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5일 목요일

폭동 없는 한국은 좋은 나라? [2011.08.29 제875호]

2011년 8월 29일, <한겨레21> 제875호에 올라온 기획 기사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2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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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 없는 한국은 좋은 나라? [2011.08.29 제875호]

[기획2] 강한 국가, 순치된 국민, 게토의 부재, 문민 전통 등이 폭동을 막는 구실… ‘묻지마’ 범죄와 자살로 고통을 드러내지만, 집단행동 없으면 문제 공론화 기회도 없어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모를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로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디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디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거예요.”
1977년 발표된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는 주인공 권씨의 진술을 통해 1970년대 빈민가의 소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배경은 1971년 8월10일 지금의 경기도 성남에서 일어난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서울 청계천 일대에 거주하다 강제 이주된 철거민들이 당국의 방치와 가혹한 행정 조처에 반발해 일으킨 소요 사태로 주민과 공무원, 경찰 등 수십 명이 다치고 관용차와 버스, 관공서가 불타고 파괴됐다.


광주대단지 사건, 사북 사태


소설에서 권씨는 집 한 채 마련할 요량으로 철거민 딱지를 사들였다가 당국의 전매금지 조처로 궁지에 몰린다. 이웃들의 강권으로 주민대책위에 발을 들여놓지만, 대학을 나와 서울의 출판사에 근무하는 그로선 못 배우고 가난한 이웃들의 집단행동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시위가 벌어진 날도 그는 서울로 몸을 피하려다, 전복된 삼륜차에서 쏟아진 참외를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군중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 ‘나체화 같은’ 장면에서 주인공은 그들의 행동을 밑에서 떠받치는 ‘무시무시하게 절실한 무엇’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가 징역까지 살게 된다.



주인공이 언급한, 군중의 행동을 떠받치는 ‘무시무시하게 절실한 무엇’의 실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도덕적 분노나 민주 회복을 향한 정치적 열망과는 거리가 먼, 빈곤과 굶주림, 출구가 없다는 절망,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자각에서 분출되는 집단적 분노다. 소설의 배경이 된 광주대단지 사건이 전형적인 ‘빈민 폭동’으로 분류되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 폭동은 사회적 저항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집합행동이다. 구조적 요인이 작용하지만, 발생 과정이 우발적이고 폭행·파괴·방화 등 물리적 폭력이 동반된다. ‘자연발생적인 집합행동’이란 점에서 봉기·항쟁과 유사하지만, 폭동은 지도부가 없거나 그 역할이 미미할 뿐 아니라 이슈나 목표에 대한 참여자들의 공유도가 낮고 행동의 지속 기간이 짧다는 점에서 이 둘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등장한 대규모 집합행동에서 ‘폭동’으로 분류할 만한 사건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 기간을 한국전쟁 이후로 제한하면, 광주대단지 사건과 함께 1980년 초 강원도 태백에서 일어난 사북 사태 정도가 꼽힌다. 일부 극우세력이 ‘1980년 광주’에 대해 ‘무장폭동’이란 꼬리표를 붙이려 했지만, 광주는 이슈와 목표에 대한 공유 정도가 높았고, 집단 내부에서 사적인 폭력 행사가 철저히 통제됐다는 점, 목적의식적인 지도부의 지휘 아래 저항이 장기간 지속됐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민중항쟁’에 속한다는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등장한 뒤 집회·시위 현장에서 투석이나 화염병 투척 같은 물리적 폭력이 사라지는 양상이 두드러지는데, 2002년 겨울 처음 등장한 뒤 ‘2000년대식 항의’의 문화적 우세종으로 자리잡은 촛불집회가 대표적이다.


우리 안의 합법, 뿌리 깊은 보수


대체 왜 한국에서는 유럽이나 다른 제3세계 국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폭동 형태의 저항이 드물게 나타나는 것일까. 적잖은 학자들이 한국의 저항문화가 지닌 독특함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정진상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문민 우위의 전통에서 비롯된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꼽는데, 저항 과정에서 폭력이 빚어질 경우 배경이나 동기, 목적과 무관하게 폭력 행사의 주체에게 도덕적 비난이 집중돼온 역사적 경험이 저항세력의 자기통제와 규율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는 그것을 ‘뿌리 깊은 보수주의’로 규정한다. 대표적인 예가 2008년 촛불집회 때 광화문 네거리의 컨테이너 차단선을 넘어갈 것인지를 두고 시위대 내부에서 벌어진 ‘명박산성 논쟁’이다. 이 교수는 말한다. “진보세력조차 공동체의 룰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법을 내면화하고 있는 거다. 개인과 공동체, 개인과 국가를 대등하게 사고하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한국에선 여전히 (공동체에 순응하는) ‘국민’이 다수고, ‘시민’은 소수다.”

이항우 충북대 교수(사회학)는 이를 ‘합법·비폭력 강박증’이라 꼬집는다. 이 교수는 이런 강박증이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다고 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정당성을 지닌 명실상부한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니 정치적 항의나 불만의 표출 방식도 독재정권 시절과는 달라야 한다’는 사고가 시민사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1990년대 중·후반 기든스·하버마스류의 ‘대화 민주주의’가 진보세력의 민주주의관에 거스를 수 없는 흐름처럼 자리잡은 것도 이런 강박을 강화한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폭동을 예외적 항의 방식으로 만든 또 다른 요인은 국가의 강한 억압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국가는 ‘강한 국가’였다. 국가 기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조선 말에도 관은 민란이 발생할 때 일단 요구 조건을 들어준 뒤 주동자를 가려내 가혹하게 처벌했다. 해방 공간과 정부 수립 직후까지 빈발했던 농민봉기와 도시폭동에 대해선 공권력의 철저한 사후 응징이 이뤄졌다. 군사정권의 등장은 이런 흐름을 한층 강화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승만 정권 말기까지 ‘준폭동’ 형태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는데, 5·16 쿠데타 이후에는 사실상 맥이 끊기고 청원이나 합법적인 집회·시위 형태가 지배적인 방식이 된다”며 “사회 하부 단위까지 통제와 동원이 이뤄진 결과”라고 진단했다.

장기간에 걸친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 사회적 결속의 원천이던 공동체가 산산조각 나버린 유럽과 달리, 공동체의 규율과 연대의식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로 거론된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의 해석이다. “이번에 폭동이 일어난 영국의 경우 197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원리로 자리잡으면서 가족이 해체되고, (교회·노조·학교·지역사회 등이 지탱해온) 공동체적 유대가 완전히 깨져버린 상태다. 그와 달리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심각한 위기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적 연대의식과 윤리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어, 유럽의 폭동에서와 같은 심각한 폭력과 일탈은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이택광 교수도 혈연·지연·학연 등 미세하고 촘촘한 연줄망으로 이어진 네트워크 구조가 ‘질서의 안전판’ 구실을 한다고 진단했다.


폭도 대신에 잉여가 되는


계층·인종집단 사이의 공간적 분절이 영국이나 프랑스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점도 우리 사회에 폭동이 드문 이유다. 폭동과 공간적 분절의 상관성은 광주대단지 사건이나 사북 사태가 빈민과 광부의 집단거주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의 악명 높은 도시 재개발 정책은 하층민 거주 지역의 지속적인 파괴를 통해 집단적 소요 발생의 공간적 토대를 약화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실제 1960년대 청계천이나 1970~80년대의 구로·가리봉·봉천 등지에 빈민과 노동자들의 집단주거지가 만들어졌지만, 주민들의 이동 주기가 짧고 재개발이 빈번히 이뤄진 까닭에 영국 런던 폭동의 근거지인 토트넘이나 2005년 프랑스 파리 폭동의 진원지인 방리유처럼 지리·정치·문화적으로 게토(Ghetto)화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선 유럽에서와 같은 도시 폭동이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해도 좋을까.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는 ‘대규모 사회적 저항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폭동과 같은 무정부적 형태로 분출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대규모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는 판단의 근거는 양극화와 사회적 배제의 심화를 보여주는 각종 사회지표들이다. 지난해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표한 ‘세계 임금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6%로, ILO가 임금 통계를 입수한 14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 지난 6월 통계청 조사를 보면,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의 비율은 2001년 4.3%에서 지난해 11.5%로 껑충 뛰었다. 청년실업 또한 심각하다. 지난 7월 한국의 청년실업률은 7.6%로 영국의 20%보다 낮지만, 주당 36시간 미만 취업자와 취업준비자, 취업 포기자 등을 더하면 최대 30%에 달한다.

문제는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지배하는 시대에 ‘실업’은 일시적 상태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영구 상태가 됐다. 이제 사회의 정상 부문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단순한 빈곤층이 아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셈해지지 않는 ‘잉여’ ‘쓰레기’가 되어 사람들의 인식과 시야에서 말소되고 추방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민폐’로 간주되는 이들은 소요나 폭동을 일으킬 만큼 적극적이지도 않다. 기껏해야 불특정 다수를 향해 위해나 테러를 가하거나(‘묻지마’ 범죄), 자신의 생명을 파괴(자살)한다. 국가는 이들을 보호하고 복귀시려는 사회정책보다, 격리하고 추방하는 행형정책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범죄에 대한 관용 없는 처벌이 강조되고, 치안과 안전에 대한 고려가 인권보다 우선시된다.


파편화되면 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대다수 ‘잉여’들이 그러하듯, 사회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조용히 눌러 삭이거나 비뚤어지고 개인화된 방식으로 분출하는 것(범죄·자살)이, 폭력적이고 무질서하지만 집단적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소요·폭동)보다 낫다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폭동이 일어나면 그 원인이 된 사회적 현실이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공론화되는 계기라도 마련된다. 하지만 그 고통을 삭이거나 개별화된 방식으로 해소하려 할 때 변하는 것은 없다. <새로운 빈곤>을 쓴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한다.

“오늘날의 빈곤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자신들의 고통을 공적인 관심의 문제로 만들지 못하거나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사라지면 대중의 의식에서도 사라진다. 민폐로 전락한 하나의 현상 전체를 제거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윤리적인 마음이 침묵하고, 공감이 사라지고, 도덕적 장벽이 걷힐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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