역정치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획하기 위햇거는 수동적 주민을 참여적 주민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지역사회의 수동적 소비자, 단순한 이해관계자를 참여적 주체 로 변화시키는 일은 중앙정치의 변혁 이상으로 중요하고 역사적인 일이다.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 그런데 준비상태는 턱없이 부족하다. 어떡할 것인가?

위기가 또 시작되었다. 축하주에 취했다가도 술이 확 깰 일이 아닌가?

 

 

 

2010년 6월 2일 수요일

지방선거의 교훈

 

숨가쁘게 진행되어온 제5회 지방선거가 개표가 거의 완료되었다. 결과는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연합 후보의 압승이었다. 서울과 경기에서는 아쉽게 패배했지만, 다 죽어가던 친노세력이 부활했고, 영남에서 거의 처음으로 친노계열 무소속 후보가 도지사에 당선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를 지탱해오던 지역주의에 금이가기 시작했으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막가피식의 독주에 확실히 제공이 걸렸다. 서울, 경기에서의 진보적인 교육감 당선은 현재의 경쟁주의 교육정책에 심각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앙선관위의 친정부적 규제와 천안함 사건 결과 발표의 무리한 일정 등 이명박 정부의 노골적인 선거개입에도 불구하고 한명숙, 유시민 후보가 거의 당선권에 근접하고 야당이 이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을 생각하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에서 완패했다고 볼 수 있다.

 

시민들의 심판은 엄중하다. 오만한 권력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번 선거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문제 등에 대해 각종 시위, 비판, 여론 형성, 심지어는 몇 몇의 분신을 통한 항거에도 꿈쩍도 않았던 이 정부와 주류 언론의 오만은 바로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언론과 검찰의 충성경쟁, 행정부의 무리한 집행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지식인들의 성명이나 비판적인 언론을 통해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동문서답으로 일관하며 반대세력에게 칼을 들이대던 이 정부의 오만은 바로 “할 말 있으면 선거에서 말해”라는 것이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줄 수 있는 최선의 제도인가에 대한 회의론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유권자들에 의해 권력의 일방독주가 견제 감시될 수 있으며, 또 교체 퇴출될 수도 있다는 점은 선거제도의 가장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없는 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모든 사회세력이나 정당은 이 제도의 논리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정당이나 사회세력은 선거라는 계기에 인물과 정책을 통해서 자신의 실적과 비전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고, 대중의 검증을 거쳐 권력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선거는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갖기 때문에 사실 서울시장 선거가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서울시장 후보 선정과정에서 많은 약점과 내부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서올, 경기 두 거점에서 패해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에 치명타를 날리면서 차기의 정권교체를 가시화하는 데 까지 이르지 못했다. 다른 지역이나 기초 자치단체의 야당 연합 후보들의 승리도 대부분은 대중의 견제심리에 기초한 것이지 대안적 비전을 보여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친노세력의 약진 역시 상당부분 노무현 향수에 기댄 것이며, 이들이 차후에 한국을 이끌어갈 세력이라고 판단한 결과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이번에 기초의회, 자치단체에 진출한 민주, 민노, 진보 후보들에게 엄중한 과제가 주어졌다. 이들은 이 정부와 한나라당과는 다른 행정과 의회활동의 전형을 보여주어야 한다. 토착비리로 얼룩진 지역정치를 서민, 약자 위주의 행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확실하게 구축해야 하고, 이들 통해 지역주민의 세력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중앙정부와의 마찰, 노골적인 비협조가 예상되지만 민주, 진보적인 시도지사, 교육감, 의원은 이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선거의 의제로 떠오른 것처럼 조세 및 복지 의제가 정책적 의제로 부상할 수 있도록 지자체의 행정적 실천을 통해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선거에서는 더 이상 인물중심, 지역주의 논리가 설 자리를 갖게 못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진보세력은 시험대에 놓여 있다. 이번 선거는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이념과 논리가 아니라 정책과 실천으로 응답해야 한다.

2010년 6월 1일 화요일

민주당과 진보신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선거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두가 크게 관심을 갖고 있고, 한나라, 민주 양 당은 이 선거에서 사활을 걸고 있다. 한나라당이 압승을 하면 지난 2년 동안 MB정권이 해온 4대강 추진 사업등 온갖 불법, 편법, 탄압 정책을 더욱 지속시킬 것이고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이 수도권 1곳을 포함한 2,3곳의 광역단체장선거에서 승리하고 경남에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다면 MB정권의 오만함과 막가파식의 반대세력 탄압 기조, 친자본 반서민 정책의 기조는 다소 위축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주류 세력이 차기 대권과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쥐는가의 문제도 이번 선거에 상당부분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당 주류 세력들은 이 선거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데 야당인 민주당의 행동은 처음부터 좀 이상했다.  서울시장 후보 선정과정에서 후보경선을 거치지 않고 한명숙 후보를 선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나라당도 과거 야당이 했던 방식을 형식적으로나 차용하여 후보경선을 했는데 민주당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제대로 해명도 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의 태풍의 눈은 서울시장이다. 그것은 이번 선거가 차기의 대선, 총선의 전초전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서울시장을 포기하는 행동을 했다. 호남을 비롯한 그 외 지역에서의 후보 선정과정에서의 불미스러운 일들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민주당이 과연 차기 집권을 꿈꾸는 정당인지, 그런 자격을 갖춘 정당인지가 의심스럽다. 관심을 덜 가져서 그런지 모르나, 그들의 구호는 MB 심판이라는 매우 단순한 구호 밖에 없다. 국민입장에서 보면 MB를 왜 심판해야하는지 어리둥절할 수 있다.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후보가 경기도지사 후보에 나서지 않았다면 이 선거는 참으로 싱거운 선거가 될 번 했다. 권력잡을 욕심도 의지도 비전도 투쟁력도 없는 야당을 왜 지지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중들은 미래를 보고 투표를 한다. 그런데 미래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 세력이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면 참으로 난감하다. 이 정부를 견제하고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고 판단하는 국민들은 아무리 이 정권이 미워도 선거판에서 등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몇 개의 구청장이나 시장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당이 대안세력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 후 또한번의 국민들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퇴출될 세력이 만연야당으로 남아 몇사람의 국회의원 자리만 보장해 준다면 한국정치는 일본과 같이 될 것이다.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의 사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사퇴할 것이면 나오지 말았어야 했고, 나왔으면 약속대로 끝까지 갔어야 했다. 그래서 심상정의 사퇴도 진보정치의 뿌리내리기, 진보신당의 진로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많은 당원이나 지지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그녀가 사퇴를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퇴하지 않으면 진보신당은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선거정치에서 계속 얼굴을 내밀기 어렵게 될 것이다. 선거에 못나서는 정당은 정당이 아니다. 진보신당의 이름으로 기초의원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시장이나 구청장급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식 소선구구제, 대통령제 하에서 선거정치에 개입해야 하는 진보정당은 이러한 딜레마를 갖고 있다. 개인의 약속 이행 문제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어느정도는 예상되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 문제로 진보신당 내에서 죽기살기의 비방과 투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보신당이나 민주당, 국참당 모두가 젊은이들 혹은 선거무관심층의 가슴에 불을 댕기면서 이들을 선거에 끌어내는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내일 결과를 두고 봐야겟지만 이번 선거에서 과연 MB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정치적 싹을 찾을 수 있을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어떻게 되든 선거 이후 야당 세력 내부의 철저한 세력재편이 불가피할 것이다.  새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MB 정권은 남은 2년동안 나라를 완전히 망가뜨릴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다. 잘못된 지도자들이 나라를 망가뜨리면 그 피해는 100년 동안 지속된다. MB 정권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 대안세력 만들기는 쉽지가 않다. 그것은 새로운 보수가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적극 투표하여 변화의 씨앗을 만들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