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5일 금요일

생명과 저항 위한 보루이자 피난처 [2011.07.18 제869호]

2011년 7월 18일, <한겨레21> 제869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0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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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저항 위한 보루이자 피난처 [2011.07.18 제869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용산 참사에서 민간인 학살 부른 한국전쟁기 토벌작전을 보다 ②
살려고 산과 망루에 올랐으나 주검 되어 돌아온 가난한 사람들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의 새벽, 경찰의 전격적인 진압작전으로 그 전날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 5명과 작전에 투입된 전경 1명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그슬린 주검이 되었다. 그슬린 시너통과 화염병도 함께 발견됐다. 그러나 경찰은 모든 주검과 유류품을 공개하지 않은 채 곧바로 현장을 치워버렸고, 신원 확인도 하지 않고 가족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주검을 옮겨 부검했다. 사건과 관련한 모든 증거는 오직 경찰의 관리 통제하에 놓였고, 이후 용산 참사의 진실은 오직 수사 당국의 자의적 증거물 선택에 의해 마무리됐다. 대통령과 경찰에 의해 ‘떼잡이’, 혹은 ‘도심 테러범’으로 불린 망루 농성자들은 결국 법원에 의해 그들이 던진 화염병 발화 때문에 사망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철거민 농성자 9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 즉 전경 1명을 죽인 죄로 전원 유죄를 선고받았다.



청소년·여성 희생된 ‘불갑산 대보름 작전‘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20일 전남 함평과 영광 일대에 걸쳐 있는 불갑산에서 빨치산을 소탕한다는 이른바 ‘대보름 작전’이 전개됐다. 작전 뒤 군의 <전투상보>에는 무장 빨치산 500명과 비무장 빨치산 3천 명이 당시 산에 있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공비토벌사>에는 빨치산 350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58년의 세월이 지나서, 2009년 6월19일∼8월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불갑산 대보름 작전으로 사망한 이른바 ‘빨치산’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런데 발굴 현장에서는 많은 양의 탄피와 함께 빗·거울·비녀 등 여성 생활용품과 광주서중의 교구 등 10대 청소년의 것으로 보이는 유품도 발견됐다. 현장 생존자이자 당시 17살이던 문만섭씨는 그때 여기서 약 300명의 유해가 매장됐고, 가족 단위로 불갑산에 올라갔다가 총살당한 사람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군인들이 주민들을 방공호 쪽으로 몰아넣고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용산에서 망루에 올랐다가 경찰 진압 과정에서 불타 숨진 윤용헌씨의 아들 윤현구씨는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가 대충 화염병 던져서 죽은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왜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는 언론에서 말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다”고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사건 직후 국회에 출석한 서울경찰청의 김수정 차장은 “결국 자기들이 불을 지른 것”이라고 답했다. 송영길 민주당 의원이 “증거가 뭐냐” “자살행위를 했다는 것이냐”고 다시 다그치자, 김 차장은 “검찰 수사 결과가 그렇다”고 답했다. 김 차장의 답변에 화난 송 의원이 “삼남매를 키우고 용산교회 집사를 할 정도로 독실한 71세의 크리스천이 자살행위를 했다는 것이냐”고 언성을 높이자, 김 차장은 “다른 데서 지원 나온 사람이 있지 않았느냐”라고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가 이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답을 회피했다.

개인적이든 대의를 위해서든 스스로 자살을 택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사의 변함없는 철칙이다. 그런데 검찰 수사와 법원의 판결은 이 상식을 완전히 뭉개고 있다. 사망한 농성자들은 가족에게는 물론 주변 누구에게도 자신들이 막판에는 자살하려고 망루에 올라갔다고 말하지 않았고, 죽을 각오도 하지 않았다. 사망한 양회성씨의 아내는 “세상에 상대방이 나 죽이겠다고 하는데 반항 한 번 하지 않을 사람 누가 있겠느냐”고 울부짖었다.

송경동 시인은 “평지에서는 살 곳이 없어 망루를 지었다/ 35년 세를 얻어 식당을 하던 일흔둘 할아버지가/ 25년, 30년 뒷골목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할머니가/ 책대여점을 하던 마흔의 어미가/ 24시간 편의점을 하던 아내가…/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절박하다고/ 호소의 망루를 지었다”라고 시 ‘이 냉동고를 열어라’에 적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망루의 저항

용산 철거민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최하층이라기보다는 약간은 먹고살 만한 영세상인들이다. 그들은 주거권 보장 없이 강제퇴거를 당했고, 영업점을 파괴당해서 그 보상금으로는 그곳에서와 비슷한 수준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영업자들에게 삶의 터전, 즉 가게는 직장이자 집이다. 조합 쪽은 “이렇게 돈을 많이 준 데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돈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30년간 한 군데서 먹고살았다. 도대체 어디서 살라는 것이냐.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밖에 못한다”고 항변한다. 사망한 윤용헌씨의 아내 권명숙씨는 남편이 망루에 올라간 이유에 대해 “우리 작은애는 장애가 있다. 그러면(쫓겨나면) 애들은 학교를 어디로 가야 하나. 배상도 못 받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라며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호프집을 운영하던 사망한 이상림씨는 투자액의 3분의 1밖에 보상금을 받지 못했고, 복요릿집을 운영하던 양회성씨는 2억4천만원을 투자했으나 6천만원의 보상금만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장사를 해서 그곳에서 먹고살려고, 매일 계속되는 용역 직원의 폭력과 공포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억울한 심정을 국민에게 호소하려고 망루에 올랐다. 즉, 망루는 그들이 되도록 오랫동안 버티면서 경찰의 침탈에 견딜 수 있는 바리케이드였던 셈이다. 철거 용역들은 망루를 짓지 못하게 물대포를 쏘면서 갖은 방해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사건 전날인 2009년 1월19일에 가서야 엉성한 망루를 짓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철거운동단체들이 지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철거민들을 도와주지 않는 현실에서 그들은 오래 버티기 위해 외부 지원에 의존했다. 그런 그들을, 이명박 대통령은 돈 더달라고 요구하는 떼쟁이로, 철거용역은 벌레처럼 취급했고, 경찰 당국은 도심 테러범으로 몰았다. 이들에게 철거민은 시민이 아니었다.

철거민이나 노동자가 망루를 지어 저항한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멀리는 일제시기 여성 노동투사 강주룡이 올라간 평양의 을밀대 지붕도 일종의 망루요, 가까이는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올라갔고 지금 한진중공업 김진숙이 180일 이상 버티고 있는 골리앗(크레인)도 일종의 망루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기륭전자, 서울 상도동 철거 현장에서도 어김없이 망루가 있었다. 당시 상도동 철거 현장에서는 철거민이 지은 망루가 포클레인에 찍혀 무너졌고, 망루의 사람들은 살인미수로 체포됐다.

빨치산과 전철연이 유일한 원군

망루에 오른 철거민은 한국전쟁 때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그들은 이승만 정부 아래 군경의 토벌 대상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야산대’ ‘입산자’ ‘빨치산’이라 불렀다. 토벌 작전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군의 전과 보고를 보면 그들 일부는 죽창으로 무장했고, 빨치산들을 따라다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산으로 올라간 이유는 산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 당시 군경 쪽이 밝힌 ‘폭도’ 수는 어떤 경우에도 300명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토벌작전으로 희생된 사람은 수만 명이었다. 다랑쉬 굴에서 발굴된 각종 생활용품과 유해가 말해주듯이, 이들 대다수는 생존을 위해 한라산 자락으로 피신한 민간인들이었다. 당시 미군 쪽도 “제주도 주민들은 당국의 처벌이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반도 쪽에 가담했다”고 인정했다. 이들이 군의 선무공작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이유는 내려온 사람들 중 가족 1명이라도 사라진 사실이 확인되면 도피자 가족이라 해서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즉 군경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1951년 2월 불갑산 대보름 작전으로 사망한 민간인들은 그 전해인 1950년 10∼11월부터 그해 1월까지 5중대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목격하거나 듣고서 산이 차라리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해서 올라갔거나, 퇴각하는 빨치산의 권유로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당시 군과 경찰들은 어쩔 수 없이 빨치산에 밥해준 사람을 빨치산과 같이 취급해 잡아서 고문해 죽이기도 했다. 산으로 올라간 주민들은 무장한 빨치산과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군사훈련도 받고 정식 무기는 없어도 경찰이나 토벌군에 맞서려고 죽창으로 무장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공격을 위한 것이었나, 생존을 위한 행동이었나? 집에 있으면 부역자로 잡히고 자수해도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다면,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솥과 수저 등 살림살이를 챙겨 가족 단위로 입산하기도 했고, 또 빨치산과 한 무리가 된 것이다. 부역자로 처형당할 위기에 놓여 올데갈데없는 그 민초들이 1948년 전남 여순 사건 직후부터 반란군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한국전쟁 때는 장흥 유치산, 함평 불갑산으로 들어갔다.

망루와 산은 일시적인 생명 보전과 저항을 위한 보루이자 피난처일 따름이다. 어떤 체제에서도 공권력의 폭력 앞에서 당장의 죽음을 피하려고 주민들이 피난하고 저항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국가는 그들이 저항한다고 또 법을 여겼다고 해서 대화를 포기한 채 ‘비시민’, 즉 빨치산이나 테러범으로 규정한 다음,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정상 참작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토벌과 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과거의 입산자나 오늘의 철거민들은 생활인이지 투사가 아니다. 사면초가인 상태에서 빨치산과 전철연은 그들에게 유일한 원군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경찰은 무리한 진압 작전으로 생명을 살상할 위험이 있을 경우, 이들과 최대한 협상하고 이들을 내려오게 한 뒤 사건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려간 사람들이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산과 망루에 머물러 있었다. 용산 철거민 노한나씨는 용산 참사 직전에 경찰이 한 번도 왜 망루에 올라갔는지 묻지 않았으며 “‘당신들의 요구는 무엇인가’라고 묻지도 않은 채 그저 내려오라고만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오갈 데 없던 우리 이웃들

입산자들이 군과 경찰의 살해 공격에 맞서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면,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은 허무하게 해산·체포당하지 않으려고 시너통과 화염병으로 무장했다. 당국과의 대화가 차단되고, 받아주는 이웃이 없어 오갈 데 없는 우리 사회의 가난한 자는 살려고 산과 망루로 올라갔다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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