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쏟아지는 저녁입니다.
지금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유상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내일이 발인이라는 데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친구로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멀리 있어 문상도 못 갔습니다.
전교조 사람들과도 최근에는 별로 교분이 없고, 학교 선후배들도 잘 만나지 않다 보니 내게는 문자하나
오지 않았고, 그 동안 그렇게 투병중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6시에 노총에서 회의가 있어 일찍 나오다 보니 오늘자 신문에 난 것도 몰랐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1981년 서초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실 때 학생인 내가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운동권의 거의 전설적인 선배였습니다. 그 때 서초중학교 앞 식당에서 교육운동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후 그는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고생하셨고, 이후 전교조 창립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나는 89년 교사직을 떠나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고, 교육운동, 교사운동과 멀어졌습니다.
전교조 운동을 함께하지 못하고 연구자의 길을 걸은 것에 대해 언제나 빚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오다가다 그를 여러번 만난적이 있고,영등포의 한국교육연구소에 간 것도 기억납니다.
또 민간인학살 범국민위 만들 때도 그를 임원으로 추대하기도 했습니다.부친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부드럽고 다감한 선배였습니다. 그는 한국 교육운동, 교사운동의 산 증인입니다.
그런데 군사정권 시절 여러분 투옥과 고문을 겪으면서 몸이 너무 많이 망가진 것 같습니다.
왜 고생한 사람들은 이렇게 일찍 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차피 한 번 가는 인생이지만, 많이 정말 많이 안타깝습니다.
하능에서 편히 쉬세요. 상덕이형.
유상덕 선생님이 살아온 길
1949년 여름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의 전투가 벌어지던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덕유산 자락 용추사 계곡 연촌부락에서 태어남.
(부 : 유태문 劉太文) 태어난 지 약 한 달 후 아버지는 낮에 들일을 하다가 끌려가 함양읍 근처 당그래산 아래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됨. 집단학살의 구덩이에서 시신을 찾지 못함. (국군 5연대의 함양 양민 학살 사건). 난리 통에 어머니는 형제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개가함. (이후 할머니와 삼촌댁에서 자람. 할머니는 공부를 안 시키려고 해서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 안의중을 나와 고학으로 거창고를 다님.)
1969년 서울대 사대 지리과 입학, ‘경암회’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관심 가짐.(3학년 때 경암회 회장) 1학년 때부터 야학 강학으로 활동.
1971년까지 서울대 사대 학생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다가 그 해 10월 박정희가 위수령을 선포했을 때 ‘전국 대의원 학생회’를 구성하고 명동에서 시위를 계획하다 구속된 후 강제 징집됨.
1974년 만기 제대 후 복학하여 채광석, 박부권 등과 ‘야학문제연구회’를 만든 후 서울 지역의 고대, 연대 등의 야학교사들과 야학문제 써클 연합체를 조직함.
1975년 김상진 열사 추모제 사건(이른바 오둘둘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6개월의 수배생활 끝에 구속, 1년 6개월의 실형을 살고(옥중 단식투쟁으로 고문을 당함), 대학에서는 제적됨. 1977년 여름 출소 후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서 민중신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야학운동, 기독교 청년운동을 통하여 반유신투쟁에 참여함. 문동환 박사가 설립한 민중교육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야학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하고, 교재도 개발함.
1979년 ‘10.26 사태’ 이후 복권, 복학하여 1980년 9월 졸업.
1979년 교회운동권에서 만난 김덕자와 결혼. 아들 민준 출생.
1980년 9월 서울 신일고 전임강사로 교단에 섬. 정교사 발령 제의를 물리치고 교사 조직운동을 위해 신분보장이 되는 공립 발령을 신청하여 1981년 서울 서초중으로 발령이 남.
1981~1985년 서초중, 경기고, 성동고에 근무. 1981년 여름부터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 결성을 주도하고, 그후 5년 동안 전국으로 교육운동의 동지를 찾으러 다니는 일에 거의 미쳐 있었음.
(1980년대 초, 서초중 재직시 성심학교(서울 화양동성당)에서 자체개발한 국어교재로 2년간 화양동 및 성수동 여성 노동자에게 국어를 가르침)
1983년 겨울, 경기고 재직 당시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주관한 교과서의 통일정책 분석 작업을 중심적으로 참여한 것이 ‘교과서분석사건’(이른바 상록회사건)으로 비화하여 남영동 서울시경 대공분실에서 고문수사를 당하고 (사건이 유야무야 되는 바람에) 1984년 3월 성동고로 강제 전출당함.
1984년 겨울, 무크지『민중교육』기획에 참여,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져 구류 25일을 살고 파면됨. 해직동지들과 함께 교육출판기획실 설립을 주도함.
1986년 5월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결성 주도. 사무국장을 맡음. 7월 15일 안기부에 불법 연행되어 온갖 고문 끝에 이른바 ‘이병설 교수 간첩단 사건’에 얽혀 들어감. 안기부는 유상덕 동지의 저간의 활동 전부를 ‘간첩 이병설’의 지시를 받아 한 것으로 발표함. 판사는 이적표현물 소지와 대학 스승인 이교수가 간첩인 줄 알고도 만났으니 회합통신죄가 적용된다고 실형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함. 옥중에서 1987년 6월민주항쟁과 전교협 출범 등을 맞이하면서 저간의 운동을 정리, 평가해보고 앞으로 학교 현장에서 교사운동이 가져야 할 윤리적 실천목표를 정하여 출소하는 후배을 통해 최교진에게 전달함. 그것은 “첫째, 아부하지 말자. 둘째, 돈 받지 말자. 셋째, 때리지 말자. 넷째 공부(연구) 좀 하자. 다섯째,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자.”였다. 1988년 8월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 출소 후 민교협 공동대표, 전민련 결성 참여, 1989년 전교조 결성 후 2년간의 수배생활. 1991년 봄 강경대 열사 대책회의에 참여하여 또 구속됨.
1989년 3월, 한국교육연구소 설립을 주도함(준비위원장), 이후 부소장, 소장 등 역임.
1989년 전교조 대외사업국장
1990년 연대사업위원장, 민자당 해체 국민연합 집행위원
1991년 정책실장, 강경대 열사 치사사건 범국민대책회의 정책실장으로 파견, 구속
1993~1994년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정해숙 위원장과 함께 출마)
1995~1996년 전교조 부위원장 (1995년 미국 코넬대학교 초빙연구원)
1997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 출마를 준비했으나, 여의치 않아 접고 전교조 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남.
1998~2001년 대통령 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
2000년 3월,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파면된 후 15년 만에 서울 면목고로 복직함.
2003~2005년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수석전문위원
교육학 박사(교육정책) 학위 취득
2011 현재 서울 경일고 교사(조합원),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한국교육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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