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3일 수요일

유상덕 선생님 별세

비가 많이 쏟아지는 저녁입니다.

지금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유상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내일이 발인이라는 데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친구로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멀리 있어 문상도 못 갔습니다.
전교조 사람들과도 최근에는 별로 교분이 없고, 학교 선후배들도 잘 만나지 않다 보니 내게는 문자하나
오지 않았고, 그 동안 그렇게 투병중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6시에 노총에서 회의가 있어 일찍 나오다 보니 오늘자 신문에 난 것도 몰랐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1981년 서초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실 때 학생인 내가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운동권의 거의 전설적인 선배였습니다. 그 때 서초중학교 앞 식당에서 교육운동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후 그는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고생하셨고, 이후 전교조 창립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나는 89년 교사직을 떠나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고, 교육운동, 교사운동과 멀어졌습니다.
전교조 운동을 함께하지 못하고 연구자의 길을 걸은 것에 대해 언제나 빚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오다가다 그를 여러번 만난적이 있고,영등포의 한국교육연구소에 간 것도 기억납니다.
또 민간인학살 범국민위 만들 때도 그를 임원으로 추대하기도 했습니다.부친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부드럽고 다감한 선배였습니다. 그는 한국 교육운동, 교사운동의 산 증인입니다.
그런데 군사정권 시절 여러분 투옥과 고문을 겪으면서 몸이 너무 많이 망가진 것 같습니다.
왜 고생한 사람들은 이렇게 일찍 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차피 한 번 가는 인생이지만, 많이 정말 많이 안타깝습니다.
하능에서 편히 쉬세요. 상덕이형.



유상덕 선생님이 살아온 길




1949년 여름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의 전투가 벌어지던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덕유산 자락 용추사 계곡 연촌부락에서 태어남.
(부 : 유태문 劉太文) 태어난 지 약 한 달 후 아버지는 낮에 들일을 하다가 끌려가 함양읍 근처 당그래산 아래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됨. 집단학살의 구덩이에서 시신을 찾지 못함. (국군 5연대의 함양 양민 학살 사건). 난리 통에 어머니는 형제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개가함. (이후 할머니와 삼촌댁에서 자람. 할머니는 공부를 안 시키려고 해서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 안의중을 나와 고학으로 거창고를 다님.)
1969년 서울대 사대 지리과 입학, ‘경암회’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관심 가짐.(3학년 때 경암회 회장) 1학년 때부터 야학 강학으로 활동.
1971년까지 서울대 사대 학생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다가 그 해 10월 박정희가 위수령을 선포했을 때 ‘전국 대의원 학생회’를 구성하고 명동에서 시위를 계획하다 구속된 후 강제 징집됨.
1974년 만기 제대 후 복학하여 채광석, 박부권 등과 ‘야학문제연구회’를 만든 후 서울 지역의 고대, 연대 등의 야학교사들과 야학문제 써클 연합체를 조직함.
1975년 김상진 열사 추모제 사건(이른바 오둘둘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6개월의 수배생활 끝에 구속, 1년 6개월의 실형을 살고(옥중 단식투쟁으로 고문을 당함), 대학에서는 제적됨. 1977년 여름 출소 후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서 민중신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야학운동, 기독교 청년운동을 통하여 반유신투쟁에 참여함. 문동환 박사가 설립한 민중교육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야학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하고, 교재도 개발함.

1979년 ‘10.26 사태’ 이후 복권, 복학하여 1980년 9월 졸업.
1979년 교회운동권에서 만난 김덕자와 결혼. 아들 민준 출생.
1980년 9월 서울 신일고 전임강사로 교단에 섬. 정교사 발령 제의를 물리치고 교사 조직운동을 위해 신분보장이 되는 공립 발령을 신청하여 1981년 서울 서초중으로 발령이 남.
1981~1985년 서초중, 경기고, 성동고에 근무. 1981년 여름부터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 결성을 주도하고, 그후 5년 동안 전국으로 교육운동의 동지를 찾으러 다니는 일에 거의 미쳐 있었음.

(1980년대 초, 서초중 재직시 성심학교(서울 화양동성당)에서 자체개발한 국어교재로 2년간 화양동 및 성수동 여성 노동자에게 국어를 가르침)
1983년 겨울, 경기고 재직 당시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주관한 교과서의 통일정책 분석 작업을 중심적으로 참여한 것이 ‘교과서분석사건’(이른바 상록회사건)으로 비화하여 남영동 서울시경 대공분실에서 고문수사를 당하고 (사건이 유야무야 되는 바람에) 1984년 3월 성동고로 강제 전출당함.
1984년 겨울, 무크지『민중교육』기획에 참여,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져 구류 25일을 살고 파면됨. 해직동지들과 함께 교육출판기획실 설립을 주도함.
1986년 5월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결성 주도. 사무국장을 맡음. 7월 15일 안기부에 불법 연행되어 온갖 고문 끝에 이른바 ‘이병설 교수 간첩단 사건’에 얽혀 들어감. 안기부는 유상덕 동지의 저간의 활동 전부를 ‘간첩 이병설’의 지시를 받아 한 것으로 발표함. 판사는 이적표현물 소지와 대학 스승인 이교수가 간첩인 줄 알고도 만났으니 회합통신죄가 적용된다고 실형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함. 옥중에서 1987년 6월민주항쟁과 전교협 출범 등을 맞이하면서 저간의 운동을 정리, 평가해보고 앞으로 학교 현장에서 교사운동이 가져야 할 윤리적 실천목표를 정하여 출소하는 후배을 통해 최교진에게 전달함. 그것은 “첫째, 아부하지 말자. 둘째, 돈 받지 말자. 셋째, 때리지 말자. 넷째 공부(연구) 좀 하자. 다섯째,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자.”였다. 1988년 8월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 출소 후 민교협 공동대표, 전민련 결성 참여, 1989년 전교조 결성 후 2년간의 수배생활. 1991년 봄 강경대 열사 대책회의에 참여하여 또 구속됨.

1989년 3월, 한국교육연구소 설립을 주도함(준비위원장), 이후 부소장, 소장 등 역임.
1989년 전교조 대외사업국장
1990년 연대사업위원장, 민자당 해체 국민연합 집행위원
1991년 정책실장, 강경대 열사 치사사건 범국민대책회의 정책실장으로 파견, 구속
1993~1994년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정해숙 위원장과 함께 출마)
1995~1996년 전교조 부위원장 (1995년 미국 코넬대학교 초빙연구원)
1997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 출마를 준비했으나, 여의치 않아 접고 전교조 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남.
1998~2001년 대통령 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
2000년 3월,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파면된 후 15년 만에 서울 면목고로 복직함.
2003~2005년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수석전문위원

교육학 박사(교육정책) 학위 취득
2011 현재 서울 경일고 교사(조합원),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한국교육연구소 이사장

2011년 7월 10일 일요일

장하준 교수의 아름다운 기부

장하준 교수가 포니정 혁신상으로 받은 1억원 전액을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투기자본감시센터, 한국이주인권센터에 기부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마땅히 국가가 지원해야 하는데도 외면하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단체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모든 기부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처럼 상금의 전액을 운동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장하준 교수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고, 책이 많이 팔려 인세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도 해도 있는 사람들이 더 인색한 것이 세상 인심아닌가? 기업들도 자기들에 장기적으로 이익이되거나 이미지 제고에 도움되는 일 아니면 단 돈 1원도 내지 않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하여튼 오랫만이 듣는 매우 훈훈한 소식이다. 운동단체가 살아야 세상이 바로 잡힌다. 사회운동가들이 먹고 살수 없는 세상이 되면 정치도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이 정부 들어서 운동단체들 돈줄이 말라 거의 고사직전에 있다. 기업가 이명박은 운동단체를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기부가 더욱 빛난다. 앞으로 복지단체가 아닌 운동단체에 기부하는 일이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 7월 7일 목요일

타살성 자살 - 해병대 사고를 보고서

평창 동계 올림픽 유지에 온 나라가 환호를 하고 있다.
예상 수입만 수십조원이 된다고 한다. 그래 돈 벼락 좀 맞아보자. 축하할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애 많이 썼다니 수고를 치하하고 싶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 좋은 일 아닌가? 나는 이 일에 대해 칭찬을 주저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우울한 소식하나 지나칠 수 없다. 오늘 자식을 군에 보냈다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식의 주검을 맞이하는 부모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에서 일어난 사고다.
'기수열외', 구타와 왕따.... 이게 언제 적 이야긴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관심사병'들이 일이킨 일이라고 그들은 또 변명할까?

1950년부터 2005년까지 비전투상황 (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제외)에서 사고로 사망한 군인이 약 6만명, 자살자가 약 1만 2천명이다.
이 통계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나라 군대는 사람 목숨 파리목숨처럼 간주하는 곳이다.
군대서 죽는 것은 개 값도 못받는 일이다. 80년대 초 내가 군대 갈 데 들었던 이야기다.
군인은 인간이 아니다. 군발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청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군대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한국 군대는 기본적으로 남의 집 귀한 자식 보살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병은 전투 상황에서 총알받이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이게 포병 사격지휘병 출신 나의 판단이다.
그래서 부자집, 힘있는 집 자식들은 수단과 방법을 써서 군대 빠진다. 죽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내의 자살 사고는 타살성 자살이다. 군 조직 자체가 사고와 자살로 몰아간다.
기수열외, 그렇다 마음씨 여리고 내성적이고 해서 하급자들 통제 잘 못할 수 있다.
사창가 같이 가자는 데 애인 있다고 안 갈 수 있다. 아니 가지 않을 자유가 있다.
왜 그런 사람들이 군대에서 버틸 수 없는가?
어찌 21세기에 이런 조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군에서 자식을 잃은 6만명의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아직도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어머니들이여.
하늘 나라가 너희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2011년 7월 6일 수요일

[세상 읽기] 엘리트 범죄


2011년 7월 5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857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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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없는 엘리트 범죄자들은
자신이 똑똑해서 그 지위와 돈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착각한다

오늘도 부산저축은행 예금자들은 초량동 본점 안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몇 달이 지났건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요란스럽게 칼을 빼들었던 검찰은 특혜인출된 금액이 고작 85억원밖에 안 된다고 중간발표를 하고, 이 모든 금융비리, 감독 직무유기 사건에 대한 수사를 적당히 마무리하려 한다. 더구나 변호사로 전직한 전 중수부장과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들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쪽에 서서 3억원의 착수금까지 받았다고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소처럼 일했습니다. 파출부, 세차장, 폐지 수집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장애인 남편과 살면서 지난 30여년 동안 이렇게 번 돈을 매일 저축은행에 넣었다는 박성자(65) 할머니, 후순위 채권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직원의 권유로 돈을 맡겼다가 2400만원이란 돈을 날렸다. 별로 큰돈이 아니라고? “내 평생의 세월이 담긴 그 돈은 나와 남편의 생명 같은 돈입니다. 내 돈 돌려주세요. 나는 그 돈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녀의 2400만원은 그녀의 생명과도 같고 10년간 뿌려진 저축은행 로비자금 1조원 이상의 무게를 갖고 있다.

부산저축은행의 경우 피해자의 90%가 서민 노령층이고 1억원 미만의 예금주가 97%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브이아이피(VIP) 고객들인 재력가와 법조인, 감독당국 관련자들은 미리 돈을 빼내었다. 금융비리의 주역인 대주주·임원, 금감원·감사원 등 감독기관 고위 공직자들은 우리 사회 최고 학력의 ‘엘리트’들이다. 특히 수억원의 금품로비를 받아 저축은행 감사를 무마한 의혹을 받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은진수 전 감사위원은 이른바 3시를 패스한 우리 사회 최고의 엘리트다.

우리는 가난이 범죄를 낳는다고 알고 있다. 도둑, 강도, 절도 등은 대부분 가난과 연관된 범죄들이다. 그런데 이런 범죄는 거의 들추어지고 관련자는 기소되고 감옥을 가지만, 권력층과 엘리트들의 범죄, 기업범죄, 국가범죄는 공개되기도 어렵고, 혹 알려지더라도 뿌리는 그냥 둔 채 흐지부지 마무리된다. 그런데 전자는 피해자 몇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지만 엘리트 범죄는 온 사회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와 사회에 치명적인 해독을 끼친다.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보면 우리 사회의 엘리트 범죄는 거의 중증 수준이다.

중국의 사회학자 페이샤오퉁은 “지주는 소작인 없이는 토지에서 수익을 얻을 수 없으나, 소작인은 지주 없이도 땅을 경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금융비리에 관련된 모든 힘센 사람들은 예금자나 국민 없이는 수익을 얻을 수 없지만, 후자는 이들 없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땀 흘리는 사람 없이는 세상은 하루도 굴러갈 수 없지만, 이들의 땀 덕분에 먹고사는 사람들이 없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반성 없는 이들 엘리트 범죄자들과 그들의 범죄를 변호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자신이 똑똑해서 그 지위와 돈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착각한다.

피해자 박성자씨는 “그래도 그들은 배운 사람들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렇다.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서민의 상식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 반대다. 배우면 배울수록 더 큰 도둑놈이 되는 한국 사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우선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엄한 단죄와 처벌만이 무너진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이다. 그다음은 근본과 끝을 착각하고 있는 고위 공직자, 특히 경제 엘리트나 법조인들의 이런 비뚤어진 사고방식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총체적으로 되짚어보아야 한다.

국가범죄의 책임 가리기와 역사 바로쓰기


원문을 보시려면 아래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weekly.changbi.com/54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70613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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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2011년 7월 6일


김동춘 / 성공회대 교수




국가범죄의 책임 가리기와 역사 바로쓰기
대법원의 울산보도연맹사건 원심판결 파기환송 건을 보면서



한국의 뉴라이트와 주류언론, 그리고 이 정부는 몇년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해 정말 수고가 많다. 그런데 죄 없는 국민을 많이 죽여야 건국의 영웅이 되는 것일까? 1950년 7,8월 북한 인민군의 침략으로 대한민국이 형편없이 무너져내리던 시점에 이승만의 직접지휘하에 있던 CIC(방첩대), 헌병, 경찰 사찰과에서는 전국 수십만명의 '요주의(要注意)' 인물을 불법으로 체포하여 골짜기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이다. 우리 국민이 모두 알고 있는 속어 '골로 간다'는 말은 이 사건 이후 생겨났고, 이후 수십년간 "빨갱이는 인간취급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공안당국의 암묵적 실천도 여기서 시작되었고, 수많은 국민의 평생을 옥죄었던 연좌제도 바로 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울산보도연맹사건 판결의 반전과 재반전

필자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조사를 지휘했으며 2009년 11월 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실을 공식적으로 규명했다. 그리고 지난 6월 30일 울산지역 보도연맹사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판결이 대법원에서 내려졌다. 대법원은 고등법원이 2009년 8월 18일 내린 결정, 즉 "울산 보도연맹사건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요구는 시효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보상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판단하라며 되돌려보냈다.

애초 이 사건에 대한 1심 법원의 판결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즉 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시효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 규명을 결정한 날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므로 국가는 피해자 유족들에게 보상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유족들이 이미 1960년 4·19 직후 유해발굴도 했고 가해자에 대한 소송도 했기 때문에 사건 내용을 알고 있었으며, 설사 군사정권하에서는 권리주장을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민주정권 수립 이후에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민사상의 손해배상청구시한인 3년이 경과하여 국가는 이들에 대해 보상을 할 책임이 없다고 1심 결정을 뒤집었다.

그러나 이번에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결정을 또다시 파기하면서, 전시중 국가기관이 저지르는 위법행위는 외부에서 거의 파악하기 어려워 원고들로서는 손해배상청구권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이러한 집단학살사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절차에 의해서는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고들이 권리행사를 할 수 없었고 (…) 그동안 이 사실을 은폐해왔던 피고(국가)가 이제 와서 뒤늦게 원고들이 집단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취지로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여 그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상실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국가범죄에 의한 피해 구제할 보·배상 특별법을

즉 국가가 불법으로 사람들을 죽여놓고, 이후에도 수십년간 연좌제의 멍에로 신음해온 유족들이 이 문제를 발설하는 것조차 겁박을 하고 또 유족회 활동가들을 처벌까지 해왔는데, 이제 와서 왜 사건 직후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았느냐고 적반하장 격으로 따지면서 시효가 지났으니 당신들은 권리주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고등법원의 판결이 상식과 현저히 거리를 둔 것이라면 대법원의 판결은 크게 환영할 만하다. 따라서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여 평생 한을 품고 살아온 유족들에게 비록 적은 액수라도 국가가 뒤늦게 자그마한 위로를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판결을 지켜보는 우리는 제3자로서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든다. 즉 그렇게 많은 피해자들이 일일이 자기 돈을 들여서 소송을 하고, 법원이 건 별로 판단해서 피해자에게 보상조치를 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과, 전쟁중이라고는 하나 그렇게 수십만명의 인명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반인도적 범죄의 책임자에 대한 형사적 단죄가 왜 없는가라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범죄의 피해자에게도 민사상의 채권자-채무자 관계의 규칙을 적용하고 있는데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특히 이처럼 국제법에서 통용되는 반인륜적 범죄에 해당하는 학살사건에 대해 민사상의 채권-채무관계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심히 의심스럽다.

국가폭력에 의한 가해 사실과 피해 여부는 국가가 직접 조사해서 인정한 다음 피해자의 신청을 받아서 심사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법원에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고, 스스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즉 국가는 중요 범죄의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가 주장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겠다는 극히 오만한 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당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전국적으로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개인별 구제를 신청해야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것처럼 이런 중요한 집단학살사건은 법원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모든 피해를 일괄 구제하기 위한 별도의 보·배상 관련 특별법이 필요하다.

반인도적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와 역사 바로쓰기

마지막으로 이승만정부하의 군 정보국, 헌병, 경찰 치안국 등 주요 권력기관이 모두 관련되어 있는 이 학살사건에 대해 당시 관련자는 거의 사망했고 공소시효도 지났기 때문에 실정법상으로 그들을 단죄하기는 어렵지만, 역사적 면죄부까지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정부 들어서 이러한 국가범죄는 완전히 묵살되어버리고 이승만의 나라세우기를 미화하거나 백선엽 전쟁영웅 만들기 등 '현대사 바로잡기'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는데, 이는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를 두번 죽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엄청난 반인륜 범죄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국민 교육 없이 유족 개개인을 민사상으로 보상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국제인권규범을 적용해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매우 환영할 만하지만, 향후 이 소송의 향방은 국가의 잘못된 공권력 집행에 대한 피해 국민의 명예회복 여부,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의 인권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추가적인 법적 장치 마련, 역사 바로쓰기 작업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2011.7.6 ⓒ 창비주간논평

2011년 7월 3일 일요일

어느 알바생의 죽음

가난은 확실히 죄가 맞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제대하자 말자 등록금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던 대학생이 숨졌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85590.html

조금 수입이 높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을 담보로 그 위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냉동기 수리하다 냉매가스에 질식사 했다고 하는데,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작업자들의 잘못도
있겠지만 이 위험한 사업장에 안전장치 없이 투입시킨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

바로 삼성계열의 신세계 이마트다.
일년도 주식 차액만으로서 수천억, 수조원을 챙기는 한국의 최대 대기업 계열사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마 신세계 이마트는 이 보수회사는 자신들 직영이 아니므로 책임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자. 이런 사회를 과연 문명사회라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사회는 과연 문명의 길로 그들이 말하는
'선진화'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정치의 부존재, 정치의 실종이 이처럼 뼈저리게 느껴지는 일도 없는 것 같다.

2011년 7월 1일 금요일

이인규 전중수부장

김동철 민주당 의원은 정동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부산저축은행 변호활동을 벌였다. 착수금 3억원, 성공보수금 9억 9천만 원까지 약정됐다.”고 밝혔다. 부산저축은행 범죄자들을 비호하는 역할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이인규는 중수부장직을 그만두자마자 거꾸로 박연차 전 회장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바른’에 들어가 이 정부 관련 사건을 도맡아서 일년만에 120억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인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이다.
문재인 변호사는 최근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이인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인규 중수부장이 대통령을 맞이하고 차를 한 잔 내놓았다.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는 책에서 "조사 과정을 지켜보면서 검찰이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대통령과 박연차회장의 말이 다른데 박 회장의 말이 진실이라고 뒷받침할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며 "심지어 (노 전 대통령과 박연차 회장의) 통화기록조차 없었다. 통화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섰다. 대통령이 아니라고 한 부분이 박 회장 말과 다르면, 다른 객관적 증거로 누구 말이 맞는지를 가리는 게 검찰의 일이다. 그러나 증거도 없이 대질을 하겠다는 건 대단한 무례였다. 그는 노대통령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사람이다.

전직대통령을 수사하는데 연일 언론을 통해 수사 사항을 공표하고 또한 과장되게 공표를 하였다.
박연차회장의 유일한 진술이 증거임에도 다른 간접적인증거든 전문증거든 정황증거 이런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채 노무현대통령을 출석시켜 조사를 하였다

박연차 수사관에서 박연차 변호인으로 변신, 부산저축은행 범죄 변호, 노대통령 수사... 노대통령 사망. 1년 120억의 소득. 이 모든 일의 주역인 이인규에게 공통되게 흐르는 기반은 무엇인가?

이런 사람을 중수부장으로 기용한 대통령, 이런 사람이 중수부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한국의 검찰조직
..... 오늘 이 인물을 통해 우리사회를 본다.

맑은 물이 흐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첫째도 검찰개혁이요 둘째도 검찰개혁이요 셋째도 검찰개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