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0일, <한겨레21> 제865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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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 무력화 두려운 폭력 국가의 무자비함 [2011.06.20 제86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용산 참사에서 민간인 학살 부른 한국전쟁기 토벌작전을 보다 ①
약점 많은 정부의 위기의식이 낳은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
2009년 1월20일 발생한 서울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부의 대서민 정책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경찰·검찰·구청·법원·청와대 등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와 일반 국민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현미경이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 용산 참사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이 참사가 전혀 돌발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지배질서 작동 원리의 한 자락을 들춰낸 사건임을 보여주려고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토벌작전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려 한다. 그것은 한국에서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용산 참사와 겹치는 빨치산 소탕작전
경찰은 왜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그런 작전을 벌였을까? 경찰은 왜 화염병, 대형 새총 등 위험한 무기가 있던 망루에 진입을 시도했을까? 경찰특공대를 동원해서 즉각 진압해야 할 정도로 농성자들은 중요 범죄자이고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였는가? 그들은 대법원 최종 판결문에 나온 것처럼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심각한 침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나?
사건 직후 김수정 서울지방경찰청 차장은 “농성 장소가 한산한 곳이었다면 경찰도 굳이 위험한 작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약자라도 화염병, 시너, 염산, 삼지창 등 살인적인 무기를 갖고 시민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에 더 큰 참사 발생 이전에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농성 장소가 너무 위험한 곳이어서 조기 진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철거민들이 도심지 한복판에서 화염병과 벽돌 등을 무차별로 투척하는 등 도심 테러를 벌여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냥 두었으면 서울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란다. 진압 전날인 1월19일 낮 1시쯤 서울경찰청 차장, 기동본부장 등이 참석한 1차 대책회의에서 용산경찰서장이 특공대 투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특공대 투입을 결정해 김석기 서울청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즉, 경찰이 특공대라는 특수진압부대를 투입한 이유는 농성자들이 “인명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테러 행위를 했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2003년 이라크가 테러의 배후이고 대량파괴무기(WMD)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방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조지 부시의 이라크 침략 정당화 발언과 마찬가지로, 경찰은 이들이 사실상 테러 세력과 같은 공격성을 가졌고 그 위험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성자들을 단순 해산시키거나 체포하려 하기보다 강제 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용산 참사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경찰이 토끼를 몰듯이 농성자들을 몰아붙이고 망루를 해체하는 장면은 시위 진압이라기보다, 제주도 4·3 사건과 여순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기의 빨치산 소탕작전을 연상시켰다. 당시 군은 잔존 빨치산이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진압잔전 뒤, 죽은 사람들을 보니 상당수는 군인과 경찰의 폭력을 피해 솔가해 산으로 피신한 주민이거나 여성과 노약자였고, 그들이 가진 무기란 것은 방어를 위한 몽둥이와 죽창에 불과했다. 군은 큰 전과를 올렸다고 자축했지만, 그 전과는 사실상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당시에는 산으로 올라갔으니 제거해도 좋은 적이 된 것이고, 지금은 망루에 올라가서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화염병과 돌을 던졌으니 테러 세력이라는 것이다. 경찰특공대는 망루의 사람들을 체포한다고 진입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위험한 상황에서 퇴로를 차단해 농성자 5명과 진압 경관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법원의 최종 결론은 적법한 공권력 행사였고, 사망자들은 결국 자살한 셈이 되었다.
이승만 시기 인식과 동일한 MB 정부
과연 이들이 진압 이전까지 국민에게 위해를 가했는가? 경찰은 이들이 돌과 골프공을 투척해 차량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피해가 있었고, 화염병을 도로에 투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찰 보고서에도 이들의 투척으로 시민이나 경찰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화염병도 경찰이 진압작전을 개시한 이후 던진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시민의 생명 위협’ ‘서울 불바다’ 위험은 진압을 위한 명분 들이대기에 가깝다. 시민의 동조를 얻어야 할 세입자들이 시민을 공격 표적으로 삼을 이유는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는 철거 하루 늦는 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 그래서 철거 투쟁은 전쟁이야”라는 세입자들의 진술처럼, 용역업체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들과 시공사 쪽의 계약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용산 재개발 현장 철거의 주역은 용역업체라기보다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휘·감독하고 그들에게 돈을 제공하는 대형 건설사들이었다. 만약 철거가 지연된다면 용역업체들은 조합 쪽에 지체 보상금을 납부해야 하고 시공업체는 은행이자를 내야 하는 등 재개발에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수익에 차질을 빚을 위험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경찰청과 경찰특공대는 다급하던 시공업체와 용역업체를 대행한 주체였나? 정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실제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설 용역업체를 공권력 행사에 동원하고, 그 이전부터 용역의 폭력을 묵인한 채 시공업체가 절실히 원하는 일을 수행한 경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그 답이 앞의 경찰청 차장의 발언 속에 들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도심 대로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들이 실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다. 초점은 이들의 무장을 ‘인내를 갖고’ 두고 볼 수 없기에 긴급히 해산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항의 농성하는 것이 모든 행인에게 보였고, 그것은 정부의 법질서 확립이 실패했다는 점이 모든 사람에게 가시화됨을 의미한다. 결국 이들이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무장 농성 자체가 행인에게 부각돼 권력이 무력화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객관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주관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에 ‘테러’ 세력으로 간주돼 위협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산으로 피란 간, 거의 무장하지 않은 주민들조차 국가를 위협하는 빨치산으로 간주돼 조속히 진압해야 할 대상이 되었던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시기의 이승만 정권의 인식과 동일하다.
대항세력 그냥 둘 수 없다는 토벌 논리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베냐민의 ‘폭력비판론’을 끌어올 수 있다. 베냐민은 저항 세력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기존 질서를 중지시키는 것, 예를 들어 노동자 파업도 지배세력에는 체제 위협으로 간주된다고 보았다. 국가, 즉 공권력은 ‘개인’ 수준에 놓인 폭력도 국가와 법질서를 전복하는 위협 세력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개인 수준의 폭력 수단도 국가, 즉 법이 관철되지 않는 영역이며 설사 그것이 방어를 위한 폭력이더라도 대항 폭력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말이다. 이 경우 국민에 대해 약점이 많은 국가, 즉 대항 세력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정권일수록 저항 세력의 무장을 더 용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대항 폭력을 내버려둘 경우 국가의 폭력 독점, 즉 법의 위신이 허물어진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제주 4·3 봉기를 그렇게 철저히 진압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부가 전라도·경상도 등지에서 인민군 부역자나 빨치산을 무자비하게 토벌한 이유도 이런 논리였다. 당시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생 정부에는 큰 위협이고 도전이었다. 저항 세력과 진압할 수 없는 세력의 제거는 이승만 정권의 생명줄을 잡고 있던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자신의 통치 가능성을 보여줘야 했다. 이때 무장하지 않은 빨치산이 수십 명이 있든 수백 명이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없애지 않고서는 정권이 설 자리가 없다고 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한라산 빨치산 500명을 소탕하려고 무려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무리한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망루에 올라가 강제 진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화염병을 준비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생존을 위한 버티기를 국가와 국민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테러 세력으로 간주한 사고방식이었다. 폭력기구로 무장한 채 도심에서 버티는 농성자들은 이명박 정부에는 신속히 제거해야 할 ‘적’이었던 셈이다. 용산 참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와 마찬가지로 토벌의 논리,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후방 영역에 ‘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 혹은 대항 폭력을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다급함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산 농성자들은 비록 정부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 자체가 위협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등 과거에도 철거민들은 망루를 짓고 화염병을 제조하는 등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당시 서울 상도동과 대전 용두동에서도 경찰·용역깡패와 철거민 간 유혈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경찰이 이렇게 토끼몰이식으로 철거민을 진압하지 않았고, 진통 끝에 합의를 도출했다. 당시 정부는 대항 폭력을 보는 관용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었고 그 정도의 위협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의 무장은 그 자체로는 법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진압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형편없이 실추된 공권력의 정당성
그렇게 본다면 용산의 살인적 진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명박 정부의 작품이었다. 중요한 재개발 계획이 세입자 몇 명의 저항으로 지연되거나 좌절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 그들이 감히 공권력에 도전한다는 생각, 그것을 그냥 두면 촛불시위와 노동자 파업 등이 나타나 공권력을 무력화할 수도 있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울 불바다’ 발언처럼 위협을 과장해 결국 살인적 진압을 감행한 것이다. 신생 이승만 정권의 ‘주관적 두려움’이 무리한 빨치산 토벌작전을 감행한 배경이었다면, 촛불시위에 화들짝 놀란 이명박 정부는 힘으로 잠재적 적을 조기에 제압하려고 용역업체와 막대한 개발이익을 얻게 될 시공업체의 대행자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기의 무수한 살인적 토벌작전이 그랬듯이 공권력의 위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정당성과 위신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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