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8일 수요일

민주당의 예고된 패배

예상했던 대로 민주당은 이번 선서에서 참패했다. 투표율이 높아지면 젊은층이 많이 지지해서 이길 것이라는 예상도 완전히 빗나갔다. 젊은층은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아니 지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오늘날 실업상태에 있는 청년, 비정규직으로 인생을 시작하는 청년, 결혼을 기피하는 여성들에게 과연 정치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민주당 후보들의 면면을 보라. 그것은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의사를 우롱하는 공천이었고, 선거연합의 정신을 완전히 뭉개는 공천이었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소수 정당에게 아무것도 양보한게 없다. 연합을 하면 각 후보의 지지율을 합친 득표율이 나올 것이라는 산술적 계산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사실 나는 광주에서 민노당이 이겨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민주당은 광주에서 패배했어야 했다. 광주에서 민주당은 집권당 즉 한나라당이다. 지역에서의 행태도 경상도의 한나라당과 완전히 동일하다. 광주사람들이 그래도 막판에는 민주당에게 표를 주었지만, 사실  광주, 전남에서 민주당의  패배했어야 오늘과 같이 땅짚고 헤엄치는 전라도 민주당에게 확실한 경고장이 될 수 있었다.

 

민주당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미 오래 전에 판명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민주당이 제1 야당이란 이름으로 전투력도 대안도 없이 군림하는 것이 현재 한국 정치다. 4대강 문제도 그렇지만, 천안함 조사보고서가 저렇게 많는 의혹을 남기고 있어도 싸움할 의지도 없고, 총리실 사찰 문제가 저렇게 심각한 양상으로 드러나도 제대로 투쟁할 의지도 없다. MB가 친서민운운하면서 국민들을 우롱해도 제대로 비판조차 못한다.  이번 광주에서 처럼 색깔론까지 들먹이며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정당이다.

 

MB는 싫지만 민주당도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표심이 둥둥 떠다닐 것이다. 현재 민주당의 어떤 후보가 나와도 다음 대선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어떡할 것인가? 지금부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4대강 현장의 폭행, 경찰의 직무유기 혹은 경찰의 비호?

이 땅에서 정치권력에 반대하는 일은 노골적인 공적폭력은 물론 사적폭력에서 완전히 노출될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다. 왜 사적 폭력에 노출되어야 하냐고? 경찰이 정권 혹은 힘있는 이해집단의 편을 들어서 이러한 폭력의 만연을 수수방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방이후 전혀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지난 10년 정도 약간 드문 현상이 되었을 따름이고, 또 다시 자랑스럽게 부활하였다.

 

어제 여주의 이포보 부근에서 이러한 일이 재발하였다.  4대강 사업에 찬성하는 주민이라고 밝힌 100여명이 각목을 들고 들어와 천막을 부수고 의자 등 집기를 내던졌다고 한다. 이들이 유원일 국회의원과 환경단체 간부를 각목으로 구타하는데도 주변에 있던 경찰들은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유 의원실은 “현장에 여주경찰서 경비과장이 있었는데도 경찰은 (혐의자를) 체포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다”고 주장했다. 여주경찰서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막지 못했다”며 “영상을 토대로 폭행 혐의자를 찾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 경찰의 해명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과연 이 현장에 각목을 들고 온 사람이 누구인가? 과연 4대강을 찬성하는 평범한 시민일까? 우리는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누구일지에 대해 거의 짐작할 수 있다. 과연 경찰이 이 폭력행사자들을 찾아낼지, 그들을 수사할지, 그들이 처벌을 받을 것이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의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지난 60년동안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4대 반대하는 시위자들과 이들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라도 발생했다면, 그리고 반대하는 측이 각목부대 한 사람에게라도 폭력을 행사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오늘자 조간 보수신분들에는 시위대의 폭력에 대해 대문짝만하게 보도했을 것이다.

 

그렇다. 무법천지, 즉 법이 없는 세상이다. 공권력이 한 쪽 편을 드는 세상이다. 아니 법이 있으되 오직 한쪽 편만 드는 세상이다. 힘없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은 완전히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세상이다.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강정구교수 퇴임식

어제 중앙대에서 열린 강정구 교수 퇴임식 행사에 갔었다. 퇴임식을 그가 봉직했던 동국대에서 하지 않고 중앙대에서 하게 된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동국대에서 직위해제된 상태에서 정년을 맞았다.

 

그런데 나는 한사람의 교수의 퇴임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 300명 정도는 족히 온 것 같았다. 정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의 유명대학 교수들의 경우 학계나 사회에 진출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 많은 제자들이 있고, 또 약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성대한 퇴임식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직위해제된 교수퇴임식에 이렇게 성황을 이룬 것은 드문일이다.  

 

강교수님 덕분에 나도 수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 거의 백여명 이상을 만났다.

 

아마 그가 평통사 등 평화통일 운동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향린교회, 비판사회학회, 민간인학살범국민위 등에서 회장, 대표 등 그 동안 여러 중요한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2000년대 이후 방북시 서명 사건, 통일전쟁론 등으로 감옥에 가는 등 두번이나 수난을 당하는 일을 겪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고난의 이력을 깊이 위로하고 공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언론의 프리즘에 의해 굴절된 그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를 대책없는 친북인사, 세상물정모르는 고지식하고 완고한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그는 북한, 남북관계, 한미관계 등에 대해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고지식하게 발언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가 말하듯이 냉전의 우상 속에서 그는 여전히 위험한 친북인사처럼 보일 따름이다. 물론 북한에 대해 나는 좀더 비판적이기 때문에 그는 나와 생각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족자주, 주권문제, 한미관계의 굴절, 미군주둔 등에 대한 민족문제에 대한 그의 주장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분단국가의 지식인으로 응당 제기할 수 있는 것들이다.

 

민족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보수주의자가 많지만, 그는 가족과 학교에서도 미국서 교육받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동국대 모 교수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학교의 거의 모든 교수가 그 문제의 교수를 감쌌지만, 동료인 그와 인간적 대립까지 각오하고 피해자인 여성을 옹호했던 사람이 강정구 교수였다.

 

1988년 그가 귀국해서 산사연에서 발표회를 했을 때 그 직전에 발표한 나의 논문 ( 한국현대사 연구 1의 서문)을 인용하면서 카랑카랑하게 언급하는 것을 보고 미국서 공부한 사람이 저렇게 우리와 한국현대사에 대해 비슷한 시각을 갖는 경우도 있나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후 나는 산사연 활동, 각종 학술활동을 통해 그와 수 없이 많이 만났고, 그 인연으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범국민위를 조직할 때 그를 대표로 추대하였고, 이 일을 위해 같이 여의도 앞 시위 대열에 서서 거리를 누비기도 했다.

 

하여튼  퇴임은 자유로운 학자로 다시 출발하는 것이라는 어제의 축사도 있었지만, 이제 그가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활동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

 

 

 

   

 

 

2010년 7월 22일 목요일

자살대국 한국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 최고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자살현장에 대해 마이니치 신문이 보도하였다. 그리고 양국 간의 유사성을 비교하고 있다. 

 

自殺率(人口10万人当たりの自殺者数)でみると、97年の19・8が、98年には26・9に上昇。1年で7ポイントも増えた
自殺率(人口10万人当たりの自殺者数)でみると、97年の19・8が、98年には26・9に上昇。1年で7ポイントも増えた

위 표의 설명에서 나와 있듯이 일본과 한국 모두 97년 이후 자살자가 거의 두 배 정도로 증가했다. 한국에서는 양극화라는 말로, 일본에서는 격차라는 말로 97년 이후의 사회를 설명하고 있으나 현상은 유사하다. 사회안전망의 해체와 과도한 경쟁주의다. 이 신분은 한국에서의 '우리'의 해체와 높은 자살율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자살자 중 노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에서 사회의 붕괴 즉 애초부터 사회안전망이 극히 취약한 사회에서 가족이 사실상 복지 기능을 수행하지 어려워짐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쨋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이나 14위의 경제대국인한국이 세계 최상의 자살대국이라는 점은 깊이 음미해볼만한 내용이다. 즉 자살은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탈락한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공동체의 결여에서 초래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자살율이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신문의 보도 역시 그 점을 주목하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이 비록 경제적으로는 부국의 대열에 올라섰다고 하나,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 즉 전통적 가족이 붕괴하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사회적 연대나 약자에 대한 보호의 기제가 지극히 취약한 사회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문은 한국과 일본의 공통점으로 오랜 관료정치 등 정치시스템의 유사성을 들고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안보 우산 속에서 사실상의 극우 독재 60년을 겪은 점이 이러한 취약한 사회적 토대와 크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일본도 그러하지만 한국에서도 사회 혹은 국가복지의 개념이 대단히 취약하고 그것은 진보정당의 결여, 취약한 노동운동과 직결되어 있다. 일본도 그러하지만, 한국 역시 반공주의 우산 속에서 추진한 성장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을 갖고 있는지 성찰해 봐야할 시점이다.

 

일본과 한국은 2차대전후 성공한 국가의 표본이 아니라, 고성장주의가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수반하지 않은 병든 국가일지 모른다.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대리기사의 죽음

어느 대리기사의 죽음이 전국을 분노에 들끓게 하고 있다.

술취한 차주는 대리기사를 치여 죽이고도 범행일체를 부인해서 법원에서 풀려났다. 경찰과 법원이 차주를 풀어주고도, 왜 이것을 '민감한 사안'이라고 언급하는지, '워낙 특이한 사안'이라 취급하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사건이 알려지면 해당 대리운전 회사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가기 때문에 뒷선에서 이것을 묻어두려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대리운전 기사가 아무런 힘이 없고, 경찰과 법원이 살인자를 풀어주고도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하는 한국사회의 잔인한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국회에서도 대리운전 관련 법을 만들겠다고 이미 6년전에 준비하여 상정되어 있지만, 업체의 로비 때문인지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사회의 살인, 즉 우리사회가 약자에게 가하는 살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리기사를 살해한 차주는 아무리 술이 취했다고 하나 분명히 그를 살해하거나 적어도 해칠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리기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손님인 차주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돈을 못 받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업체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고, 혹시 단골 손님들로부터 말이라도 들으면 그 업체에게 치명적인 피해가 갈 것이고, 대리기사 자신들도 일자리를 잃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권침해가 빈발하는 것 같다.

 

이번에 사망한 이동국씨의 경우처럼 대리기사의 상당수는 사업하다 실패한 중년 남성들, 사실상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 낮에 버는 돈으로는 생활이 안되어 할 수 없이 밤에 뛰는 청년들이다. 하루 밤에 아무리 많이 뛰어봐야 6차례 정도 이상을 할 수 없고, 버는 돈의 일부도 회사로 들어가니 이들이 밤새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몇 만원에 불과하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있는 대리기사는 바로 우리의 친구, 이웃, 후배, 자식들이다. 아마 이번에 이동국씨를 치여 죽게한 술취한 차주 자신도 어쩌면 대리기사의 신세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장 약한 처지에 있는 대리기사들에게 만연한 폭행, 폭언, 돈 안주기 등 반인륜적인 행태는 사실상 우리사회의 치부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나는 이 사건을 지난번 여러대학에서 발생한 이른바 '패륜녀'. "폐륜남' 사건과 유사한 것으로 본다. 즉 약육강식, 금전만능, 노동자 천시 사회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사회의 집단린치인 셈이다. 욕설을 하고 침을 뱉고  때리고 심지어는 죽여도 말을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이러한 행동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자신이나 부모, 친지들도 그러한 처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들과 다르고, 그들은 못났으며, 못났기 때문에 아루렇게 대해도 된다는 이 비뿔어진 세태의 무너진 도덕심, 고질적인 반노동자 문화가 이러한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폭력과 살인을 불러온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을 사회적 살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2010년 7월 16일 금요일

이명박 시대, 외교가 있나?

미국은 동해를 일본해라고 공식적으로 언명했다. 외교부는 동해 표현을 놓고 한미 간에 의견차이가 있는 게 현실이라며 한국의 생각을 주지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의 언론은 그동안의 우리 외교 노력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논평하였다.

 

이 내용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미국은 1948년 이후 동아시아 정치에서 일본보다 한국을 우선시 한적이 없고, 일본의 이익에 반해서 한국에 우선권을 둔 적이 없다. 일본의 패전책임을 묻고 전후 관계를 정상화한 도쿄재판이나 샌프란시크코 조약에서 한국인들은 전혀 초대받지 못했고, 한국의 입장은 고려조차 된 적이 없다. 이승만이 그렇게 반대해도 휴전회담을 성사시켰고, 프에플로호 사건 때 박정희가 그렇게 반대해도 이북에게 사과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 한미간에 의견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측 의견의 일방적 묵살이다. 아니 한국측 의견 자체의 부재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 외교를 한 적이 없다. 한미 FTA부터 패를 모두 보여주고 일방적으로 아첨하는 자세를 취한 국가와 무슨 협상이 있을 것이며, 무슨 외교관계가 수립될 수 있는가?

 

이 정부는 외교에 있어서 역대 가장 무능한 정부다. 미국과 일본에게 이처럼 손쉬운 대상도 없었다. 이승만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고개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중앙일보식 제헌절 기억

거론할 가치도 없는 글이지만, 생각하다보니 거슬려서 한 자 적는다. 어제 일자 중앙일보 칼럼에서 박효종교수는 "제헌절을 기억해야할 이유"라는 칼럼에서 헌법정신을 아우르는 화두가 있다면 ‘자유’라고 못박고서, 자유의 반대는 전제정이며, 전제정은 바로 오늘의 북한이고 따라서 천안함 사태에서 볼 수 있었듯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한 전제정권 북한에게 평화를 외치는 것은 비겁하다고 글을 맺는다.

 

 나는 그가 헌법 전문이나 헌법 전체을 읽어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독립정신, 자주독립, 정의, 인도, 동포애, 민족의 단결, 봉건적 인습 타파, 민주주의, 각인의 기회 균등,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항구적인 세계평화, 안전과 자유와 행복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나 당시 제정과정의 국회 논란 어느 구석에도 북한의 전제정을 배격하며 자유를 제일의 가치로 삼는다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진오는 자유와 평등을 기본가치로 한다는 제안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헌법전문은 물론 각 조항을 살펴보면 법앞의 평등, 신체, 사상, 거주이전 등 각종의 자유 뿐만 아니라 이익의 균점, 사회정의의 실현, 운수, 통신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의 국유화 등 그가 말하는 자유보다는 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이 더 많다. 

 

제헌헌법에는 자주독립, 동포애, 사회정의 등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이명박 정권이 전부가 반대로 가는 내용이다. 더욱이 제헌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국토방위의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는데, 이 정부의 대통령, 국무총리, 집권당 대표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난폭한 논리를 아까운 지면에 도배한 중앙일보와 박효종이 참으로 애처롭다.

제헌헌법이 중앙일보에 가서 참 고생이 많다.

반공, 반북주의라는 미신에 홀리면 모든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 사실의 왜곡도 여반장이다.  

모든 이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제헌헌법 문서 중에도 오직 자기가 읽고 싶은 내용만 보인다.

 

제헌헌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위반한 자들이 누구인가?

모두 제헌헌법을 읽어보자. 함석헌선생이 말했듯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민주당의 깊은 뜻, 장상후보 공천

민주당이 장상 최고위원을 은평을 보선 후보로 추천했다고 한다. 이재오 권익위원장의 대항마로 선택한 모양이다. 장상최고위원을 추천하게된 민주당의 내부정치는 잘 모르겠다. 열린우리당 시절 지역구 차원의 밑으로부터의 공천 실험이 실패로 끝난 마당에 새로운 정치실험이 실종된 가운데 나온 구태의연한 공천인 것은 분명하다. 

 

누구도 장상씨가 이재오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공천주체인 민주당 지도부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깊은 뜻을 읽기 위해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볼 수도 있다. 패배를 각오하고 장상을 추천할 때는 뭔가 깊은 뜻이 있지 않고서는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번에 이재오를 당선시켜 박근혜를 확실히 죽이게 하는 전략의 일환인가? 아니면 선거는 지그재그이므로 이번에 한나라당을 이기게 해서 국민들을 긴장시키고 민주당을 정신차리게 해서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전략인가? 그런 속 깊은 뜻을 갖고서 장상을 공천한 것일까?

민주당의 고단수 정치인가?

 

하여튼 이해하기 힘들다. 집권을 포기한 집단인지, 아니면 고도의 집권전략인지?

 

 

 

2010년 7월 12일 월요일

잊혀진 조직, 전노협

올해는 한국 역사상 굴직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던 해여서 유난히 기념할 일도 기억할 일도 많다. 4.19, 5.18에서 시작해서 한국전쟁, 경술국치까지 정부나 민간차원에서 숨 가쁠 정도로 기념행사나 기념학술행사 등이 연이어 개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전노협 창립 20주년이 역시 올해라는 사실이다. 전노협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가 집약된 조직적 결집체이며, 전노협 창립은 분단이후 한국의 노동계를 지배해온 한국노총 독점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큰 역사적 사건이다. 즉 전노협은 민주노조, 자주노조의 전국적인 조직체이며, 이후 민주노총과 민노당, 진보신당의 모태가 된 노동자 대중 조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노동운동사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진보정당 운동사의 관점에서도 전노협 창설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되새겨봐야 할 점이 많다.

 

전노협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새롭게 등장한 ‘민주노조’들의 전국적 결집체였지만,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당시의 조건에서 부분적으로 노동자 정치운동의 과제까지 수행하였다. 창립식 조차 당국의 탄압과 봉쇄를 피해 숨바꼭질하듯이 치러야 할 정도로 극히 엄혹한 환경 속에서 결성된 전노협은 창립 이후에도 시종 탄압과 극한 투쟁을 반복하였다. 노조라는 조직 자체가 일종의 방어적 조직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전노협은 사용자 혹은 자본의 막강한 힘에 맞서서 연대를 통해 보호막을 치려했던 신생 민주노조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사용자 혹은 자본과 대립각 을 세우는 ‘민주’ 노조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조건 하에서 전노협이 창립되었다는 것은 이후 노동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중요한 사회세력,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충돌을 일으키는 90년대 이후의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을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 전노협의 창립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도정에서 일정한 실험을 거친 지금의 시점에서 노조와 정당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진보정당은 개별 혹은 전국단위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과제를 어떻게 수렴해야하는지 등의 쟁점과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전노협 창립이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 문제는 ‘민주노조’의 계승자인 민주노총, 그리고 양 진보정당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자기 점검 과제이며, 정체성 수립을 위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난 7월 6일 열린 전노협 건설 20주년 기념 토론회는 그 행사 주체나 다루어진 내용 모든 면에서 전노협 창립의 역사적 의미를 사회에 부각시키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왜소한 감이 있었다. 발표된 논문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행사 자체를 조직노동 혹은 정당이 아닌 외곽의 몇 단체가 공동주최를 한 것도 문제였으며, 전노협 이후의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노협 창립의 의의, 전노협 창립에 기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 등 중요한 내용이 모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미처 알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나, 전노협 20주년이 되는 올 1월에 민주노총, 민노당, 진보신당에서 전노협 창립 20년을 기념하는 성명이라도 발표했는지 의심스럽다.

 

한국의 대표적 노동조합이, 그리고 노동자 정당이 전노협을 기억하지 않는데, 우리사회의 누가 전노협을 기억하고 민주노동의 역사를 기억하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민주노동운동에 헌신한 사람들, 전노협 창립과 발전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을 지금의 노동운동단체나 노동자 정당이 기억해 주지 않는데 우리사회의 누구보고 이들을 기억해 달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자신들의 역사, 자신들의 공유된 기억이 없이 사회운동이나 정치가 성공할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의 역사에 대한 공유된 기억이 없는 대중과 조직이 정체성을 가지면서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단언하건데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연구자 등 여유있는 사람들의 사치가 아니다. 기억은 곧 운동이자 정치다. 전노협 건설 20주년 기념 토론회를 보고서 여러 가지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2010년 7월 7일 수요일

김종익 사건, 학살자의 논리가 다시 등장.

김종익 사건의 전말은 명확하다.

그는 2008년 총리실 조사를 받을 당시  촛불시위 지원금을 냈는지, 이광재 현 강원지사와 어떤 관계를 주로 질문 받았으며, 아무런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회사 지분을 포기하고 회사를 떠났다.

그는 이명박이 "1만 명의 촛불누구 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라고 말한 이후 그리고 검찰의 박연차 정치자금 수사가 진행되던 시점에 이광재의 정치자금 지원 여부를 주로 추궁받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블로그에 쥐코 동영상 올린 사실로 조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이명박의 촛불시위 배후 규명 지시의 일환으로, 그리고 전 정부 핵심인사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의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었으며, 그 모든 과정은 철처하게 현 정부의 의지 하에 불법 강압에 의해 진행되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이 사건은 총리실의 공직자윤리지원관실 단독으로 진행된 사건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사건의 진실을 호도하면서 학살의 논리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다.

조해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지난 정권 실세와 결착돼 후광을 누리고 특정 이념에 치우쳐서 반정부 활동을 해온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평범한 시민, 은행인 출신 사업가로 부각시키기 위해 화면조작까지 한 의혹이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김종익씨 인터뷰 장면에서 김씨 소유 서적들의 제목을 감추려고 화면 조작을 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며 "밝혀진 서적들은 '혁명의 연구', '김일성과 민주항쟁', '조선노동당 연구', '사회주의 개혁과 한반도'같은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PD수첩이 이 서적 제목들을 감추려고 한 것은 김씨가 PD수첩 말처럼 '평범한 시민'이나 '평범한 은행원 출신 사업가'가 아니라 특정 이념에 깊이 빠진 편향된 사고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시청자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총리실 공직감찰팀에 제보됐던 사실에 따르면 김종익씨는 노사모 출신으로 이광재 전 의원의 선거운동을 했고, 권력의 후광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사람으로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방하고 광우병 시위를 부추기는 등 반정부 활동을 한 것으로 돼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언론들은 ‘MBC 에 등장한 김 전 대표의 인터뷰 영상에서 그의 책장에 꽂힌 책들 중 진보 성향의 사회과학 서적이 많았다’ ‘김 전 대표가 노사모 회원이고 후원금도 정기적으로 냈다’는 식의 보도를 내보내 사건의 본질을 진보·보수 논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가 이렇게 범상치 않은 진보인사이므로 조사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해고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무서운 논리다.

한 사람의 생존권을 불법적으로 박탈하고도 그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정신차리자. 학살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