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쓴 글 하나 올립니다. 6년이 지난 후 변한 것이 없어서 현실을 한탄합니다.
하루살이 나라
몇년 전 “일본에는 왜 싱크탱크가 없는가”라는 보고서를 주마간산 격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일본이 싱크탱크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미국과의 특수 관계 즉 미국의 우산 아래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펴기 어려운 ‘정상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핵심, 즉 안보와 경제를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정치적 종속 국가에서 독자적인 싱크탱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한국 역시 그런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는 정부, 정당, 기업, 언론, 시민단체, 노조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체 싱크탱크가 없다. 정책이 논란이 되면 언제나 기초연구에 몰두해야 할 대학의 교수들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일회용으로 사용한다. 그러니 10년 앞을 내다보는 일관된 정책대안은 물론, 2~3년 앞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도 거의 찾을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풍토다.
나는 1990년대 중반 ‘지구화’ 담론이 유행할 무렵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다. 지구화는 당시 온 한국정치를 휘감는 유행이자 바람이었지만, 정치권이나 학계에서, 한국처럼 재벌이 경제의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 특히 미국과 ‘특수 관계’에 있으며 동북아 분단국가라는 독특한 입지에 있는 국가에 지구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오직 미국발 지구화 담론의 번역물과 지구화와 시장경제가 가져올 장밋빛 미래에 대한 찬양만이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노벨상 경제학자인 스티글리츠가 지적했듯이 97년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당시 한국의 경제 관료나 주류 언론은 그후 국제통화기금 스스로도 잘못되었다고 실토했던 당시의 무리한 구조조정 요구에 대해 입도 벙긋 못했다. 미국발 지구화 담론을 진리인 양 받아들인 우리 지도층의 지적인 무능력이 그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사실 미국의 세계 지배는 다니엘 벨이 말했듯이 대학과 지식의 힘에 기초한다. 대학은 기초연구를 하고 여러 싱크탱크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여 온 세계에 팔아먹고, 온 세계 엘리트와 대중들의 머리를 지배한다. 미국의 보수적 지식인 커티스는 영국과 달리 미국은 인종·민족적으로는 미국인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미국인’인 각 나라의 정치가, 학자, 관료들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이 모든 문제의 정답이라면 미국에 유학 가서 미국학자들에게 배워 그들이 세운 이론과 정책을 수입하고, 잘 안 풀리면 미국 학자 불러서 강의 듣고, 그들의 책을 빨리 번역하면 된다. 한국처럼 그의 분석이 잘 맞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 결과로 아이엠에프 이후 오늘 한국의 대기업은 대부분 외국 투자자의 손에 넘어갔다.
보수세력이 대통령과 의회를 장악했던 과거에는 ‘개혁세력’은 힘이 없어서 생각을 펴지 못한다고 변명했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일관된 방침과 노선만 있으면 많은 일을 벌이거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정권이 이렇게 죽을 쓰는가 우리당은 창당 무렵에 정책연구소 설립을 가장 중요한 활동방향으로 설정하였으나 아직까지 종무소식이다. 국가발전을 위한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요행수로 집권해서, 과거 정권처럼 정치적 힘만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말인가 사실 이 정부는 정책 일반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학 정책, 학문정책, 지식인 정책이 없다. 각 분야 전문가들 위원회에 불러놓고 아이디어 듣는 것이 정책 생산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요컨대 한국에는 미래를 체계적으로 고민하는 싱크탱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집단도 없다. 21세기에도 강대국 눈치만 보며 하루살이처럼 살자는 이야기인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일본에는 한국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각 분야에 풍부한 전문가의 풀이 있다. 배짱, 오기, 정치력으로 이 냉혹한 세계에서 버틸 수는 없다. 책임 있는 정책집단이 없이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04.7.24. 한겨레신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