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7일 월요일

광주 5.18과 나

1980년 5월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다. 학년으로 따지면 4학년이었지만, 1학년을 두 번다녀서( 77년 시위관련 무기정학 당함) 3학년 재학중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학이 학번 중심으로 움직였으므로 나는 학교에서는 4학년 대접을 받았다. 나는 학회(운동권 서클) 의 주요 선배이기는 했으나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 학교에서 운동의 주요 주동자급으로 분류될 정도의 역할은 하지 않았고, 1960년 4.19 이후 5.16 반동을 맞았듯이 어떻게 하면 또한번 그런 일을 겪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학교에서 학술행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두환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쿠데타를 통해 판을 뒤집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다.

 

5월 17일 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발표가 있었을 때 나는 하숙집을 빠져 나와 친척집에 갔다. 계엄선포 시 학생들에게 전달된 행동지침은 다음날 10시 서울역에 모인다는 것이었다. 5월 18일 아침 나는 서울역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 며칠 전에 수만명이 모였던 서울역 광장에 실제 모인 사람은 몇 백명 정도에 불과했다. 학생들 중 누구가 노래를 선창하면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남영동 쪽에서 뛰어오는 계엄군을 보았다. 바로 여러 사진에서 광주 진압시 동원된 군인들과 동일한 복장을 한 그러한 군인들이 군화를 철걱거리며 총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 학교 데모 현장에서 전경들은 수 없이 많이 보았지만,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진압하러 오는 것은 처음 보았다. 머리가 뻣뻣이 서는 느낌이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10분도 안되어 서울역의 데모대는 해산당하고 말았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갔고, 버스에 겨우 올라서 다시 친척집으로 갔다. 저녁에 몇 명의 동료와 만났을 때 영등포 시위 현장에서 잡힌 학생들이 거의 초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신말기 데모진압과는 성질이 다르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20일 무렵 광주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내 귀를 의심할만한 끔찍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서울역이나 영등포에서 벌인 시위가 광주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고, 군은 서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울의 광주 출신 학생들이 광주로 내려가려한다는 이야기도 들였다. 우리도 같이 내려가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21.22일 경 쯤 나는 광주에서 올라온 삐라를 보았다. 어떤 루트인지는 모르나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정말로 믿기 어려운 내용이 담긴 삐라가 서울의 학생들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각각 그 삐라 배포를 할당받았다. 나도 몇 장을 주택에 집어넣는 등의 방식으로 뿌렸다. 그러나 겁많았던 나는 다 뿌리지도 못하고 남은 삐라를 몰래 불태워 버렸다. 분노와 부끄러움을 주체할 수 없었으나, 다른 편으로는 뿌리다가 잡히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역시 갖고 있었다. 

 

28일 경 광주가 계엄군에게 다시 장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슬픔과 절망감에 빠졌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온다고는 예상했지만, 문명국가에서 그러한 학살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슬픔, 분노, 주체할 수 없는 연민, 세상의 무관심에 대한 절망 등이 교차하였다.

 

6월 13일 단성사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 단성사에 또 나갔는데, 역시 5분도 안되어 진압, 해산되었다.

그 해 여름은 절망과 비탄의 나날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거의 1년동안 신문과 TV를 보지 않았다. 광주 5.18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당시 나도 투쟁의 최선두에 서지는 못했지만 역시 그 시대의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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