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8일 수요일

31년 전 5월 18일 나는



서울역 앞에 갔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서울역과 영등포역 앞에 비상연락을 해서 모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 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습니다. 10시가 되자 ( 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학생들이 약 500여명 모였던 것 같습니다( 며칠전이었던 서울역 집회에서는 무려 10만명이 결집했으나.... ). 누가 노래를 선창을 하자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갈월동쪽에서 진압군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캠퍼스에서 경찰을 봤을 때의 느낌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땅을 울리며 행진해 오는 군인들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광주에 투입된 그 군인들, 나중에 확인하게 되었으나 같은 복장의 계엄군이었습니다.


학생들 모여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그들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단순 해산이 아니라 체포를 하려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학생 대열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도 서부역( 지금 KTX역 뒷편) 쪽으로 뛰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버스를 타고, 봉천동 산동네에 마련된 숙소로 갔습니다.


광주의 유혈 참극은 그 다음날 전해 들었습니다. 광주 출신 친구들이 버스로 광주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가야하는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했으나 누구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일 경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삐라가 비밀리에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삐라를 뿌렸습니다.


그 후 몇개월, 공포과 분노와 좌절감.....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세월입니다.



어제 토론행사가 있어 광주에 갔습니다. 금남로의 전야제에도 참관했습니다.

광주는 축제분위기였습니다. 토론장에서는 김상봉교수를, 길거리에서는 우연히 공선옥 작가 등도 만났습니다. 과거보다는 젊은이들 사이에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의미있느 변화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의 정치사회적 절망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오늘 광주 가톨릭대 학술행사장에 갔었습니다.

이제 광주의 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를 겪은 기성세대의 수치심을 지금세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덜 무겁게, 즐겁게 광주 5.18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댓글 1개:

  1. 그날의 광주의 피흘린 선배들과 피의 짐을 진 선배들...
    그래서 저희세대의 삶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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