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석사논문 지도교수이신 고영복 교수께서 별세하셨다.
말년에 간첩사건으로 고생을 하셨다. 전쟁기 의용군 징집, 60년대에 월북했다가 남하한 삼촌을 만난것이 간첩행위까지 되어 2년 동안 영어의 생활을 했다.
또 한 사람의 분단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그는 독특한 처세를 한 분이다. 유신시절이나 5공 시절에는 어용교수로까지 불려질 정도로 박정권, 전두환 정권에 깊이 협조했다. 새마을운동을 옹호하고 정당화해주는 글도 썼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정권협조가 운동권 학생들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서울대 사회학과의 운동권 학생들 치고 그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학생시절 학생운동으로 연루되어 투옥되거나 찍혓다가 지금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몇 사람도 그의 추천이 아니면 교수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용교수와 운동권학생 보호교수라는 이 양면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는 국내파 학자였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는 비주류였다.
1982년, 내가 5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타전공학생으로 사회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그는 이미 50대 중반의 상당한 원로(?) 교수였다. 내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4.19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려고 프로포절을 제출하니 학과에는 고영복 교수를 지도료수로 배정했다.
그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기초로 친절하게 지도를 해 주셨는데, 나를 상당히 힘들게 했다.
대체로 젊은 교수는 좀 깐깐한 편이고 나이가 든 분들은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것이 보통인데
그는 예상했던 것 보다는 상당히 까다로운 교수였다.
그래서 논문을 처음부터 완전히 고쳐쓰기를 3,4 번 한 것 같다. 요즘처럼 피씨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고지 수백매를 처음부터 새로 쓴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내 논문에 대해서도 그다시 후한 점수를 주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내 석사논문은 그다시 잘 된 논문이 아니다. 정치경제학과 알튀세르 이론을 한국에 적용하려고 시작했다가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주류 부르주와 사회학의 이론을 적용하는 잡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군복부와 학교교사 생활을 하다가 수년 후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그는 이미 정년을 내일 모레 앞 둔 최고 원로교수가 되어 있었고, 퇴임한 이후에는 사회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번역거리등 일거리를 주시기도 했다. 들은 소문에 의하면 강연료 원고료 등을 한푼도 쓰지 않고 평생모아 오프스텔을 장만해서 연구소를 만드셨다고도 한다.
나도 박사과정 시절 돈이 없이 고생하다가 그의 배려로 책을 집필하여 약간 도움을 받기도 했다.
출옥후 몇 사람의 제자들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고, 위원회있을 때 한 두 번 통화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인사를 드리려 가겠다고 해도 본인이 병중이므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거절하셨다.
많은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준 고영복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그의 사회학에 대한 평가도 시작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가다가 적습니다. 제가 90년대 초반에 서울대입구역 사거리 오피스텔이 살적인데 고영복 교수님을 자주 지나가다 뵙곤 한 기억이 나네요. (위에 언급된 연구소가 그 오피스텔에 있는지라.) 저는 사회학 전공이 아니어서 자세히는 고교수님에 대해 알지는 못했고 그냥 착실하신 교수님으로 알고 있다가 간첩사건에 연루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어용이라~ 80-90년대는 참 다양한 종류의 서울대 교수님들이 존재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폴리페서보다는 한수 위셨죠.
답글삭제교수는 무슨 얼어죽을.. 그냥 빨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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