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조작 사건과 고문 피해자들이 만든 재단인 '진실의 힘'은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이 겪는 고통이 군사정권 시절의 국가 폭력과 간첩 낙인, 그로 인한 사회적 고립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고문과 사회적 고문을 같은 차원에서 보았다.
30여년 전 독재정권 시절 ‘조작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들이 자신의 형사배상금을 모은 1000만원을 쌍용차 해고노동자 아이들을 위해 내놨다. 억울한 옥살이로 5년을 빼앗긴 김양기(61)씨는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사냥감 몰이’ 당하듯 쫓기며 경찰에게 맞는 걸 보면서 아이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며 “적은 돈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6년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하다 간첩으로 조작돼 고문을 받았다. 고문으로 삶이 파괴된 이들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사회적 고문’이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계급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따듯한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내가 아는한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세상에서 오직 자신들만이 피해자라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폭력이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정치적 고문과 사회적 고문을 동일한 차원에서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을 당해본 사람만이 유사한 고통을 겪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행동이었다.
지난 십 수년 동안 나는 노동폭력의 뿌리는 국가폭력에 있고, 양자는 동일한 구조 하에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 주장이 드디어 피해자들의 연대적 실천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사회적 인식으로 확대되어야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이 만날 수 있고, 운동이 보다 든든한 뿌리를 갖게 된다.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2011년 6월 25일 토요일
스페인 청년들의 분노
스페인 청년들의 '분노'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스페인 수도 Puerta del Sol 광장을 채운 청년들의 시위는 이제 전국적인 대중시위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이달 29, 30일에는 이 광장에는 전국에서 걸어온 청년들이 채울 예정이다. '분노한 대중' 대열은 바르셀로나에서 652 킬로를 걸어서 29개 도시를 거쳐서 시위를 벌인다음 마드리드의 광장에 합류할 예정이고. 발렌시아나 카딕스 등의 도시에서도 각각 출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시위를 조직한 다비드 ( 성은 밝히지 않음)가 설명하였다.
그들은 이 행진이 변화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거주의 권리, 일할 권리, 문화 건강의 권리, 교육받을 권리, 정치 참여, 필요한 상품을 소비할 권리,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를 주장한다.
스페인의 청년실업은 실제로는 50%에 육박하고 있으며 유럽국가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를 가진 사람도 대부분은 임시식 일용직에 종사하고 있다. 물론 다른 유럽국가들도 비슷한 상태이기는 하나 스페인은 유독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도 높고 실업률도 높다. 부패한 정부, 기업의 탐욕 등에 분노가 청년들의 시위의 저변에 깔려 있다. 시위대는 스페인의 분노를 유럽의 분노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한다. '전쟁없는 세계'라는 단체의 조직가인 Rafael de la Rubia 는 우리는 "먼저 길을 장악하고, 장소를 장악하고, 그 다음에 통로를 지킬 것이다". 그 다음에는 유럽을 장악할 것이다 ( "Après, nous prendrons l'Europe")라고 말한다.
한국 스페인 청년들의 처지는 스페인보다 못하지 않다. 아니 그 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그리스에 이어 스페인의 시위가 유럽을 흔들고 있다.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유럽의 한국학 (러시아 4신)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유럽 한국학 대회에 참석해서 논문 발표를 했다. 이미 작년도에 캐나다 요크대학의 Janice Kim 이 남북한 50년대를 주제로 하는 특별 세션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미주의 한국학 대회에는 내가 진실위원회 재직 시 2009년 진실위 활동을 홍보하기 위해 특별히 참가한 적이 있었으나 유럽 한국학 행사는 처음이었다. 듣기로는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수십명 정도 참가했으나 이제 수백명 단위로 커졌다고 한다. 유럽에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학 관련 학자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 외국인들이 영어로 16세기 한국 성리학과 조선시대 전통문학에 대해 논하는 장면은 기이한 느낌까지 가졌다. 국제적으로 한국학의 저변이 많이 넓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참석자의 80 퍼센트 정도는 인문학자였고, 사회과학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해외 한국학이 기본적으로는 어학, 문학, 역사 중심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행사 참가 신청자 중 과반수는 탈락했다고 한다. 특히 외국이나 한국에서 이 행사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 만큼 많았다고 하는데 어쨋든 제한된 수만 참가한 모양이다. 학교나 기관에서 경비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물가가 바싸기로 유명한 러시아에서 열리는 행사에 자비로 상당 부분을 충당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청자가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 측에서는국제 학술회의 참가가 연구업적으로 중시되니까 그런 것 같고, 유럽이나 미주의 경우는 박사 학위 마친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 선을 ( ?) 보여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쨋든 참가 신청자가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만큼 한국학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석하면서 국내의 한국학과 외국의 한국학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한국학의 내용은 무엇인지, 보편 학문의 차원에서 한국학이 어떤 입지를 갖고 있는지 하는 의문을 계속 갖게 되었다. 국내의 한국학이 해외의 한국학에 비해 훨씬 심도있고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국내에 한국학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이 행사의 주요 후원자인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한국학의 센타 역할을 하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즉 외국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인 문학과 역사에서 독점의 지위를 갖는 한국학이 과연 국제 무대에서 일본학, 중국학과 맞설 수 있는 내공이 있는지, 그리고 도전적인 신진학자를 육성해 내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날의 저녁 식사를 국제교류재단의 이사장 ( 김병국) 이 내면서 장황한 인사를 했는데, 거의 알맹이가 없었다. 과연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은 교류의 내용인 한국학의 수준과 현재적 문제의식에 대해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즉 국내 역사학이나 문학이 외국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언어상의 장벽이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예를들어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중요저작으로 인정받는 도이힐러 교수의 [조선 초기 유교의 변환]에 대해서도 국내 사학계는 극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외국인이 한국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라는 알량한 자존심이 ( 폐쇄성) 숨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가족연구의 대가인 최재석 교수가 비판한 바 있는데, 내용은 주로 자기 연구 업적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국학의 기둥인 문학과 역사 철학이 여전히 독점의 특혜 혹에서 안주하면서 진정으로 보편주의적인 시야를 열어가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한국에서 활동하는 역사학자나 문학자들도 이번 생사에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국제 한국학 관련 학계에서 지적인 지도력을 갖고 있었는지느 의심스럽다.
이번 행사에서 특히 충적적인 것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의 한국학의 신세였다. 월 300달러의 뤌급받에 못받으면서 한국 고전 문헌 해제를 하는 노학자에게 월 1000불을 받는 명품으로 치장한 여자 졸업생이 찾아와서 이 고지식하고 답답한 선생님들의 처지를 비웃는 것이 오늘의 러시아의 대학 현실이라 할 수 있다. 구 소련의 인문 교육의 전통이 나름대로 단단해서 그런지, 이들 중에는 한국어와 한문 해독은 물론, 영어, 불어 등 외국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말 그대로 뚜벅뚜벅 공부만 해 온 고지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는 이제 졸업을 앞둔 모든 러시아 한국학 관련 학생들을 유혹하고 있다. 외모가 출중한 여학생들은 곧바로 결혼하고, 남자들도 한국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안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이 돈 안되고 빛이 안나는 그것도 아주 주변학문인 한국학 공부하는 젊은이는 이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구한말이후 식민지 시대에 걸친 한국관련 자료의 상당수가 러시아 도서관에 무더기로 쌓여있다. 그런데 공부할 사람이 없다.
하여튼 한국의 경제발전의 놀라운 성과에 비해 유럽의 한국학 수준은 아직 걸음마 단계여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 돈이 많은 일본, 나라가 큰 중국과 비교하면 모든 점에서 초라하기만 하다. 국내 각 연구재단의 기여도 점점 높아지고 있으나, 국내 한국학이 그것을 뒷바침할 보편적 내용과 실력을 쌓아가고 있는지는 큰 의문이기 때문이다.
2011년 6월 19일 일요일
공권력 무력화 두려운 폭력 국가의 무자비함
2011년 6월 20일, <한겨레21> 제865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835.html
----
공권력 무력화 두려운 폭력 국가의 무자비함 [2011.06.20 제86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용산 참사에서 민간인 학살 부른 한국전쟁기 토벌작전을 보다 ①
약점 많은 정부의 위기의식이 낳은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
2009년 1월20일 발생한 서울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부의 대서민 정책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경찰·검찰·구청·법원·청와대 등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와 일반 국민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현미경이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 용산 참사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이 참사가 전혀 돌발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지배질서 작동 원리의 한 자락을 들춰낸 사건임을 보여주려고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토벌작전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려 한다. 그것은 한국에서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용산 참사와 겹치는 빨치산 소탕작전
경찰은 왜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그런 작전을 벌였을까? 경찰은 왜 화염병, 대형 새총 등 위험한 무기가 있던 망루에 진입을 시도했을까? 경찰특공대를 동원해서 즉각 진압해야 할 정도로 농성자들은 중요 범죄자이고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였는가? 그들은 대법원 최종 판결문에 나온 것처럼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심각한 침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나?
사건 직후 김수정 서울지방경찰청 차장은 “농성 장소가 한산한 곳이었다면 경찰도 굳이 위험한 작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약자라도 화염병, 시너, 염산, 삼지창 등 살인적인 무기를 갖고 시민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에 더 큰 참사 발생 이전에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농성 장소가 너무 위험한 곳이어서 조기 진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철거민들이 도심지 한복판에서 화염병과 벽돌 등을 무차별로 투척하는 등 도심 테러를 벌여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냥 두었으면 서울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란다. 진압 전날인 1월19일 낮 1시쯤 서울경찰청 차장, 기동본부장 등이 참석한 1차 대책회의에서 용산경찰서장이 특공대 투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특공대 투입을 결정해 김석기 서울청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즉, 경찰이 특공대라는 특수진압부대를 투입한 이유는 농성자들이 “인명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테러 행위를 했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2003년 이라크가 테러의 배후이고 대량파괴무기(WMD)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방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조지 부시의 이라크 침략 정당화 발언과 마찬가지로, 경찰은 이들이 사실상 테러 세력과 같은 공격성을 가졌고 그 위험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성자들을 단순 해산시키거나 체포하려 하기보다 강제 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용산 참사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경찰이 토끼를 몰듯이 농성자들을 몰아붙이고 망루를 해체하는 장면은 시위 진압이라기보다, 제주도 4·3 사건과 여순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기의 빨치산 소탕작전을 연상시켰다. 당시 군은 잔존 빨치산이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진압잔전 뒤, 죽은 사람들을 보니 상당수는 군인과 경찰의 폭력을 피해 솔가해 산으로 피신한 주민이거나 여성과 노약자였고, 그들이 가진 무기란 것은 방어를 위한 몽둥이와 죽창에 불과했다. 군은 큰 전과를 올렸다고 자축했지만, 그 전과는 사실상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당시에는 산으로 올라갔으니 제거해도 좋은 적이 된 것이고, 지금은 망루에 올라가서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화염병과 돌을 던졌으니 테러 세력이라는 것이다. 경찰특공대는 망루의 사람들을 체포한다고 진입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위험한 상황에서 퇴로를 차단해 농성자 5명과 진압 경관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법원의 최종 결론은 적법한 공권력 행사였고, 사망자들은 결국 자살한 셈이 되었다.
이승만 시기 인식과 동일한 MB 정부
과연 이들이 진압 이전까지 국민에게 위해를 가했는가? 경찰은 이들이 돌과 골프공을 투척해 차량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피해가 있었고, 화염병을 도로에 투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찰 보고서에도 이들의 투척으로 시민이나 경찰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화염병도 경찰이 진압작전을 개시한 이후 던진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시민의 생명 위협’ ‘서울 불바다’ 위험은 진압을 위한 명분 들이대기에 가깝다. 시민의 동조를 얻어야 할 세입자들이 시민을 공격 표적으로 삼을 이유는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는 철거 하루 늦는 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 그래서 철거 투쟁은 전쟁이야”라는 세입자들의 진술처럼, 용역업체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들과 시공사 쪽의 계약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용산 재개발 현장 철거의 주역은 용역업체라기보다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휘·감독하고 그들에게 돈을 제공하는 대형 건설사들이었다. 만약 철거가 지연된다면 용역업체들은 조합 쪽에 지체 보상금을 납부해야 하고 시공업체는 은행이자를 내야 하는 등 재개발에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수익에 차질을 빚을 위험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경찰청과 경찰특공대는 다급하던 시공업체와 용역업체를 대행한 주체였나? 정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실제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설 용역업체를 공권력 행사에 동원하고, 그 이전부터 용역의 폭력을 묵인한 채 시공업체가 절실히 원하는 일을 수행한 경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그 답이 앞의 경찰청 차장의 발언 속에 들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도심 대로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들이 실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다. 초점은 이들의 무장을 ‘인내를 갖고’ 두고 볼 수 없기에 긴급히 해산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항의 농성하는 것이 모든 행인에게 보였고, 그것은 정부의 법질서 확립이 실패했다는 점이 모든 사람에게 가시화됨을 의미한다. 결국 이들이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무장 농성 자체가 행인에게 부각돼 권력이 무력화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객관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주관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에 ‘테러’ 세력으로 간주돼 위협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산으로 피란 간, 거의 무장하지 않은 주민들조차 국가를 위협하는 빨치산으로 간주돼 조속히 진압해야 할 대상이 되었던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시기의 이승만 정권의 인식과 동일하다.
대항세력 그냥 둘 수 없다는 토벌 논리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베냐민의 ‘폭력비판론’을 끌어올 수 있다. 베냐민은 저항 세력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기존 질서를 중지시키는 것, 예를 들어 노동자 파업도 지배세력에는 체제 위협으로 간주된다고 보았다. 국가, 즉 공권력은 ‘개인’ 수준에 놓인 폭력도 국가와 법질서를 전복하는 위협 세력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개인 수준의 폭력 수단도 국가, 즉 법이 관철되지 않는 영역이며 설사 그것이 방어를 위한 폭력이더라도 대항 폭력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말이다. 이 경우 국민에 대해 약점이 많은 국가, 즉 대항 세력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정권일수록 저항 세력의 무장을 더 용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대항 폭력을 내버려둘 경우 국가의 폭력 독점, 즉 법의 위신이 허물어진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제주 4·3 봉기를 그렇게 철저히 진압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부가 전라도·경상도 등지에서 인민군 부역자나 빨치산을 무자비하게 토벌한 이유도 이런 논리였다. 당시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생 정부에는 큰 위협이고 도전이었다. 저항 세력과 진압할 수 없는 세력의 제거는 이승만 정권의 생명줄을 잡고 있던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자신의 통치 가능성을 보여줘야 했다. 이때 무장하지 않은 빨치산이 수십 명이 있든 수백 명이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없애지 않고서는 정권이 설 자리가 없다고 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한라산 빨치산 500명을 소탕하려고 무려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무리한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망루에 올라가 강제 진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화염병을 준비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생존을 위한 버티기를 국가와 국민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테러 세력으로 간주한 사고방식이었다. 폭력기구로 무장한 채 도심에서 버티는 농성자들은 이명박 정부에는 신속히 제거해야 할 ‘적’이었던 셈이다. 용산 참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와 마찬가지로 토벌의 논리,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후방 영역에 ‘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 혹은 대항 폭력을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다급함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산 농성자들은 비록 정부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 자체가 위협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등 과거에도 철거민들은 망루를 짓고 화염병을 제조하는 등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당시 서울 상도동과 대전 용두동에서도 경찰·용역깡패와 철거민 간 유혈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경찰이 이렇게 토끼몰이식으로 철거민을 진압하지 않았고, 진통 끝에 합의를 도출했다. 당시 정부는 대항 폭력을 보는 관용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었고 그 정도의 위협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의 무장은 그 자체로는 법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진압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형편없이 실추된 공권력의 정당성
그렇게 본다면 용산의 살인적 진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명박 정부의 작품이었다. 중요한 재개발 계획이 세입자 몇 명의 저항으로 지연되거나 좌절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 그들이 감히 공권력에 도전한다는 생각, 그것을 그냥 두면 촛불시위와 노동자 파업 등이 나타나 공권력을 무력화할 수도 있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울 불바다’ 발언처럼 위협을 과장해 결국 살인적 진압을 감행한 것이다. 신생 이승만 정권의 ‘주관적 두려움’이 무리한 빨치산 토벌작전을 감행한 배경이었다면, 촛불시위에 화들짝 놀란 이명박 정부는 힘으로 잠재적 적을 조기에 제압하려고 용역업체와 막대한 개발이익을 얻게 될 시공업체의 대행자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기의 무수한 살인적 토벌작전이 그랬듯이 공권력의 위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정당성과 위신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835.html
----
공권력 무력화 두려운 폭력 국가의 무자비함 [2011.06.20 제86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용산 참사에서 민간인 학살 부른 한국전쟁기 토벌작전을 보다 ①
약점 많은 정부의 위기의식이 낳은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
2009년 1월20일 발생한 서울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부의 대서민 정책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경찰·검찰·구청·법원·청와대 등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와 일반 국민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현미경이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 용산 참사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이 참사가 전혀 돌발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지배질서 작동 원리의 한 자락을 들춰낸 사건임을 보여주려고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토벌작전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려 한다. 그것은 한국에서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용산 참사와 겹치는 빨치산 소탕작전
경찰은 왜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그런 작전을 벌였을까? 경찰은 왜 화염병, 대형 새총 등 위험한 무기가 있던 망루에 진입을 시도했을까? 경찰특공대를 동원해서 즉각 진압해야 할 정도로 농성자들은 중요 범죄자이고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였는가? 그들은 대법원 최종 판결문에 나온 것처럼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심각한 침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나?
사건 직후 김수정 서울지방경찰청 차장은 “농성 장소가 한산한 곳이었다면 경찰도 굳이 위험한 작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약자라도 화염병, 시너, 염산, 삼지창 등 살인적인 무기를 갖고 시민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에 더 큰 참사 발생 이전에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농성 장소가 너무 위험한 곳이어서 조기 진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철거민들이 도심지 한복판에서 화염병과 벽돌 등을 무차별로 투척하는 등 도심 테러를 벌여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냥 두었으면 서울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란다. 진압 전날인 1월19일 낮 1시쯤 서울경찰청 차장, 기동본부장 등이 참석한 1차 대책회의에서 용산경찰서장이 특공대 투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특공대 투입을 결정해 김석기 서울청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즉, 경찰이 특공대라는 특수진압부대를 투입한 이유는 농성자들이 “인명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테러 행위를 했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2003년 이라크가 테러의 배후이고 대량파괴무기(WMD)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방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조지 부시의 이라크 침략 정당화 발언과 마찬가지로, 경찰은 이들이 사실상 테러 세력과 같은 공격성을 가졌고 그 위험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성자들을 단순 해산시키거나 체포하려 하기보다 강제 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용산 참사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경찰이 토끼를 몰듯이 농성자들을 몰아붙이고 망루를 해체하는 장면은 시위 진압이라기보다, 제주도 4·3 사건과 여순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기의 빨치산 소탕작전을 연상시켰다. 당시 군은 잔존 빨치산이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진압잔전 뒤, 죽은 사람들을 보니 상당수는 군인과 경찰의 폭력을 피해 솔가해 산으로 피신한 주민이거나 여성과 노약자였고, 그들이 가진 무기란 것은 방어를 위한 몽둥이와 죽창에 불과했다. 군은 큰 전과를 올렸다고 자축했지만, 그 전과는 사실상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당시에는 산으로 올라갔으니 제거해도 좋은 적이 된 것이고, 지금은 망루에 올라가서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화염병과 돌을 던졌으니 테러 세력이라는 것이다. 경찰특공대는 망루의 사람들을 체포한다고 진입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위험한 상황에서 퇴로를 차단해 농성자 5명과 진압 경관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법원의 최종 결론은 적법한 공권력 행사였고, 사망자들은 결국 자살한 셈이 되었다.
이승만 시기 인식과 동일한 MB 정부
과연 이들이 진압 이전까지 국민에게 위해를 가했는가? 경찰은 이들이 돌과 골프공을 투척해 차량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피해가 있었고, 화염병을 도로에 투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찰 보고서에도 이들의 투척으로 시민이나 경찰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화염병도 경찰이 진압작전을 개시한 이후 던진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시민의 생명 위협’ ‘서울 불바다’ 위험은 진압을 위한 명분 들이대기에 가깝다. 시민의 동조를 얻어야 할 세입자들이 시민을 공격 표적으로 삼을 이유는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는 철거 하루 늦는 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 그래서 철거 투쟁은 전쟁이야”라는 세입자들의 진술처럼, 용역업체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들과 시공사 쪽의 계약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용산 재개발 현장 철거의 주역은 용역업체라기보다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휘·감독하고 그들에게 돈을 제공하는 대형 건설사들이었다. 만약 철거가 지연된다면 용역업체들은 조합 쪽에 지체 보상금을 납부해야 하고 시공업체는 은행이자를 내야 하는 등 재개발에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수익에 차질을 빚을 위험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경찰청과 경찰특공대는 다급하던 시공업체와 용역업체를 대행한 주체였나? 정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실제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설 용역업체를 공권력 행사에 동원하고, 그 이전부터 용역의 폭력을 묵인한 채 시공업체가 절실히 원하는 일을 수행한 경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그 답이 앞의 경찰청 차장의 발언 속에 들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도심 대로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들이 실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다. 초점은 이들의 무장을 ‘인내를 갖고’ 두고 볼 수 없기에 긴급히 해산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항의 농성하는 것이 모든 행인에게 보였고, 그것은 정부의 법질서 확립이 실패했다는 점이 모든 사람에게 가시화됨을 의미한다. 결국 이들이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무장 농성 자체가 행인에게 부각돼 권력이 무력화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객관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주관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에 ‘테러’ 세력으로 간주돼 위협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산으로 피란 간, 거의 무장하지 않은 주민들조차 국가를 위협하는 빨치산으로 간주돼 조속히 진압해야 할 대상이 되었던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시기의 이승만 정권의 인식과 동일하다.
대항세력 그냥 둘 수 없다는 토벌 논리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베냐민의 ‘폭력비판론’을 끌어올 수 있다. 베냐민은 저항 세력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기존 질서를 중지시키는 것, 예를 들어 노동자 파업도 지배세력에는 체제 위협으로 간주된다고 보았다. 국가, 즉 공권력은 ‘개인’ 수준에 놓인 폭력도 국가와 법질서를 전복하는 위협 세력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개인 수준의 폭력 수단도 국가, 즉 법이 관철되지 않는 영역이며 설사 그것이 방어를 위한 폭력이더라도 대항 폭력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말이다. 이 경우 국민에 대해 약점이 많은 국가, 즉 대항 세력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정권일수록 저항 세력의 무장을 더 용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대항 폭력을 내버려둘 경우 국가의 폭력 독점, 즉 법의 위신이 허물어진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제주 4·3 봉기를 그렇게 철저히 진압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부가 전라도·경상도 등지에서 인민군 부역자나 빨치산을 무자비하게 토벌한 이유도 이런 논리였다. 당시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생 정부에는 큰 위협이고 도전이었다. 저항 세력과 진압할 수 없는 세력의 제거는 이승만 정권의 생명줄을 잡고 있던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자신의 통치 가능성을 보여줘야 했다. 이때 무장하지 않은 빨치산이 수십 명이 있든 수백 명이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없애지 않고서는 정권이 설 자리가 없다고 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한라산 빨치산 500명을 소탕하려고 무려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무리한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망루에 올라가 강제 진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화염병을 준비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생존을 위한 버티기를 국가와 국민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테러 세력으로 간주한 사고방식이었다. 폭력기구로 무장한 채 도심에서 버티는 농성자들은 이명박 정부에는 신속히 제거해야 할 ‘적’이었던 셈이다. 용산 참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와 마찬가지로 토벌의 논리,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후방 영역에 ‘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 혹은 대항 폭력을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다급함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산 농성자들은 비록 정부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 자체가 위협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등 과거에도 철거민들은 망루를 짓고 화염병을 제조하는 등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당시 서울 상도동과 대전 용두동에서도 경찰·용역깡패와 철거민 간 유혈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경찰이 이렇게 토끼몰이식으로 철거민을 진압하지 않았고, 진통 끝에 합의를 도출했다. 당시 정부는 대항 폭력을 보는 관용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었고 그 정도의 위협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의 무장은 그 자체로는 법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진압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형편없이 실추된 공권력의 정당성
그렇게 본다면 용산의 살인적 진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명박 정부의 작품이었다. 중요한 재개발 계획이 세입자 몇 명의 저항으로 지연되거나 좌절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 그들이 감히 공권력에 도전한다는 생각, 그것을 그냥 두면 촛불시위와 노동자 파업 등이 나타나 공권력을 무력화할 수도 있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울 불바다’ 발언처럼 위협을 과장해 결국 살인적 진압을 감행한 것이다. 신생 이승만 정권의 ‘주관적 두려움’이 무리한 빨치산 토벌작전을 감행한 배경이었다면, 촛불시위에 화들짝 놀란 이명박 정부는 힘으로 잠재적 적을 조기에 제압하려고 용역업체와 막대한 개발이익을 얻게 될 시공업체의 대행자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기의 무수한 살인적 토벌작전이 그랬듯이 공권력의 위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정당성과 위신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오늘의 러시아 (러시아 3신)
오늘의 러시아
박노자는 러시아는 현재는 그 자체가 악이며,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러시아는 깡패들이 통치하고 있는 깡패 자본주의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의 과도한 비판을 듣다 보면 이민자들이 자신의 고국에 대해 갖는 특유의 부정적 감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오늘의 러시아가 확실히 자본주의의 쓰레기 하차장이라는 지적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모스크바에만 돈이 모이고 다른 지역은 극도의 가난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료들이 너무나 부패하여 이들을 싹 제거하지 않고서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고 성토하고 있다.
박노자의 스승인 성페테스부르크 국립대학 교수 쿠르바노프 교수도 거의 같은 생각이었다. 과거 사회주의가 더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러시아 최고의 명문 대학인 이 제국대학에도 한국학 하는 학생들이 몰려드는데, 졸업하면 모두 현대, 삼성 취직하기 위해 눈이 벌게 있으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연구자들은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공부를 게속하는 것과 한국 대기업 취직하는 것 사이에는 거의 5배 이상의 소득격차가 있다고 한다.
호텔에 일하는 아줌마들은 모두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과거 소련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외국이 되어버린 주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데, 그들의 급료는 월 100불 정도라고 한다. 현재 모스크바 노동자 임금이 800불 정도이므로 이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10평도 안되는 집에서 거의 10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여기서 번 돈은 자기 나라로 송금하는데,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이상으로 심각한 착취를 당한다고 한다.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러시아의 졸부들은 유럽, 특히 독일 등의 고미술 등을 싹쓸이하고 있어서 독일인들을 긴장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돈 잔치는 거의 초기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한다.
러시아 중심가에는 현대, 삼성 등 광고판을 볼 수 있다. 크레믈린 궁에서 보면 왼쪽에는 삼성이 오른 편에는 현대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전처럼 돈을 많이 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러시아 관료들과 결탁을 하지 않고서는 사업을 할 수 없고, 마피아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업하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과거 공산주의 선전물 대신에 이제 코카콜라 광고가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길거리에는 코카콜라 선전 청년들이 호객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20년, 러시아는 어디로 갈까? 아직 러시아 경제규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당분간 러시아가 세계 중심국가로 부상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사회주의 세력보다 자유주의 혹은 러시아 민족주의가 훨씬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러시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교정할 수 있는 사회운동이 나타날지는 의문이다.
박노자는 러시아는 현재는 그 자체가 악이며,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러시아는 깡패들이 통치하고 있는 깡패 자본주의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의 과도한 비판을 듣다 보면 이민자들이 자신의 고국에 대해 갖는 특유의 부정적 감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오늘의 러시아가 확실히 자본주의의 쓰레기 하차장이라는 지적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모스크바에만 돈이 모이고 다른 지역은 극도의 가난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료들이 너무나 부패하여 이들을 싹 제거하지 않고서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고 성토하고 있다.
박노자의 스승인 성페테스부르크 국립대학 교수 쿠르바노프 교수도 거의 같은 생각이었다. 과거 사회주의가 더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러시아 최고의 명문 대학인 이 제국대학에도 한국학 하는 학생들이 몰려드는데, 졸업하면 모두 현대, 삼성 취직하기 위해 눈이 벌게 있으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연구자들은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공부를 게속하는 것과 한국 대기업 취직하는 것 사이에는 거의 5배 이상의 소득격차가 있다고 한다.
호텔에 일하는 아줌마들은 모두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과거 소련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외국이 되어버린 주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데, 그들의 급료는 월 100불 정도라고 한다. 현재 모스크바 노동자 임금이 800불 정도이므로 이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10평도 안되는 집에서 거의 10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여기서 번 돈은 자기 나라로 송금하는데,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이상으로 심각한 착취를 당한다고 한다.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러시아의 졸부들은 유럽, 특히 독일 등의 고미술 등을 싹쓸이하고 있어서 독일인들을 긴장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돈 잔치는 거의 초기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한다.
러시아 중심가에는 현대, 삼성 등 광고판을 볼 수 있다. 크레믈린 궁에서 보면 왼쪽에는 삼성이 오른 편에는 현대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전처럼 돈을 많이 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러시아 관료들과 결탁을 하지 않고서는 사업을 할 수 없고, 마피아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업하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과거 공산주의 선전물 대신에 이제 코카콜라 광고가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길거리에는 코카콜라 선전 청년들이 호객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20년, 러시아는 어디로 갈까? 아직 러시아 경제규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당분간 러시아가 세계 중심국가로 부상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사회주의 세력보다 자유주의 혹은 러시아 민족주의가 훨씬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러시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교정할 수 있는 사회운동이 나타날지는 의문이다.
향수로서 러시아 (러시아 2신)
아직 학회 참석자들은 도착하지 않았고, 박노자는 러시아 사람들 만나느라 점점 바빠져서 계속 돌봐달라고(? ) 부탁할 수도 없어서 할 수없이 미아가 된 나는 연대 허경진 교수와 함께 숙소 근처의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구경을 갔다. 250 루블이라 좀 비싸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볼 거리들이 많았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모두 로어로 되어 있고 영어 해설이 거의 없어서 매우 아쉬웠지만 알고 있는 러시아사 지식을 총동원해서 사진이나 전시물들이 무슨 내용인지 짐작을 했다.
러시아 역사는 한국의 70년대 말 80년대 초 운동권 근처 얼쩡거린 사람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실 그 때 우리는 모두 러시아 찬미자였고, 어설픈 러시아 전문가였다. 러시아 혁명은 우리를 모두 흥분시키는 흥미진진한 주제였다. 나로드니키들이 불렀던 ‘스탠카라친’은 운동권이 즐겨 부르던 운동 가요였으며, 에드워드 윌슨의 [핀란드 역까지]는 아직 레닌과 러시아 혁명 관련 서적이 금서였던 시절, 러시아 혁명에 대해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입문서 역할을 했고, 그 이후 80년대 들어서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고요한 돈강], 고리끼의 [어머니] 등과 더불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이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플레하노프의 책, 레닌의 저서, 스탈린의 저서, 그리고 러시아 최고의 전문가 카아의 원서로 된 [볼세비키 혁명] 등까지 정말 지나칠 정도로 러시아 혁명 관련 핵들을 많이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 때는 그랬다. 그런데 이 때 얻은 지식이 오늘 박물관 구경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박물관 초입은 과거 짜르제국에서 오늘의 메드배제프 시절까지를 일별할 수 있게 배치를 했다. 그 다음은 19세기 시기부터 시간 순서로 배열을 했다. 각 시기 내에서는 정치, 군사역사를 먼저 배치하고 그 다음은 문화사 생활사를 배치하였다.
로마노프 짜르 시절은 귀족과 농민을 대비시켜 양자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복장과 용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망해가는 제국이었지만 러시아는 한 때 제국이었다. 그리고 제국 시절 러시아는 조선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서 정치에 개입을 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의 주역이기도 하다. 제국의 영화와 농민의 참상을 대비시켰고,
그 다음은 공업화에 의해 변화된 러시아도 보여주었다. 레닌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서술 내용이 연상되는 공업노동자들의 등장과 파업 등이 장면도 전시하고 있으며 혁명가들이 감옥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동행한 허교수의 이야기에 의하면 성 빼제르 부르크의 박물관은 주로 황실의 영화를 보여주는데 초점이 있었지만 여기는 그 점이 약하다고 한다.
?1905년 러일 전쟁의 패배는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전주곡이었다. 서양 동양 모든 나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러일전쟁은 일본의 야스쿠니에서의 러일전쟁 전시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아주 살짝만 다루고 있다. 러시아로서는 잊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 사건, 직업적 혁명가의 등장, 급속한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등장 등의 내용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이라는 것도 산업화의 모순이 봉건적 모순과 중첩되면서 발생한 것, 이른바 약한고리론의 결과가 아닌가라는 그전 읽었던 책 내용이 실감났다.
1917년 2월혁명에서 10월 혁명기의 기간, 그리고 10월 혁명으로 드디어 레닌이 기차로 핀란드 역에 내리는 극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전시하였다.
이후 반혁명 진압, 스탈린 시기의 산업화, 세계 최초의 우주선 발사로 소련의 위세가 전세계를 뒤흔드던 시기가 결국 러시아의 최고의 영광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보면 러시아 혁명은 서구 따라잡기 산업화의 또 다른 경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주의와 서구주의의 오랜 갈등, 결국 서구주의의 외피에 러시아주의의 내용을 숨기고 있었다고나 할까?
제국은 혁명으로 무너졌으나 소련은 또 다른 제국이 되었다. 나는 소련의 역사 속에서 언뜻언뜻 나타나는 조선, 한국을 보았다. 레닌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금괴를 주었고, 박헌영은 소련 공산대학에 유학을 했다. 박헌영과 주세죽 사이에서 난 딸은 유명한 발레리나로 활동하였으며 아직 소련에 살아있다. 물론 그녀는 한국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세계 사회주의가들이 다 그랬듯이 당시 조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소련은 정신적 조국이었고, 코민테른의 지침은 교과서였다. 소련은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일본인 스파이로 의심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으니 조선인들은 그에 대해 입도 벙긋 못했다. 당시의 국제, 세계는 소련이었다. 여운형 등 조선 혁명가들은 소련에서 호지명 등 식민지 독립투사들을 만났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기차를 타고 소련을 방문했다. 전시관 한 구석에서 본 김일성의 사진들은 이상한 비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스탈린의 재가를 얻기 위해 소련을 비밀리 방문했다. 한국전쟁 직전 백남운은 소련을 방문애서 위대한 (?) 사회주의의의 찬란한 성취 (? )에 감격했었다 그런데, 박물관의 스탈린 시대의 각종 선전물, 동영상 전시물을 통해 오늘 북한을 보았다. 러시아에게는 과거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구 소련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전시관은 한산하다. 전시관 구석에 앉아있는 아줌마들은 하품만 하거나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다. 사회주의 러시아는 역사가 되었다.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제국, 돈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힘이 약한 나라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다는 큰 결점을 갖고 있다. 일제시대 이래 조선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는 이념 내용 이전에 미국과 소련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갈라졌다. 80년대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던 동료들이 생각난다. 오늘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분열도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언제나 미래지향적 가치를 중심으로 논쟁을 해 나갈 수 있을까?
사라진 소련 사회주의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조선 ( 한국 )을 본다. 제국이 될 수 없는 나라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러시아 역사는 한국의 70년대 말 80년대 초 운동권 근처 얼쩡거린 사람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실 그 때 우리는 모두 러시아 찬미자였고, 어설픈 러시아 전문가였다. 러시아 혁명은 우리를 모두 흥분시키는 흥미진진한 주제였다. 나로드니키들이 불렀던 ‘스탠카라친’은 운동권이 즐겨 부르던 운동 가요였으며, 에드워드 윌슨의 [핀란드 역까지]는 아직 레닌과 러시아 혁명 관련 서적이 금서였던 시절, 러시아 혁명에 대해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입문서 역할을 했고, 그 이후 80년대 들어서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고요한 돈강], 고리끼의 [어머니] 등과 더불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이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플레하노프의 책, 레닌의 저서, 스탈린의 저서, 그리고 러시아 최고의 전문가 카아의 원서로 된 [볼세비키 혁명] 등까지 정말 지나칠 정도로 러시아 혁명 관련 핵들을 많이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 때는 그랬다. 그런데 이 때 얻은 지식이 오늘 박물관 구경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박물관 초입은 과거 짜르제국에서 오늘의 메드배제프 시절까지를 일별할 수 있게 배치를 했다. 그 다음은 19세기 시기부터 시간 순서로 배열을 했다. 각 시기 내에서는 정치, 군사역사를 먼저 배치하고 그 다음은 문화사 생활사를 배치하였다.
로마노프 짜르 시절은 귀족과 농민을 대비시켜 양자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복장과 용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망해가는 제국이었지만 러시아는 한 때 제국이었다. 그리고 제국 시절 러시아는 조선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서 정치에 개입을 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의 주역이기도 하다. 제국의 영화와 농민의 참상을 대비시켰고,
그 다음은 공업화에 의해 변화된 러시아도 보여주었다. 레닌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서술 내용이 연상되는 공업노동자들의 등장과 파업 등이 장면도 전시하고 있으며 혁명가들이 감옥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동행한 허교수의 이야기에 의하면 성 빼제르 부르크의 박물관은 주로 황실의 영화를 보여주는데 초점이 있었지만 여기는 그 점이 약하다고 한다.
?1905년 러일 전쟁의 패배는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전주곡이었다. 서양 동양 모든 나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러일전쟁은 일본의 야스쿠니에서의 러일전쟁 전시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아주 살짝만 다루고 있다. 러시아로서는 잊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 사건, 직업적 혁명가의 등장, 급속한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등장 등의 내용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이라는 것도 산업화의 모순이 봉건적 모순과 중첩되면서 발생한 것, 이른바 약한고리론의 결과가 아닌가라는 그전 읽었던 책 내용이 실감났다.
1917년 2월혁명에서 10월 혁명기의 기간, 그리고 10월 혁명으로 드디어 레닌이 기차로 핀란드 역에 내리는 극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전시하였다.
이후 반혁명 진압, 스탈린 시기의 산업화, 세계 최초의 우주선 발사로 소련의 위세가 전세계를 뒤흔드던 시기가 결국 러시아의 최고의 영광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보면 러시아 혁명은 서구 따라잡기 산업화의 또 다른 경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주의와 서구주의의 오랜 갈등, 결국 서구주의의 외피에 러시아주의의 내용을 숨기고 있었다고나 할까?
제국은 혁명으로 무너졌으나 소련은 또 다른 제국이 되었다. 나는 소련의 역사 속에서 언뜻언뜻 나타나는 조선, 한국을 보았다. 레닌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금괴를 주었고, 박헌영은 소련 공산대학에 유학을 했다. 박헌영과 주세죽 사이에서 난 딸은 유명한 발레리나로 활동하였으며 아직 소련에 살아있다. 물론 그녀는 한국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세계 사회주의가들이 다 그랬듯이 당시 조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소련은 정신적 조국이었고, 코민테른의 지침은 교과서였다. 소련은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일본인 스파이로 의심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으니 조선인들은 그에 대해 입도 벙긋 못했다. 당시의 국제, 세계는 소련이었다. 여운형 등 조선 혁명가들은 소련에서 호지명 등 식민지 독립투사들을 만났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기차를 타고 소련을 방문했다. 전시관 한 구석에서 본 김일성의 사진들은 이상한 비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스탈린의 재가를 얻기 위해 소련을 비밀리 방문했다. 한국전쟁 직전 백남운은 소련을 방문애서 위대한 (?) 사회주의의의 찬란한 성취 (? )에 감격했었다 그런데, 박물관의 스탈린 시대의 각종 선전물, 동영상 전시물을 통해 오늘 북한을 보았다. 러시아에게는 과거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구 소련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전시관은 한산하다. 전시관 구석에 앉아있는 아줌마들은 하품만 하거나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다. 사회주의 러시아는 역사가 되었다.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제국, 돈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힘이 약한 나라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다는 큰 결점을 갖고 있다. 일제시대 이래 조선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는 이념 내용 이전에 미국과 소련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갈라졌다. 80년대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던 동료들이 생각난다. 오늘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분열도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언제나 미래지향적 가치를 중심으로 논쟁을 해 나갈 수 있을까?
사라진 소련 사회주의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조선 ( 한국 )을 본다. 제국이 될 수 없는 나라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2011년 6월 16일 목요일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러시아 1신)
어제 이곳 시간 밤 10시 정도 모스크바 호텔로 왔습니다.
박노자에게 기분이 어떤가 물었더니 8년만인데 자기는 모스크바 싫어한다는 군요.
더구나 천민자본주의의 센터가 된 모스크바는 더욱 싫어한다고 합니다.
전철역에서 길 건너면 되는 호텔에 가기 위해 5분 정도 돌아서 지하도를 건넜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 오르내리는 것 쉽지 않았습니다.
신호등을 만들지 않았는데, 사람위주가 아니라 차 위주의 교통이라고 박노자가 설명합니다.
졸부들이 설치는 한국의 종로거리 같은 곳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호텔은 매루 럭러시한 곳인데, 하루 미리 도착해서 하루 숙박비용은 별도로 지불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격은 묻지 않았는데 최소 150유로는 넘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물가를 자랑하는 모스크바의 시내 중심부 호텔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차 소음도 크고 해서 오슬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박노자가 주의사항을 알려줍니다.
밤에 혼자 나가지 말것, 여권 반드시 지참할 것, 지갑은 윗 주머니에 넣을 것. 극우 청년들 몰려다니면 곧바로 피할 것, 총알택시 타지 말것......
방에 들어와서 인터넷을 접속하려하니 오슬로에서는 무선이 공짜였는데 여기서는 시간당 무려
350 루블, 우리 돈으로 만 오천원 정도입니다. 그 돈 주고 지금 글 쓰는 셈입니다.
앞으로 인터넷 연결 어려우리라는 예상했습니다.
졸부가 무섭습니다.
박노자에게 기분이 어떤가 물었더니 8년만인데 자기는 모스크바 싫어한다는 군요.
더구나 천민자본주의의 센터가 된 모스크바는 더욱 싫어한다고 합니다.
전철역에서 길 건너면 되는 호텔에 가기 위해 5분 정도 돌아서 지하도를 건넜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 오르내리는 것 쉽지 않았습니다.
신호등을 만들지 않았는데, 사람위주가 아니라 차 위주의 교통이라고 박노자가 설명합니다.
졸부들이 설치는 한국의 종로거리 같은 곳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호텔은 매루 럭러시한 곳인데, 하루 미리 도착해서 하루 숙박비용은 별도로 지불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격은 묻지 않았는데 최소 150유로는 넘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물가를 자랑하는 모스크바의 시내 중심부 호텔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차 소음도 크고 해서 오슬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박노자가 주의사항을 알려줍니다.
밤에 혼자 나가지 말것, 여권 반드시 지참할 것, 지갑은 윗 주머니에 넣을 것. 극우 청년들 몰려다니면 곧바로 피할 것, 총알택시 타지 말것......
방에 들어와서 인터넷을 접속하려하니 오슬로에서는 무선이 공짜였는데 여기서는 시간당 무려
350 루블, 우리 돈으로 만 오천원 정도입니다. 그 돈 주고 지금 글 쓰는 셈입니다.
앞으로 인터넷 연결 어려우리라는 예상했습니다.
졸부가 무섭습니다.
2011년 6월 15일 수요일
노르웨이에서 긴 하루
노르웨이에서 긴 하루
노르웨이라는 나라 처음이지만 이틀 밤을 자고 오늘 모스크바로 떠난다.
온지는 3일 째이지만 하루 온전히 구경한 것은 어제 밖에 없었으므로 어제 보고 들은 것 몇 가지 전한다. 주로 여기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박노자, 기업 주재원으로 있는 내 친구에게 들은 것, 그리고 같이 저녁식사 한 호주출신 일본 여자 교수와 나눈 이야기를 종합한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여름 하루는 참 길었다. 밤 11시가 넘어야 어두워지고 4시가 되니 동이 터온다.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잠을 설친 나는 아침 5시 무렵에 밖에 나가서 산보를 했다 인구 70만의 잘 정돈된 오슬로 시내는 한산했고 가끔 전철, 버스가 왔다 갔다 했다.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 그리고 지구상에서 사회주의에 가장 가까운 나라, 그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박노자와 대학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식사의 질은 우리 나라 대학 교수식당의 5,000원 짜리 정도에 불과한데 가격이 무려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박노자도 집에서 주로 도시락을 싸온다고 한다. 자기도 이 식당에 처음이라 하고 정부 돈이 아니면(나를 초청한 비용은 노르웨이 외교부의 아시아기금에서 지원받는 것이다) 이렇게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일식집에서 4사람이 먹었다. 스시, 라면 등 평범한 것을 먹었는데 일인당 6, 7만원 정도였다.
노르웨이 물가가 왜 이리 비싼가? 물론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에 속하게 되었지만 30년 전만해도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부의 원천은 뭐니뭐니해도 석유다. 세계에서 석유수출에서 제2위라고 한다. 원래는 삼림이나 조선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석유가 쏟아지면서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핵심 조선 기술은 여전히 노르웨이가 최고라고 하는데, 한국도 조선 강국이지만, 한국 배를 많이 팔면 팔수록 노르웨이가 돈을 번다나(자동차가 생각났다. 한국 차 많이 팔면 일본이 더 돈을 많이 버는 역설) 하여튼 한국은 노르웨이의 두 번째 교역국이고 무시하지 못할 나라가 되었다.
노르웨이는 버는 돈의 50 퍼센트를 세금으로 가져가고 거의 완벽한 복지 시스템을 자랑한다. 전액 무상인 대학은 고교 졸업자의 50 퍼센트가 진학을 하는데 유럽 국가 중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젊은이들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므로 진학률이 떨어져서 고민이라고 한다. ( 우리와 완전 반대...) 박사를 받으면 국가에서 아예 돈을 지급해 준다고 한다 (!! ). 전체 노동력 중에서 비정규직이 9퍼센트에 불과하고 그것도 최근에 들어온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민정책을 매우 엄격하게 하는 편인데도 이민자들이 늘어나서 나른 나라처럼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고 한다. 그러나 집권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하고 있으며 일부 극좌세력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영항력은 주로 교수나 교사 등 지식인에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정치에 관심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도좌파를 지지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 차이도 거의 없다고 하니 지상 천국이라고 할만하다.
노동자의 권리가 매우 강하고, 파업이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지지를 하기 때문에 대학 엘리베이터 노동자들이 작년에 3개월 동안 파업 했을 때 학내 모든 구성원들은 걸어서 몇 층을 올라가면서도 불평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처럼 경찰이 노동자들을 체포하는 풍경은 30년대 대공황 때나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주 5일 근무에 9시 출근에서 5시면 거의 퇴근하는데, 일 년에 휴가가 5주이고, 여성은 출산 휴가가 1년이며 아빠도 2주 정도 무조건 출산휴가를 준다고 한다. 정식결혼한 부부와 동거인에 대한 차별이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18세 이후 독립을 하며 대체로 몇 번의 동거를 거쳐 결혼을 하거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특히 남자 입장에서는 이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거의 파탄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결혼할 이유가 없다는 내 친구의 전언..... 그렇다고 이혼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며 또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그리고 동거를 경험한 커플도 이혼이 많다고 하니 이 현상을 어이 설명해야할지 나도 난감.
사회적 차원에서의 사회주의는 강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점은 스웨덴과도 유사한 점인 것 같다. 평등주의가 매우 강한 이면에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하고, 조직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개인주의가 있다. 자식을 독립적으로 키우려는 정신에는 자식과의 거리감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나라처럼 사회나 조직 내부가 경쟁적이지 않고, 피고용자의 권리가 강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천국이지만, 이들은 엄격한 노동윤리를 견지한다고 한다. 즉 아이를 데려오는 등 집에 일이 있으면, 근무시간에도 퇴근을 요청하는 일이 있는데, 자기가 빠진 시간만큼 철처하게 보충하고, 조직에서 합의를 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수하는 엄격함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경쟁이 효율성을 높인다는 미국식 가설은 틀린 것이다. 대충대충이 없고, 근무시간은 완벽하게 충성을 하기 때문에 또 그 만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었다. (모든 면에서 독일과 참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박노자가 지적하듯이 노르웨이는 제조업이 약해서 포스트모던 경향이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19, 20세기 국민국가의 전형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강한 소속의식과 충성심을 갖고 있으며 민족주의는 아니지만, 국민적 정체성이 매우 강해서 노르웨이 말에 서투르면 조직이나 사회에서 거의 배제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물론 어학에 비상한 재능이 있는 박노자는 러시아어 영어와 더불어 노르웨이말도 유창하게 하였는데, 대학에서는 외국 전문가 초빙이 용납된다고 한다) 즉 시골로 갈수록 자국민주의 더 엄격해서 외국인이 동화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잘사는 나라이므로 외국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세계화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말은 딴 세상 이야기같이 들리는 듯....
그런데 과연 노르웨이가 천국이기만 할까? 명이 있으면 암이 있는 법니다. 강한 개인주의는 바로 거리감, 고독감을 수반하는 법이다. 노동자, 약자에게는 분명 좋은 나라이기는 하나 늙은이의 외로움, 개인의 고독은 치유할 수 없는가 보다. 알콜 중독자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술과 담배가 비싼 이유도 알콜 중독자 퇴치 목적이라고 하니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긴긴 겨울을 술로 보내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가족, 친구, 동창이 없고, 우리처럼 엉켜서 즐기는 문화는 거의 없어 보였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몇 가지 이야기 거리 더 남겨두고 러시아로 가야겠다. 박노자가 러시아 친구 후배들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니 기대해야겠다.
노르웨이라는 나라 처음이지만 이틀 밤을 자고 오늘 모스크바로 떠난다.
온지는 3일 째이지만 하루 온전히 구경한 것은 어제 밖에 없었으므로 어제 보고 들은 것 몇 가지 전한다. 주로 여기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박노자, 기업 주재원으로 있는 내 친구에게 들은 것, 그리고 같이 저녁식사 한 호주출신 일본 여자 교수와 나눈 이야기를 종합한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여름 하루는 참 길었다. 밤 11시가 넘어야 어두워지고 4시가 되니 동이 터온다.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잠을 설친 나는 아침 5시 무렵에 밖에 나가서 산보를 했다 인구 70만의 잘 정돈된 오슬로 시내는 한산했고 가끔 전철, 버스가 왔다 갔다 했다.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 그리고 지구상에서 사회주의에 가장 가까운 나라, 그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박노자와 대학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식사의 질은 우리 나라 대학 교수식당의 5,000원 짜리 정도에 불과한데 가격이 무려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박노자도 집에서 주로 도시락을 싸온다고 한다. 자기도 이 식당에 처음이라 하고 정부 돈이 아니면(나를 초청한 비용은 노르웨이 외교부의 아시아기금에서 지원받는 것이다) 이렇게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일식집에서 4사람이 먹었다. 스시, 라면 등 평범한 것을 먹었는데 일인당 6, 7만원 정도였다.
노르웨이 물가가 왜 이리 비싼가? 물론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에 속하게 되었지만 30년 전만해도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부의 원천은 뭐니뭐니해도 석유다. 세계에서 석유수출에서 제2위라고 한다. 원래는 삼림이나 조선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석유가 쏟아지면서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핵심 조선 기술은 여전히 노르웨이가 최고라고 하는데, 한국도 조선 강국이지만, 한국 배를 많이 팔면 팔수록 노르웨이가 돈을 번다나(자동차가 생각났다. 한국 차 많이 팔면 일본이 더 돈을 많이 버는 역설) 하여튼 한국은 노르웨이의 두 번째 교역국이고 무시하지 못할 나라가 되었다.
노르웨이는 버는 돈의 50 퍼센트를 세금으로 가져가고 거의 완벽한 복지 시스템을 자랑한다. 전액 무상인 대학은 고교 졸업자의 50 퍼센트가 진학을 하는데 유럽 국가 중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젊은이들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므로 진학률이 떨어져서 고민이라고 한다. ( 우리와 완전 반대...) 박사를 받으면 국가에서 아예 돈을 지급해 준다고 한다 (!! ). 전체 노동력 중에서 비정규직이 9퍼센트에 불과하고 그것도 최근에 들어온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민정책을 매우 엄격하게 하는 편인데도 이민자들이 늘어나서 나른 나라처럼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고 한다. 그러나 집권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하고 있으며 일부 극좌세력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영항력은 주로 교수나 교사 등 지식인에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정치에 관심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도좌파를 지지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 차이도 거의 없다고 하니 지상 천국이라고 할만하다.
노동자의 권리가 매우 강하고, 파업이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지지를 하기 때문에 대학 엘리베이터 노동자들이 작년에 3개월 동안 파업 했을 때 학내 모든 구성원들은 걸어서 몇 층을 올라가면서도 불평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처럼 경찰이 노동자들을 체포하는 풍경은 30년대 대공황 때나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주 5일 근무에 9시 출근에서 5시면 거의 퇴근하는데, 일 년에 휴가가 5주이고, 여성은 출산 휴가가 1년이며 아빠도 2주 정도 무조건 출산휴가를 준다고 한다. 정식결혼한 부부와 동거인에 대한 차별이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18세 이후 독립을 하며 대체로 몇 번의 동거를 거쳐 결혼을 하거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특히 남자 입장에서는 이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거의 파탄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결혼할 이유가 없다는 내 친구의 전언..... 그렇다고 이혼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며 또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그리고 동거를 경험한 커플도 이혼이 많다고 하니 이 현상을 어이 설명해야할지 나도 난감.
사회적 차원에서의 사회주의는 강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점은 스웨덴과도 유사한 점인 것 같다. 평등주의가 매우 강한 이면에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하고, 조직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개인주의가 있다. 자식을 독립적으로 키우려는 정신에는 자식과의 거리감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나라처럼 사회나 조직 내부가 경쟁적이지 않고, 피고용자의 권리가 강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천국이지만, 이들은 엄격한 노동윤리를 견지한다고 한다. 즉 아이를 데려오는 등 집에 일이 있으면, 근무시간에도 퇴근을 요청하는 일이 있는데, 자기가 빠진 시간만큼 철처하게 보충하고, 조직에서 합의를 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수하는 엄격함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경쟁이 효율성을 높인다는 미국식 가설은 틀린 것이다. 대충대충이 없고, 근무시간은 완벽하게 충성을 하기 때문에 또 그 만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었다. (모든 면에서 독일과 참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박노자가 지적하듯이 노르웨이는 제조업이 약해서 포스트모던 경향이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19, 20세기 국민국가의 전형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강한 소속의식과 충성심을 갖고 있으며 민족주의는 아니지만, 국민적 정체성이 매우 강해서 노르웨이 말에 서투르면 조직이나 사회에서 거의 배제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물론 어학에 비상한 재능이 있는 박노자는 러시아어 영어와 더불어 노르웨이말도 유창하게 하였는데, 대학에서는 외국 전문가 초빙이 용납된다고 한다) 즉 시골로 갈수록 자국민주의 더 엄격해서 외국인이 동화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잘사는 나라이므로 외국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세계화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말은 딴 세상 이야기같이 들리는 듯....
그런데 과연 노르웨이가 천국이기만 할까? 명이 있으면 암이 있는 법니다. 강한 개인주의는 바로 거리감, 고독감을 수반하는 법이다. 노동자, 약자에게는 분명 좋은 나라이기는 하나 늙은이의 외로움, 개인의 고독은 치유할 수 없는가 보다. 알콜 중독자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술과 담배가 비싼 이유도 알콜 중독자 퇴치 목적이라고 하니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긴긴 겨울을 술로 보내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가족, 친구, 동창이 없고, 우리처럼 엉켜서 즐기는 문화는 거의 없어 보였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몇 가지 이야기 거리 더 남겨두고 러시아로 가야겠다. 박노자가 러시아 친구 후배들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니 기대해야겠다.
2011년 6월 14일 화요일
[세상 읽기] 워크던트
2011년 6월 14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82502.html
----
오늘의 워크던트(노동생)는
50년대 고학생, 60~70년대 유학생,
80년대 공장에 간 대학생과 다르다
본업은 학생이지만, 학비 마련을 위해 공부보다는 ‘알바’에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하는 오늘의 대학생들을 영어로 노동자와 학생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워크던트’ 혹은 ‘노동생’이라 부르면 어떨까? 등록금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기 때문에 이들의 처지에 대한 논란이 이제 식상한 감도 있지만 초점이 등록금 문제로 집약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오늘의 워크던트는 고학을 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1950년대 중·고등학생들이나, 접시 닦으면서 고국의 엘리트가 될 꿈을 꾸던 60~70년대 미국 유학생들이나, 노동자로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키고서 노동운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80년대 대학생들과도 다르다. 워크던트의 처지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며, 사실상은 노동자·기술자·예술가로 살아야 할 청년들이 졸업장을 얻기 위해 학생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닥쳐올 미래는 버젓한 직장인이나 이 사회의 엘리트가 아닌 채무자, 청년실업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다. 부모 잘 만나서 지금 워크던트로 살지 않아도 되는 일부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노동자를 관리하는 직업을 얻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워크던트인 청년들은 이미 사회의 서열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이 무엇인지, 최저임금이나 노동인권이 무엇인지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자기개발 시대’의 청년들이다. 그들은 한번 벼랑으로 떨어지면 다시 기어 올라올 수 없는 냉엄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매일 체험하면서 스펙에 목숨을 건다. 이들이 마련해야 하는 등록금과 용돈은 이 사회에서 ‘잉여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자격증 취득 비용이지 결코 엘리트 지위를 얻을 수 있는 투자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학 등록금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등록금이 반값이 되면 이제 이들이 알바 대신 학업에 더 충실하게 되고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될까? 청년들을 대학에 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반값 등록금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한번 취득한 학력·학벌이 평생을 지배하고, 노동자를 극도로 천대하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가 이렇게 벌어져 있는 이 사회에서 대학 등록금을 무상으로 한들 이들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까?
나는 한국 사회에서의 학력·학벌 경쟁은 “노동자가 되지 않으려는 전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워크던트 문제는 노동자를 죄인으로 만들고, 학벌 좋은 힘있는 사람들은 도둑질을 해도 살아남는 이 지배구조에 원인이 있다. 바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청춘을 ‘잉여인간’으로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잉여’의 존재이면서도 1년에 수억원의 연봉과 뒷돈을 챙기는 엘리트들의 모습이 이렇게 극심한 학력·학벌 경쟁을 일으키는 주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찰에 끌려가는 파업 노동자의 모습을 볼 때 모든 학부모들은 빚을 내서라도 자기 자식은 노동자 만들지 않기 위해 학원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려 할 것이다. 최고 학부를 나온 반사회적 비리의 주범들이 친구·동문들의 힘으로 줄줄이 면죄부를 받는다면, 우리 학부모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식을 스카이(SKY) 대학에 보내려 할 것이고, 최소한 현대판 신분증인 대학 졸업장이라도 안겨주려 할 것이다.
등록금 문제로 드러난 오늘의 워크던트 처지는 우리 사회 저 깊은 곳의 숙제 거리를 집약하고 있다. 자, 우선 워크던트를 전업 학생이 되도록 해주고, 그들에게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주자. 그다음으로 노동자를 인간답게 해주고 학력·학벌주의를 삼제(芟除)할 길을 찾아보자. 등록금 문제는 드러난 현상이니 말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82502.html
----
오늘의 워크던트(노동생)는
50년대 고학생, 60~70년대 유학생,
80년대 공장에 간 대학생과 다르다
본업은 학생이지만, 학비 마련을 위해 공부보다는 ‘알바’에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하는 오늘의 대학생들을 영어로 노동자와 학생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워크던트’ 혹은 ‘노동생’이라 부르면 어떨까? 등록금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기 때문에 이들의 처지에 대한 논란이 이제 식상한 감도 있지만 초점이 등록금 문제로 집약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오늘의 워크던트는 고학을 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1950년대 중·고등학생들이나, 접시 닦으면서 고국의 엘리트가 될 꿈을 꾸던 60~70년대 미국 유학생들이나, 노동자로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키고서 노동운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80년대 대학생들과도 다르다. 워크던트의 처지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며, 사실상은 노동자·기술자·예술가로 살아야 할 청년들이 졸업장을 얻기 위해 학생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닥쳐올 미래는 버젓한 직장인이나 이 사회의 엘리트가 아닌 채무자, 청년실업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다. 부모 잘 만나서 지금 워크던트로 살지 않아도 되는 일부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노동자를 관리하는 직업을 얻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워크던트인 청년들은 이미 사회의 서열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이 무엇인지, 최저임금이나 노동인권이 무엇인지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자기개발 시대’의 청년들이다. 그들은 한번 벼랑으로 떨어지면 다시 기어 올라올 수 없는 냉엄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매일 체험하면서 스펙에 목숨을 건다. 이들이 마련해야 하는 등록금과 용돈은 이 사회에서 ‘잉여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자격증 취득 비용이지 결코 엘리트 지위를 얻을 수 있는 투자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학 등록금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등록금이 반값이 되면 이제 이들이 알바 대신 학업에 더 충실하게 되고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될까? 청년들을 대학에 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반값 등록금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한번 취득한 학력·학벌이 평생을 지배하고, 노동자를 극도로 천대하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가 이렇게 벌어져 있는 이 사회에서 대학 등록금을 무상으로 한들 이들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까?
나는 한국 사회에서의 학력·학벌 경쟁은 “노동자가 되지 않으려는 전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워크던트 문제는 노동자를 죄인으로 만들고, 학벌 좋은 힘있는 사람들은 도둑질을 해도 살아남는 이 지배구조에 원인이 있다. 바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청춘을 ‘잉여인간’으로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잉여’의 존재이면서도 1년에 수억원의 연봉과 뒷돈을 챙기는 엘리트들의 모습이 이렇게 극심한 학력·학벌 경쟁을 일으키는 주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찰에 끌려가는 파업 노동자의 모습을 볼 때 모든 학부모들은 빚을 내서라도 자기 자식은 노동자 만들지 않기 위해 학원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려 할 것이다. 최고 학부를 나온 반사회적 비리의 주범들이 친구·동문들의 힘으로 줄줄이 면죄부를 받는다면, 우리 학부모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식을 스카이(SKY) 대학에 보내려 할 것이고, 최소한 현대판 신분증인 대학 졸업장이라도 안겨주려 할 것이다.
등록금 문제로 드러난 오늘의 워크던트 처지는 우리 사회 저 깊은 곳의 숙제 거리를 집약하고 있다. 자, 우선 워크던트를 전업 학생이 되도록 해주고, 그들에게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주자. 그다음으로 노동자를 인간답게 해주고 학력·학벌주의를 삼제(芟除)할 길을 찾아보자. 등록금 문제는 드러난 현상이니 말이다.
2011년 6월 13일 월요일
학자들에 대하여
나는 자유를 사랑하고 신선한 대지위의 공기를 사랑한다.
나는 학자들의 지위와 권위 위에서 잠들기 보다는 차라리 황소가죽 위에 잠들고 싶다.
나는 너무나 뜨거우며 자신만의 사상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 때문에 이따금 나는 숨이 가쁘다.
그러므로 나는 먼지 투성이의 모든 방을 떠나 야외로 가야한다.
학자들은 차가운 그늘 속에 차갑게 앉아있다. 그들은 모든 일에서 관조하는 자가 되려하며 태양이 내리쬐는 계단에 앉기를 회피한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선한 대지를 찾아, 태양이 내리뙤는 계단을 찾아 떠납니다.
신선한 공기 마시고,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저 백야의 대지 위에서 태양열로 충전하여 돌아올 예정입니다.
나는 학자들의 지위와 권위 위에서 잠들기 보다는 차라리 황소가죽 위에 잠들고 싶다.
나는 너무나 뜨거우며 자신만의 사상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 때문에 이따금 나는 숨이 가쁘다.
그러므로 나는 먼지 투성이의 모든 방을 떠나 야외로 가야한다.
학자들은 차가운 그늘 속에 차갑게 앉아있다. 그들은 모든 일에서 관조하는 자가 되려하며 태양이 내리쬐는 계단에 앉기를 회피한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선한 대지를 찾아, 태양이 내리뙤는 계단을 찾아 떠납니다.
신선한 공기 마시고,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저 백야의 대지 위에서 태양열로 충전하여 돌아올 예정입니다.
2011년 6월 5일 일요일
'선진통일'론은 21세기판 북진통일론
드이어 선진이와 통일이가 만났다.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이 주도하는 ‘선진통일연합(이하 ‘선통연’)’이 오늘 6월 6일 오후 2시 여의도 63빌딩에서 창립대회를 갖는다고 한다.선통연은 선진화와 통일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운동의 활성화를 표방한다고 한다. 1만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이 단체에는 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김진홍 두레교회목사, 박효종 서울대 교수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선통연 측은 다만 통일에 대비한 순수 국민운동 단체로, 내년 총선 및 대선과 연계된 정당색을 띠지 않는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6년 전 2005년 뉴라이트가 뜰 때 필자는 교수신문(2005.4.26)에 다음과 같이 뉴라이트의 성격을 진단했다. 문장은 좀 어색한데 전화 인터뷰를 그냥 받아 적은 것이어서 그렇다.
.............................................................................
<구세력을 新세력으로 화장하는 도구 / 김동춘>
뉴라이트의 기조는 시장원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신자유주의지만, 한국의 재벌체제나 시장논리와는 맞지 않는 기업부패 문제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구보수를 비판하긴 해도 극우반공주의 요소에서 명백하게 선을 긋지 않고 있다. 또한 감세와 탈규제 정책에 대해 미국에서 보여주듯 낮은 것 같지만, 오히려 빈부격차와 저임노동자를 양산하는 점은 유럽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런 주장은 친자본·친기업의 논리를 호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북한인권은 시민사회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야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조심스럽게 제기해야한다. 이는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뉴라이트의 주장은 북한 체제비판을 위해 인권이라는 담론을 사용하는 것으로 ‘왜 북한을 인정하느냐’라는 물음과 똑같다.한국현대사의 성공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부끄러운 점을 숨기고자 하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기억투쟁으로 올드라이트나 일본 극우파와 같은 논리다.
사회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 사회의 민감한 부분이나 기득권을 공격하면서 나와야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지만, 북한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것 외에 명확한 자유주의도 아니며, 강정구 교수에 대한 지지보다 다양한 입장을 용인하는 등 올드라이트와 차별화가 이뤄지지 않는 점에서 전망은 불투명하다.
오히려 구세력을 新세력으로 화장하는 도구로 뉴라이트가 사용되거나 아니면 권력진입을 위한 레토릭으로 갈 것 같다. 시민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
자, 이제 선진과 통일이 만나서 신 보수를 제창하고 있다. 그들은 내년 대선, 총선 포석은 아니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제 통일은 그들의 담론이 되었다. 왜 진보보수 모두 분단 관리에만 신경을 쓰고, 통일문제의 급박성과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통일만이 살길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의 21판이라 할만하다. 48년 통일 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단독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53년 휴전반대를 제창하면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휴전회담을 결사반대하였다. 걸으로는 민족주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것은 동족의 반이 죽여도 통일만 되면 좋다는 식의 막가파식 논리였다. 그런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미국과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하에서 그러한 논리가 성사 가능성이 없는 줄 알면서도 부르짖은 정치쇼에 가까운 것이었듯이, 선진통일론은 한반도에 드리운 미국의 강력한 이해와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편 선진통일론은 과거 운동진영의 분단극복 통일론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선진통일론은 과거의 학생운동진영의 통일론과 달리 한반도에서 통일이 안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있으며, 무엇을 위한 통일인지 묻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말하는 선진이 장차의 통일국가의 내용이 될 터인데, 그것은 북진통일론처럼 북한 붕괴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오늘 한국의 탈법과 부정, 재벌의 무소불위의 권력행사를 문제삼지 않는 선진이다. 그들이 말하는 통일은 북한 인민들의 고통을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그럴듯한 인도주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처럼 이 남한의 천민자본주의 하에서 매일 죽어가고 있는 실업자나 청년들에 대한 일말의 관심과 대안도 없는 정치 레토릭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정성이 있다면 먼저 남한의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
어떤 조직의 성격을 알고 싶으면 레토릭보다는 그곳에 가담하는 사람을 보면 된다.
선진통일의 면면도 신보수와는 거리가 먼 구보수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친미반북반공 이상의 어떤 철학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이북에 빨리 자본주의를 이식하자! 바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탐욕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우익의 탄생을 고대한다. 그런데 선진통일이 그렇게 될것 같지 않다. 비교적 합리적 우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윤여준 전장관이 빠진 점도 석연치 않다.
어디 한번 이들의 행보를 지켜보자.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이 주도하는 ‘선진통일연합(이하 ‘선통연’)’이 오늘 6월 6일 오후 2시 여의도 63빌딩에서 창립대회를 갖는다고 한다.선통연은 선진화와 통일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운동의 활성화를 표방한다고 한다. 1만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이 단체에는 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김진홍 두레교회목사, 박효종 서울대 교수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선통연 측은 다만 통일에 대비한 순수 국민운동 단체로, 내년 총선 및 대선과 연계된 정당색을 띠지 않는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6년 전 2005년 뉴라이트가 뜰 때 필자는 교수신문(2005.4.26)에 다음과 같이 뉴라이트의 성격을 진단했다. 문장은 좀 어색한데 전화 인터뷰를 그냥 받아 적은 것이어서 그렇다.
.............................................................................
<구세력을 新세력으로 화장하는 도구 / 김동춘>
뉴라이트의 기조는 시장원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신자유주의지만, 한국의 재벌체제나 시장논리와는 맞지 않는 기업부패 문제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구보수를 비판하긴 해도 극우반공주의 요소에서 명백하게 선을 긋지 않고 있다. 또한 감세와 탈규제 정책에 대해 미국에서 보여주듯 낮은 것 같지만, 오히려 빈부격차와 저임노동자를 양산하는 점은 유럽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런 주장은 친자본·친기업의 논리를 호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북한인권은 시민사회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야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조심스럽게 제기해야한다. 이는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뉴라이트의 주장은 북한 체제비판을 위해 인권이라는 담론을 사용하는 것으로 ‘왜 북한을 인정하느냐’라는 물음과 똑같다.한국현대사의 성공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부끄러운 점을 숨기고자 하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기억투쟁으로 올드라이트나 일본 극우파와 같은 논리다.
사회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 사회의 민감한 부분이나 기득권을 공격하면서 나와야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지만, 북한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것 외에 명확한 자유주의도 아니며, 강정구 교수에 대한 지지보다 다양한 입장을 용인하는 등 올드라이트와 차별화가 이뤄지지 않는 점에서 전망은 불투명하다.
오히려 구세력을 新세력으로 화장하는 도구로 뉴라이트가 사용되거나 아니면 권력진입을 위한 레토릭으로 갈 것 같다. 시민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
자, 이제 선진과 통일이 만나서 신 보수를 제창하고 있다. 그들은 내년 대선, 총선 포석은 아니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제 통일은 그들의 담론이 되었다. 왜 진보보수 모두 분단 관리에만 신경을 쓰고, 통일문제의 급박성과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통일만이 살길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의 21판이라 할만하다. 48년 통일 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단독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53년 휴전반대를 제창하면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휴전회담을 결사반대하였다. 걸으로는 민족주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것은 동족의 반이 죽여도 통일만 되면 좋다는 식의 막가파식 논리였다. 그런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미국과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하에서 그러한 논리가 성사 가능성이 없는 줄 알면서도 부르짖은 정치쇼에 가까운 것이었듯이, 선진통일론은 한반도에 드리운 미국의 강력한 이해와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편 선진통일론은 과거 운동진영의 분단극복 통일론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선진통일론은 과거의 학생운동진영의 통일론과 달리 한반도에서 통일이 안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있으며, 무엇을 위한 통일인지 묻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말하는 선진이 장차의 통일국가의 내용이 될 터인데, 그것은 북진통일론처럼 북한 붕괴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오늘 한국의 탈법과 부정, 재벌의 무소불위의 권력행사를 문제삼지 않는 선진이다. 그들이 말하는 통일은 북한 인민들의 고통을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그럴듯한 인도주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처럼 이 남한의 천민자본주의 하에서 매일 죽어가고 있는 실업자나 청년들에 대한 일말의 관심과 대안도 없는 정치 레토릭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정성이 있다면 먼저 남한의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
어떤 조직의 성격을 알고 싶으면 레토릭보다는 그곳에 가담하는 사람을 보면 된다.
선진통일의 면면도 신보수와는 거리가 먼 구보수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친미반북반공 이상의 어떤 철학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이북에 빨리 자본주의를 이식하자! 바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탐욕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우익의 탄생을 고대한다. 그런데 선진통일이 그렇게 될것 같지 않다. 비교적 합리적 우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윤여준 전장관이 빠진 점도 석연치 않다.
어디 한번 이들의 행보를 지켜보자.
2011년 6월 3일 금요일
훈련병 자살사건
군대 가본 사람은 안다. 군은 사병을 도구취급한다는 것을.
그리고 일부 장교들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병들을 개인 수족처럼 몰아세우고 부려먹은다는 것을.
한국군대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좋게 봐주기 어렵다. 출발부터 친일 인사 중심으로 편재되었고, 한국전쟁을 비롯해서 국민들을 적으로 몬 이력들로 가득차 있다. 부패, 부정, 편법은 한국군대에서 태생적으로 존재햇던 문화였다. 다른 모든 사회조직이 변화되어도 군은 아직 요지부동인 것 같다.
사병을 물건 취급하는 군대에서 힘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자식을 군대보내지 않으려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비판받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다.
이승만 정권 기의 국민방위군 사건이야말로 그 이후 국민들이 국가를 불신하고 자식을 군대 보내지 않으려 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군은 인권의 사각지대다. 군인을 '군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군인들 스스로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1세기에도 아직 이런 군대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미국에서는 이미 64년에 기업가 출신 맥나라마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군의 문민화는 거꾸로 가고 있다. 거의 모든 입대자가 대학 재학중인 이런 나라에서 50년대 식 군대문화가 통용될 수 없다.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사병체험을 하지 않은 자들이 청와대와 국회, 행정부 요직에 모두 앉아있어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자식을 군대에 보냈다가 이렇게 청쳔벽력같은 일을 당한 부모를 향해 이 정부는 부릎이라고 꿇고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군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논의를 해야 한다. 훈련병의 생영은 국민 모두의 생명이다. 훈련병의 자살은 국민 모두의 자살이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