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2일 월요일

잊혀진 조직, 전노협

올해는 한국 역사상 굴직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던 해여서 유난히 기념할 일도 기억할 일도 많다. 4.19, 5.18에서 시작해서 한국전쟁, 경술국치까지 정부나 민간차원에서 숨 가쁠 정도로 기념행사나 기념학술행사 등이 연이어 개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전노협 창립 20주년이 역시 올해라는 사실이다. 전노협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가 집약된 조직적 결집체이며, 전노협 창립은 분단이후 한국의 노동계를 지배해온 한국노총 독점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큰 역사적 사건이다. 즉 전노협은 민주노조, 자주노조의 전국적인 조직체이며, 이후 민주노총과 민노당, 진보신당의 모태가 된 노동자 대중 조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노동운동사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진보정당 운동사의 관점에서도 전노협 창설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되새겨봐야 할 점이 많다.

 

전노협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새롭게 등장한 ‘민주노조’들의 전국적 결집체였지만,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당시의 조건에서 부분적으로 노동자 정치운동의 과제까지 수행하였다. 창립식 조차 당국의 탄압과 봉쇄를 피해 숨바꼭질하듯이 치러야 할 정도로 극히 엄혹한 환경 속에서 결성된 전노협은 창립 이후에도 시종 탄압과 극한 투쟁을 반복하였다. 노조라는 조직 자체가 일종의 방어적 조직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전노협은 사용자 혹은 자본의 막강한 힘에 맞서서 연대를 통해 보호막을 치려했던 신생 민주노조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사용자 혹은 자본과 대립각 을 세우는 ‘민주’ 노조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조건 하에서 전노협이 창립되었다는 것은 이후 노동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중요한 사회세력,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충돌을 일으키는 90년대 이후의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을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 전노협의 창립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도정에서 일정한 실험을 거친 지금의 시점에서 노조와 정당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진보정당은 개별 혹은 전국단위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과제를 어떻게 수렴해야하는지 등의 쟁점과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전노협 창립이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 문제는 ‘민주노조’의 계승자인 민주노총, 그리고 양 진보정당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자기 점검 과제이며, 정체성 수립을 위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난 7월 6일 열린 전노협 건설 20주년 기념 토론회는 그 행사 주체나 다루어진 내용 모든 면에서 전노협 창립의 역사적 의미를 사회에 부각시키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왜소한 감이 있었다. 발표된 논문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행사 자체를 조직노동 혹은 정당이 아닌 외곽의 몇 단체가 공동주최를 한 것도 문제였으며, 전노협 이후의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노협 창립의 의의, 전노협 창립에 기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 등 중요한 내용이 모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미처 알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나, 전노협 20주년이 되는 올 1월에 민주노총, 민노당, 진보신당에서 전노협 창립 20년을 기념하는 성명이라도 발표했는지 의심스럽다.

 

한국의 대표적 노동조합이, 그리고 노동자 정당이 전노협을 기억하지 않는데, 우리사회의 누가 전노협을 기억하고 민주노동의 역사를 기억하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민주노동운동에 헌신한 사람들, 전노협 창립과 발전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을 지금의 노동운동단체나 노동자 정당이 기억해 주지 않는데 우리사회의 누구보고 이들을 기억해 달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자신들의 역사, 자신들의 공유된 기억이 없이 사회운동이나 정치가 성공할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의 역사에 대한 공유된 기억이 없는 대중과 조직이 정체성을 가지면서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단언하건데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연구자 등 여유있는 사람들의 사치가 아니다. 기억은 곧 운동이자 정치다. 전노협 건설 20주년 기념 토론회를 보고서 여러 가지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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