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이 블로그를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국내 사이트 검열을 한다는 소문 듣고 구글에 블로그를 만들었었는데,
한겨레 측에서 제안도 있고 해서 한겨레로 옮겼습니다.
아래 주소로 많이 방문해 주세요.
언론기고가 많이지다 보니 블로그에 별도의 글을 올릴 여유는 점점 없어집니다.
그래도 언론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 종종 올리겠습니다.
http://blog.hani.co.kr/dckim/
김동춘 배상
2012년 2월 17일 금요일
2012년 2월 7일 화요일
[세상 읽기] ‘먹튀’ 론스타와 그 대리인들 / 김동춘

2012년 2월 7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77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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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엘리트들이 국가 자산 팔아 막대한 이득…’
당대 최고 엘리트들이 그럴듯한
논리와 법을 무기로 하여
국가 자산을 투기자본에 넘겼다
미국계 펀드회사 론스타는 지난 2003년 외환은행의 지분 51%를 인수한 뒤 그동안 4조6000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드디어 손을 털었다. 1000억 사회공헌 약속도 흐지부지한 채, 막대한 수익에 대한 세금도 내지 않은 채 외환은행을 하나은행에 넘겼다. 4조6000억원은 전국의 26만 국공립대 학생들이 3년 동안 무상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돈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속이 몹시 쓰리다.
외환은행 인수 자격 여부조차 의심되었던 론스타가 어떻게 주가조작 등 금융범죄를 저지르고, 종업원들을 무자비하게 해고하는 등 사회적 책임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철저히 배당금을 챙겨갈 수 있었을까?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을 팔아치우는 것이 마치 금융 선진화의 길이라는 식으로 떠들던 언론이나 학자들은 오늘 한국의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었고, 우리가 외국자본에 너무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논설을 또다시 반복한다. 그들이 말하듯이 이제 과연 한국 금융시스템의 문제일까?
1910년 일본은 총칼을 들이대면서 조선 각료들을 위협하여 강제병합을 성사시켰다. 이완용 등 현지 대리인들은 그것을 문명화를 위한 시대의 대세라 말했다. 2002년 론스타는 김앤장을 앞세워 한국의 재경부와 금융당국의 최고위층에 외환은행 인수를 위한 전방위 로비를 펼쳤다. 그들은 외환은행 매각을 ‘외자유치’라 표현하였다. 조선왕조는 종이 한 장의 서명으로 일본에 넘어갔지만, 국민의 피땀으로 만든 외환은행은 정체불명의 팩스 1장으로 론스타에 넘어갔다. 조선의 각료들은 ‘나라의 힘이 없어 스스로 문명개화할 수 없다’는 명분하에 나라를 팔아넘겼지만, 2003년 론스타의 현지 대리인들, 김앤장, 금감위, 외환은행장, 재경부 최고위층 관리들과 보수언론들은 멀쩡한 은행을 부실은행으로 판정하고, ‘외자유치’ 안 하면 곧 망한다고 협박하고, 금융 선진화라는 그럴듯한 명분하에 위에서 바람잡고 아래서는 비밀리에 회동해서 마치 군사작전 하듯이 외환은행을 팔아치웠다.
과거 조선의 각료들은 일본의 총칼이 두려워 굴복을 했지만, 오늘날 국내 대리인들은 스스로 앞장서서 법과 절차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면서 공공자산을 팔아넘겼고, 론스타가 주가조작 등 용납할 수 없는 금융범죄를 벌여도 면죄부를 주었으며, 9년여 동안 온갖 논리와 법 지식을 동원하여 그들이 돈을 챙겨서 떠날 수 있도록 충실히 봉사했다. 그래서 외환은행 노조는 이 모든 일이 “대한민국 법과 원칙에 대한 사망선고”라고 말한다.
외환은행 매각 당시 이들 현지 대리인들이 많은 돈을 챙긴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번의 론스타가 하나은행에 외환은행을 넘기며 거둔 수익의 일정 부분도 바로 국내 대리자들과 투자자들, 즉 ‘검은 머리의 외국인’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선진 금융기법 도입, 동북아 금융허브 등 그들이 그렇게 귀가 아프게 떠들었던 거짓말의 성찬을 지금 떠올려 무엇하랴? 분명한 사실은 과거나 오늘이나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국가의 공복들이 그럴듯한 논리와 법을 무기로 하여 국가 자산을 투기자본에 팔아넘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사적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그들은 또다시 ‘미래의 경쟁력’을 들먹이며 인천공항을 매각하겠다고 하고, 효율성 운운하면서 케이티엑스 매각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옛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은 선거를 앞두고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있지만 그들은 지난 9년 동안 과연 이 일과 관련해서 한 게 무엇인가? 그들이 과연 앞으로도 반복될 이 국내 법률자문회사-국가관료들의 국민 배신 행각을 막을 의지와 힘이 있을까?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2년 1월 24일 화요일
고문·학살도 용서하는 하나님 위 ‘상 하나님’ [2012.01.30 제895호]
2012년 1월 30일, <한겨레21> 제895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2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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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학살도 용서하는 하나님 위 ‘상 하나님’ [2012.01.30 제89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고문이 애국”이라는 이근안의 자기정당화 논리
죄 많이 지은 자들을 구원해 준 반공 이데올로기
2011년 12월30일 새벽,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1970∼80년대 군사독재하에서 온몸을 던져 저항했던 한국 민주화운동의 아이콘이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돼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하고, 그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파킨슨씨병을 앓아오다가 64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승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김 상임고문은 서울 남영동 515호실에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결국 그는 공안 당국이 불러주는 소설 같은 혐의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학살과 고문을 정당화하는 나라
1986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2008년 5월 충남 태안 지역 ‘제1기 아버지학교’에 특별강사로 나서, 자신은 빨갱이만 잡았는데 정권이 바뀌니 역적이 돼 있었다며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심문(고문)은 예술이다”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그는,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당시 독재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행위를 미화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이근안을 목사로 만들어주었다. 설사 극악한 고문범죄를 자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고문한 사실을 부인하고, 공식적으로 과거 일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한 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애국행동이었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을 목사 예우까지 해주었고, 태안 군민들은 그를 강사로 초청했다. 부산 시민들은 김근태 상임고문을 고문할 때 지휘 라인에 있던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정형근을 세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그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건재하고 있다.
이근안의 말과 행동은 영화 <밀양>(원작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잘 그려졌다. 주인공 신애는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은 뒤 그 죄책감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데, 신앙을 통해 치유를 경험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로 찾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유괴해 살해한 아이의 엄마가 왔음에도 그 살인범은 뉘우치는 기색이라곤 눈곱만치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평안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살인범은 바로 5·18 광주 학살을 반성하지 않는 신군부의 모습 그 자체다. 그들은 1980년 광주에서 대량학살극을 벌인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집권 뒤 수많은 고문을 통한 간첩 조작 사건을 지휘했다. 전직 군 장성, 전직 장관, 전직 의원, 전직 국가기관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대형 교회의 원로 장로나 집사의 예우를 받고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어떤 죄과를 어떻게 용서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과거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근안처럼 “그때는 그게 애국이었다”라고만 암묵적으로 말하지 않고 “지금 봐도 그것은 애국이었다”라고 말한다. 국제사회에서 유대인 대량학살(Holocaust)을 부인하는 것은 범죄로 간주된다. 그런데 학살과 고문을 단지 부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이 나라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결국 이들에게는 그들을 받아준 하나님 외에도 칭찬과 격려까지 해주는 ‘더 높은 하나님(반공이데올로기)’이 있다는 얘기다.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준 하나님은 그저 정신적 위로만을 주지만,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주고 미화해주는 하나님은 정치적·신체적·제도적·물질적·사회적 지위와 안식까지 보장해준다. 이 세속정치를 관장하는 하나님은 김근태를 고문하도록 허용해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어왔다.
‘젖먹이도 징그러워 한 빨갱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이 하나님은 ‘의심되는’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죽이도록 해주었다. 19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의 첩첩산중에 있는 석달마을 주민 86명이 국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군인들은 민가에 불을 놓고서 뛰쳐나오는 주민을 닥치는 대로 사살했고, 마을 뒤 산모퉁이에 숨어 있던 청년들과 하굣길의 어린이들까지 사살했다. 희생자의 70%는 20살 이하의 청소년이거나 노인들이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도 22명(25%)이나 되었다. 현장 생존자인 채의진에 의하면 “이놈들, 빨갱이 밥 해주고 돼지 잡아서 주었지? 우리는 국군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학살사건을 조사하던 당시 미군 쪽은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추궁했던 공산주의자들과의 내통 혐의는 군인들이 뒤집어씌운 누명이었고 확인사살까지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 학살의 진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공비의 최후적 만행으로서 국군을 가장하고 부락에 침입하여 살인·방화 등을 감행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이들이 공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거꾸로 적혀 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석달마을 사람들이 군에 학살당한 사실을 밝혔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현재까지 공비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공식화되고 국군의 범죄는 확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나 경찰은 좌익이다 싶으면 재판도 없이 ‘즉결 처분’(학살)했다고 한다. 한 군인은 부락 내부 주민들 간의 사감으로 사람들이 ‘저놈 빨갱이’라고 지목하면 곧바로 즉결 처분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무법 상황이라서 빨갱이로 지목되면 중대장·소대장 선에서 즉결 처분해도 문제되지 않았고, 군인들도 중대장·소대장의 명령으로 즉결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토벌 작전에 지장이 있고 대상이 빨갱이라서 나중에 즉결 처분했다고 보고하면 문제되지 않았기에, 그것은 연대본부까지 보고할 사안이 아니었고, 현장에서 처분한 다음 서면 보고도 안 하고 구두 보고 정도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 경북 청도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출신의 호림부대 등은 빨치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청년들을 잡으러 갔다가 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부모 등 가족 일부를 대신 잡아서 죽이기도 했고, 집을 불태운 뒤 남은 가재도구를 빼앗기도 하고, 가족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이 극악무도한 학살과 약탈이 모두 ‘빨갱이 소탕’의 이름하에 정당화됐고, 그 일에 가담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애국자’로 돼 있다.
박완서가 말한 것처럼 한국전쟁 시기는 “빨갱이라면 젖먹이 어린것까지도 덮어놓고 징그러워하고 꺼리던 때”였다. 그래서 벌레처럼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 식구의 사고와 행동은 오로지 빨갱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박완서, ‘엄마의 말뚝2’). 빨갱이로 지목되는 것은 사실상의 사형선고, 즉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것을 의미했고, 타인을 그렇게 지목하는 사람이나 집단 뒤에는 ‘상(上) 하나님’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 하나님’은 빨갱이 잡는 일에 나선 이력이 있다고 주장하면 학살범·고문범·폭력범 등 반인륜적 범죄는 물론, 재산탈취범·학원비리범·사기범·조세포탈범·강간범까지 애국자라고 칭찬해주고 온갖 지위와 권력과 부를 안겨다준다.

‘상 하나님’의 대행자, 법원
속세의 심판자, 법원이 ‘상 하나님’의 대행자다. 김근태의 재판을 담당한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기일까지 단독결정으로 가족면회를 금지했다. 말로는 김근태가 경찰에서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고문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다음에 그는 제1회 공판기일부터 방청권을 발행해 가족과 주변 민주화 인사들의 방청을 방해했다. 그는 김근태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가장 핵심적 증거인 고문 사실을 고의적으로 회피했고, 김근태가 적은 탄원서를 변호사들이 열람하지 못하게 따돌리기까지 했다. 서성 판사의 원심법원은 공소 제기 절차가 법령을 위반했으므로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변호인들의 주장을 그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배척함으로써, 결국 김근태가 주장했듯이 그 재판은 고문경찰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들을 비호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고문이 계속될 수 있게 보장해주었다. 고문 사실이 명백했기에 법원과 검찰의 기본 양심을 믿으려 했던 ‘순진한’ 김근태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재판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당신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고 큰소리치던 고문경찰들의 말을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문이 죄가 아니라 빨갱이인 것이 죄이고, 정권과 언론이 한번 빨갱이라고 지목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이 되는 현실을 처절하게 체험했다.
아무런 검증이나 항변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정권, 검찰이나 경찰, 언론이 특정 인사나 집단을 빨갱이로 지목하기만 하면 빠져나올 여지가 없어진다는 걸 잘 아는 우리 사회의 부패·비리 집단은 그것을 100% 활용했다. 과거 문민정부의 사정 대상 1호로 지목됐고 학교공금 횡령과 부정 편입학 혐의로 법정에 선 상지대의 김문기 이사장은, 1986년 7월 교수 채용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것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농성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학생들과 직원들에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고 적힌 유인물을 제작해 학생들의 농성장 주변에 몰래 뿌리고 신고한 다음, 경찰병력을 요청해 학생들을 연행해가도록 했다.
오빠가 좌익으로 몰려 죽게 된 상황에서 박완서는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지 빨갱이냐 흰둥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실과 사랑의 눈으로 보면 ‘상 하나님’은 바로 사람 잡는 괴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간 무서운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하고 실체가 없는 허깨비임을 알아챌 수 있다. 현재와 과거에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상 하나님’의 힘에 기댄다는 사실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괴물이 사람 잡는 이야기’
그런데 아직도 일부 정치가나 언론은 입만 열면 이 ‘상 하나님’에게 매달린다. 2011년 7월20일치 <조선일보>는 ‘해군기지 부지가 좌파단체 해방구로’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또 다른 날에는 “제주가 좌파 종북세력의 투쟁 최일선이 돼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옛날에는 이렇게 소리 지르면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죽여도 좋고, 고문해도 좋다”고 했지만, 지금은 머뭇거리며 그냥 경찰력만 출동시켜서 잡아가라고 한다. 그게 불안하니까 그들은 더욱더 “하나님, 저들은 좌파입니다. 종북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 후세대는 ‘괴물이 사람 잡는 이야기’를 희극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2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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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학살도 용서하는 하나님 위 ‘상 하나님’ [2012.01.30 제89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고문이 애국”이라는 이근안의 자기정당화 논리
죄 많이 지은 자들을 구원해 준 반공 이데올로기
2011년 12월30일 새벽,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1970∼80년대 군사독재하에서 온몸을 던져 저항했던 한국 민주화운동의 아이콘이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돼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하고, 그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파킨슨씨병을 앓아오다가 64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승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김 상임고문은 서울 남영동 515호실에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결국 그는 공안 당국이 불러주는 소설 같은 혐의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학살과 고문을 정당화하는 나라
1986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2008년 5월 충남 태안 지역 ‘제1기 아버지학교’에 특별강사로 나서, 자신은 빨갱이만 잡았는데 정권이 바뀌니 역적이 돼 있었다며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심문(고문)은 예술이다”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그는,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당시 독재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행위를 미화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이근안을 목사로 만들어주었다. 설사 극악한 고문범죄를 자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고문한 사실을 부인하고, 공식적으로 과거 일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한 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애국행동이었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을 목사 예우까지 해주었고, 태안 군민들은 그를 강사로 초청했다. 부산 시민들은 김근태 상임고문을 고문할 때 지휘 라인에 있던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정형근을 세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그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건재하고 있다.
이근안의 말과 행동은 영화 <밀양>(원작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잘 그려졌다. 주인공 신애는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은 뒤 그 죄책감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데, 신앙을 통해 치유를 경험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로 찾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유괴해 살해한 아이의 엄마가 왔음에도 그 살인범은 뉘우치는 기색이라곤 눈곱만치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평안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살인범은 바로 5·18 광주 학살을 반성하지 않는 신군부의 모습 그 자체다. 그들은 1980년 광주에서 대량학살극을 벌인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집권 뒤 수많은 고문을 통한 간첩 조작 사건을 지휘했다. 전직 군 장성, 전직 장관, 전직 의원, 전직 국가기관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대형 교회의 원로 장로나 집사의 예우를 받고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어떤 죄과를 어떻게 용서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과거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근안처럼 “그때는 그게 애국이었다”라고만 암묵적으로 말하지 않고 “지금 봐도 그것은 애국이었다”라고 말한다. 국제사회에서 유대인 대량학살(Holocaust)을 부인하는 것은 범죄로 간주된다. 그런데 학살과 고문을 단지 부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이 나라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결국 이들에게는 그들을 받아준 하나님 외에도 칭찬과 격려까지 해주는 ‘더 높은 하나님(반공이데올로기)’이 있다는 얘기다.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준 하나님은 그저 정신적 위로만을 주지만,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주고 미화해주는 하나님은 정치적·신체적·제도적·물질적·사회적 지위와 안식까지 보장해준다. 이 세속정치를 관장하는 하나님은 김근태를 고문하도록 허용해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어왔다.
‘젖먹이도 징그러워 한 빨갱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이 하나님은 ‘의심되는’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죽이도록 해주었다. 19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의 첩첩산중에 있는 석달마을 주민 86명이 국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군인들은 민가에 불을 놓고서 뛰쳐나오는 주민을 닥치는 대로 사살했고, 마을 뒤 산모퉁이에 숨어 있던 청년들과 하굣길의 어린이들까지 사살했다. 희생자의 70%는 20살 이하의 청소년이거나 노인들이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도 22명(25%)이나 되었다. 현장 생존자인 채의진에 의하면 “이놈들, 빨갱이 밥 해주고 돼지 잡아서 주었지? 우리는 국군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학살사건을 조사하던 당시 미군 쪽은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추궁했던 공산주의자들과의 내통 혐의는 군인들이 뒤집어씌운 누명이었고 확인사살까지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 학살의 진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공비의 최후적 만행으로서 국군을 가장하고 부락에 침입하여 살인·방화 등을 감행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이들이 공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거꾸로 적혀 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석달마을 사람들이 군에 학살당한 사실을 밝혔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현재까지 공비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공식화되고 국군의 범죄는 확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나 경찰은 좌익이다 싶으면 재판도 없이 ‘즉결 처분’(학살)했다고 한다. 한 군인은 부락 내부 주민들 간의 사감으로 사람들이 ‘저놈 빨갱이’라고 지목하면 곧바로 즉결 처분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무법 상황이라서 빨갱이로 지목되면 중대장·소대장 선에서 즉결 처분해도 문제되지 않았고, 군인들도 중대장·소대장의 명령으로 즉결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토벌 작전에 지장이 있고 대상이 빨갱이라서 나중에 즉결 처분했다고 보고하면 문제되지 않았기에, 그것은 연대본부까지 보고할 사안이 아니었고, 현장에서 처분한 다음 서면 보고도 안 하고 구두 보고 정도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 경북 청도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출신의 호림부대 등은 빨치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청년들을 잡으러 갔다가 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부모 등 가족 일부를 대신 잡아서 죽이기도 했고, 집을 불태운 뒤 남은 가재도구를 빼앗기도 하고, 가족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이 극악무도한 학살과 약탈이 모두 ‘빨갱이 소탕’의 이름하에 정당화됐고, 그 일에 가담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애국자’로 돼 있다.
박완서가 말한 것처럼 한국전쟁 시기는 “빨갱이라면 젖먹이 어린것까지도 덮어놓고 징그러워하고 꺼리던 때”였다. 그래서 벌레처럼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 식구의 사고와 행동은 오로지 빨갱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박완서, ‘엄마의 말뚝2’). 빨갱이로 지목되는 것은 사실상의 사형선고, 즉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것을 의미했고, 타인을 그렇게 지목하는 사람이나 집단 뒤에는 ‘상(上) 하나님’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 하나님’은 빨갱이 잡는 일에 나선 이력이 있다고 주장하면 학살범·고문범·폭력범 등 반인륜적 범죄는 물론, 재산탈취범·학원비리범·사기범·조세포탈범·강간범까지 애국자라고 칭찬해주고 온갖 지위와 권력과 부를 안겨다준다.

‘상 하나님’의 대행자, 법원
속세의 심판자, 법원이 ‘상 하나님’의 대행자다. 김근태의 재판을 담당한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기일까지 단독결정으로 가족면회를 금지했다. 말로는 김근태가 경찰에서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고문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다음에 그는 제1회 공판기일부터 방청권을 발행해 가족과 주변 민주화 인사들의 방청을 방해했다. 그는 김근태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가장 핵심적 증거인 고문 사실을 고의적으로 회피했고, 김근태가 적은 탄원서를 변호사들이 열람하지 못하게 따돌리기까지 했다. 서성 판사의 원심법원은 공소 제기 절차가 법령을 위반했으므로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변호인들의 주장을 그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배척함으로써, 결국 김근태가 주장했듯이 그 재판은 고문경찰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들을 비호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고문이 계속될 수 있게 보장해주었다. 고문 사실이 명백했기에 법원과 검찰의 기본 양심을 믿으려 했던 ‘순진한’ 김근태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재판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당신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고 큰소리치던 고문경찰들의 말을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문이 죄가 아니라 빨갱이인 것이 죄이고, 정권과 언론이 한번 빨갱이라고 지목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이 되는 현실을 처절하게 체험했다.
아무런 검증이나 항변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정권, 검찰이나 경찰, 언론이 특정 인사나 집단을 빨갱이로 지목하기만 하면 빠져나올 여지가 없어진다는 걸 잘 아는 우리 사회의 부패·비리 집단은 그것을 100% 활용했다. 과거 문민정부의 사정 대상 1호로 지목됐고 학교공금 횡령과 부정 편입학 혐의로 법정에 선 상지대의 김문기 이사장은, 1986년 7월 교수 채용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것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농성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학생들과 직원들에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고 적힌 유인물을 제작해 학생들의 농성장 주변에 몰래 뿌리고 신고한 다음, 경찰병력을 요청해 학생들을 연행해가도록 했다.
오빠가 좌익으로 몰려 죽게 된 상황에서 박완서는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지 빨갱이냐 흰둥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실과 사랑의 눈으로 보면 ‘상 하나님’은 바로 사람 잡는 괴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간 무서운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하고 실체가 없는 허깨비임을 알아챌 수 있다. 현재와 과거에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상 하나님’의 힘에 기댄다는 사실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괴물이 사람 잡는 이야기’
그런데 아직도 일부 정치가나 언론은 입만 열면 이 ‘상 하나님’에게 매달린다. 2011년 7월20일치 <조선일보>는 ‘해군기지 부지가 좌파단체 해방구로’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또 다른 날에는 “제주가 좌파 종북세력의 투쟁 최일선이 돼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옛날에는 이렇게 소리 지르면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죽여도 좋고, 고문해도 좋다”고 했지만, 지금은 머뭇거리며 그냥 경찰력만 출동시켜서 잡아가라고 한다. 그게 불안하니까 그들은 더욱더 “하나님, 저들은 좌파입니다. 종북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 후세대는 ‘괴물이 사람 잡는 이야기’를 희극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모두가 정치에 나서면 '소는 누가 키우나?'
http://weekly.changbi.com/59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20118163923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주소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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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2012년 1월 18일
김동춘 / 성공회대 교수
모두가 정치에 나서면 소는 누가 키우나?
[창비주간논평] 정권교체보다 더 중요한 것
정치의 계절이 왔다. 올해 정권교체가 될 것인지가 새해 벽두부터 모두의 관심사인 것 같다. 그동안 시민운동에 몸담았던 주변 여러 사람들이 출판기념회를 한다며 오라고 한다. 그래서 누가 정치에 나서려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자의도 있고 타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사회변화를 위해 시민운동에 몸을 던졌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운동에만 몸담아서는 생계조차 꾸려가기 버거운 사회운동 출신들이 우선 떠오른다. 그리고 자기 직업세계에서 부당한 처사를 겪으면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한 사람, 나름대로 자기 직업 영역에서 성공을 했으나 더 큰 자기실현을 하고픈 사람, 그리고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의 경력을 바탕으로 제도정치에 참여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들 새내기 정치가들의 열정에 힘입어 정치권도 물갈이되면 좋겠다. 그런데 세상의 화두가 모두 정치로 모아지고, 사회운동 지도자급 사람들이 너도나도 총선에 출사표를 던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정치를 해야 하지만, 사회의 모든 능력있는 사람들이 모두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잘난 사람들'은 정치에 뛰어드는 현실
그런데 파트타임 시민운동을 해온 나는 정치하겠다는 사회운동가들을 말릴 명분이 없고, 모든 일을 정권교체와 연결시키는 세상의 보통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우선 40대 중반 넘어서까지 사회운동을 해서는 자신의 경력에 걸맞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없고, 자녀들 교육은 물론 가족의 생계조차 꾸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명박정권이 들어선 이후 공익 시민단체의 돈줄이 막히고 진보적 학자들의 연구용역조차 끊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것을 너무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직사회, 대학, 언론, 지역사회 어느 곳도, 뜻있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소박하게 노력하여 그 영역에서 조직도 발전시키고 자기실현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이 대기업을 비판하지만 나는 이 점에서는 그래도 기업이 좀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에 나서기보다는 각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는 충고는 지극히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한국사회의 현실과는 좀 동떨어져 있다.
20여년 전 나는 노동현장조사를 하면서 노조위원장 출신들의 이후 성장통로가 마련되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위기를 피할 수 없다고 느꼈고, 이후 논문과 책에서 그것을 강조한 바 있다. 87년 울산 노동자 대투쟁의 상징적 인물인 권용목은 고생 끝에 뉴라이트 쪽으로 갔다가 결국 일찍 사망했다. 이것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노동운동 전체의 비극이다. 오늘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이 저렇게 미약한 것은 앞장 선 사람들의 스펙과 헌신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의 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20여년 민주노동운동 역사에 제대로 된 노동교육센터나 노동재단 하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시민운동 20여년에 시민운동에 청춘을 바친 사람들이 계속 활동할 수 있고 그들을 먹여살려줄 기관 하나 없다. 기자들은 삼성의 돈을 받아 미국연수를 가고 돌아와서는 삼성맨이 된다. 소신있는 기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민간재단 하나 없는 이 조건을 생각하면 그들을 비판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좋은 다큐를 만들 수 있는 자질과 의욕을 가진 가난한 영화제작자를 후원해주는 기관이 없고, 학자들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조사·연구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조사비를 구할 길이 없고, 장차 중요한 역할을 할 잠재력있는 연구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대학원 하나 없는 현실도 그렇다.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좋은 거름을 주어야 한다
자신의 영역에서 경력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조건이 안되어 있으니 모든 '잘난 사람들'은 곧바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정치로 가게 된다. 그런데 지난 20여년 간 세상을 바꾸겠다고 수많은 사회운동가가 정치에 뛰어들었건만, 오직 자기 자신만 권력자로 바꾸었을 따름이며 일부는 부나방처럼 불에 뛰어들어갔다 타죽고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혔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치에서 경륜과 식견을 쌓은 전직 운동가들은 다시 운동 진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비극이다.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비극이다. 이들을 정치로 내몰고, 정치경력을 쌓은 이후에도 다시 사회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정치의 후진성, 정치가에 대한 배반감, 양심적 인사들의 변신과 도덕적 파탄을 계속 목격해야 하며 대중의 좌절과 실망감은 계속될 것이다.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하고, 꽃을 피우려면 줄기가 튼튼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거름을 주는 일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그저 나무에 영양제만 놓으면서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정치학자들은 이쁜 좋은 꽃이 꼭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사실만 강조한다.
우리사회 각계의 중견인 486세대는 언제까지 선거판에 나서는 친구들 정치자금을 대고만 말 것인가? 왜 그 부자 노조는 노동운동, 아니 자기 자식들의 미래에 그렇게 무관심한가? 국민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지위를 갖게 된 대기업들은 왜 자기 회사 이미지 홍보에만 그 많은 돈을 쓰는가? 우리사회에 돈은 충분히 있다. 그 돈이 미래를 위한 거름으로 사용되지 않을 따름이고, 또 돈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쓰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정권교체보다 더 중요한 것
시민운동,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가장 '준비된' 예비 정치가들이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는 지역이나 자신의 분야에 남아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계속 발휘해주어야 하고 정치권으로 가더라도 다시 돌아와 그 경험을 전수해서 집단적 지혜의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 대다수 사회운동가들이 거름이 되지 않으면 제도정치에 나선 동료들도 뜻을 꺾을 수밖에 없다. 사회란 무엇인가? 공익을 위해 봉사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계를 뒷받침해주는 물적 기반이다. 우선 공직이나 대학에서 이들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회 내의 여러 진지들, 특히 많은 공익재단을 만들어 이들이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길이 오직 중앙정치로만 통하는 조선시대 이래의 과도정치화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정치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계속 후진 상태에 있을 것이다. 정권교체? 물론 필요하다. 그런데 바닥현실을 보면, 교체되더라도 그 정권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2012.1.18 ⓒ 창비주간논평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세상 읽기] 망나니의 칼 / 김동춘

2012년 1월 16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49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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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한명숙·미네르바·피디수첩…
무죄로 끝날 일이 아니다
국민참여 국회 청문회를 제안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간 검찰의 칼이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과 한명숙 전 총리를 찌르지는 못했다. 이번에 이 두 사람에게 무죄 선고를 내린 일을 포함하여 미네르바 사건, <피디수첩> 사건에서 검찰의 칼을 거둔 법원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상식의 최저선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애초 불법 민간인 사찰의 희생자가 되어 자신의 블로그에 촛불 동영상을 올렸다가 기소된 김종익씨는 이번에는 조전혁 의원의 막가파식의 고소를 받은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로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 낙서를 했다고 검찰에 기소된 대학강사는 유죄판결을 받은 상태다. 정연주·한명숙 두 사람과 달리 이들은 평범한 시민이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치명상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은 도대체 애초부터 사건으로 성립조차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 재판부의 권고를 받아 세금 환급을 포기한 <한국방송> 사장을 배임죄로 기소한 것이나, 기업가의 신빙성 없는 진술 한마디로 전 총리를 범죄자로 몰아가고, 100만명 이상이 본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렸다는 혐의로 사기업 사장을 기소하고, 그냥 장난 정도로 봐줄 낙서사건에까지 칼을 휘둘러댄 것이다. 이들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보인 검찰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을 글로 적으면 책 한권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근본을 뒤흔든 중요사건이라 볼 수 있는 디도스 공격, 저축은행 사건, 효성그룹 비자금 사건, 한상률 전 국세청장 사건, 그랜저 검사 사건 등에서 검찰은 칼을 꺼내는 시늉만 했다. 사람들은 정연주·한명숙씨가 무죄가 되었으니 ‘사필귀정’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무죄’는 결코 원상회복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이 입은 개인적 상처도 크지만, 정 전 사장을 쫓아낸 이후 지난 3년 동안 <한국방송>이 공영방송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편파방송과 국민 바보 만들기 작업을 한 결과, 이 정권의 더 심각한 비리와 부정은 그대로 축소·은폐될 수 있었다. 미네르바 사건이나 <피디수첩> 사건이 무죄가 되었지만, 당사자들은 정신질환을 앓을 정도의 큰 상처를 입었고, 이 사건을 지켜본 국민과 언론인들의 입은 얼어붙었다.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중죄에 제대로 칼을 들이대지 않는 것은 그런 범죄의 재발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법과 정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일이었고, 과거 같으면 여러 번 탄핵을 당할 수도 있는 사안에 연루된 현 정권을 살려주는 일이었다.
칼을 휘둘렀던 사람들은 승승장구 출세하여 아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옷을 벗은 사람은 연 수십억원의 수임료를 챙기는 잘나가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있다. 과거 검찰이 그러했듯이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 들어오면 또다시 그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며 권력 뒤에 숨을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나라 최대의 암적인 존재는 검찰이다”라고 말했다.
망나니는 결코 스스로의 판단으로 칼을 휘두르지 않고 오직 명령에 충실하게 따를 뿐이다. 그런데 망나니의 잘못 휘두른 칼에 맞아 엉뚱한 사람이 죽거나 치명상을 입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칼을 맞지 않아야 할 사람이 맞고, 마땅히 칼을 맞아야 할 사람이 살아남아 국민이 누려야 할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시장의 공정성, 정의가 여지없이 무너진다면, 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이며, 어떻게 망가진 사회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무죄로 끝날 일이 아니다. 피해자 보상과 검찰 사과로도 충분치 않다. 나는 국민참여 국회 청문회를 제안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2년 1월 3일 화요일
임진년 새아침

임진년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제의 어둠을 뒤로 하고 다시 해가 떠오릅니다.
이 한반도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올해는 정치의 해 입니다.
여기저기서 출판기념회한다고 초청장이 옵니다.
좋은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많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정치변화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당장 대단한 것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만 길게보면 아주 작은 것 밖에 못바꿉니다.
대중의 힘이 뒷바침되지 않는다면, 제도와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냉소하지도 말고, 너무 흥분하지도 말고, 너무 좌절하지도 말고,
말만 하지 말고, 작은 행동이라도 해서 정치가 실질적으로 세상을 변화도록 압박해야 겠습니다.
올해 여기저기서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화장품 가게(!)와 작명소(!)가 호황을 누릴지도 모릅니다.
지난 4년 동안 가장 비굴했던 자들이 정의의 사도처럼 군림할 것입니다.
아무것 한것도 없는 사람들이 김칫국부터 마시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어린아이의 울음을 잠시 멈추기 위한 장난감 장난들입니다.
각성된 대중들만이 이 시선호도용 장난감을 집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백성',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2011년 12월 26일 월요일
[세상 읽기] 세습의 문화 / 김동춘

2011년 12월 26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19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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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북을 가장 강경하게
비판하는 쪽이 사실상 북과 가장
닮은 집단들이라는 건 역설적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그의 아들 김정은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급부상하였다. 북은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하기 위해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물론 북의 3대 세습을 비판하던 미국도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위기수습과 체제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은 북으로서는 합리적 선택인 것 같다. 정권교체가 어려운 북 체제의 성격상 핵문제 해결과 개혁·개방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남한의 보수집단은 북을 현대판 왕조체제라 비판한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남한에서 북을 가장 강경하게 비판하는 쪽이 사실상 북과 가장 닮은 집단들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재벌, 보수언론, 사학재단에서 이런 2대, 3대 세습은 일반적이며, 세습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유사하다. 수년 전 담임목사직 세습으로 비판을 받던 광림교회는 김선도 목사의 아들을 후임자로 선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광림교회의 전통과 목회 방침을 잘 알지 못하는 목회자가 후임자로 부임하면 성장에 지장을 주고 분열과 분파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삼성은 에버랜드 사건 무죄 선고로 이재용 편법 상속을 위한 법률적 장벽이 없어지자, ‘오너경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사장단의 입을 빌려 “삼성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전임 회장의 경험과 지혜를 활용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명분을 들이대며 그를 삼성의 후계자로 등극시켰다. 국가와 기업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지만 공적 조직을 가족이 사유화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혁명위업 완성’을 위해서건 ‘전통 유지’, ‘성장과 발전’, ‘경험과 지혜 활용’을 위해서건, 오늘 남북한의 세습의 실제 동기는 앞선 창업자의 직계 남성만이 해당 조직을 책임질 수 있는 적임자라 보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실 내부의 관점에서 보면 앞선 지도자의 방침과 철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안전하고, 내부 약점이나 불법사실도 덮을 수 있을뿐더러, 위기상황에서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해주고, 일사불란한 지휘를 가능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2대는 동업자이지만, 3대는 황태자”라는 말도 있듯이, 세습은 권력을 절대화하여 조직이 큰 실패를 해도 그에 대해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고, 심각한 부패를 낳을뿐더러, 구성원을 노예화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극심한 식량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북 주민의 처지는 ‘노조가 없어서’ 백혈병 발병 사망에 대해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죽어간 삼성전자 여직원들의 처지와 얼마나 다를까? 온갖 반사회적 불법을 저지른 담임목사가 구속되어도 “목사님, 우리 목사님” 외치는 세습 대형교회 신도들이나, 오너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족벌 사학과 언론사 직원은 과연 전적으로 다른 처지에 있을까?
오늘 북의 김정은 체제가 단기적으로는 안정을 보장해주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남북한의 새 왕조체제가 그것이 표방하는 진보·보수의 이념과 전혀 무관하게 수구 퇴행적 행태라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것이며 21세기 가치와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 모든 세습은 전쟁, 분단, 조직위기, 성장지상주의를 빌미로 등장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세습을 정당화했던 국내외 환경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조직을 연착륙시키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2011년 12월 26일, <한겨레21> 제891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0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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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도전자 잡아베던 독재시대 국가원수모독죄
비판·풍자 용납 않는 엠비시대 다시 살아나
지난 10월13일 서울 롯데백화점 주변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연행된 대학강사 박정수씨에게 대법원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공용물건 손상죄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원은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형법상 금지하는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애초 구속영장을 신청한 남대문서 형사과장은 “중요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국격을 높이는 국가 홍보물을 더럽히는 것이 (시민의) 정상적 사고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씨는 애초 경찰이 단순 재물손괴 혐의로 조사를 했다가 ‘윗선’의 지시로 ‘공안 사건’으로 키웠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경찰에게 물었더니, 경찰청장에게 보고되고 청와대에도 보고됐기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MB 비판하면 ‘불경죄’로 다스려
총리실 불법사찰 건의 최대 피해자인 (주)KB한마음 사장 김종익씨는 애초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을 빌미로 유죄가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에서 쫓겨났고 소유 주식을 포기했으며, 경찰과 검찰은 공금횡령과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등을 들어 그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의 공식 죄목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 결정서에서 피해자는 자연인 이명박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적시돼 있다. 검찰은 수개월을 끌다 대통령 명예훼손을 인정하는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결국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고, 사기업의 회장직과 개인 소유의 주식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의 범죄가 된 것이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하라”고 고함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을 장례식 방해 혐의를 적용해 벌금 3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일반인들은 그런 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생소한 법조항을 끄집어내 그를 형사처벌했다.
지난 3월 문화방송 경영진은 ‘검찰과 스폰서’ ‘4대강의 비밀’ 등 사회적 큰 반향을 일으킨 의 간판급 연출자인 최승호 PD를 비롯해 핵심 인력 교체를 강행했다. 최승호 PD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노조는 성명에서 “MB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불경죄’를 범하기라도 하는 듯, 최승호 PD가 MB 정권의 뿌리인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다루려 하자 을 거칠게 흔들어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사교양국장은 1년 이상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사람은 예외 없이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경찰, 검찰, 법원, 문화방송 경영진 등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람을 처벌한 명분과 법조항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하나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김종익씨에게 적용한 죄목인 ‘대통령 명예훼손죄’는 최고권력자가 명예훼손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독재 시절 여러 민주인사를 옥죄다가 노태우 정권하에서 폐지된 형법상 ‘국가원수모독죄’의 정신이 깔려 있는 셈이다. 제작자들에 대한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훼손죄 기소,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국가정보원 명예훼손 기소 등 같은 범주에 속하는 정부 쪽 기소 사건 역시 법이 국민의 보호막이 되기는커녕,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의 칼이 되어 정부 정책과 최고권력자에 대해 작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마구 휘둘러대는 것과 같다.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거나 대통령을 사실상 국가와 동일시한 상태에서 권력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언론은 무조건 앵무새처럼 대통령을 찬양해야 하고, 국민은 ‘입을 닥쳐야 하는’ 독재체제하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발상이 이명박 정부에서 살아났다.

최능진
이승만에게 도전해 살해당한 최능진
군사독재 시절 국가원수모독죄의 원형은 전근대 시절과 일제 식민지 시절의 불경죄였다. 1948년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최능진은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이승만의 당선을 저지하려고 같은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그해 10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돼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즉각 정전, 평화 호소 대회’를 추진했지만, 수복 뒤 군법회의는 인민군 치하에서 그의 활동이 국방경비법 32조(이적죄) 위반에 해당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그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총살형을 당했다. 원래 그는 일제하에서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일하다가 공산당과 마찰을 빚어 월남한 인물이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며 친일 경찰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1946년 경무부장에 의해 파면되기도 했다.

장준하
선거 당시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은 집요하게 최능진의 등록을 방해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는 극적으로 후보등록을 했다. 기호 1번이 된 그는 독립운동 경력을 부각시키고 이승만의 친일 경찰 기용을 비판해 인기가 높았으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대문 경찰서장은 본인이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당선 무효를 주장했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이틀 전인 5월8일,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의 날인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의 등록을 무효화했다. ‘혁명의용군 사건’ 역시 조작 의혹이 짙고, 전쟁 중 군법회의의 사형 판결도 평화적으로 전쟁을 종식하려 했던 행위에 정치보복으로 응답했다는 비판이 많다(2009년 8월1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헌법상 근거가 없는 군법회의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 판결을 확정판결로 볼 수 없다고 결정했다).
최능진의 비극적 최후는 실정법과 재판의 형식을 거쳤다고는 하나, 당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앙되던 이승만에게 감히 도전하면 어떤 정치보복을 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후 국가원수모독죄가 적용된 1988년까지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대통령을 비꼬거나 정치적으로 도전한 인물들에게는 긴급조치 위반 등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무서운 보복과 처벌을 가했다.
일본에선 없어진 ‘국가원수모독죄’
최능진과 마찬가지로 장준하도 일제 말 일본군 학도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편입돼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인 박정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경력 때문에 5·16 쿠데타 이후부터 그는 박정희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는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규탄했고, “일본 패망이 없었으면 박정희는 여전히 독립투사를 학살하는 일본군 장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박정희는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공격했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돼 3개월간 투옥됐고, 그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등산에 나섰던 그는 한 벼랑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과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히려 했으나, 죽은 지 24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다. 사고사라고 보기 어려운 정황이 너무나 많은데도 아직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최능진과 장준하는 국가 지도자에게 감히 도전했다가 온갖 수난을 당한 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공통된 점은 이들이 모두 국가 지도자로서 국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두 인물을 공격했다가 보복의 칼을 맞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약점이 있거나 위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농담에도 성난 얼굴을 하는 법이다.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중국의 법은 어떤 자라도 황제에게 경의를 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그 법은 이 경의를 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구실로 그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죽이고 그가 죽이고 싶은 가족은 모두 죽일 수 있다”라고 불경죄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즉 법이 합리성과 공정성의 원칙이 아니라 인격의 원리에 입각해 있고,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해 그에게 어떤 도전도 금하는 전통시대 중국의 법문화를 비판했다.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한 법의 정신은 군국주의 일본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메이지 헌법 3조에는 ‘천황의 신성불가침’ 조항이 있고, 형법에서는 ‘황실에 대한 죄’ 조항이 있었다. 천황제를 비판한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는 이 불경죄 조항으로 처벌을 받았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박열도 대역죄인이 되어 해방 때까지 무려 21년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의 우익 지도자들은 이 대역죄·불경죄의 조항을 살리려 했다.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자유당의 기타우라 게이타로는 “도대체 26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불경죄를 미국식으로 삭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널리 국민 일반의 지식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를 위해 그 찬부를 묻고 싶다”고 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도 두 법을 존치시켜달라고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헌법이 법 아래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천황이나 황족만이 형법상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에서는 없어진 이 법이 한국에서 1988년까지 ‘국가원수모독죄’로 살아숨쉬었다.
MB 나온 웹자보 삭제 요구 받아
지난해 서울 청량리에서 탈성매매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는 단체 ‘성매매 없는 세상, 이룸’에서 웹자보(인터넷판 대자보)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유한 건물인 서울 양재동의 영일빌딩에서 성매매업소가 영업 중임을 풍자하려고 빌딩의 업소 사진과 함께 합성사진을 실은 것이다. 그러자 담당공무원들은 웹자보 삭제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사무실과 상담소 대표의 개인 휴대전화에까지 수시로 전화를 해댔으며, 이런 식이면 앞으로 상황이 어려울 것이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불경죄는 사라졌으나 불경죄의 정신은 권력자나 관료들에게 아직까지 살아 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싫어하거나 저잣거리 광대들의 농담조차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딱딱한 머리의 권력자, 국가나 국가원수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 아래 국민은 국가 혹은 국가원수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시대나 군국주의 시대의 사고를 가진 관료가 바로 그들이다. 이 칼은 과거에는 최능진·장준하 같은 도전자를 잡아서 베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예술가나 소시민의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로 살아났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0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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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 [2011.12.26 제891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도전자 잡아베던 독재시대 국가원수모독죄
비판·풍자 용납 않는 엠비시대 다시 살아나
지난 10월13일 서울 롯데백화점 주변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연행된 대학강사 박정수씨에게 대법원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공용물건 손상죄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원은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형법상 금지하는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애초 구속영장을 신청한 남대문서 형사과장은 “중요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국격을 높이는 국가 홍보물을 더럽히는 것이 (시민의) 정상적 사고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씨는 애초 경찰이 단순 재물손괴 혐의로 조사를 했다가 ‘윗선’의 지시로 ‘공안 사건’으로 키웠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경찰에게 물었더니, 경찰청장에게 보고되고 청와대에도 보고됐기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MB 비판하면 ‘불경죄’로 다스려
총리실 불법사찰 건의 최대 피해자인 (주)KB한마음 사장 김종익씨는 애초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을 빌미로 유죄가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에서 쫓겨났고 소유 주식을 포기했으며, 경찰과 검찰은 공금횡령과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등을 들어 그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의 공식 죄목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 결정서에서 피해자는 자연인 이명박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적시돼 있다. 검찰은 수개월을 끌다 대통령 명예훼손을 인정하는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결국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고, 사기업의 회장직과 개인 소유의 주식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의 범죄가 된 것이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하라”고 고함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을 장례식 방해 혐의를 적용해 벌금 3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일반인들은 그런 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생소한 법조항을 끄집어내 그를 형사처벌했다.
지난 3월 문화방송 경영진은 ‘검찰과 스폰서’ ‘4대강의 비밀’ 등 사회적 큰 반향을 일으킨 의 간판급 연출자인 최승호 PD를 비롯해 핵심 인력 교체를 강행했다. 최승호 PD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노조는 성명에서 “MB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불경죄’를 범하기라도 하는 듯, 최승호 PD가 MB 정권의 뿌리인 소망교회의 문제점을 다루려 하자 을 거칠게 흔들어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사교양국장은 1년 이상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사람은 예외 없이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경찰, 검찰, 법원, 문화방송 경영진 등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람을 처벌한 명분과 법조항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하나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김종익씨에게 적용한 죄목인 ‘대통령 명예훼손죄’는 최고권력자가 명예훼손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독재 시절 여러 민주인사를 옥죄다가 노태우 정권하에서 폐지된 형법상 ‘국가원수모독죄’의 정신이 깔려 있는 셈이다. 제작자들에 대한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훼손죄 기소,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국가정보원 명예훼손 기소 등 같은 범주에 속하는 정부 쪽 기소 사건 역시 법이 국민의 보호막이 되기는커녕,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의 칼이 되어 정부 정책과 최고권력자에 대해 작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마구 휘둘러대는 것과 같다.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거나 대통령을 사실상 국가와 동일시한 상태에서 권력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언론은 무조건 앵무새처럼 대통령을 찬양해야 하고, 국민은 ‘입을 닥쳐야 하는’ 독재체제하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발상이 이명박 정부에서 살아났다.

최능진
이승만에게 도전해 살해당한 최능진
군사독재 시절 국가원수모독죄의 원형은 전근대 시절과 일제 식민지 시절의 불경죄였다. 1948년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최능진은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이승만의 당선을 저지하려고 같은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그해 10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돼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즉각 정전, 평화 호소 대회’를 추진했지만, 수복 뒤 군법회의는 인민군 치하에서 그의 활동이 국방경비법 32조(이적죄) 위반에 해당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그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총살형을 당했다. 원래 그는 일제하에서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일하다가 공산당과 마찰을 빚어 월남한 인물이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며 친일 경찰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1946년 경무부장에 의해 파면되기도 했다.

장준하
선거 당시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은 집요하게 최능진의 등록을 방해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는 극적으로 후보등록을 했다. 기호 1번이 된 그는 독립운동 경력을 부각시키고 이승만의 친일 경찰 기용을 비판해 인기가 높았으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대문 경찰서장은 본인이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당선 무효를 주장했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이틀 전인 5월8일,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의 날인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의 등록을 무효화했다. ‘혁명의용군 사건’ 역시 조작 의혹이 짙고, 전쟁 중 군법회의의 사형 판결도 평화적으로 전쟁을 종식하려 했던 행위에 정치보복으로 응답했다는 비판이 많다(2009년 8월1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헌법상 근거가 없는 군법회의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 판결을 확정판결로 볼 수 없다고 결정했다).
최능진의 비극적 최후는 실정법과 재판의 형식을 거쳤다고는 하나, 당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앙되던 이승만에게 감히 도전하면 어떤 정치보복을 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후 국가원수모독죄가 적용된 1988년까지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대통령을 비꼬거나 정치적으로 도전한 인물들에게는 긴급조치 위반 등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무서운 보복과 처벌을 가했다.
일본에선 없어진 ‘국가원수모독죄’
최능진과 마찬가지로 장준하도 일제 말 일본군 학도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편입돼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인 박정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경력 때문에 5·16 쿠데타 이후부터 그는 박정희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는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규탄했고, “일본 패망이 없었으면 박정희는 여전히 독립투사를 학살하는 일본군 장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박정희는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공격했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돼 3개월간 투옥됐고, 그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등산에 나섰던 그는 한 벼랑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과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히려 했으나, 죽은 지 24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다. 사고사라고 보기 어려운 정황이 너무나 많은데도 아직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최능진과 장준하는 국가 지도자에게 감히 도전했다가 온갖 수난을 당한 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공통된 점은 이들이 모두 국가 지도자로서 국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두 인물을 공격했다가 보복의 칼을 맞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약점이 있거나 위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농담에도 성난 얼굴을 하는 법이다.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중국의 법은 어떤 자라도 황제에게 경의를 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그 법은 이 경의를 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구실로 그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죽이고 그가 죽이고 싶은 가족은 모두 죽일 수 있다”라고 불경죄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즉 법이 합리성과 공정성의 원칙이 아니라 인격의 원리에 입각해 있고,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해 그에게 어떤 도전도 금하는 전통시대 중국의 법문화를 비판했다.
최고권력자를 신성시한 법의 정신은 군국주의 일본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메이지 헌법 3조에는 ‘천황의 신성불가침’ 조항이 있고, 형법에서는 ‘황실에 대한 죄’ 조항이 있었다. 천황제를 비판한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는 이 불경죄 조항으로 처벌을 받았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박열도 대역죄인이 되어 해방 때까지 무려 21년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의 우익 지도자들은 이 대역죄·불경죄의 조항을 살리려 했다.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자유당의 기타우라 게이타로는 “도대체 26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불경죄를 미국식으로 삭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널리 국민 일반의 지식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를 위해 그 찬부를 묻고 싶다”고 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도 두 법을 존치시켜달라고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헌법이 법 아래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천황이나 황족만이 형법상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에서는 없어진 이 법이 한국에서 1988년까지 ‘국가원수모독죄’로 살아숨쉬었다.
MB 나온 웹자보 삭제 요구 받아
지난해 서울 청량리에서 탈성매매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는 단체 ‘성매매 없는 세상, 이룸’에서 웹자보(인터넷판 대자보)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유한 건물인 서울 양재동의 영일빌딩에서 성매매업소가 영업 중임을 풍자하려고 빌딩의 업소 사진과 함께 합성사진을 실은 것이다. 그러자 담당공무원들은 웹자보 삭제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사무실과 상담소 대표의 개인 휴대전화에까지 수시로 전화를 해댔으며, 이런 식이면 앞으로 상황이 어려울 것이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불경죄는 사라졌으나 불경죄의 정신은 권력자나 관료들에게 아직까지 살아 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싫어하거나 저잣거리 광대들의 농담조차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딱딱한 머리의 권력자, 국가나 국가원수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 아래 국민은 국가 혹은 국가원수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시대나 군국주의 시대의 사고를 가진 관료가 바로 그들이다. 이 칼은 과거에는 최능진·장준하 같은 도전자를 잡아서 베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예술가나 소시민의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로 살아났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세상 읽기] 대학에는 ‘대학’(大學)이 없다 / 김동춘

2011년 12월 5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86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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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역사 60년이 지났는데
아직 박사 따려면 ‘미국’ 가야 하고
학부는 오직 ‘간판’ 취득 기관이다
지난 며칠 동안 학술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에 다녀왔다. 느낀 것이 많지만 대학을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이 눈에 가장 많이 들어왔다. 지하철이나 학교 카페에서 스마트폰 갖고 노는 학생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베를린대학으로 가는 전철간에는 책이나 수업교재를 줄 치며 읽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며칠 동안의 인상이지만 프랜차이즈 업체가 어지럽게 들어와 있는 캠퍼스나, 도서관에서 토익·토플·편입 공부 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젊은이들 탓하자는 것 아니다. 대학에서 밥 먹고 있는 한 사람이자 학부모인 나도 책임의 일부를 지고 있다. 한국의 학부는 취업과 출세를 위한 ‘간판’ 따는 곳이다. 그러니 입학이 중요하지,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입학만으로 이후 취업과 출세가 거의 80%는 정해져버리니, 교수와 학생이 학문을 매개로 만날 일이 없다. ‘서열’이 낮은 대학의 교수나 학생은 이런 조건에서 취업률 압박과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정년 보장을 받은 상위권 대학의 교수는 교육에 매진할 동기가 거의 없다. 게다가 대학 강의의 반은 학술 연구는커녕 하루하루의 생계 걱정을 하는 시간강사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대학의 실제 수준은 사실상 대학원을 보면 안다. 그런데 국내 대학원은 텅 비어 있다. 국내 학위로는 행세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학을 제외하면 외국 학생들이 한국의 특정 교수 밑에서 공부하러 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사실상 국민교육기관인 학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 학부모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하고 심지어는 수많은 전사자(?)가 나오는 비극이 계속되지만, 정작 학문과 학자를 생산하는 대학원은 학부의 부속기관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 대학에는 한국 유학생 7만여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학생 수로는 중국·인도에 이어 3위이지만 인구비례로 보면 압도적 1위다. 한국 학생들이 1년 지출하는 돈은 평균 잡아도 대략 2조원이 훨씬 넘을 것이다. 이 돈이면 서울의 큰 대학 5개 이상을 운영하고도 남는다. 그 돈을 10년 정도 국내 대학(원)에 집중 지원하면 일본처럼 구태여 미국 유학 가지 않고서도 자기 땅이나 세계에서 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또 할 의지도 없다. 대학 역사 60년이 지났는데, 아직 박사를 따려면 ‘미국’ 가야 하고, 학부는 오직 ‘간판’, 특정 학벌집단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증 취득 기관으로만 남아 있다. 경쟁해서는 안 될 곳에 과도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국가의 지원과 경쟁이 필요한 곳은 그냥 버려져 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한국에 대학이 없고 학문이 없는데, 실제로 대학은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다.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학부모 부담률은 전체의 90% 정도로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식 학벌사회 편입시키기 위한 투자비용이다. 독일의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고, 등록금이 거의 없다. 요즘 독일 대학도 미국 따라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 때문에 기존의 국가 지원과 평준화 제도를 철회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서열대로 모여 있는 한국 학생들이 평준화된 대학에 다니는 독일 학생들보다 우수하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학부를 평준화하고, 기업이나 사회에 채용 정보를 주기 위해 졸업정원제 등 대학 평가 체계를 엄격히 하되, 오히려 대학원에 집중 지원하고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여 대학(원)을 진정으로 학문하는 곳, 국제적인 수준을 갖춘 곳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2011년 12월 5일, <한겨레21> 제888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9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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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공인의 실종 ②-지역명망가 학살하고 연 거짓 우파만의 세상
한국사회는 공적인 인간이 절멸된 뒤 친일파가 만든 결과일 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인사 청문 대상자는 총 89명으로 이 중 82.0%에 달하는 73명이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등 이른바 ‘4+1 필수(?) 불법 과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탈세 또는 탈루, 체납 등 세금 관련 의혹이 57명(64.0%)으로 가장 많았고, 부동산 투기 의혹 44명(49.4%), 위장 전입 의혹 29명(32.6%), 병역 기피 의혹 16명(18.0%), 표절 등 논문 관련 의혹 13명(14.6%) 순이었다.
지역도 다르지 않다. 민선 지자체장 3명을 배출한 경기도 성남시와 전북 임실의 경우, 역대 지자체장 전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거의가 뇌물수수 등의 죄목이었다. 경북의 영천시와 소싸움으로 유명한 청도군은 2005년 이후 시장과 군수가 선거법 위반 등 죄목으로 물러나 매년 선거를 치러 왔다. 충청북도는 민선 4기 동안 도내 지자체장 중 4명이 중도에 낙마했고, 민선 5기 들어서도 지자체장 3명이 기소되었다. 강원도·전라남도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단체장의 비리는 거의 전국적 현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4·3 전후로 지역인물 극명하게 갈린 제주
1953년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고 집권당이나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했고, 수많은 장관과 고위 관료가 왔다 갔지만, 민주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는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말을 들은 지도 참 오래되었다. 가장 힘있던 사람들이 재임 기간 중이나 그 이후 각종 부패 스캔들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고,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잊혀졌다.
나는 이것을 중앙이나 지역사회에서 ‘공인의 실종’, 즉 오직 개인적 권력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들만이 주로 힘있는 자리에 올라할 수 있도록 판이 짜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임명직이나 선출직이나 별로 큰 차이는 없다. 민주화 이후 선거라는 절차를 거치고 있지만, 진정 국민과 주민의 편에 서서 일할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은 현재도 거의 없다. 한국전쟁은 좌익은 물론 중도 혹은 우익 인사 중에서도 공적 대의에 헌신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후부터는 그런 사람이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지역사회의 1차 판갈이는 1945년 8·15 해방 직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통해서였다. 공식 역사는 좌익이 이들 조직을 주도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지역사회에 들어가보면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실제로 해방 직후 지역에서 신망받는 상당수 사람들이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이런 조직에서 활동했다. 2차 판갈이는 정부 수립 전후 이들이 탄압을 받아 제거되고, 곧이어 학살된 사건이다.
제주도에서처럼 4·3 사건 이전과 이후 지역사회의 지도자들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등 지역 자치기구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70% 정도가 일제하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지역의 부호나 극우 인사를 도지사로 앉혔고, 4·3 사건을 겪으며 초기 주민의 신망을 받은 거의 모든 인물들이 타살·학살·실종되었다. 1987년 이후 제주 4·3 사건 재조명 분위기가 활발해지자 지역의 노인들은 “요망한(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고, 물경한(시원찮은) 우리만 살아남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즉 민주화 이후 난폭한 폭도로 몰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리더십이 있는 똑똑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이끌고 가르쳐줄 진정한 선배가 없어 마을의 정기와 맥이 끊겼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4·3 이전의 지도자들과 친일파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다시 판이 짜인 이후의 제주 지역 지배자들을 비교해 “똑똑한 사람 다 죽고 나서 아무개가 도지사가 되니 도민들 모두가 비웃었다”고 말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원로가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친일파들에게 죽임 당한 지역인물들
‘원로 실종’, 즉 존경할 만한 지도자 부재는 제주도만이 현상이 아니라 사실 1950년대 이후 한국 전체의 특징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군 단위에서 주민의 요구는 주로 지역사회의 지주 부호층, 친일 식자층으로 구성된 ‘유지’ 집단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총독부 관리들과의 뒷거래와 진정을 통해 민원을 해결하며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왔다. 총독부 관리나 경찰들이 이들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독점적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이들은 쫓겨났고, 주민의 신망을 받던 항일 인사나 지식층, 양심세력이 주민의 참여를 통해 짧은 기간 지역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역사회는 또다시 식민지 말단 관료 출신, 우익청년단 출신, 중앙에서 유명해져서 고향으로 낙하산 타고 내려온 인사로 채워졌고, 일제 시기와 같은 로비와 진정으로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한국전쟁 기간에 이승만 정부의 군경·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해방 직후 지역사회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이들 대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을 죽인 사람은 일본 경찰 출신과 옛 친일 경력자들이었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반이승만 노선이 죽을죄였다.
전남의 완도·해남 등 지역에서는 일제하에서 청년운동·소작쟁의 등에 참가했던 지역의 활동가,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와 같은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상당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자연스럽게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당, 청년단체 등 지역 정치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의 공출에 반대하거나 이승만 편을 들지 않거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부 수립 전후 수없이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다 전쟁 이전에 경찰에 사살되기도 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보도연맹원 혹은 부역자로 지목돼 대부분 학살되었다. 최평산(1903년생)은 일제 시기 완도군 소안면에 본부를 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 구성원이었고,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대표적 항일 인사였다. 그는 해방 뒤 과거 항일운동 동료들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8년 11월5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소안면의 김장균(1923년생)은 광복군 출신이다. 해방 뒤 귀국해 완도군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책임자가 된 뒤 수배와 구금이 반복되었다. 김장균은 완도읍 죽청리 뒷산에 은거하던 중 1949년 4월13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김남곤(1899년생), 김장안(1905년생), 김유곤(1908년생), 최홍길(1899년생)은 소안사립학교 동문으로 일제강점기 소안면 독립운동 2세대다. 이들은 해방 뒤 소안면 사회운동을 주도해 수시로 경찰에 구금됐다. 1949년 8월 소안면에서 좌익 혐의로 각각 체포된 이들은 완도군 신지면 현재의 명사십리 해안가에서 경찰에 모두 사살되었다.

공인 제거 뒤 만든 지금의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완도군 소안면은 해방 뒤 ‘좌익의 근거지’로 지목돼 초토화됐고, 이렇게 전도된 기억은 지금까지 섬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할아버지·아버지가 모두 좌익계열 운동가였던 완도의 정종래씨는 “세상은 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닌 빨갱이의 후손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는데(<주간경향>, 2007년 8월14일), 독립운동의 공적, 해방 직후 지역사회 운동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빨갱이의 멍에만 짊어진 가족들의 이야기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항일운동가 출신이나 좌익계열 사람들이 사라지자 중도층이나 우익 성향 인사들, 식자층이 지역사회에 등장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 전후 동네에서 구장이나 반장 역할을 했던 사람 중 일부가 전쟁 발발 뒤 인민군이 점령한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는데 인민군은 동네 사정을 잘 알고 글을 할 줄 아는 이들에게 지역 행정을 맡겼고, 수복 뒤 경찰이나 우익 치안대는 이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주민의 모함으로 살해된 경우가 있다.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에는 임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 신자였다. 해방 뒤 타 지방 사람 송해봉이 들어와 천주교를 전파하며 지역의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해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이 천주교에 나가면 결혼도 하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그는 글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복 뒤 임씨들은 자치대를 조직해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결국 눈엣가시 같던 외지인 가톨릭 신자를 없앨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었다. 지역에서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송해봉은 그렇게 이웃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한국의 어느 지방, 지역사회에 내려가도 이런 사례를 만날 수 있다. 결국 한국전쟁 전후 지역사회에서 살해·실종·학살된 사람들이 좌익 인사라고 보는 것은 냉전시대의 시각이다.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벗어던져야 한국 지역정치의 실상이 보인다. 공적 마인드를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이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들이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의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의 소멸사라 해야 맞다. 흔히 사람들은 친일파가 득세해 오늘의 한국 정치와 사회가 이렇게 비뚤어졌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친일파와 경찰이 해방 뒤 지역정치를 주도한 항일운동가, 지역 지도자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학살한 결과라고 말해야 한다.
휴전 뒤 7년 만에 나타난 공적 인간
그래서 전쟁 뒤 한국은 사적 이해,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이 되었다. 식민지 말단 하수인 ‘유지집단’은 또다시 지역사회의 유지, 반공국가의 첨병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공적 인간의 소멸사는 동시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짜 우익’의 탄생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적 도덕으로 무장한 새 인간은 휴전 뒤 정확히 7년 만에 나왔다. 4·19 혁명이 그것이다. “기성세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는 “오직 개인과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인간들은 물러가라”는 이야기였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9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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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우익’ 탄생사는 공적 인간의 소멸사 [2011.12.05 제888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공인의 실종 ②-지역명망가 학살하고 연 거짓 우파만의 세상
한국사회는 공적인 인간이 절멸된 뒤 친일파가 만든 결과일 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인사 청문 대상자는 총 89명으로 이 중 82.0%에 달하는 73명이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등 이른바 ‘4+1 필수(?) 불법 과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탈세 또는 탈루, 체납 등 세금 관련 의혹이 57명(64.0%)으로 가장 많았고, 부동산 투기 의혹 44명(49.4%), 위장 전입 의혹 29명(32.6%), 병역 기피 의혹 16명(18.0%), 표절 등 논문 관련 의혹 13명(14.6%) 순이었다.
지역도 다르지 않다. 민선 지자체장 3명을 배출한 경기도 성남시와 전북 임실의 경우, 역대 지자체장 전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거의가 뇌물수수 등의 죄목이었다. 경북의 영천시와 소싸움으로 유명한 청도군은 2005년 이후 시장과 군수가 선거법 위반 등 죄목으로 물러나 매년 선거를 치러 왔다. 충청북도는 민선 4기 동안 도내 지자체장 중 4명이 중도에 낙마했고, 민선 5기 들어서도 지자체장 3명이 기소되었다. 강원도·전라남도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단체장의 비리는 거의 전국적 현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4·3 전후로 지역인물 극명하게 갈린 제주
1953년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고 집권당이나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했고, 수많은 장관과 고위 관료가 왔다 갔지만, 민주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는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말을 들은 지도 참 오래되었다. 가장 힘있던 사람들이 재임 기간 중이나 그 이후 각종 부패 스캔들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고,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잊혀졌다.
나는 이것을 중앙이나 지역사회에서 ‘공인의 실종’, 즉 오직 개인적 권력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들만이 주로 힘있는 자리에 올라할 수 있도록 판이 짜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임명직이나 선출직이나 별로 큰 차이는 없다. 민주화 이후 선거라는 절차를 거치고 있지만, 진정 국민과 주민의 편에 서서 일할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은 현재도 거의 없다. 한국전쟁은 좌익은 물론 중도 혹은 우익 인사 중에서도 공적 대의에 헌신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후부터는 그런 사람이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지역사회의 1차 판갈이는 1945년 8·15 해방 직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통해서였다. 공식 역사는 좌익이 이들 조직을 주도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지역사회에 들어가보면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실제로 해방 직후 지역에서 신망받는 상당수 사람들이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이런 조직에서 활동했다. 2차 판갈이는 정부 수립 전후 이들이 탄압을 받아 제거되고, 곧이어 학살된 사건이다.
제주도에서처럼 4·3 사건 이전과 이후 지역사회의 지도자들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등 지역 자치기구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70% 정도가 일제하 항일운동 경력 때문에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지역의 부호나 극우 인사를 도지사로 앉혔고, 4·3 사건을 겪으며 초기 주민의 신망을 받은 거의 모든 인물들이 타살·학살·실종되었다. 1987년 이후 제주 4·3 사건 재조명 분위기가 활발해지자 지역의 노인들은 “요망한(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고, 물경한(시원찮은) 우리만 살아남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즉 민주화 이후 난폭한 폭도로 몰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리더십이 있는 똑똑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이끌고 가르쳐줄 진정한 선배가 없어 마을의 정기와 맥이 끊겼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4·3 이전의 지도자들과 친일파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다시 판이 짜인 이후의 제주 지역 지배자들을 비교해 “똑똑한 사람 다 죽고 나서 아무개가 도지사가 되니 도민들 모두가 비웃었다”고 말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원로가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친일파들에게 죽임 당한 지역인물들
‘원로 실종’, 즉 존경할 만한 지도자 부재는 제주도만이 현상이 아니라 사실 1950년대 이후 한국 전체의 특징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군 단위에서 주민의 요구는 주로 지역사회의 지주 부호층, 친일 식자층으로 구성된 ‘유지’ 집단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총독부 관리들과의 뒷거래와 진정을 통해 민원을 해결하며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왔다. 총독부 관리나 경찰들이 이들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독점적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이들은 쫓겨났고, 주민의 신망을 받던 항일 인사나 지식층, 양심세력이 주민의 참여를 통해 짧은 기간 지역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역사회는 또다시 식민지 말단 관료 출신, 우익청년단 출신, 중앙에서 유명해져서 고향으로 낙하산 타고 내려온 인사로 채워졌고, 일제 시기와 같은 로비와 진정으로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한국전쟁 기간에 이승만 정부의 군경·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해방 직후 지역사회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이들 대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을 죽인 사람은 일본 경찰 출신과 옛 친일 경력자들이었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반이승만 노선이 죽을죄였다.
전남의 완도·해남 등 지역에서는 일제하에서 청년운동·소작쟁의 등에 참가했던 지역의 활동가,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와 같은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상당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자연스럽게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당, 청년단체 등 지역 정치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의 공출에 반대하거나 이승만 편을 들지 않거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부 수립 전후 수없이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다 전쟁 이전에 경찰에 사살되기도 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보도연맹원 혹은 부역자로 지목돼 대부분 학살되었다. 최평산(1903년생)은 일제 시기 완도군 소안면에 본부를 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 구성원이었고,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대표적 항일 인사였다. 그는 해방 뒤 과거 항일운동 동료들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8년 11월5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소안면의 김장균(1923년생)은 광복군 출신이다. 해방 뒤 귀국해 완도군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책임자가 된 뒤 수배와 구금이 반복되었다. 김장균은 완도읍 죽청리 뒷산에 은거하던 중 1949년 4월13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김남곤(1899년생), 김장안(1905년생), 김유곤(1908년생), 최홍길(1899년생)은 소안사립학교 동문으로 일제강점기 소안면 독립운동 2세대다. 이들은 해방 뒤 소안면 사회운동을 주도해 수시로 경찰에 구금됐다. 1949년 8월 소안면에서 좌익 혐의로 각각 체포된 이들은 완도군 신지면 현재의 명사십리 해안가에서 경찰에 모두 사살되었다.

공인 제거 뒤 만든 지금의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완도군 소안면은 해방 뒤 ‘좌익의 근거지’로 지목돼 초토화됐고, 이렇게 전도된 기억은 지금까지 섬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할아버지·아버지가 모두 좌익계열 운동가였던 완도의 정종래씨는 “세상은 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닌 빨갱이의 후손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는데(<주간경향>, 2007년 8월14일), 독립운동의 공적, 해방 직후 지역사회 운동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빨갱이의 멍에만 짊어진 가족들의 이야기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항일운동가 출신이나 좌익계열 사람들이 사라지자 중도층이나 우익 성향 인사들, 식자층이 지역사회에 등장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 전후 동네에서 구장이나 반장 역할을 했던 사람 중 일부가 전쟁 발발 뒤 인민군이 점령한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는데 인민군은 동네 사정을 잘 알고 글을 할 줄 아는 이들에게 지역 행정을 맡겼고, 수복 뒤 경찰이나 우익 치안대는 이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주민의 모함으로 살해된 경우가 있다.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에는 임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 신자였다. 해방 뒤 타 지방 사람 송해봉이 들어와 천주교를 전파하며 지역의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해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이 천주교에 나가면 결혼도 하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그는 글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복 뒤 임씨들은 자치대를 조직해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결국 눈엣가시 같던 외지인 가톨릭 신자를 없앨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었다. 지역에서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송해봉은 그렇게 이웃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한국의 어느 지방, 지역사회에 내려가도 이런 사례를 만날 수 있다. 결국 한국전쟁 전후 지역사회에서 살해·실종·학살된 사람들이 좌익 인사라고 보는 것은 냉전시대의 시각이다.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벗어던져야 한국 지역정치의 실상이 보인다. 공적 마인드를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이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들이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의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의 소멸사라 해야 맞다. 흔히 사람들은 친일파가 득세해 오늘의 한국 정치와 사회가 이렇게 비뚤어졌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친일파와 경찰이 해방 뒤 지역정치를 주도한 항일운동가, 지역 지도자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학살한 결과라고 말해야 한다.
휴전 뒤 7년 만에 나타난 공적 인간
그래서 전쟁 뒤 한국은 사적 이해,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이 되었다. 식민지 말단 하수인 ‘유지집단’은 또다시 지역사회의 유지, 반공국가의 첨병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공적 인간의 소멸사는 동시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짜 우익’의 탄생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적 도덕으로 무장한 새 인간은 휴전 뒤 정확히 7년 만에 나왔다. 4·19 혁명이 그것이다. “기성세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는 “오직 개인과 가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인간들은 물러가라”는 이야기였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독일 튀빙겐 대학

독일 마지막 일정으로 튀빙겐에 가서 한국학과에서 강의를 했다.
6년만이다. 내 책 전쟁과 사회 독일어판 번역자가 이곳의 송문의교수님이어서 그곳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송교수님이 그 때의 팜플렛을 그대로 갖고 계셨다.
튀빙겐은 중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대학도시다. 네카강을 끼고 있는 그림같은 곳이다. 헤겔, 셀링, 휠더르린 등이 이곳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캐플러가 공부한 곳이기도 하고, 헤세가 젊은시절 서점에서 점원노릇도 한 곳이다. 신학과 철학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뇌과학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대학이라고 한다.사회학자인 다렌도르프가 이곳 사회학과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대학도시인 것 같았다.
목요일 저녁 강연장에는 머리 허연 신사가 나타났다. 헨리 폰 보세 목사님이시다. ( 중간명을 보아 귀족 출신인듯? ) 감리교 목사님으로 한국의 한일장신대에서도 강의하신적이 있다고 한다. 놀라는 것은 그가 내 책 독일어판을 매우 꼼꼼하게 읽으신 독자이며,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려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한국에서 왔는데 청중이 너무 적다고 주최측에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독일 반전세대의 한 분이시다. 말미에 질문도 많이 해 주셔서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매우 놀라운 어른으로 비춰진 것 같다.
금요일 아침, 약간 시간이 나서 튀빙겐 시내, 강가에서 산책하고 도서관도 들러보았다.
초콜렛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500년 전 대학 본부나 기숙사 건물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참 좋은 곳이다. 한국의 중소도시에도 흔한 대형수퍼(SSM)도 볼 수 없었다.
프렌차이즈 업체가 무질서하게 들어와 있는 우리나라 큰 대학의 캠퍼스 풍경과 겹쳐졌다.
2011년 12월 1일 목요일
독일자유대학 3
사람들은 미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데 ( 나도 내 책 전쟁과 사회에서 그렇게 적었다)실제 미국은 대학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미국의 세계지배의 힘이 대학에 잇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들 별로 못 만나봤다. 정치가들 중 그런 식견을 가진 사람 더욱 못봤다. 아마 내년 정권 교체가 되어도 지경부, 외교부의 미국 유학파 관료들이 모든 것을 사사건건 발목잡을 것이다.(오해 없기를 내가 모든 미국 유학파를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님) 시장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그들을 무슨 수로 설득할 것인가? 그들은 한국 속의 미국이다. 미국이 대학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사례중 한국 보다 더 좋은 경우는 없다.
론스타의 먹튀도 사실 그들의 공모에 의해서 가능했다.
어제 자유대학 한국학과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모두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아마도 케이 팝, 한류 열풍으로 한국에 관심을 가졌을 청년들인 것 같다. 인종적으로도 다양해보였다. 참석한 어떤 사람의 전언에 의하면 그 동안의 어떤 초청강의보다도 열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 회사에 취직할 목적으로 입학해도 좋다. 한국학의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국학과 건물도 이채로웠다. 단독주택인데 입구에는 장승이 서 있었다.
낮에 베를린 시내 배회를 했다. 구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도 돌아봤다. 지하철에서 놀란 것은 스파트 폰 보면서 노는 사람을 거의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신문과 책을 들고 있엇고 그 중 일부는 글씨가 매우 빽빽한 두꺼운 책도 들고 있었다. 대학으로 오는 마지막 노선에는 대학생들이 복사물이나 책 보면서 공부하는 모습들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지하철, 대학근처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독일의 힘과 수준을 보는 것 같앗다.
간판따기 위해 학교에 와서 수업시간에는 폰 들고 문자질 하는 한국 학생들. 수업시간 늦에 나타거나 쉬는 시간 출석을 불렀다면 사라지는 학생들. 음식 갖고와서 먹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학생들.
대학은 그 나라의 수준이다. 어디 이 사진의 자유대학 한국학과 처럼 저런 주택에서 교수 학생 모여 밤늦도록 토론하는 그런 대학없을까?
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독일자유대학 2
어제 memory and history 행사 무사히 마쳤다.
나는 한국 대표로 초청받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시아 전체 대표( ?? ) 였다.
라틴아메리카 대표 1명, 그리고 아시아 대표인 나, 나머지는 독일과 미국에서 왔다.
사실 대표라는 말은 농담이다. 무슨 운동 경기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최 측에서 학술횅사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시아 쪽을 배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국인가? 어제 주최측인 다램 인문학 연구소 소장인 쿠퍼교수에 물어보았다.
그는 중국인들은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 말 조심을 하고, 일본인들은 자기 문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을 선택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학자들이 생각해볼 중요한 이야기였다. 한국학자들의 역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사람 중에 왜 나를 선택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마 독일어로 번역된 저서도 있고, 한국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만 하고 있다. 아마 자유대학에서 한국교수 누가 추천했을 것이다. 소장은 어제 마지막 회식을 하면서 그는 이번 행사에 내가 많이 기여했다고 인사를 했다. 의례적인 인사인지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 사람들 모르는 것 이야기 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 사례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통해 기억을 어떻게 신빙성 있는 진실로 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의견을 표명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여성학자 Elizabeth Jelin은 정치학자(? ) 이고 나머지는 모두 역사학자, 문학 전공자들이었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는 좀 따분했다. 최근 20년간 역사학계에서의 기억연구 붐에 대한 논란, 기억이 어떻게 역사학 연구의 풍부화에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 기억연구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 역사기술에서 기억이 갖는 중요성 등이 주요 주제였다.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했다는 Gabrielle Spiegel 이 좌장 역할을 했고, 나머지 발표자들도 이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는 학자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특별히 흥미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이미 내가 다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실천적 영역이나 문제의식의 차원에서는 우리는 그들의 선생이 될 자격이 있다. 단 책상에 앉아 각국의 유사 사례를 정리하거나 이론화할 여유가 없을 따름이다.
인문학자들이라 그런지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현실정치 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내 발표에 대해서도 약간 겉도는 질문만 제기되었고, 독일의 집합적 기억에 대해서도 미국의 전후 점령 등을 언급하지 않아서 좀 답답했다. 학살연구와 마찬가지로 기억연구도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인상이었는데 이 행사에서 중요인물 2 사람이 유대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억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약간의 긴장도 있었다. 이스라엘 출신이자 미국에서 활동하는 발표자는 자신은 팔레스타인의 강제이주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고 오직 두 집단의 상이한 기억만 다루겠다고 말했는데, 과연 오늘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괄호에 넣고 기억을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기억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관적인 현상인데 여기서 어떤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개별발표보다 훨씬 긴장된 것은 마지막의 대중토론 시간이었다. 통상 독일에서 학술행사는 이렇게 진행되는 모양인데 이번 행사도 독일 교육부 지원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언론홍보, 그리고 시민 교육 차원에서 반드시 마지막에는 공개행사를 갖는 것 같았다. 대학의 사회서비스, 공공지식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은 학생들인 것 같았지만 그대로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도 여러 명 참석했다. 개별 발표는 그냥 발표하고 질문에 답하면 되었지만 이런 행사는 청중질문에 대해 즉답을 하기도 해야하고, 또 발표자들끼리 토론도 해야하므로 영어 듣기와 표현에 능하지 않는 나로서는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대로 나에 대한 질문은 없었지만, 어떤 할아버지가 당신들 역사학자들이 나치 학살에 대해 수백권의 책을 썼는데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당신들이 할 수 있는일이 무엇인가라고 아주 심각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도대체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해명을 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에 대한 질책인 것도 같아서 따끔했다. 그런데 내가 들어도 동료 참석자들의 답변은 좀 시원치 않았다. 내가 그 할아버지라면 학살이나 큰 역사적 사건 울궈먹으면서 먹고사는 인간들 아닌가라는 질문을 거꾸로 던지고 싶었다. 학자들끼리의 토론 말미에 대중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은 좋았다. 우리도 대학의 학술행사가 이렇게 운명되면 좋을 것 같다. 하여튼 아시아대표로 고군분투했다. 영어가 서툴로 하고싶은 말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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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독일 자유대학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세대인가 계급인가, 아니면 세대가 계급인가
http://weekly.changbi.com/581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109135215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주소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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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2011년 11월 9일
김동춘 / 성공회대 교수
세대인가 계급인가, 아니면 세대가 계급인가
[창비주간논평] 서울시장 선거의 민심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 세대투표의 특징이 두드러졌다고들 말한다. 출구조사에 의하면 20~40대의 압도적 다수가 박원순을 지지하고, 특히 30대의 경우 박원순 지지자가 나경원 지지자의 3배나 된다는 사실이 그 중요한 근거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계급투표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는 지적이 있다. 소득이 높은 강남 3구의 투표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고, 그중에서도 압구정동에서는 나후보가 79%를 얻는 등 나후보 지지율 상위 10개동은 대부분은 강남구였으며, 박후보는 대학생 밀집 거주지역을 비롯해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구로동, 창신동 등에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이 출구조사가 엄밀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이 조사만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강남구의 경우 인구구성을 확인하여 실제 강남구의 30,40대도 거의가 나후보를 지지했는지 검증해보아야 하고, 거꾸로 30,40대 대부분이 소득이나 재산 여부를 불문하고 박후보를 지지했는지 여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50대 이상과 40대 이하의 투표행태가 현격하게 갈린다는 것, 저소득층이 밀집 거주하는 지역의 투표율이 낮다는 것, 아파트가격이 높은 지역의 투표율이 높고 나후보 지지율이 높다는 것을 종합해보면, 이번 선거는 세대투표 경향이 두드러진 가운데 빈곤층과 부유층의 차별적인 투표행태가 그 밑에 깔려 있다는 점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하층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두드러지고, 상대적으로 부르주아가 자기 집단이익에 더욱 민감하다는 기존의 이론도 이번 선거에서 또 한번 확인되었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세대의식'이 반영된 것인가
그런데 과연 언론이나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세대, 계급의 개념이 과연 지금 한국인의 투표성향, 더 나아가 정치의식, 사회의식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계급이나 세대는 사회적 응집체 중의 하나다. 그런데 '계급'이 주로 경제질서에서 같은 위치, 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을 말한다면 세대는 생물학적·사회역사적 시간대에서 특정한 위치를 공유하는 집단, 즉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특정한 정치경제적 사건을 비슷한 나이에 겪은 사람들을 말한다. 만하임(K. Mannheim)은 신선한 접촉의 경험, 즉 젊은 나이에 특정 공간에서 어떤 큰 사건을 같이 겪음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기억'으로 각인될 때 이들은 세대의식을 공유하고 그것은 이후 지속적으로 이들의 의식과 정치행동을 좌우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를 두고 젊은 '세대'가 박후보를 지지했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도 좋을까?
앞의 정의에 따르면 486세대, 4․19세대 등 정치적 경험과 뚜렷한 가치지향을 공유한 사람들은 분명히 세대라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의 30대, 40대가 각각 별도의 세대가 되거나, 20대까지 묶어 40대 이하를 하나의 세대로 부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물론 30대 이상의 경우 청년시절에 IMF 경제위기를 겪었다는 점, IT기술과 인터넷 문화에 어릴 때부터 노출되었다는 점, 월드컵 경험 등의 공통점을 들 수는 있다. 그리고 40대 이하가 모두 SNS에 익숙하다는 점을 들 수도 있지만, 이들이 이번 선거 이전에 하나의 공유된 사회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사한 가치와 행동을 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이번 박후보에게 거의 몰표를 안겨준 30대의 경우 2007년 대선 때는 그 반대의 투표행태를 보였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세대현상은 오히려 노년에 더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50대 이상, 특히 60대 이상이 압도적으로 나후보를 지지했는데, 한국전쟁과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겪은 60대 이상은 과거에는 물론 10여년간 거의 모든 투표에서 매우 일관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0대 이하를 묶어주는 고리는 세대의식이 아니라 이들이 온몸으로 겪고 있는 현재의 비정규직화, 실업, 주거 등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대'라는 외피로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롬니((M. Romney)는 "이것은 계급전쟁이다"라고 공격했다. 월가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이 금융자본주의의 탐욕과 CEO들의 부도덕한 돈잔치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2010년 우익의 티파티(Tea Party)운동이 뜰 때와 유사하게 무정형적이고 계급의식도 약하며 정치엘리뜨 일반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에서 스페인, 그리스에 이르는 유럽·북아프리카 전지역 청년들의 저항운동도 사실상은 심각한 청년실업과 빈곤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크다. 즉 청년들의 좌절은 전세계적 현상이고, 그것은 미국 주도의 시장자본주의, 1%가 99%를 가져가는 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60년대 반전세대의 문화적 저항과는 달리 '세대'라는 외피를 통해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비정치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 최근 칼럼은 지금까지 미국은 후세대가 항상 이전 세대보다 좋았고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것이 어려워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미국에나 한국에서 정규직 아버지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아들을 걱정하고, 비정규직 아버지는 아들을 정규직으로 만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가 자녀의 정규직 채용시 가산점을 요구하는 것처럼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계급상황을 개인적으로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가짜 해결사'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의 청년들처럼 한국의 20~40세대도 이 고실업과 비정규직화, 사회적 양극화, 대자본의 거침없는 탐욕,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하는 기성 정치권과 언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순을 온몸에 안고 있는 존재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역시 이들이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므로, 결국 '세대'로 지칭되는 현실의 밑에는 전통적 세대현상이 아닌 잠재적인 계급현상, 더 나아가 경제양극화에 응답하지 못하는 현재의 정치적 대표체제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관된 의식이 없고 무정형의 집단이므로 2007년 '이명박 밀어주기' 때처럼 앞으로 대자본의 편을 들면서 실업, 복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선전하는 가짜 해결사, 즉 우익세력에 또다시 기웃거릴 수도 있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세대라는 형식으로 잠재화된 계급집단의 불만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결과는 내년의 정권교체에 청신호를 주고는 있지만, 이 불만은 정권심판의 구호만으로 결집될 수 없으며, 설사 현재의 야당 중심으로 정권교체를 하더라도, 이들에게 또다시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 이들을 일관된 의식을 갖는 사회세력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지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청된다.
2011.11.9 ⓒ 창비주간논평
[세상 읽기] 크레인과 굴뚝 / 김동춘

2011년 11월 14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53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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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적 안 잡으면 백성이 죽는다”
큰 도적 잡아, 일하는 사람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정치세력 어디 없나?
309일 동안 고공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 내려온 김진숙씨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고 한다. 노사 합의에 따라 농성을 풀고 내려온 사람을 ‘업무방해’죄로 구속을 했다면 더 큰 갈등이 발생했을 것이다. 혹시 큰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던 국민들도 크게 안심을 했고, 그간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섰던 희망버스 기획자들이나 참가자들 모두 크게 안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진중공업 사태로 숨을 돌리는 순간 쌍용자동차에서는 열아홉번째 희생자가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퇴직 노동자가 돈 벌러 나간 사이 그의 부인이 집에서 숨을 거두었고, 두 아이는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의 주검 옆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다.
크레인에 올라갔던 노동자는 무려 300일 이상의 농성 끝에 살아서 내려오기는 했으나 공장 굴뚝과 지붕에 올라갔다가 개처럼 끌려 내려왔던 노동자들은 곧바로 회사 정상화 이후 복직 약속 종이 한 장 달랑 든 채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한 사람씩 죽어가고 있다. 그들이 올라갔던 크레인과 굴뚝은 보통사람들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인간 존재의 막장이나 극한지대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 길이 없었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저 높은 곳으로 살기 위해 올라갔다. 곤봉과 최루탄을 쏘아대는 경찰, 무기를 든 용역직원, 업무방해로 구속영장 들고 서 있는 검찰, 경찰과 용역의 폭력에는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언론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땅에는 그들이 서 있을 공간은 없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이들을 ‘떼잡이’라고 부르고, 검찰은 ‘업무방해’, ‘공무집행방해’ 등의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라 부른다. 이명박 정권 집권 2년도 안 된 2009년 11월에 이미 구속노동자는 334명을 넘었고, 쌍용자동차 한 회사에서만 구속노동자가 무려 86명에 달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노동자들도 해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용자나 언론이 강조하지 않아도 노동자들 자신이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 수십년간 열심히 일했는데, 경영 위기에 처하면 오직 노동자들만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고, 해고자 선별 과정이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사쪽의 온갖 협박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파업하다 해고되면 빨간 딱지를 붙여 다른 곳에 재취업도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를 그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고, 정당과 정치권, 노동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노조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목숨을 각오한 결사항전에 나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감사론(監司論)에 빗대어 보면, 굶주린 나머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작은 도적은 사실 도적이 아닌데도 무조건 구속되고, 남의 돈을 개인 돈처럼 빼돌리거나 투자를 잘못해서 충직한 머슴을 거리로 내몬 사람들,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로비 자금을 챙긴 ‘큰 도적’들은 언제나 위세 당당하여 야경꾼이나 포도청, 사헌부는 물론 나라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처벌하지 못한다. 도저히 이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인들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크레인이나 굴뚝에 올라가 소리치고,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백성들은 소리 없이 죽어간다.
나라와 사회의 진짜 주인인, 땀을 흘려 생산을 하는 자들이 궁지에 몰려 크레인으로 올라가거나 생계형 범죄를 저질렀다고 감옥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우리는 원한다. 다산 선생 말대로 “큰 도적을 잡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죽는다”. 큰 도적 잡아서 일하는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정치세력 어디 없나?
피 묻은 총검을 든 한국 ‘자유민주주의’ [2011.11.14 제885호]
2011년 11월 14일, <한겨레21> 제885호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7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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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총검을 든 한국 ‘자유민주주의’ [2011.11.14 제88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독재와 쿠데타로 자유주의의 원리를 배반한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우리 한인은 자유민으로 죽을지언정 남의 노예 백성으로 살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우리가 혈전 마당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표명한 것입니다. 우리 평민과 군인들이 각각 가진 것을 다 사용해서 세계 모든 자유민의 원수를 일심으로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이승만)
“우리는 침략자를 물리치고 국토를 통일하여 자유대한을 건설할 권리가 있음을 전세계에 엄숙히 선언한다.”(‘38선 정전안을 결사반대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인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의 꿈은 분쇄하고 세계의 자유 인류의 평화를 이룩해야 할 우리의 앞날에는 아직도 허다한 난관과 시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박정희)

유신헌법이 강조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2009년 8월 교과서 검정 신청을 3개월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뉴라이트 쪽의 주장을 받아들여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을 새롭게 발표했고, 2010년에는 이미 검정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사’로 고쳐 쓰도록 했다. 2011년 교육과정에서는 지난 8월9일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 고시했다. 그리고 이번에 고시된 개정 교육과정에는 위원회에서 논의된 적도 없는 내용을 추가했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도록 고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때아닌 자유민주주의냐 민주주의냐 논란이 일었다. ‘역사교육과정 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이 교육과정에 일일이 개입하고 국가기구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교육과정 개발, 집필 기준 작성, 검정까지 주도하도록 하여 사실상 정권의 입김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기존 교과서 내용 수정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거의 쿠데타적인 방식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고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는가?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떠나서는 서술될 수 없다. …하나였던 한반도의 북부에 불법적으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고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침략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권희영)라고 그 이유를 주장한다. 즉 대한민국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칙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독재를 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단지 권력구조의 측면에서만 일시적으로 자유의 원칙을 제한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결국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이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의 전문에는 우리 헌법 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런데 유신체제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표현과 결사의 자유, 법치, 삼권분립을 가장 심각하게 제한하고 조작간첩 사건 등 국가가 사실상 범죄를 자행한 시기였다. 그런데 유신헌법이 이렇듯 국가를 신성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가장 무시하고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실이 바로 오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즉 유신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유’(민주)다. 이 ‘자유’(민주)는 공산독재는 배격하나 반공독재와 자본독재,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용인할 여지를 남긴다.
이승만과 자유당, 천황제의 적자들
물론 이 사상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에 속하는 우드로 윌슨과 해리 트루먼은 민주정부와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내세우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들, 특히 윌슨 시대의 독일, 트루먼 시대의 소련 공산주의 독재의 사슬에서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을 도덕 혹은 정의의 담론으로까지 승격시켰다. 이들에게 자유와 시장경제는 도덕적, 더 나아가 종교적 함의까지 갖는다. 그런데 윌슨의 ‘자유’는 사실상 제국주의 국가의 자유임이 이미 판명 났다. 그의 민족자결은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될 수 없는 강자의 논리였다. 트루먼의 ‘자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전쟁에 이런 관점에서 접근했다. 트루먼에게 한국전쟁은 자유세계와 공산노예의 투쟁이었다. 즉 트루먼과 미국에 자유세계는 선의 세계, 문명세계이고 공산주의는 악의 세계, 야만의 세계였다. 그에게는 한국과 같이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시장경제만 유지한다면 ‘자유’의 이름하에 진행된 옛 제국주의 파시즘 세력(친일파)의 부활, 반인권적인 식민지적 경찰통치의 부활, 군과 경찰의 노골적 폭력과 학살이 일어나도 알 바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 윌슨의 제자이며 트루먼의 후원하에 한국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윌슨과 트루먼의 보편주의는 바로 이승만의 ‘자유세계’ 관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승만에게 ‘자유’와 ‘독립’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구 집권과 정적 탄압을 위한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비상계엄 선포, 전시라는 이름하에 의심되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 거의 재판도 없이 죽일 수 있었던 특별조치령, 민간인을 군인으로 취급해 구속할 수 있었던 국방경비법, 인민군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을 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체포해 처형한 수복 뒤의 지옥과 같던 서울이, 피난민의 생명과 재산이 외국군인 미군의 무차별적 폭력과 자의적 작전 결정에 의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할 수 있었던 이 땅이 이들에게는 ‘자유세계’였다.
“자유대한의 푸른 하늘엔/ 학두루미가/ 펄펄 나르네/ 춤을 추네/ 얼마나 그리던 자유였더냐/ 우리는 지금 자유 찾았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갖었네.”( 박종화, ‘구름 위에 넌짓 실어’)
제1공화국의 자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기초로 하나 경찰의 전제정치, 우익 청년단의 고문과 테러를 수반했다. 그래서 가공할만한 선거조작과 부패를 저지르고, 어린 학생들에게 총칼을 겨눈 집단이 바로 이승만의 수족 ‘자유당’이었다. 일본의 ‘자유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유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희생하고라도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우위를 내세운 천황제의 적자였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 역사학자들이 천황제의 전쟁범죄를 감추고 이웃 국가 침략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자민당과 자유주의 사관은 사실상 미국이 만들어준 자유세계의 일원이자 사유재산 비판을 대역죄인 취급한 천황제의 적자들인 셈이다.

유신 쿠데타 북에 먼저 알린 박정희
그러니 박정희가 국회의원 3분의 2 선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절차적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그것도 통일을 위한다는 거짓 명분을 들이대고 국민을 거의 겁박해 90% 이상의 지지로 통과시키고, 긴급조치라는 초유의 대통령 명령을 법으로 대신하던 시절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강변한 것은 이승만이 말한 ‘자유’의 후렴에 해당하고 멀리는 그가 일본의 명치유신과 조선총독부 통치하의 전시동원 체제와 억압을 남한에 다시 실천한 장본인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었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채 온 국민에게 사상적 순결성을 강요하고, 국가에 대한 일방적 충성을 강조한 천황제 파시즘의 후계자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민주적 질서’의 수호자가 된 셈이다. 이승만의 계엄령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국가의 긴급권 행사, 즉 개인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통제했는데, 이 자유의 제한이 바로 ‘자유’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역설이 발생한 셈이었다. 그렇게 되니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던 어린 학생들이 자유당과 반공연맹을 불태우는 일이 발생했고, 박정희의 긴급조치를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 “자유민주주의 유린”이라고 공격한 종교인들이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다.
만약 백번 양보해 이승만이 말한 자유와 박정희가 말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반공 혹은 국가 억압 정당화의 논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파시즘을 명백하게 반대한다는 점을 법과 절차, 행정집행에서 명시해야 하고 국민, 국가 그리고 민족의 입장에서 그것을 배반한 사람을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이후 현재까지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발언을 하거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에 테러를 행사하는 극우세력에 대해 ‘자유민주적’ 헌법정신과 각종 형법을 적용해 처벌한 예가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민에 대한 테러를 자유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 국가인 미국의 한국 국민에 대한 범죄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했으며, 박정희의 경우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북한 당국과 비밀히 협상을 했고, 국가의 기밀 사항까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인 북한에 먼저 통고해주었다. 유신 쿠데타를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알려주는 반국가적 조처까지 취한 것이다(박명림, ‘박정희 시기의 헌법정신과 내용의 재해석’, <역사비평>, 2011년 가을).
여기서 과거의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오늘날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싣자는 뉴라이트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냉전 시절 자유주의에 대해 앤서니 아블라스터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가이거나 혹은 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반혁명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가까워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러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한국의 앞날을 예견하듯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범위라는 공화국도 원한다. 그들의 온건한 범위를 넘어서면 그들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들은 행복하게 혁명이라는 관념을 즐긴다. 그러나 그들은 1848년 인민폭동의 광풍 앞에서 공포에 질려 후퇴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문명과 질서를 구하기 위해 계엄령의 총검 뒤에 숨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
사실 공산주의에 두려움을 가졌던 1945~60년의 기간처럼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원리를 그렇게도 비열하게 배반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87년까지, 아니 2011년 오늘 이 시점까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원리를 비열하게 배반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오직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를 내세우는 파시스트거나 천황제 파시즘의 후예라고 공격하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외친 사람들에게 총검을 들이댄 자유(민주)주의였다. 오늘도 그들은 절차와 법을 지키자는 사람들 앞에 주먹을 과시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너희들 인민민주주의자 아니냐고.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7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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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총검을 든 한국 ‘자유민주주의’ [2011.11.14 제88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독재와 쿠데타로 자유주의의 원리를 배반한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우리 한인은 자유민으로 죽을지언정 남의 노예 백성으로 살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우리가 혈전 마당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표명한 것입니다. 우리 평민과 군인들이 각각 가진 것을 다 사용해서 세계 모든 자유민의 원수를 일심으로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이승만)
“우리는 침략자를 물리치고 국토를 통일하여 자유대한을 건설할 권리가 있음을 전세계에 엄숙히 선언한다.”(‘38선 정전안을 결사반대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인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의 꿈은 분쇄하고 세계의 자유 인류의 평화를 이룩해야 할 우리의 앞날에는 아직도 허다한 난관과 시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박정희)

유신헌법이 강조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2009년 8월 교과서 검정 신청을 3개월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뉴라이트 쪽의 주장을 받아들여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을 새롭게 발표했고, 2010년에는 이미 검정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사’로 고쳐 쓰도록 했다. 2011년 교육과정에서는 지난 8월9일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 고시했다. 그리고 이번에 고시된 개정 교육과정에는 위원회에서 논의된 적도 없는 내용을 추가했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도록 고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때아닌 자유민주주의냐 민주주의냐 논란이 일었다. ‘역사교육과정 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이 교육과정에 일일이 개입하고 국가기구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교육과정 개발, 집필 기준 작성, 검정까지 주도하도록 하여 사실상 정권의 입김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기존 교과서 내용 수정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거의 쿠데타적인 방식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고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는가?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떠나서는 서술될 수 없다. …하나였던 한반도의 북부에 불법적으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고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침략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권희영)라고 그 이유를 주장한다. 즉 대한민국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칙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독재를 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단지 권력구조의 측면에서만 일시적으로 자유의 원칙을 제한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결국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이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의 전문에는 우리 헌법 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런데 유신체제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표현과 결사의 자유, 법치, 삼권분립을 가장 심각하게 제한하고 조작간첩 사건 등 국가가 사실상 범죄를 자행한 시기였다. 그런데 유신헌법이 이렇듯 국가를 신성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가장 무시하고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실이 바로 오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즉 유신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유’(민주)다. 이 ‘자유’(민주)는 공산독재는 배격하나 반공독재와 자본독재,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용인할 여지를 남긴다.
이승만과 자유당, 천황제의 적자들
물론 이 사상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에 속하는 우드로 윌슨과 해리 트루먼은 민주정부와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내세우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들, 특히 윌슨 시대의 독일, 트루먼 시대의 소련 공산주의 독재의 사슬에서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을 도덕 혹은 정의의 담론으로까지 승격시켰다. 이들에게 자유와 시장경제는 도덕적, 더 나아가 종교적 함의까지 갖는다. 그런데 윌슨의 ‘자유’는 사실상 제국주의 국가의 자유임이 이미 판명 났다. 그의 민족자결은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될 수 없는 강자의 논리였다. 트루먼의 ‘자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전쟁에 이런 관점에서 접근했다. 트루먼에게 한국전쟁은 자유세계와 공산노예의 투쟁이었다. 즉 트루먼과 미국에 자유세계는 선의 세계, 문명세계이고 공산주의는 악의 세계, 야만의 세계였다. 그에게는 한국과 같이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시장경제만 유지한다면 ‘자유’의 이름하에 진행된 옛 제국주의 파시즘 세력(친일파)의 부활, 반인권적인 식민지적 경찰통치의 부활, 군과 경찰의 노골적 폭력과 학살이 일어나도 알 바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 윌슨의 제자이며 트루먼의 후원하에 한국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윌슨과 트루먼의 보편주의는 바로 이승만의 ‘자유세계’ 관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승만에게 ‘자유’와 ‘독립’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구 집권과 정적 탄압을 위한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비상계엄 선포, 전시라는 이름하에 의심되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 거의 재판도 없이 죽일 수 있었던 특별조치령, 민간인을 군인으로 취급해 구속할 수 있었던 국방경비법, 인민군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을 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체포해 처형한 수복 뒤의 지옥과 같던 서울이, 피난민의 생명과 재산이 외국군인 미군의 무차별적 폭력과 자의적 작전 결정에 의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할 수 있었던 이 땅이 이들에게는 ‘자유세계’였다.
“자유대한의 푸른 하늘엔/ 학두루미가/ 펄펄 나르네/ 춤을 추네/ 얼마나 그리던 자유였더냐/ 우리는 지금 자유 찾았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갖었네.”( 박종화, ‘구름 위에 넌짓 실어’)
제1공화국의 자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기초로 하나 경찰의 전제정치, 우익 청년단의 고문과 테러를 수반했다. 그래서 가공할만한 선거조작과 부패를 저지르고, 어린 학생들에게 총칼을 겨눈 집단이 바로 이승만의 수족 ‘자유당’이었다. 일본의 ‘자유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유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희생하고라도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우위를 내세운 천황제의 적자였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 역사학자들이 천황제의 전쟁범죄를 감추고 이웃 국가 침략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자민당과 자유주의 사관은 사실상 미국이 만들어준 자유세계의 일원이자 사유재산 비판을 대역죄인 취급한 천황제의 적자들인 셈이다.

유신 쿠데타 북에 먼저 알린 박정희
그러니 박정희가 국회의원 3분의 2 선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절차적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그것도 통일을 위한다는 거짓 명분을 들이대고 국민을 거의 겁박해 90% 이상의 지지로 통과시키고, 긴급조치라는 초유의 대통령 명령을 법으로 대신하던 시절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강변한 것은 이승만이 말한 ‘자유’의 후렴에 해당하고 멀리는 그가 일본의 명치유신과 조선총독부 통치하의 전시동원 체제와 억압을 남한에 다시 실천한 장본인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었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채 온 국민에게 사상적 순결성을 강요하고, 국가에 대한 일방적 충성을 강조한 천황제 파시즘의 후계자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민주적 질서’의 수호자가 된 셈이다. 이승만의 계엄령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국가의 긴급권 행사, 즉 개인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통제했는데, 이 자유의 제한이 바로 ‘자유’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역설이 발생한 셈이었다. 그렇게 되니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던 어린 학생들이 자유당과 반공연맹을 불태우는 일이 발생했고, 박정희의 긴급조치를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 “자유민주주의 유린”이라고 공격한 종교인들이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다.
만약 백번 양보해 이승만이 말한 자유와 박정희가 말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반공 혹은 국가 억압 정당화의 논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파시즘을 명백하게 반대한다는 점을 법과 절차, 행정집행에서 명시해야 하고 국민, 국가 그리고 민족의 입장에서 그것을 배반한 사람을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이후 현재까지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발언을 하거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에 테러를 행사하는 극우세력에 대해 ‘자유민주적’ 헌법정신과 각종 형법을 적용해 처벌한 예가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민에 대한 테러를 자유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 국가인 미국의 한국 국민에 대한 범죄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했으며, 박정희의 경우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북한 당국과 비밀히 협상을 했고, 국가의 기밀 사항까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인 북한에 먼저 통고해주었다. 유신 쿠데타를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알려주는 반국가적 조처까지 취한 것이다(박명림, ‘박정희 시기의 헌법정신과 내용의 재해석’, <역사비평>, 2011년 가을).
여기서 과거의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오늘날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싣자는 뉴라이트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냉전 시절 자유주의에 대해 앤서니 아블라스터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가이거나 혹은 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반혁명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가까워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러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한국의 앞날을 예견하듯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범위라는 공화국도 원한다. 그들의 온건한 범위를 넘어서면 그들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들은 행복하게 혁명이라는 관념을 즐긴다. 그러나 그들은 1848년 인민폭동의 광풍 앞에서 공포에 질려 후퇴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문명과 질서를 구하기 위해 계엄령의 총검 뒤에 숨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
사실 공산주의에 두려움을 가졌던 1945~60년의 기간처럼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원리를 그렇게도 비열하게 배반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87년까지, 아니 2011년 오늘 이 시점까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원리를 비열하게 배반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오직 강자의 자유, 대자본의 자유를 내세우는 파시스트거나 천황제 파시즘의 후예라고 공격하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외친 사람들에게 총검을 들이댄 자유(민주)주의였다. 오늘도 그들은 절차와 법을 지키자는 사람들 앞에 주먹을 과시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너희들 인민민주주의자 아니냐고.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1년 10월 25일 화요일
“MB 정부의 지배방식은 전쟁정치”
2011년 10월 25일, <한겨레>에 올라온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024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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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사회학대회’ 김동춘 교수 발표
반대세력을 ‘적’으로 간주
검찰·일부 언론 동원 진압해
“개발독재 방식 신자유주의”

이명박 정부는 처음엔 주로 경제 자유화에 충실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독단적인 국정운영과 민간인 사찰, 과도한 개입주의적 경제정책 등으로 그 성격에 대해 갖가지 논란이 일었다. 곧 민주주의 절차로 집권했지만 사실상 30년 전 권위주의 정권과 다름없는 독재 정권이라거나 파시즘 정권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런 진단에 더해 김동춘(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21일 열린 제14회 비판사회학대회에서 엠비 정부의 성격을 ‘전쟁정치’란 개념으로 설명해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지배 방식’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의 근저엔 “지배 집단의 위기의식과 기득권 상실의 불안감 속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쟁정치’, 곧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제도적 쿠데타’”가 자리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전쟁정치란 국가가 전쟁상황에 있다는 전제 아래 국가의 유지, 곧 안팎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을 가장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국내 정치를 전쟁 수행하듯이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곧 반대세력을 ‘좌파’나 ‘적’으로 간주한 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압하는 방식의 국정운영을 일관되게 계속해왔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그동안의 민주화 성과를 인정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일부 억제해왔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민주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봤지만 이후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건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정권 존립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지배 세력의 이해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전쟁정치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 국군 기무사령부, 검찰·경찰 공안부서 등 ‘그림자 정부’의 위상이 다시 강화되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청산하려는 시도는 이런 전쟁정치의 지배 방식이 표면화된 단적인 사례라고 본다.
사실상 전쟁정치는 민주정부 10년을 제외하고 한국의 역대 정부들이 예외 없이 수행해왔던 지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뒤에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검찰과 언론의 구실이다. ‘자기편’에는 봐주기 수사를 하지만 반대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리한 기소도 서슴지 않는 검찰, 정부 사업에 대해 홍보성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을 “억압과 정당화의 두 기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거나 권위주의 정권 등으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이 정부는 아무런 가치나 방향, 이념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경제 제일주의, 시장주의의 허구성, 그리고 한국 보수주의의 퇴행적 성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이런 전쟁정치가 일관된 계획이나 지휘 아래 진행됐다고도 보기 어려우며, 차라리 지배 세력이 지난 10년 동안 약간 상실했던 이익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 체면과 염치를 가리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설명했다.
이런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한국 사회의 전체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면? 김 교수는 기본적으로 한국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으며, 1987년 민주화에도 그 지배 세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뒤로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했고, 지배 세력과 집권 세력(민주정부) 사이의 갈등이 노골화됐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공주의·개발독재 세력의 재집권’이라는 성격을 띤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이전처럼 지배 세력과 집권 세력을 다시 일치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경제적 신자유주의 추진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역진이라는 흐름을 결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해, “개발독재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성격을 갖는다는 풀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024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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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사회학대회’ 김동춘 교수 발표
반대세력을 ‘적’으로 간주
검찰·일부 언론 동원 진압해
“개발독재 방식 신자유주의”

이명박 정부는 처음엔 주로 경제 자유화에 충실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독단적인 국정운영과 민간인 사찰, 과도한 개입주의적 경제정책 등으로 그 성격에 대해 갖가지 논란이 일었다. 곧 민주주의 절차로 집권했지만 사실상 30년 전 권위주의 정권과 다름없는 독재 정권이라거나 파시즘 정권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런 진단에 더해 김동춘(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21일 열린 제14회 비판사회학대회에서 엠비 정부의 성격을 ‘전쟁정치’란 개념으로 설명해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지배 방식’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의 근저엔 “지배 집단의 위기의식과 기득권 상실의 불안감 속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쟁정치’, 곧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제도적 쿠데타’”가 자리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전쟁정치란 국가가 전쟁상황에 있다는 전제 아래 국가의 유지, 곧 안팎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을 가장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국내 정치를 전쟁 수행하듯이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곧 반대세력을 ‘좌파’나 ‘적’으로 간주한 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압하는 방식의 국정운영을 일관되게 계속해왔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그동안의 민주화 성과를 인정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일부 억제해왔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민주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봤지만 이후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건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정권 존립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지배 세력의 이해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전쟁정치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 국군 기무사령부, 검찰·경찰 공안부서 등 ‘그림자 정부’의 위상이 다시 강화되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청산하려는 시도는 이런 전쟁정치의 지배 방식이 표면화된 단적인 사례라고 본다.
사실상 전쟁정치는 민주정부 10년을 제외하고 한국의 역대 정부들이 예외 없이 수행해왔던 지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뒤에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검찰과 언론의 구실이다. ‘자기편’에는 봐주기 수사를 하지만 반대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리한 기소도 서슴지 않는 검찰, 정부 사업에 대해 홍보성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을 “억압과 정당화의 두 기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거나 권위주의 정권 등으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이 정부는 아무런 가치나 방향, 이념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경제 제일주의, 시장주의의 허구성, 그리고 한국 보수주의의 퇴행적 성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이런 전쟁정치가 일관된 계획이나 지휘 아래 진행됐다고도 보기 어려우며, 차라리 지배 세력이 지난 10년 동안 약간 상실했던 이익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 체면과 염치를 가리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설명했다.
이런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한국 사회의 전체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면? 김 교수는 기본적으로 한국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으며, 1987년 민주화에도 그 지배 세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뒤로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했고, 지배 세력과 집권 세력(민주정부) 사이의 갈등이 노골화됐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공주의·개발독재 세력의 재집권’이라는 성격을 띤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이전처럼 지배 세력과 집권 세력을 다시 일치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경제적 신자유주의 추진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역진이라는 흐름을 결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해, “개발독재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성격을 갖는다는 풀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세상 읽기] 사장님들의 분노 / 김동춘

2011년 10월 24일, <한겨레>에 올라온 연재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21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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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 정치가들이 말하는 ‘경제’와
자신들의 ‘경제’는 전혀 다르단 것을
자영업자들은 진작 알아차렸어야…
지난 18일 요식업을 하는 자영업자 7만여명이 서울 잠실경기장에 모였다. 그들은 카드수수료율을 대형마트 수준인 1.5% 정도로 내려 달라고 요구했다. 신용카드 회사는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지만 중소상인들은 대형마트의 거의 갑절인 2.7% 이상의 카드수수료를 내고서는 도저히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자영업자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전체 취업자의 28%를 차지하는 자영업자 중 연매출 4800만원 이하의 간이과세자가 전체의 80%에 달한다고 하고, 자영업자의 4분의 1은 월 120만원의 소득도 올리지 못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사실 대부분의 자영업자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지 못해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노무현 정부와 비교해서 자영업자에 대한 정부의 배려는 어떤가’라는 설문에 자영업자의 46.7%가 ‘더 힘들다’고 답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서울이나 지방에서 택시를 탔을 때 기사들에게 “요즘 살기 어떠냐”고 물어보면 육두문자부터 먼저 내뱉었던 기억이 있다. 그 개인택시 기사님들 모두 2007년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을 것이다. 서강대의 조사 결과 2007년 선거에서 자영업자의 60%가 지지했다고 하는데, 비공식적인 조사로는 자영업자들의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80%를 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하니 이들은 거의 ‘묻지 마’ 투표를 한 셈이다. 이들 호프집, 치킨집, 미장원, 식당, 카센터 사장님들과 재래시장 아주머니들은 이명박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 했을 때, 자신들도 이 비즈니스 세계의 일원인 줄 알았을 것이다.
2009년 6월 이명박 대통령이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했을 때 상인들이 대형마트 때문에 장사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가 법을 만들어도, (대기업이) 헌소를 내면 정부가 패소를 합니다. … 요즘은 농촌에도 인터넷이 들어와서 직거래를 하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즉 망해가는 소상인들을 보호할 방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기업들이 헌법재판소에 제소할 것까지 미리 알려주면서 상인들이 몰락해도 그것은 시장의 법칙이니 어쩔 수 없고 알아서 자구책을 구하라고 했다.
대형마트의 뒷골목 상권 장악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국회는 뒷북치듯이 유통산업발전법을 통과시키고 자영업자를 보호하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미리 겁을 준 것처럼 대형마트들이 아직 헌법재판소에 제소를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고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이 본격 작동되면 이들 자영업자들은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동네 가게는 모조리 사라질 수도 있다.
자영업자들의 91%는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임금노동자보다 더 낮은 소득수준에 있는 자영업자들은 이 사회에서 완전히 버려진 존재다. 그래서 이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카드수수료율은 마땅히 대형슈퍼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대형슈퍼의 동네시장 약탈 역시 중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고통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선거 때 정치가들이 말하는 ‘경제’와 자신들의 ‘경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경제활동인구의 28%를 차지하는 자영업자들의 처지는 오늘 한국 서민의 실상이고 선거 때 나타나는 이들의 착오는 바로 우리 서민들의 판단착오이기도 하다.
“유신헌법은 무효…독재 부역자 처벌해야”
2011년 10월 19일, <한겨레>에 올라온 글 입니다. 본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13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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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화복지포럼 학술대회
“나치 전력자는 엄정한 죗값 치렀는데…”
‘반민주행위자 인명사전’ 펴낼 계획도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파시즘 체제였던 유신체제를 두고, “유신헌법을 법적으로 무효화하고, ‘유신부역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자”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반민주행위자·유신부역자 인명사전’을 만들려는 계획도 나왔다.
민주·평화·복지포럼(상임대표 이부영)과 민주정책연구원(원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은 19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유신체제,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었다. 5·16쿠데타 50년을 맞아 마련한 학술대회 시리즈 가운데 세번째 행사였다. 이날 대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신체제의 악영향에 대한 진단에 이어, “특별법 입법 등 실질적인 조처를 통해 유신체제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터져나왔다. 지난해부터 대법원에서 재심을 통해 긴급조치 무효 판결을 내고 있긴 하나, 전후 독일의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처럼 유신헌법을 무효화하는 확실한 조처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다.
발표를 맡은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는 “유신헌법은 법적으로 무효”라고 못박았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단체가 국민의 주권을 대신 행사하게 하고,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시켜 권력분립을 포기하는 등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이념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게다가 1972년 국회를 해산했던 10·17 비상조치가 유신헌법 탄생의 배경이 됐는데, 임 교수는 “당시 대통령에겐 국회 해산권도 없었고 헌법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킬 어떤 권한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유신헌법은 내용과 절차 모든 측면에서 무효라는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조작 간첩사건 등 유신체제를 지탱했던 공작정치의 내용을 분석해, “유신체제는 명백히 일제말 식민지 파시즘과 동시대 유럽 파시즘의 적자”라고 밝혔다. 그는 “나치 전력자들이 엄정하게 죗값을 치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긴급조치에 근거해 무고한 시민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판사가 대법원장이 된다”며 우리에겐 유신체제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지적했다. 또 나치 청산법으로 10여만명을 처벌했던 독일의 사례를 들어 “간첩조작, 학원탄압, 노동탄압 등을 기획하거나 집행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책임자급은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국회의 특별법 입법 등 유신헌법을 무효화하는 실질적인 조처가 있어야 또다른 민주주의 역행을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정치학)는 국회가 주관하고 학계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헌정사 평가위원회’를 발족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편 이부영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처럼, 유신체제에 부역했던 인사들의 명단을 사전처럼 담은 <반민주행위자·유신부역자 인명사전>(가제)을 내년께 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13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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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화복지포럼 학술대회
“나치 전력자는 엄정한 죗값 치렀는데…”
‘반민주행위자 인명사전’ 펴낼 계획도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파시즘 체제였던 유신체제를 두고, “유신헌법을 법적으로 무효화하고, ‘유신부역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자”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반민주행위자·유신부역자 인명사전’을 만들려는 계획도 나왔다.
민주·평화·복지포럼(상임대표 이부영)과 민주정책연구원(원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은 19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유신체제,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었다. 5·16쿠데타 50년을 맞아 마련한 학술대회 시리즈 가운데 세번째 행사였다. 이날 대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신체제의 악영향에 대한 진단에 이어, “특별법 입법 등 실질적인 조처를 통해 유신체제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터져나왔다. 지난해부터 대법원에서 재심을 통해 긴급조치 무효 판결을 내고 있긴 하나, 전후 독일의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처럼 유신헌법을 무효화하는 확실한 조처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다.
발표를 맡은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는 “유신헌법은 법적으로 무효”라고 못박았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단체가 국민의 주권을 대신 행사하게 하고,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시켜 권력분립을 포기하는 등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이념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게다가 1972년 국회를 해산했던 10·17 비상조치가 유신헌법 탄생의 배경이 됐는데, 임 교수는 “당시 대통령에겐 국회 해산권도 없었고 헌법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킬 어떤 권한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유신헌법은 내용과 절차 모든 측면에서 무효라는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조작 간첩사건 등 유신체제를 지탱했던 공작정치의 내용을 분석해, “유신체제는 명백히 일제말 식민지 파시즘과 동시대 유럽 파시즘의 적자”라고 밝혔다. 그는 “나치 전력자들이 엄정하게 죗값을 치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긴급조치에 근거해 무고한 시민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판사가 대법원장이 된다”며 우리에겐 유신체제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지적했다. 또 나치 청산법으로 10여만명을 처벌했던 독일의 사례를 들어 “간첩조작, 학원탄압, 노동탄압 등을 기획하거나 집행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책임자급은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국회의 특별법 입법 등 유신헌법을 무효화하는 실질적인 조처가 있어야 또다른 민주주의 역행을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정치학)는 국회가 주관하고 학계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헌정사 평가위원회’를 발족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편 이부영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처럼, 유신체제에 부역했던 인사들의 명단을 사전처럼 담은 <반민주행위자·유신부역자 인명사전>(가제)을 내년께 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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